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3. 구원회-118-
혜진이 마지 못한 척 만수에게 대답했다.
"···꼭 유언장을 미리 보셔야겠습니까?"
"당연하지. 나는 형님의 친동생일세. 혈육도 모르는 유언장의 내용을 비서인 자네만 알고 있다는 게 말이 되는가?"
"음, 그럼 따라오십시오."
"오. 역시 머리가 잘 돌아가는 친구구먼. 자네라면 분명 현명한 판단을 내릴 줄 알았지."
혜진이 앞장서자 장만수가 입을 헤벌쭉 벌리며 쫄래쫄래 뒤따랐다.
힐을 신지 않았는데도 바짝 업 된 엉덩이가 자동으로 실룩거렸다. 혜진의 뒤태를 훔쳐보며 만수가 입맛을 다셨다.
'키햐. 저 요망한 년 방댕이 씰룩이는 거 보소? 형님 돌아가시고 나면, 저 비서실장 년도 이제 내 차지야. 바로 전 물을 한 발 빼고 왔는데도, 좆을 묵직하게 만드는 몸매라니. 기가 막히는 구먼.'
만수는 점점 저택의 안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한참을 들어가는데도 혜진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장만수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근데 지금 어디로 가는겐가? 이쪽은 형님의 침소랑은 방향이 반대인 것 같은데?"
"유언장은 그곳에 없습니다. 혹시 모를 도난을 대비해, 별도의 금고에 보관하고 있거든요."
"금고? 이곳에 금고가 있었어?"
혜진이 뒤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부담임 목사님께선 아직 모르셨나 보군요. 장목사님은 만일을 대비해 집안에 별도의 금고를 두고 현금과 무기명 채권, 금괴 등을 보관하고 계셨습니다. 제가 그것을 관리하고 있고요."
"아아, 그거?"
장만수는 혜진이 단순한 좆집의 용도가 아니라 만석의 금고지기 역할도 함께 맡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머리가 빈 여자였다면, 단기간에 장로라는 중책을 맡지 못했을 거라는 것도.
'쓰읍-. 형님이 미국에서 참 쓸만한 애를 데려왔단 말이지? 무슨 재주로 저런 여자애를 꼬신거지? 머리도 좋고, 맛도 좋은.'
"하하, 나야 열심히 예배만 드릴 뿐 교회 재정에 대해선 영 젬병 아닌가? 형님이 돈을 그런식으로 보관하고 있는 줄은 몰랐지."
물론 이는 순 거짓말이었다.
장만석의 피붙이인 만수나 석개 모두 그의 재산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건 주지의 사실. 서로 딴 주머니를 차고, 헌금의 일부를 빼돌려 막대한 부를 축적하는 중이었다.
다만 장만석이 이를 알면서도 묵인한 것은, 실제 그들이 몰래 착복하는 돈이 자신이 해외 계좌에 숨겨둔 막대한 자산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푼돈이기 때문이지 절대 몰라서 놔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 때문에 두 사람에게 일찌감치 후계를 물려줄 생각을 접기까지 했으니.
감찰팀에게 정기적으로 두 사람의 비위 사실을 보고 받아온 혜진 역시 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여기, 이 방입니다."
"오호, 저택 안에 이런 곳이 있었구먼."
"네. 여기서 일하는 하녀들도 저택 전부를 파악하진 못합니다.
이곳이 워낙에 크고 복잡해서 자기가 일하는 구역 말고는 가본 적도 없거든요. 하지만 저는 오랜 기간 여기에 머물렀으니 누구보다 이곳의 구조를 잘 알고 있죠."
"그렇구먼. 앞으로 누가 이 저택을 물려받든 자네의 협조가 절 실히 필요하겠어."
"네, 뭐···. 들어가시죠."
열린 문을 따라 장만수가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조그만 서재처럼 보였는데, 벽면의 책꽂이에 책이 빽빽하게 꽂혀 있고 가운데에는 커다란 책상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단출한 구조였다.
방안에 불이 켜져 있지 않고, 창문을 통해 미약한 불빛만 들어와 주변이 상당히 어두운 편이었다.
"으음, 이곳은 뭐하는 공간인가? 손님방은 아닌 것 같은데."
혜진이 불을 켜기 위해 벽면의 스위치를 더듬으며 대답했다.
"남는 방 하나를 꾸며 저의 서재 겸 휴식공간으로 쓰던 곳입니다."
"오호. 자네의 서재란 말인가?"
"네. 틈틈이 독서를 해야겠다 싶어서, 저택에서 가장 조용한 방을 구했습니다. 아, 그리고 외부에서 소음이 들어오지 못하게 방음시설도 갖췄고요."
"방음시설? 그럼 여기서 나는 소리는 밖으로 절대 새어 나가지 않는다는 뜻이군?"
만수가 머릿속으로 음탕한 상상을 하는 듯 잦이가 다시 부풀기 시작했다.
'가만있자, 일단 금고를 열어서 유언장을 확보하고, 그다음 확저 비서년을 덮쳐서 내것으로 만들어 버리면? 흐흐흐, 아무리 난 년이라도 잦이 들어가면 꼼짝 못 하는 건 똑같겠지?'
만수는 타고난 대물 덕에 형 못지 않은 방탕한 섹스라이프를 즐겼다. 특히 구원회 내에서 강간한 여신도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흐흐흐. 구혜진이 말만 그럴싸하지 완전 헛똑똑이였구먼? 형님의 숨이 간당간당한 마당에 내가 눈치 볼 사람이 어딨다고 이렇게 방심을 하실까나? 스스로 호랑이 굴로 들어가는 구나.'
"네. 그렇습니다. 어두우니 불을 좀 켜겠습니다."
"그래, 그러라고."
틱조명이 들어오자 서재 방이 완전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제야 문 옆에 서 있던 한 여성의 존재가 나타났다.
방심하고 있던 장만수가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뭐, 뭐얏 씨발! 깜짝이야!"
장만수는 인기척 하나 없던 방에서 사람이 나타나자 소스라치게 놀랐으나, 이내 상대가 여자라는 것과 너무 못생기고 뚱뚱하다는 사실에 도리어 분노를 표출했다.
"이 돼지 같은 년은 또 뭐야? 왜 갑자기 나타나서 사람을 놀래켜 놀래키길?"
혜진이 슬쩍 구석으로 물러서는 사이, 도훈이 출입구를 가로 막으며 말했다.
"이놈이 장만석의 동생인가?"
"맞아. 장만수. 구원회의 부담임 목사."
"뭐, 뭐?"
"흐음, 얼굴에 개기름이 가득한 게 형이랑 달리 살이 뒤룩뒤룩쪘구나."
장만수는 두 가지 의미에서 크게 당황했다.
하나는 고분고분하던 구혜진이 갑자기 안면 몰수하더니 표정을 싹 바꾼 것과, 돼지처럼 보이는 여자 목소리가 완전한 남자의 것이라는 점에서였다.
"너, 너 이 새끼. 너 뭐 하는 새끼야? 남자야 여자야?"
"곧 뒤질 새끼가 뭐가 그렇게 궁금해?"
"아니, 이년이 미쳤나!"
장만수가 뭔가 단단히 잘못된 것을 깨닫고 기민하게 움직였다.
비쩍 마른 형과 달리 육중한 체구를 자랑하는 만수는 나이답지 않게 힘도 센 편이었다. 지금도 들박을 몇 십분 간 해낼 정도.
그는 여장한 도훈에게 달려들어 당장 멱살을 잡아 챌 것처럼 팔을 내 뻗었다. 그러나 그 순간 눈앞이 번쩍하더니 천장과 바닥이 거꾸로 뒤집어졌다.
"어이쿠!"
쿵-!
도훈이 한순간에 마당쓸기로 거구의 장만수를 고꾸라뜨린 것이었다.
제 무게를 못 이기고 바닥에 나가떨어진 장만수가 고통에 신음을 토해냈다.
"끄으으! 이, 이놈이 감히 내가 누군줄 알고!"
"뭐래 병신아. 방금 확인했잖아? 장만석 동생 장만수라며. 맞지?"
바닥으로 고꾸라진 장만수는 충격으로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특히 여장 남자가 대체 무슨 기술로 자신을 넘어뜨렸는지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고수라는데 무척 놀랐다.
"겨, 경비! 경비는 어딨나!"
장만수가 고래고래 소리쳤지만, 방음시설이 완벽하게 된 서재에 소리가 묻혀 밖으로 새어나가지 못했다.
혜진은 혹시나 싶어 LP판까지 재생시키며 음악을 크게 틀었다.
"이게 무슨!"
클래식 음악을 켠 혜진이 뻔뻔하게 말했다.
"아, 제가 말씀 안 드렸나요? 음악감상이 취미라서 이 방에 고가의 음향 장비를 설치했거든요. 그 덕에 방음시설도 설치한 것이 고요."
"구혜진, 네 이년! 감히 나를!"
그제야 함정에 빠졌다는 걸 확신한 장만수가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넘어지면서 다리를 다친 것인지 발목을 절뚝였다.
'씨발, 그래봐야 겨우 여자 두명이야. 내가 아무리 늙었어도 여자도 제압 못 할까 봐? 나를 우습게 봐도 유분수지.'
형인 장만석과 달리 장만수는 젊어서부터 풍채가 무척 좋은 편이었다. 당연히 힘도 센 편이라 소싯적엔 주먹질로 사고도 많이 치고 다녔다. 싸움꾼이라기엔 부족했지만, 타고난 완력과 맷집 덕에 어디가서 맞고 다닌적은 없었다.
"방금전엔 내가 방심을···. 크헉!"
"처 누워있어 새끼야. 뒤지기 싫으면."
여장한 도훈이 순식간에 달려들더니 팔을 내 뻗어 장만수의 목울대를 노렸다. 목을 조르는 것처럼 손모양을 만들어 빠르게 성대 부위를 가격하는 기술이었다.
어찌나 그 속도가 빠른지 만수는 제대로 대응도 못 하고 목 울대를 처맞고 무릎을 꿇었다.
"컥!"
"뭐? 나보고 돼지라고? 지가 더 돼지 같은 게 어디서 감히."
"꺽, 컥-. 너, 너희들 대체 무슨···."
만수가 숨을 제대로 못 쉬고 꺽꺽대는데, 뒤로 물러서 있는 혜진이 그제야 만수의 앞으로 다가왔다.
"부담임 목사님. 유언장 쓰실 준비 끝나셨나요?"
"뭐, 뭐라?"
"장만석 목사님의 유언장 같은 건 당연히 여기 없습니다. 이곳은 장만수 목사님의 유언장을 작성하러 온 곳이니까요."
"혀, 형님이 시키 드나? 아, 아니면 장석개?"
만수는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다.
설마하니 장만석의 심복 구혜진이 배신할 거란 생각은 못 한 채, 만석이나 석개가 자신을 제거하기 위해 모종의 음모를 꾸몄다고 믿은 것이다.
"뭐라고요?"
"씨발! 네 년이 나한테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아?"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도 여전히 목청을 높이는 만수를 본 도훈이 고개를 좌우로 까딱거리며 위협했다.
"돼지 새끼가 아직도 정신 못 차리네? 상황 파악이 안 돼? 당신 지금 여기 유언장 쓰러 왔다니까? 백날 소리쳐봐야 경호팀 같은 건 안 와."
"으으!"
"지금 부담임 목사님이 할 수 있는 선택은 둘 중 하나예요."
협박하는 상황에서도 혜진이 차분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첫째. 유언장 쓰기를 거부하고, 그냥 여기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는 거죠."
"윽!"
"둘째, 유언장 쓰는 것에 협조하고 목숨을 부지해 외국으로 도망치는 거예요. 그럼 남은 여생은 좀 더 즐기다 갈 수 있겠죠. 지금같은 삶은 어림 없겠지만. 어때요?"
"이 미친년이!"
장만수가 다시 고래고래 소릴 지르자 구혜진이 안 되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대화가 전혀 안 통하는데?"
"말로 해서 통할 사람이 아니네. 안 되겠다. 혜진이 넌 잠깐 벽보고 있어."
"벽을 보고 있으라고?"
"지금부터 벌어질 일이 너무 끔찍해서 나중에 트라우마 생길지도 모르니까."
"흐음. 그럼 네가 알아서 해. 난 음악감상이나 하고 있을게."
혜진이 도훈의 말대로 벽을 등지고 돌아서더니, 고가의 헤드폰을 꺼내 혼자 음악감상을 시작했다.
스피커에서 나오던 배경음악이 사라지자, 오히려 고요해진 적막이 공포감을 불러 일으켰다.
여장한 도훈이 씨익 웃더니 장만수를 노려보았다.
"나보고 돼지라고 했겠다, 이 돼지 새끼야?"
"이, 이보게. 누구에게 무슨 사주를 받았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그 두 배로 쳐줌세."
장만수가 끝까지 머리를 굴렸다.
여장한 도훈이 해결사로 고용된 킬러 정도로 생각하고 회유를 시도한 것이었다.
"두배?"
"그, 그래. 돈이라면 얼마든지 줄 수 있네. 아니, 역으로 제안을 걸지. 이 일을 사주한 사람을 처리해주면 10배로 주겠네!"
생명의 위기를 느낀 만수의 발악을 보며 도훈이 혀를 끌끌찼다.
"아무래도 넌 유언장을 못 쓰고 가겠네."
"자, 잠시만···. 얼마면 되는가? 얼마면 자네를 살 수 있느냐는 말일세?"
"나를 산다고?"
"그래! 어차피 다 돈 때문에 하는 일 아닌가? 한번만 잘 생각해 보게나."
도훈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만수가 차고 있던 목걸이를 발견했다. 목사에겐 전혀 어울리지는 않는 두툼한 금목걸이였다.
"그거 풀어봐."
"뭐, 뭣을 말인가."
"금 목걸이."
"다, 당장 내줌세. 이런 것 쯤이야!"
만수가 허겁지겁 목걸이를 풀더니 도훈에게 건넸다.
[뭐하십니까? 설마 회유되신 건 아니죠?]
'아니. 사이코메트리로 과거 좀 들춰보려고.'
[장만수의 과거요?]
'어떤 죄를 저질렀는지는 알아봐야지. 어차피 미션과 관련된 처리는 신벌하고 무관하다면서?'
[그렇습니다.]
도훈이 과감하게 나서게 된 이유였다.
'구원회 분쇄'라는 명분에 합당한 살인은, 면죄부를 제공하겠다는 것이었다.
금 목걸이를 손에 쥔 도훈이 사이코메트리 스킬을 통해 빠르게장만수의 과거를 뒤졌다. 잠시 후 스킬을 끝낸 도훈이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말했다.
"이햐-. 너 생각보다 더 개새끼였구나?"
"뭐라는 건가? 금목걸이를 분명 주지 않았나? 그걸로 부족하다면···."
"닥쳐! 이 돼지 새끼야."
금목걸이를 주먹에 돌돌만 도훈이 장만수의 육중한 몸을 한 손으로 일으켜 세웠다.
"넌 좀 맞아야겠다."
뒤돌아선 혜진이 헤드폰으로 클래식을 감상하는 사이, 반대편에선 돼지 멱따는 소리가 울려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