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 구원회-99-
* * *
혜진을 태운 차는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졸음 쉼터에서 급작스럽게 합체를 하게 된 두 사람은, 훼방꾼의 방해로 후다닥 행위를 중단해야 했다.
도훈이 재빨리 살기를 발출해 불청객을 쫓아내긴 했지만 흐름이 끊긴 사이 이성을 되찾은 혜진은, 밀려오는 창피함과 민망함 때문에 섹스를 중도 포기하고 말았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 건지 정신 번쩍 든 것이다.
하다가 끊긴 것이 찝찝하긴 했지만, 강제로 다시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도훈도 머쓱해하며 운전대를 잡았다.
"···뭐, 일단은 네 말이 사실이라고 믿겠어. 내가 직접 확인까지 했으니까."
"넵."
도훈이 무미건조하게 대답하는 게 섭섭했는지 보조석에 앉은 혜진이 다시 한 번 강조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확실한 사실 확인을 위해서···."
"네, 알고 있습니다. 실장님."
"······."
혜진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오랜만에 섹스까지 했건만, 도훈의 반응이 영 시큰둥한 것이다.
'뭐지 저 반응? 설마 나를 청년부 예배때 보던 다른 여신도처럼 아무하고나 자는 헤픈 여자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렇게 오해한다면 너무나 억울한 일이었다.
구원회가 대체로 성적으로 문란한 집단이긴 하지만, 혜진은 지금껏 교주인 장목사를 제외한 어떤 남자와도 자본적이 없었다.
어떻게 따지면 일부 종사만 해오던 그녀가, 모처럼 큰맘 먹고 한 번 대준 셈인데 도훈의 반응이 너무 밋밋했다.
하지만 도훈도 도훈대로 나름 뿔이 난 이유가 있었다.
'하다가 말아? 갓난애도 먹던 사탕 뺏기면 열받아 우는데, 감히 대물에 박히고도 제정신으로 돌아왔다는 거야? 나를 우습게 봐도 유분수지.'
이성을 잃었던 혜진이, 갑자기 섹스를 중단한 것이 자존심이 상했던 것이다.
서로 기분이 상한 탓에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말없이 고속도로를 달려갔다. 침묵이 부담되었는지 혜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근데 아깐 어떻게 한 거야?"
"네? 뭘요?"
"트럭 기사 말이야. 네가 뭐라고 한마디 하니까 혼이 나가서는 줄행랑을 치던데?"
"듣지 않으셨어요?"
"꺼지라고 했다고 순순히 물러난 게 이상하잖아."
혜진이 트럭 기사의 얼굴을 떠올렸다.
덩치도 크고 무척이나 험상궂게 생긴 사내였다. 힘깨나 쓰게 생긴 산적 두목 같은 사내가, 도훈의 한마디에 혼비백산하여 달아나는 모습은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경호팀이라도 달려올까 봐 쫄았나 보죠, 뭐."
"뭐라고? 너··· 설마 다 알고 있었던 거야?"
혜진은 비꼬듯 말하는 도훈의 대답을 듣고서야, 진실을 깨달았다.
"생각해보면 당연하잖아요. 헬기 타고 날아올 것도 아닌데, 위치 알린다고 경호팀이 바로 달려오겠어요? 여기가 무슨 미국도 아니고."
"그, 그럼 왜···."
"왜 순순히 말을 들었냐고요? 그거야 저는 정말로 결백하니까요. 전 누가 보내서 장로님에게 접근한 게 아니에요. 제 스스로 찾아온 거죠."
"···뭐라고? 너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스스로 날 찾아왔다니?"
갑자기 커밍 아웃을 하는 도훈을 보며 로시가 우려를 표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구혜진에게 진짜 접근한 목적을 밝혀도요.]
'언제까지 속일 순 없는 일이야. 게다가 혜진의 세뇌가 풀린 걸 확인했으니 이쯤에서 승부를 걸어봐야지. 질질 끌어 봐야 뾰족한 수가 더 있는 것도 아니고.'
"맞아요. 구실장님. 아니, 구혜진씨. 전 당신을 만나러 왔어요."
"너, 너 정체가 뭐야? 서, 성기사단 출신이라는 말도 그럼···."
"그건 사실이에요. 성기사단이라는 건 직접 확인까지 하셨잖아요."
"너 진짜 양 권사가 보냈어?"
"누가 보낸 게 아니라니까 그러시네. 양 권사랑은 아무 상관 없어요. 정확히 말하면 저는 구원회 내의 후계 구도나 권력 다툼엔 털끝만큼도 관심 없어요."
"그, 그럼 나한테 접근한 목적이 뭐야?"
"장만석."
"모, 목사님 존함을 그렇게 함부로 부르다니!"
"아직도 모르겠어요?"
"뭘?"
"당신, 가스라이팅 당한 거라고. 장만석 그 사이비 교주한테."
"무, 무슨 소리야 갑자기!"
도훈이 운전대를 거칠게 흔들었다.
순간 균형이 흐트러진 차가 테일링을 일으키며 심하게 흔들렸다.
"꺄악, 뭐, 뭐하는 거야."
도훈은 컨트롤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일부러 위협을 준 것이었다. 아직도 장로라는 알량한 신분을 믿고 도훈을 찍어 누르려는 구혜진에게 보내는 경고였다.
"정신 차리라고! 그렇게 당하고도 아직도 모르겠어?"
"내, 내가 뭘 당했다는 거야?"
"미치겠네, 진짜. 지금 무슨 이유로 성남 분원에 가는 건데?"
"그, 그걸 운전기사가 왜 물어? 그리고, 너 지금 태도가 몹시 불량하다는 거 알고 있지? 난 구원회 장로야!"
도훈이 시니컬하게 웃었다.
분명히 겁을 먹어놓고도 여전히 배짱을 부리는 게 뻔히 눈에 보였다.
"웃기시네. 장로는 무슨. 장만석 똥꼬나 헐도록 빠는 첩실 주제에."
"뭐, 뭐라고? 가, 감히!"
"이봐요, 구혜진씨. 지금쯤이면 눈치채지 않았어?"
"뭘?"
"장만석은 미친놈이라고. 주님의 말씀을 빌어 사람들을 현혹하고, 남의 재산을 갈취하는 것도 모자라, 심지어 순진한 처녀들을 제물로 바치는 사이코!"
"···너, 너 어떻게 그걸."
"내가 말했지? 난 당신을 만나기 위해 의도적으로 접근한 거라고."
"너, 대체 정체가 뭐야?"
"나?"
도훈이 운전대를 놓고 고개를 옆으로 돌려 대답했다.
"구원회를 구원하러 온 사람."
"아, 앞에 봐! 고속도로 한가운데서 뭐하는 거야?"
"왜? 아직 죽고 싶진 않나보지? 목숨은 아까워?"
[주인님, 너무 위험하지 않습니까?]
'상관없어. 차선이탈방지 시스템이 있더라고. 심지어 운전대를 놓아도 문제는 없어.'
[아하. 괜히 겁주는 거였군요.]
"다, 당연한 소릴!"
"그거 봐. 당신 아직 창창하잖아. 여전히 젊고 예쁘단 말이야.
그런 당신이 뭐하러 다 죽어가는 늙은 노인네 밑이나 닦아주고 있는 거냐고? 부귀영화라도 누리고 싶은 거야?"
"······."
"눈치를 보니 다 알고 있는 것 같네. 나쁜 짓인지 몰라서 돕는 건 호구지만, 알고 도우면 공범이란 걸 명심해."
"고, 공범이라니 나, 나는 그저···."
도훈이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계속 분당으로 가? 아님 여기서 차 돌릴까?"
"······."
"결정해. 난 당신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어. 그래서 설득하러 온 거야."
"설득이라니?"
"이대로 장목사를 그대로 둘 건지 아니면 지금이라도 올바른 일에 동참할 건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차 돌린다고 하면 전부 다 설명해 주지. 하지만 여전히 사이비교주에게 충성을 바치겠다면 나도 더는 당신을 설득하지 않겠어."
"······."
혜진은 몹시 혼란스러웠다.
도훈의 정체에 대해 전혀 감을 못 잡는 부분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세뇌가 풀린 직후 그녀가 품었던 의문들을 날카롭게 찔러오는 그의 질문 때문에 머릿속이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다.
그녀가 믿어왔던 진실이 무너지고, 구원회의 모순이 드러나는 순간 그녀가 알던 세상도 함께 부서졌다.
"나, 나는···."
"얼른. 회차지점 얼마 안 남았어."
"자, 잠시만 생각할 시간을 줘."
도훈이 내비게이션을 힐끗 보면서 말했다.
"2분 남았네."
"아, 아니 그런 중대한 결정을 갑자기 내리라고 하면···."
부우우웅도훈이 액셀을 밟자 차가 빠르게 치고나가기 시작했다. 시간이 시시각각으로 줄어드는 사이 혜진은 빠르게 결단을 내려야 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정체도 모르는 사람 말을 곧이 곧대로 믿으라니. 그것도 장목사님을 배신하자는 말을···.'
하지만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세뇌가 풀리자마자, 혜진은 자신이 지금껏 무슨 짓을 벌였는지 속속들이 기억했다.
이는 도덕적 비난에 그치는 수준이 아니라, 형법에서 다룰법한 범죄행위나 마찬가지였다. 도훈의 말처럼 이제껏 장목사의 악행에 동참해온 것이다.
'아아, 내가 어쩌자고 그런 짓을···.'
어떻게 보면 도훈은 그녀가 저지른 악행을 되돌릴 수 있도록 도와주려는 귀인일지도 몰랐다.
그의 말은 하나도 틀린 게 없었으니까.
고심 끝에 혜진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말했다.
"···차 돌려 줘. 서울로."
* * *
다시 차를 돌린 두 사람은 서울 외곽의 모텔로 향했다. 정확히는 모텔이 아니라 모텔 아래 있는 커피숍에 들르기 위해서였다.
보다 심도있는 대화를 위해서였지만, 도훈이 워낙 운전을 거칠게 했기 때문에, 겁을 집어먹은 혜진이 차에서 얼른 내리려고 한 것도 있었다.
물론 모든 것이 도훈의 의도였지만.
음료를 시킨 두 사람은 구석 자리에 앉아 대화를 시작했다.
"난 아직도 네가 누군지, 무슨 목적으로 나에게 접근했는지 모르겠어. 나를 설득하고 싶다면, 네 정체부터 솔직하게 밝혀."
"이름과 나이는 아까 말한 대로야. 박민용, 24세. 아, 말 편하게 해도 되지? 나이 차도 얼마 안 나는데."
나이 차가 안 난다고 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당장은 반말이 중요한 사항은 아니었으므로 혜진도 양해하고 넘어갔다.
"그럼 성기사단은···."
"그것도 일부 사실이야."
"일부?"
"성기사단 입단 심사를 봤거든."
"입단 심사라니? 아직 성기사단도 아니란 소리야 그럼?"
"왜? 내가 설마 입단도 못할 레벨이라고 보는 건가? 겪어 봤으니 충분히 알 텐데? 중간에 멈춰서 아직 모르겠어?"
도훈이 굳이 카섹스를 언급하자 혜진이 살짝 얼굴을 붉혔다.
"흠, 흠. 그건 여기서 중요한 얘기가 아니야."
"그럼 뭐가 중요하지?"
"구원회를 구원한다는 너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정확하게 설명해줘."
"구원회는 미친 종교야."
"······."
"이 교회의 운영방식은 딱 봐도 정상이 아니야. 내부에 있는 신도들은 잘 모르는 것 같지만, 외부인이 봤을 땐 그야말로 정신나간 사이비 집단이나 다를 바 없어. 사이비 중에서도 최악이지."
도훈은 이제껏 구원회를 지켜보면서 느낀 소회를 장로인 구혜진에게 모두 쏟아냈다. 도훈의 비난을 들으면서도 혜진은 한마디도 반박하지 못했다.
그녀가 생각해도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이해가 안 가는 건, 누가봐도 수상스러운 구원회의 운영방식을 두고도, 왜 이제껏 그 모순을 스스로 느끼지 못했는가 하는 점이었다.
도훈이 그녀의 의문을 풀어주려는 듯 넌지시 단서를 남겼다.
"···하지만 놀랍게도 신도들은 이게 잘못되었다는 문제를 조금도 자각하지 못하지."
"왜지?"
"성수."
"성수?"
"그래. 교주가 뿌리는 정액으로 만드는 성수. 그게 바로 구원회신도들의 눈과 귀를 멀게 하는 마약이야. 종교가 인민의 아편이 아니라, 실제 마약 제조 공장이었던 셈이지."
"마약이라니···."
"너도 장로 직위에 있었으니 어느 정도 눈치채고는 있을 텐데?
장목사의 정액으로 만든 성수안에 특별한 힘이 있다는 걸."
"······."
물론 혜진은 알고 있었다.
아니, 알고 있다는 사실을 오늘에서야 비로서 알게 되었다.
세뇌에 빠져있을 때는 이상한 점을 자각하지 못했으나 제정신이 들고 보니 그것이 얼마나 해괴망측한 일이었는지 새삼 깨닫게 된 것이었다.
"구혜진 당신도 마찬가지야."
"나?"
"성수라는 마약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했던 거."
"내, 내가···. 성수를···."
혜진은 의아함을 느꼈다.
그녀는 모종의 이유로 성수의 섭취를 끊은 지 오래. 그렇다면 어째서 중독이 풀리지 않았는지 궁금했다.
도훈이 그녀의 의문을 이해한다는 듯이 설명했다.
"아까 두통약. 그거, 장목사가 줬다고 했지?"
"어? 으, 응."
"그것도 성수의 일종이야."
"뭐, 뭐라고?"
"약을 먹었던 게 아니라, 사실상 독약을 섭취하고 있었던 거지.
장목사 그놈이 멋대로 부릴 목적으로 널 속인 거야."
"······."
혜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버지처럼 따랐던 장목사가 사실상 그녀를 마리오네트처럼 조종한 원흉이라니. 갑자기 속에서 부글부글 분노가 치밀었다.
그때 도훈이 말했다.
"이제는 내가 물어볼 차례야."
"자, 잠깐만."
"뭐?"
"아직 네가 무슨 목적인지 알려주지 않았잖아."
"기브앤 테이크지. 나도 이만하면 충분히 패를 깐 것 같은데, 그쪽도 나한테 어느정도 패를 보여야 하지 않겠어? 죄다 히든만 쥔 채로 포커를 칠 수 없는 것처럼 말이야."
"······."
"장만석이 대체 처녀를 찾는 이유가 뭐지?"
"뭐?"
"놈이 처녀를 수집한다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아무리 조사해도 나로선 그 이유를 모르겠어서 말이지. 넌 그의 수행비서였으니까, 정확한 이유를 알고 있지 않아?"
혜진은 어디까지 말해야 할지 망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