1919. 구원회-124-
그 순간 침소의 중심에서 난데없이 돌풍이 일어났다.
짙은 보랏빛을 띈 돌풍은 순식간에 천장까지 치솟더니 잠시 뒤돌풍이 사라진 자리에 검은 망토를 걸친 미남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저, 저 자는···.]
'뭐야? 마법인가? 등장한 번 요란하시는.'
[주인님. 너무 늦은것 아닐까요? 어쩌면 장만석이 진혈의 뱀파 이어의 힘을 얻었을지도···.]
'뭐라고? 이런 씨발.' 도훈이 빠르게 손에 쥔 카드를 출수하며 장만석의 미간을 조준해 뿌렸다. 동시에 양손 손가락 사이에 카드를 3장씩 끼우더니 6장의 카드를 추가로 더 뿌렸다.
"세븐 포커다, 씹새끼야!"
파바바박!
도훈이 처음으로 날린 카드가 순식간에 장만석의 이마에 박혔다.
연이어 날아간 카드 역시 그의 팔다리, 심장 부근을 꿰뚫으며 절반 이상 박혀 들어갔다.
[고, 공격이 먹혔습니다!!!]
'···아니야.'
[네? 카드가 몸에 절반 이상 박혔는데요?]
'평범한 사람이었으면 몸을 뚫고 나올 정도로 강력한 공격이었어. 놈의 몸을 뚫지 못한 것은, 놈이 수월하게 방어해 냈다는 뜻이야.'
[이럴수가···.]
도훈의 예상대로 미간 정중앙에 포커 카드가 꽂힌 장만석은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는 손끝으로 카드 끝을 붙잡더니 뒤로 쭉 뽑아냈다. 그러자 두개골까지 꿰뚫렸던 상처가 스르륵 아물더니 붉은 실선으로 좁아 들었다. 잠시 후 그마저도 말끔하게 사라졌다.
몸에 박혔던 카드 또한 안에서 힘으로 밀어낸 것처럼 스스로 밀려나오더니 바닥으로 투둑 떨어졌다.
"···스페이드 에이스 카드인가?"
미간에 박힌 카드를 뽑아낸 장만석이 카드 앞면을 확인하며 여유롭게 중얼거렸다. 머릿속에 울리던 음침한 목소리와는 달리 놀라울 정도의 미성이었다.
심지어 얼굴은 서양의 존잘 배우처럼 잘생겨서, 혼혈이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창백하리만큼 새하얀 얼굴과, 유난히 짙은 눈썹에 깊은 눈동자는 같은 남자인 도훈마저 아찔함을 느낄만큼 매력적이었다.
"예상보다 더 재밌는 아이였구나. 한데 이런 잔재주로 날 상대 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한 것이냐?"
젊게 변한 장만석이 손가락을 까딱이자 바닥에 떨어졌던 카드들이 공중으로 두둥실 떠올랐다. 반원을 그리듯 넓게 늘어선 카드들이 그의 머리위를 공전하듯 일정한 간격에 맞춰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여, 염력? 저새끼 마법사였어? 연금술사가 아니라?'
[아아, 지금 모습을 보니 장만석이 확실히 진혈의 뱀파이어로 각성해버린 것 같습니다. 염동력은 진혈 뱀파이어가 쓰는 스킬입니다. 잡종에게는 없는.]
"그러고보니 백스트레이트 플러시였네? 너 뭐, 타짜냐?"
카드 앞을 확인한 장만석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다면 어쩔래, 씹새끼야."
도훈은 기습이 실패로 돌아가자 다소 여유를 잃은 상태였다.
그가 모습을 드러낸 장만석에게 다짜고짜 암습을 펼친 것은 그를 죽이겠다는 계산보다, 진혈의 뱀파이어로 각성한 그의 능력을 테스트해 본 것에 가까웠다.
그리고 도훈은 방금 짧게 합을 교환하면서 확실한 사실을 깨달았다.
장만석이 마침내 의식을 완성하고 불사의 능력을 얻었다는 것.
즉, 어떤 공격에도 흠집없이 곧바로 회복하는 사기적인 능력과 동시에 염동력 또한 쓸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도훈은 처음으로 입술 끝이 바짝바짝 마르는 기분이었다.
'···내가 상대할 레벨이 아니야.'
[주, 주인님.]
도훈은 단 1합을 겨룬 것으로 실력의 벽을 체감한 것이었다.
평소 자신감 넘치던 도훈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에 로시마저 당황했다.
"쯧쯧, 어설픈 녀석이로다."
"뭐라고?"
"네놈이 진정한 타짜라면, 제 죽을 판엔 끼지 말았어야지!"
장만석의 머리를 빙글빙글 회전하던 도훈의 카드들이, <말았어야지!>라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도훈을 향해 쏘아졌다.
열차의 차량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날아드는 카드들의 모습은, 흡사 하늘을 나는 뱀처럼 꿈틀거리며 도훈의 심장을 정확히 노렸다.
슈슈숫!
도훈이 선보인 암기술보다 훨씬 빠른 속도!
그가 보유한 초인적인 시력으로도 카드의 움직임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이런 좆같은!'
도훈은 황급히 무릎을 굽히는 철판교 수법으로 상체를 뒤로 젖혔다. 영화 매트릭스의 슬로우 모션 장면처럼, 장만석이 쏟아낸 카드가 아슬아슬 도훈의 머리칼을 자르고 지나가며 반대편 벽에 산탄처럼 뿌려졌다.
콰광-!
카드에 담긴 에너지가 어찌나 센지, 7장의 카드가 모두 박히자 벽에 균열이 생기더니 그대로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콘크리트 벽을 트럼프 카드를 날려 박살내버린 것이었다. 이는 도훈도 불가능한 수준의 위력이었다.
[아, 아니! 저럴수가!]
'봤지? 저 새낀 완전 미친 놈이라니까? 염동력이 암기술보다 더 강하잖아!' 눕듯이 바닥으로 쓰러졌던 도훈이 다시 오뚜기처럼 몸을 벌떡 일으켰다. 장만석이 그 장면을 흥미롭게 쳐다보더니 물었다.
"뭐지? 그건 혹시 무공인가?"
"좆까! 씨발, 내가 대답할 필요 있어?"
"허허. 고얀놈 같으니. 내가 비록 젊어 보이긴 해도 나이가 일흔에 가깝거늘, 말본새하고는."
"거, 충분히 누릴만큼 누리고 사셨으면, 갈때 되서 가셨어야지 뭐하러 영생을 욕심내 그러게?"
"네놈은 젊으니 아직 모르겠지. 노욕은 괜히 생기는 것이 아니다. 가진게 많아질수록 당연히 두고가자니 미련이 남을 수밖에.
인간의 본능이 그러하다."
"인간? 그래서 선택한 방법이 고작 뱀파이어 되는 거야? 사람 새끼도 아닌?"
"나에 대한 뒷조사를 제법 많이 했나 보구나. 하지만 이미 늦었다. 신께서도 무심하시지. 헌터를 보내려거든 하루만 더 빨리 보내셨어야지. 크하하!"
장만석이 하늘을 향해 광소했다.
도훈이 자신보다 한수 아래라는 것을 확신하는데서 나오는 여유였다.
마치 도훈이 양아치나 조폭 무리를 상대할 때 전혀 긴장하지 않는 태도와 비슷했다.
'시발! 진작 닥공해서 목부터 따버렸어야 했는데! 내가 뭣하러 망설였지?'
[그땐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전직 플레이어인 장만석의 능력이 미지에 감춰져 있었으니까요. 주인님의 잠입 작전은 결코 나쁜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자책하실 필요 없습니다.]
'자책이 아니라 이제는 도저히 죽일 방법이 없잖아. 로시 네가 그랬지? 진혈의 뱀파이어는 핵폭발 속에서도 되살아날 수 있다고. 저걸 어떻게 죽이냐고.'
[그건 그렇지만···.]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도박을 걸었어야 했어. 아니면 적어도 999명째 처녀를 해치울 때 기다리지 말고 덮쳤든지.'
[주인님이 이 저택에 들어왔을 땐 이미 장만석은 999명째 제물을 해치우고 자취를 감춘 이후였습니다.]
'그럼 어제나 그제 구원회에서 머물 때라도!'
[당시엔 어설픈 습격으로 장만석이 잠적할까봐 확실한 기회를 노리셨던 거잖습니까? 그땐 장만석의 능력을 정확히 몰랐으니까요.]
'아니 그거야···.'
[주인님. 미션은 언제든 성공할 수도 또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보상은 받지 못 하겠지만, 그야 다른 미션을 또 시도하면 그만입니다.]
'지금 무슨 소리야? 이제와서 나보고 미션을 포기하라고? 김비서 복수도 다 때려치우고?'
[굳이 목숨걸고 그에게 맞설 필요가 있으십니까? 주인님의 능력이면 얼마든지 도주는 가능합니다. 줄행랑 역시 훌륭한 전략입니다.]
'아니 그래도 이건 아니지.'
다른 것보다 도훈은 자존심이 무척 상했다.
강력한 육체와 3갑자에 이르는 내공을 이루고도 고작 뱀파이어 하나 이겨내지 못해 등을 보이는 것은 그가 생각하는 최악의 선택이었다.
단순히 미션을 성공하고 실패하고를 떠나, 평생 동안 후회로 남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최근 급격히 늘어난 무공에 대한 자신감까지 꺾일까봐 두려웠다.
'내가 전력으로 덤비면 놈을 이길 가능성은?'
[장만석이 진정 진혈의 뱀파이어 능력을 각성했다면, 사실상 제로에 가깝습니다.]
'진혈의 뱀파이어가 그렇게 세다고?'
[방금 보셨잖습니까? 주인님의 공격은 장만석에게 전혀 타격을 주지 못합니다. 반대로 놈의 공격은 주인님께 치명상을 입힐 수 있고요.]
'아니, 그래도 약점이 있을 거 아니야? 뱀파이어가 그렇게 강력한 존재면, 이미 세상을 지배하고 있겠지.'
[맞는 말씀입니다. 진혈의 뱀파이어도 잡종 만큼은 아니지만, 분명한 약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새벽이고, 뱀파이어는 낮보다 밤에 두배는 강해지는 게 문제죠.]
'젠장. 타이밍 한 번 좆같네!'
"···응? 네놈, 시스템과 대화중인가 보구나."
"뭐, 뭐라고?"
도훈은 시스템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상대를 처음 만났기 때문에 찐으로 당황하고 말았다. 그가 속마음으로 나누는 이야기는 전 음도 아니었기 때문에 엿듣는 것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장만석은 잠시 대화가 끊긴 사이 도훈의 상황을 간파한 것이었다.
"하하. 헌터라면 내가 전직 플레이어란 것도 이미 알고 있을텐데?"
장만석은 도훈을 탈주자를 사냥하는 헌터 플레이어 쯤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도훈은 차라리 오해하게 두는 편이 유리할 것 같다는 생각에 대답하지 않고 대화를 이어갔다.
"당연히 알지. 정액을 세뇌 약물로 바꾸어 사이비 종교를 일으킨 탈주자 출신이라는 것 정도는."
"크하하하! 그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내 연금술은 오직 정액으로만 발동하니까."
'뭐라는 거야? 정액으로 연금술을? 그런 능력도 있어?'
[저도 잘 모릅니다. 상식을 벗어나는 방식이긴 하군요.]
장만석이 플레이어 시절을 떠올리는지 잠시 감회에 잠겼다.
어차피 그로서는 힘의 우위를 이미 파악했기 때문에 도훈을 언제든 해치울 수 있는 손쉬운 존재로 여기는 듯 시종일관 여유가 넘쳤다.
"내 나이 마흔이 넘어서야 겨우 능력을 받았다. 신도 참 무심하시지. 줄거면 일찍이나 주지 말이야. 하하 예전에는 이런 말을 하면 신성모독으로 처벌을 받았던 것 같은데."
"장만석. 지금이라도 순리대로 흙과 단일화 하는 건 어때? 인생 길게 살아봐야 고통뿐이라는 거 알잖아? 살만큼 산 양반이 그걸 몰라?"
"푸하하. 우스꽝스러운 꼴을 하고 노인네처럼 말을 하는 구나!"
도훈은 그제야 자신의 여장이 아직 풀리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침소에 들어오자마저 정신없이 싸우느라 몰랐는데, 그의 얼굴은 여전히 역용술로 변신한 도순의 얼굴에, 축골공만 해제하여 커다란 덩치로 돌아온 모습이었다.
심지어 복장 또한 치마를 입고 있었고, 몸을 다시 키우느라 옷은 죄다 터져서 넝마같은 꼴이었다.
순간 부끄러움을 느낀 도훈이 온 몸에 불길을 일으켰다.
"으으으!"
그의 몸에서 일어난 불꽃이 여장 복장을 모두 태워버리자, 비가 연성 소재로 만들어진 마법의 팬티 아이템만 달랑 남았다.
[아니, 뭐하십니까?]
'싸울 때 싸우더라도 여장은 좀 아닌것 같아.'
[흐음, 그래도 팬티는 안타서 다행입니다.]
'진짜 쪽팔려서 원···.' 팬티만 달랑 입은, 타잔꼴이 된 도훈이 불꽃을 꺼뜨리는데 장만 석이 그의 팬티를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호오."
"뭐, 뭘봐 씹새끼야."
"고놈, 실하구나. 제법 묵직한데?"
"너한테 그딴 칭찬 듣고 싶지 않다고!"
도훈이 말을 마치자마자 바닥을 박차고 장만석에게 덤벼들었다.
만석의 침소는 거의 50평에 이르는 넓은 공간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이 투닥거려도 걸리적 거리는 가구가 거의 없었다.
도훈의 쇄도에 장만석이 씩 웃더니 망토로 몸을 가렸다.
그 순간 돌풍으로 변한 장만석의 모습이 사라졌다.
"이, 이 자식이!"
주먹을 날리던 도훈의 손이 허무하게 허공을 갈랐다.
'뭐야? 순간이동이야?'
[그것과는 조금 다르지만 비슷한 능력입니다. 돌풍 상태에서는 물리적 타격에 면역이 되거든요.]
'아놔 씨발, 가지가지하네.'
다시 장만석이 반대편에 모습을 드러냈다.
"진정하라고 젊은 친구. 난 아직 자넬 죽일 생각이 없으니까."
"뭐라고, 이 새끼야."
"왜? 플레이어가 불사의 존재는 아니란 건 알고 있지 않는가?
그때 불사가 가능했으면, 내가 구태여 뱀파이어가 되는 길을 택하지도 않았겠지."
"닥쳐 흡혈 박쥐 새끼. 사람도 아닌 새끼가 감히!"
"흐흐. 누가 누굴 욕하는지 모르겠군. 자네는 플레이어가 정의의 사도라도 되는 줄 아나보지?"
"너처럼 혹세무민하는 사이비 종교 교주보다야 낫지."
"정말로 그렇게 믿는다고? 아아, 이런. 또 신의 농간에 놀아나는 가여운 중생을 만나게 되었군."
"뭐라고?"
[주인님. 귀담아 듣지 마십시오. 주인님을 혼란스럽게 만들려는 술책입니다.]
'잠깐만. 뭐라고 하는지만 들어보게.'
"너무 모르는 것 같으니 내가 플레이어가 어떤 존재인지 알려 줄까? 그럼 내가 탈주를 감행한 이유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을 걸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