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9. 구원회-104-
* * *
도훈은 실제로 처음 듣는 장목사의 음성에 긴장했다.
혜진이 일부러 고개를 돌려 전화를 받았지만, 도훈은 본인이 직접 통화하는 것처럼 똑똑히 통화 내용을 들을 수 있었다.
"지금 어디냐?"
"···네, 분당 지부로 가는 길입니다."
혜진이 침착한 목소리로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그래? 이상하구나. 방금 분당지부 김목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겨우 처녀를 선발해 놨더니, 여태 본부에서 데리러 오는 사람이 없다면서 말이야."
혜진의 동공이 순간 커다랗게 확장되었다. 그녀의 심장 뛰는 소리가 나에게까지 들릴 정도였다.
[헉, 거짓말이 들통난 것 아닙니까?]
'젠장, 구원회가 내 생각보다 치밀한 조직이구나. 전화로 이중 확인을 할 줄이야.'
혜진은 당황하는 듯 했으나, 목소리 상으론 전혀 티를 내지 않고 거짓말을 이어갔다. 사람을 속이는 데 능숙한 성격으로 보였다.
"가는 길에 차량에 문제가 생겨서 부근 정비소에 들렀습니다.
잠시 지체되었는데, 서울에 도착하는 데 무리는 없습니다."
"···뭐라?"
"죄송합니다. 큰일 아니라고 생각해 따로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미련한 것을 봤나! 내 뭐라고 했느냐? 내가 끝이 좋아야 다 좋다고 하지 않았느냐? 마지막이 다가올수록 매사 조심해야 한다고 몇 번을 강조했거늘!"
"제 불찰입니다, 목사님. 부디 용서를···."
"쯧쯧. 어제밤 꿈자리가 뒤숭숭하길래 꼭 무슨 변고가 생길 것 같더라니···. 어쨌든 최대한 서둘러 오너라. 내 오늘 의식을 앞당길 예정이니 준비를 서둘러야 할 것이야."
"···예? 의식을 앞당기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혜진이 화들짝 놀랐다. 도훈 역시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설마 그 처녀를 바치는 제물 의식을 당긴다는 소리일까?
"내 곰곰이 생각해보니, 자정을 기점으로 하루가 지나지 않겠느냐? 그러니 오늘 저녁 일찍 한 명을 취하고, 12시 지나서 바로 또 한 명을 취하면 최대한 빨리 1,000명을 채울 것 같더구나."
"아···. 모, 목사님."
"왜? 네가 생각해도 기발하지? 마지막 날에만 쓸 수 있는 편법이랄까?"
"그, 그것은 조금 무리가 아닐지."
"뭐가 무리란 말이냐? 설마 내가 두 명을 연속으로 못 해치울 것으로 생각하느냐? 나 장만석이?"
"절대 아닙니다. 다만 목사님의 건강이 우려스러워서."
"흐흐흐, 마지막인데 까짓거 모르핀 몇 방 더 맞으면 그만이다.
아무튼 구실장 네가 수고가 많았다. 아니, 구장로라고 불러야지?
승진까지 시켜줬는데. 내가 이렇게 자주 깜빡한다니까?"
"편한 대로 부르셔도 됩니다."
"이제 거의 끝이 보인다. 혜진이 네가 보낸 인고의 세월이 결코 헛되지 않게 해주마. 자정이 지나 변한 내 모습에 너무 놀라지는 말도록."
"그럴리 있겠습니까. 겉모습과 상관없이 목사님은 영원히 저에겐 아버지 같은 분인걸요."
"그래. 끝까지 수고하도록. 늘 경계해야 한다. 좋은 일엔 꼭 마가 끼는 법이거든. 사탄의 유혹에 휘둘리지 않도록 주의하거라."
"···네."
[이거 큰 일 난 거 아닙니까?]
'이런 씨팔. 이틀 남은 줄 알았는데, 자정까지면 앞으로 8시간도 안 남은 거잖아?'
[장만석이 하루를 앞당기는 결정을 내렸군요.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닙니다. 24시간을 기준으로 하루가 지난다고 보면, 자정 직후는 내일로 계산되니까요. 룰의 허점을 이용한 편법이랄까요?]
'이 노망난 노인네가 진심으로 흡혈귀가 되고 싶어 안달이 났나?'
[장만석이 정말 진혈의 뱀파이어로 진화하면, 그땐 아무리 주인님이라도 그를 죽일 방법이 없어집니다.]
'진혈의 뱀파이어가 그렇게 강력한 존재야? 솔직히 구미호도 이젠 내 상대는 못 될 것 같은데? 다 비슷한 족속들 아닌가?'
[전혀 아닙니다. 해당 의식이 정말로 진혈의 뱀파이어로 거듭나는 술법이라면요. 쉽게 비유하면 진혈의 뱀파이어는 랭커 플레이어 셋이 모여도 상대가 안되는 막강한 존재입니다. 살 점 하나만 남아도 끊임없이 재생하는 불사의 권능 때문에요. 핵폭발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강한 생존력이라고 할까요?]
'뭐? 핵폭발에서 살아남아? 바퀴벌레야 뭐야?'
[그만큼 질긴 생명력을 지녔다는 뜻입니다. 심지어 씬 블러드의 약점이라고 불리는 햇볕에 피부가 타들어 간다거나, 지속적으로 흡혈을 못하면 힘이 빠지는 잡종과는 달리 언제든 힘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흐음.'
[더구나 장만석은 탈주하긴 했지만 플레이어 때 익힌 다른 능력도 지니고 있을 겁니다. 두 특성이 결합 될 경우 어느정도로 막강할지 쉽게 예측이 어렵습니다.]
'젠장. 좆만 큰 사이비 교주라고 생각했는데 이거 너무 스케일이 커지는 거 아니야? 정의의 여신께선 이것까지 내다보신 건가?'
[이제 어쩌실 생각입니까? 장만석의 계획을 알게 되었는데요.]
'이틀이 하루로 줄긴 했지만, 어쨌든 12시까진 병약한 노인네라는 건 변함없잖아? 마지막 처녀의 피를 빨아먹기 전에 뚝배기 깨뜨려 버리면 그만이야. 변신 직전에는 힘을 못 쓸 테니.'
[그게 아니라, 당장 혜진양이 다시 분당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장만석의 의심을 피하려면요. 그가 측근을 의심하기 시작하면, 종적을 감춰버릴지 모릅니다. 주인님의 암습이 틀어질 수 있다는 뜻이죠.]
'흐음, 그건 예상치 못한 변수인데?'
통화를 끝낸 혜진은 초조한 표정으로 손톱을 깨물었다.
"이제 어쩌지? 목사님이 곧 눈치챌 것 같은데. 내가 배신했다는 걸 알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장목사는 내가 오늘 밤 정리할게."
"대체 네가 뭘 어쩌겠다는 건데? 목사님이 데리고 있는 경호팀은 진짜로 전쟁을 겪어 본 외국 용병들이야. 실전에서 총 한 번 못쏴본 뜨내기들이 아니라고!"
"방법은 내가 고민할 테니 넌 염려 안해도 돼."
"아니···. 정말 아무 대책도 없이···. 이대로 도망쳐도 킬러를 고용해 보낼 거야.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니까."
"도망칠 필욘 없어."
"분당 지부에서 당장 처녀를 데려오지 않으면 대번에 날 의심할 거야."
"그럼 다시 돌아가야 하나?"
"분당지부의 김목사가 나한테 말도 없이 장목사님께 직통으로 보고할 줄은 몰랐어. 이럴 줄 알았으면 차 돌리기 전에 내가 미리 선수를 쳤어야 했는데···."
"흐음, 그건 예상치 못한 부분이니까 어쩔 수 없지."
혜진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세뇌가 풀린 뒤 기껏 장목사를 배신할 마음을 품었는데, 시작부터 어그러지고 있었다.
"···정말 지긋지긋해. 수년간 그의 노예로 살아왔는데, 도저히 족쇄를 풀 방법을 못 찾겠어."
"걱정 말라니까. 내가 다 해결해 줄게."
"네가 대체 무슨 수로?"
"넌 나만 믿어."
"하···."
도훈은 이대론 섹스가 계속 진행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이미 잔치는 끝났고, 흥은 식은 상태였다.
'섹스 천재와의 결전은 아쉽지만, 다음으로 또 미뤄야겠군.'
[벌써 두 번째 중단입니다..]
'일단은 장목사부터 처단하는 게 급선무니까. 그게 내가 정의의 여신에게 부여 받은 미션이기도 하고.'
"분당까지 언제 되돌아가지? 장로 회의는 불참한다고 해도 ···."
"몇 시까지 데려가야 하는데?"
"처녀를 선발해 가면, 담당의가 처녀막 검사를 실시한 뒤 목욕재계를 시키게 되어 있어. 의식을 앞당긴다고 한걸 보면, 앞으로 남은 시간은 길어야 두 시간이야."
"두 시간이라···. 얼른 옷 입어."
도훈도 서둘러 옷을 입었다.
"어떡하려고?"
"법인 차 명의로 과속 딱지 날아와도 회계처리하는데 문제없지?"
"무, 무슨 소리야?"
"잊었어? 내 꿈이 한 때 카레이서였다는 거 말이야. 평속 180Km로 주파해 줄게."
"무, 무슨···."
* * *
"흐익! 너, 너무 빨라!"
"걱정마. 차는 완벽하게 컨트롤하고 있으니까."
도훈은 고속도로를 미친 듯이 달려갔다.
속도계에 찍힌 수치가 200km를 쉽게 넘나들었다.
그는 신호위반이나 과속카메라를 신경쓰지 않고 풀악셀로 차를 때려 밟았다.
앞에 차가 있으면 곧바로 차선을 변경해 추월했고, 좁은 차선에 나란히 달리고 있으면 차량 사이를 칼치기로 뚫어내며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부아아앙-!
한 때 총알 택시로 불렸던 택시보다도 훨씬 빠른 속도에 혜진은 머리 위의 안전바를 꼭 붙잡은 채 부들부들 떨어야 했다.
"이, 이러다 죽을 것 같아!"
"걱정 붙들어 매라니까? 내가 한국에서 태어나지만 않았어도 진즉 F1에서 이름 날렸을걸? 아직까지 무사고라고."
"그래 봐야 4년이잖아!"
"그런가?"
도훈은 극한으로 정신을 집중한 상태였다.
200Km를 넘나드는 속도는 옆에 타 있는 것만으로 아찔했지만, 정작 도훈에겐 100Km 운전 속도와 비슷하게 느껴졌다.
고도로 집중한 상태에서 주변의 인식마저 느려지는 것이었다.
'그나저나 외제차가 좋긴 하네. 아우토반을 염두하고 만든차라 그런지 200Km를 달리는데 크게 흔들림도 없군.'
차량에 적용된 제한속도 한계까지 밀어붙인 도훈은 불과 40분도 안 되는 사이 구원회 분당 지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사색으로 질린 혜진이 비틀거리며 차에서 내렸다.
"데, 데려 올테니 잠시만 기다려."
"응."
혜진이 처녀를 데리러 간 사이 도훈은 차 밖으로 나와 담배를 피웠다.
[운전을 그렇게 잘하시는 줄 몰랐습니다.]
'차가 좋은 거지 뭐.'
[아니, 그래도 감당하기 쉽지 않으셨을 텐데요. 주인님도 그렇게 무제한을 달려본 건 처음 아닙니까?]
'그렇긴 한데, 막상 해보니까 어렵진 않더라고.'
[그나저나 처녀를 데려간다 치고 이제 어쩌실 계획입니까? 역시나 투명 인간으로 변신 후 암습인가요?]
'그게 현실적으로 가장 확률이 높지.'
[하지만 경계가 의외로 삼엄할 수 있습니다. 가령 열추적 감지 시스템이 설치되어 있으면 아무리 모습을 감춰도 카메라에 잡힐테니까요.]
'그런가? 흐음, 그건 생각안해봤는데.'
[혹시 모르니 플랜비를 고려해 보셔야 합니다. 투명인간 잠입계획이 막힐 경우, 구혜진을 활용하는 방법이라든가요.]
'가만. 그러고보니, 혜진은 처녀를 데려가는 채홍사잖아.'
[그렇죠.]
'그럼 경호팀들도 함께 가는 처녀를 의심하지 않지 않겠지?'
[네? 지금 그게 무슨···. 서, 설마 여자로 변신하시겠다고요?]
'왜? 불가능할까?' 도훈은 역용마스크를 이용해 얼굴을 자유자재로 변화시킬 수 있었다. 여자의 얼굴은 한 번도 시도해보지 못했지만, 천상계의 기술력으로 볼 때 충분히 가능할 것으로 보였다.
'문제는 체형인데.'
[보통 문제가 아니죠. 주인님 체형은 축골공을 이용하더라도 절대 여자처럼 줄일 수 없습니다. 일단 키가···.]
'키가 큰 여자도 있지 않을까?'
[그래도 180이 넘는 여자는···. 마유미양이 그 정도 되지 않습니까?]
'그렇지. 마유미를 롤모델로 변신하면···. 어차피 본부에 있는 놈들은 성남지부에서 올라오는 처녀 얼굴을 모를 거 아니야.'
[아니···. 그게···.]
'생각해봐. 열추적감지 시스템이 설치되어 있으면 아마 침투하기 전에 경호팀에 적발될 거야. 난 놈들이 무서워서 그러는 게 아니야. 소란이 벌어졌을 때 장만석이 숨어버릴까봐 걱정이지. 전투력은 형편없지만 놈이 어떤 스킬을 감추고 있는지 정보가 부족하니까. 막말로 나랑 똑같이 투명인간으로 변신해서 잠적하면 찾는 게 불가능할 거란 말이지.'
[흐음, 그건 그렇죠.]
'하지만 여자로 변신해서 잠입하면, 충분히 검문을 통과할 수 있지. 일단 장만석 근처에만 접근할 수 있다면, 한 방으로 놈을 제압할 수 있어.'
[정말 그렇게까지 하셔야 하는 건가요? 주인님의 여장은 정말 ···.]
'축골공으로 체형을 줄일 경우 어느정도로 가능하지?'
[최대 5%까지입니다. 185인 주인님의 키가 176까진 줄어들긴 할 겁니다. 하지만 덩치는 더 줄이기 어렵습니다. 박민용으로 변신한 지금 정도가 최대거든요.]
'음. 여자치곤 너무 어깨가 넓은 데.'
도훈은 혜진이 돌아오기 전에 짬을 내 혼자 축골공을 발휘해보았다. 그의 몸이 삐거덕거리며 뼈가 재조합되기 시작했다.
좀비처럼 두둑거리던 그의 몸은, 다시 뼈가 맞춰졌을 때 기괴한 형상으로 바뀌었다.
넒은 어깨를 줄이기 위해 탈골을 하느라, 팔이 너무 밑으로 내려가버린 것이었다. 심지어 팔이 빠지니 제대로 들지도 못하고 축 늘어져 누가봐도 정상처럼 보이지 않았다.
[뭐 하십니까?]
'내 어깨를 봐. 탈골됐잖아.'
[아니 그러니까 그게 무슨 병신 같은···.]
'엇, 혜진이 돌아온다.'
그때 분당지부에서 처녀를 인계받은 혜진이 어린 여자 한 명과 함께 차로 되돌아왔다.
급하게 서울로 복귀해야 했기 때문에, 절차를 생략한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