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 구원회-122-
* * *
장만석은 새가 되는 게 좋았다.
혹자는 박쥐는 조류가 아니라고도 했지만, 어쨌든 날개를 퍼덕이며 하늘을 날때의 느낌은 두 발을 딛고 인간으로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감각을 선사했다.
노쇠해진 육체는, 진혈 뱀파이어 의식을 진행하면서 점점 망가졌고 현재는 두 발로 똑바로 서 있는 것도 힘에 부친 상황.
하지만 플리모프 상태에선 전혀 달랐다. 몸집이 1/20로 줄어든 상태에선 약해진 육신으로도 얼마든지 자유롭게 비행이 가능했다.
뱀파이어가 된 이후 여러 능력이 생겼지만, 장만석이 가장 좋아하는 능력은 6시간 남짓 박쥐로 변신할 수 있는 플리모프 스킬이었다.
조그만 박쥐로 변신해 커다란 구원회 건물 위를 날아다니고 있으면, 라이트 형제가 왜 그렇게 하늘을 날고 싶어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날다람쥐같은 윙수트를 입고 목숨을 거는 익스트림스포츠 매니아의 심정도 충분히 이해했다.
이는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절대로 느낄 수 없는 경험이었다.
오죽했으면 장만석은 모든 걸 다 버리고 계속 박쥐로 살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으니까.
'후후-. 이제 두 시간뒤면 진정 진혈의 뱀파이어로 거듭나는 구나. 플리모프 마법이 아니었더라면 그 기나긴 시간을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야.'
사실 잡종 뱀파이어가 변신하는 박쥐 상태는 굉장히 위험한 기술이기도 했다. 박쥐 변신 상태에서는 본연의 능력을 일절 쓸 수 없었다. 재수없게 박쥐의 상위 포식자라도 만나는 날에는, 허무하게 생을 마감할 수 도 있었다.
하지만 장만석은 크게 괘념치 않았다.
좀비에 가까운 몸 상태로 하루 종일 침상에 누워있다가는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장만석이 마지막까지 버틸 수 있었던 건, 하루 6시간 동안 허용된 플리모프 스킬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999번째 처녀를 해치우고 어김없이 박쥐로 변한 만석은 저택을 벗어나 커다란 나무 기둥 위에 매달려 있었다.
세상이 거꾸로 보이는 보이는 것만 제외하면, 마치 푹신한 소파에 몸을 기대 누은 것처럼 편한 자세였다. 몸이 가벼워진 것 뿐만 아니라 정신 또한 젊었을 때로 되돌아간 것 같았다.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진혈의 뱀파이어로 변신해 젊은 육신을 되찾고, 내가 죽기만 기다리는 동생놈과 자식놈에게 엿먹일 시간을.'
아무리 가족지간이라도 장만석은 두 사람을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불쌍해서 거두어준 동생은 등에 칼을 꽂았고, 낳고 기른 자식 놈은 애비를 잡아먹을 폐륜아였다. 심지어, 한때 자신의 첩이던 미숙에게 홀딱 넘어가 스스로 무슨 짓을 벌이는지도 모르고 병신처럼 휘둘리고 있었다.
장만석이 볼 때 둘 다 실패작이었다.
그놈들에겐 모래 한 톨 만큼의 권력이나 눈꼽만큼의 유산도 남겨주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장만석이 지난 몇년간 두 사람을 방치했던 건 다름이 아니었다. 처녀 1,000명 따먹는 의식이 진행되는 사이, 교회를 이끌 대리자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면, 두 사람은 진즉 무덤 속에서 시체가 되어 썩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모두 끝이다. 갈아마셔도 시원찮은 두 놈을 당장 없애버리고, 젊은 몸으로 거듭나 혜진이랑 실컷 즐겨야지.'
박쥐로 변한 장만석은 혜진을 떠올리자 마음 한 구석이 찡해졌다.
'쯧쯧. 불쌍한 것. 아무리 정신지배를 받았더라도 지난 3년간 얼마나 힘들었을고.'
그의 비서인 혜진은 장만석이 발견한 보물이었다.
단지 외모가 빼어나서가 아니었다.
그녀처럼 재기발랄이란 수식어가 잘 어울리는 여자는 본적이 없었다. 똑똑하고, 눈치도 빨랐고, 심지가 굳었다.
게다가 자신을 무척 잘 따르는 아이였다.
하지만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장만석은 그녀를 품어줄 수 없었다.
처녀가 아닌 여성에게 사정하는 순간 지금껏 쌓아온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는 패널티 때문이었다.
실제로 장만석은 999번의 도전 중에서 10번에 가까운 위기를 겪었다.
다행히 곧바로 알아채고 사정에 이르지는 않았으나, 만약 구혜진과 관계를 했다간 절대 못 버틸 것을 알고 있었다.
'흐흐, 성욕도 너무 강한 아이야. 나랑 하는 걸 무척 좋아했는데 ···.'
장만석이 거꾸로 매달려 지난 추억을 떠올리는데 갑자기 앞에 건물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쯧쯧. 저 곳이 이장로 집이었나? 평생 나에게 충성한다 해놓고, 결국 동생 놈에게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준 배신자 자식. 이장로 네놈도 내가 의식만 완성하면 절대 곱게 못 죽을 것이다.'
장만석은 처음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소란이 좀처럼 잦아들지 않았다. 뭔가 이상함을 느낀 만석이 날개(실제로는 팔이다.)를 퍼덕이며 이장로의 집을 향해 날아갔다.
돌출된 처마 끝에 매달린 장만석은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아니, 저년은?'
한때 자신의 애첩이었던 권미숙을 알아본 장만석의 박쥐 눈이 커다래졌다. 그녀의 손에 권총이 들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구원회 내에서 경호팀이 아니고선 총기 소지는 불가능했다.
그 불가능을 가능케 한 모습을 보자 장만석은 점점 의문이 커져갔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설마···. 아들놈이 쿠테타라도 일으키는 것인가?'
장만석은 어이가 없고 화가 났지만, 계속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내용을 다 듣고나니 장만석은 뭔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걸 깨달았다.
'···내가 곧 죽는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이렇게 멀쩡한 내가 왜?'
대충 듣자하니 자신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것으로 착각하고, 아들인 석개가 먼저 칼을 뽑아든 것이었다. 몰래 빼돌린 총기로 무장시킨 측근들과 함께, 동생 만수의 수족을 잘라내는 중이었다.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군. 대체 이런 일이 있을 동안 혜진이는 뭘 하고 있는 거지?'
설마하니 혜진이 세뇌가 풀렸을 거라곤 꿈에도 생각 못하는 장만석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혜진에게 건 세뇌의 종류는, 성수를 섭취하면서 걸리는 세뇌보다 배는 강했다. 그녀에게 먹인 세뇌약은 그가 연금술을 통해 특별 제조한 환단으로, 자신에게 목숨을 바칠 정도로 충성하게 만드는 비약이었다.
'크흠. 결국 마지막에 이르러 이런 사달이 벌어지고 마는구나.
그래도 지금이라도 알아 차려서 다행이야.'
박쥐 상태의 장만석이 날개를 퍼덕이며 저택으로 빠르게 날아갔다.
하지만 저택 근방에 도착한 장만석은 쉽사리 저택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상황을 정확히 모른 채 박쥐 상태에서 돌아갔다가 화를 입게 되면 도저히 대처가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지금의 그는 일개 동물에 불과했다.
'경호팀은 별 이상이 없어 보이는데?'
저택 밖에서 경계중인 경호팀의 모습을 확인한 장만석은 별다른 이상 징후를 느끼지 못했다. 만약 놈들이 배신했다면, 이미 경계를 풀고 저택 내부로 들어가 장악을 시도했어야 했다.
'희한한 일이군. 경계는 평소랑 똑같아. 전혀 이상한 점을 못 느끼겠어.'
장만석이 굳이 경호팀을 둔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만에 하나 자신을 노리는 자객이 찾아올 경우,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어줄 요량이었다.
그 역시 플레이어 출신이었기 때문에, 강력한 능력자가 보이는 살상력이 일개 중대 규모의 전력을 능가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능력자라 할지라도 결국 뼈와 근육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날아드는 총알까진 결코 무시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즉, 경호팀의 진짜 역할은 경호가 아니라 일종의 시간끌기였다.
'흠, 림영석도 평소랑 다른 점이 없어 보이는데···.'
알파 팀장인 림영석은 장만석이 가장 신뢰하는 경호원 중 하나였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볼모처럼 잡혀있는 북한의 가족들을 이용해 절대적인 충성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 림영석 또한 평소처럼 경계근무를 서는 이상, 저택 밖에서 외부인이 침투했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럼 설마 내부에 첩자가 있었단 뜻인가? 혹시 몰라서 일부러 검증된 하녀들만 들였는데···. 거기에 구멍이 생긴 것인가?'
본래 저택 내에 경호팀을 제외한 사내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혹시 모를 배신자를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서였고, 고용한 하녀들 역시 신원이 확실한 구원회 신도 중에서만 선발했다.
'이상한데···. 집안에는 구실장이 아까 분명 분당지부에 예비처녀를 데리고 저택에서 대기 중일텐데? 구실장이 있는데 대체 누가 만수랑 아들놈을 부른 걸까?'
의혹은 점점 커져갔다.
그러나 장만석의 이성은 점점 범인을 향해 좁혀지고 있었다.
'···설마? 아닐거야. 혜진이가 나를? 그 가여운 것이 나를 배신 했다고?'
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세뇌를 푸는 것은 불가능했다.
두통약을 깜빡하고 두어달 걸렀다면 모를까.
하지만 그 지경이 되면 실신할 정도의 고통을 유발하는 금제였으므로 진즉 병원에 실려갔어야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군.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지?'
박쥐가 된 장만석은 저택 주변을 배회하며 내부를 살폈다.
그때 평소 거의 쓰지 않던 방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응? 저게 뭐지?'
박쥐로 플리모프한 상태에서 유일한 능력이 있다면, 나이트 비전을 쓸 수 있다는 것이었다. 박쥐 상태에선 마치 야투경을 쓴 것처럼 어둠 속에서도 대낮처럼 볼 수 있었다.
장만석은 불꺼진 방안에서 뭔가를 발견했고, 곧 창가로 날아가 창틀을 붙잡고 거꾸로 매달렸다.
그리고 그곳엔 도훈이 감금해놓은 만수와 석개가 테이프에 꽁꽁 묶여 있었다.
'저, 저게 뭐란 말인가?'
당장 갈아마셔도 시원찮은 녀석들이긴 했지만, 막상 자신의 집안에서 꽁꽁 묶여 있는 모습을 보니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분명 저들은 내가 곧 죽는다는 소식을 듣고 저택으로 달려갔다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저꼴로 묶여있는 것이지?'
의자에 묶인 만수는 그마나 괜찮았지만, 바닥에 쓰러진 아들놈의 상태는 절대 정상이 아니었다. 입가엔 피칠갑을 하고 있었고, 죽은 사람처럼 쓰러져 있었다.
습격을 받았다는 확실한 증거였다.
'누군가 나를 노리고 있다!'
박쥐 상태에서는 평소처럼 영민한 두뇌를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장만석은 곧바로 사태를 명확하게 파악했다.
일련의 사태와 증거들은 정확하게 내부의 배신자를 암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높은 확률로 그 배신자는,
'···구혜진, 네년이 감히 나를!'
분노한 장만석이 박쥐 상태에서 이빨을 드러냈다. 송곳니가 유난히 날카로웠다.
'네년이 기어코 나를 실망시키는구나. 하지만 신께서 도우셨는지, 영문도 모르고 당할 일은 없을 것이다. 흐흐, 나를 거역한 대가가 어떤 것인지 똑똑히 보여주지.'
* * *
"시간이 지난것 같은데, 장만석은 언제 돌아오는 거지?"
"그러게···. 이상하네. 자정이 벌써 넘었는데···."
혜진이 그녀 답지 않게 초조함을 드러냈다. 모든 준비를 완벽하게 끝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거사를 앞두자 긴장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혹시 장만석이 알아차리고 토낀 거 아니야?"
"토끼다니?"
"어차피 처녀 한명만 채우면 끝나는 거라며? 밖에서 아무 처녀나 붙잡고 강간이라도 하는 날엔···."
"설마? 그 노인네가 무슨 힘이 있다고."
도훈의 말을 부정하긴 했지만, 혜진도 점점 엄습해오는 불안감을 뿌리치기 힘들었다.
장만석이 육체적으로 노쇠하긴 했지만, 여전히 특별한 힘을 가진 인물이긴 했다. 특히 그의 몸에서 나오는 정액으로 지금의 구원회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꼭 육체적인 힘만이 전부는 아니지."
도훈은 전직 플레이어로서 그가 어떤 능력을 가졌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또는 잡종 뱀파이어로서도 몇가지 능력을 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좀처럼 방심할 수 없었다.
'젠장. 처음부터 시간 끌 필요 없이, 저택에 난입해서 놈의 모가지를 따버렸어야 했는데.'
[진정하십시오. 주인님 답지 않게 너무 조급한 것 같습니다.]
'내가 조급 안하게 생겼어? 자정이면 마지막 의식을 치른다는 놈이 30분이 넘도록 기척도 없이 나타나지 않는데?'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죠. 아직 단정하긴 이릅니다.]
'수틀리면 그냥 구원회 전체를 이잡듯 뒤져서라도 싹다 박살내버리는 수밖에. 구원회를 분쇄하면 어차피 미션을 달성하는 거라며.'
[너무 위험합니다. 사상자가 속출하는 큰 사건이 벌어지면, 구원회의 힘으로도 덮지 못 할테고, 그럼 PK단이 냄새를 맡고 덤벼들지도 모릅니다. 절대 잊지 마십시오. 주인님 역시 쫓기는 신세라는 걸요.]
'쫓기긴. 씨발, PK단이고 뭐고 와보라고 해. 확 그냥 때려 부수면 그만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