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890화 (1,870/2,000)

1890. 구원회-95-

'하아, 음란 마귀가 씌었나. 내가 대체 왜 이러지?'

혜진은 사실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죽어가는 장목사.

펄펄 살아 숨 쉬는 젊은 운전기사.

둘 중 하나를 골라야한다면, 그 결과는 뻔했다.

하지만, 욕망대로 살기엔 장목사에 대한 애정이 너무 컸다.

그녀는 딸처럼 아껴주고, 보듬어 준 장목사를 배신할 순 없는 일이었다.

그때 그녀의 머릿속에서 사탄이 속삭였다.

-딸은 무슨? 딸을 따먹는 아버지가 세상에 있나?

-목사는 널 철저하게 이용한 거야. 평생 책임질 것처럼 대려와서, 기껏 시키는 일이라곤 다른 처녀를 잡아다 매일 제물로 바치는 일이었지.

-그러고선 매일 밤 그짓을 쳐다보게 했지. 관전으로 만족하라며 말이야.

'아냐, 아냐. 목사님은···. 목사님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명.

신경쇠약 증세가 심해지면 도지는 증상이었다.

-어차피 장목사는 곧 죽어. 이미 반 송장이야. 너도 알고 있잖아?

-여기서 젊은 운전기사랑 떡친다고 해도 장목사가 어떻게 알겠어? 가까이서 지켜봐서 알고 있잖아. 그는 신이 아니야.

-본능대로 행동해. 많이 쌓여 있는 건 정작 너잖아?

'제발 그만! 주여, 저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혜진은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도 어렴풋 짐작하고 있었다.

이명이라고 생각한 사탄의 정체가 그녀의 무의식이라는 사실을.

무의식의 기저에 있던 평소의 생각이, 다른 목소리를 빌어 그녀에게 불평 불만을 쏟아내고 있던 것이다.

-그냥 해. 뭘 참아? 넌 12장로야. 구원회의 최고 권력자!

-그래. 저 청년도 너한테 호감이 있잖아. 어디 가서 장로랑 잤다고 떠벌일 것 같지도 않은데?

-이건 너의 권리야. 네 부하는 네가 멋대로 할 수 있어. 다른 장로들도 다 그렇게 한다고. 저번에 봤지? 네 앞에서 자기 비서 치마 밑으로 손을 집어 넣던 그 새끼. 아주 보란듯이 희롱했잖아.

"그, 그만!"

"예?"

"아, 아니야. 내가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려서···."

"머리 아프세요?"

"으, 응. 약을 좀 먹어야 겠는데 차를 잠시 세울 수 있을까?"

"차를요? 잠시만요. 1KM 앞에 졸음 쉼터가···. 금방 세워드릴 게요."

"고마워."

혜진이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손으로 짓눌렀다.

어째서인지 장목사에 대한 믿음이 약해질때마다 머리가 깨질듯이 아파왔다. 마치 손오공의 머리에 씌인 긴고아가 조이는 것처럼, 반사적으로 두통이 시작되는 것이었다.

도훈은 졸음쉼터에 차를 대면서 그녀의 현 상태를 짐작했다.

'장목사 짓이군.'

[네? 갑자기요? 장목사가 구장로에게 도청장치라도 심어 놓고 감시하고 있다는 뜻입니까?]

'그게 아니라, 어떤 사술을 쓴 건지 모르겠지만 혜진의 마음이 흔들리려고 하니까 갑자기 두통을 일으켰잖아. 어떤 금제를 걸어둔 것 같아.'

[아! 그럴 수도 있겠군요. 만약 플레이어라면···.]

'지독한 새끼. 단순히 성수로만 옭아맨 게 아니었어. 주변 측근들을 이런 식으로 통제했었구나!'

"졸음쉼터 도착했어요, 괜찮으세요?"

"으, 으···. 머리가 깨질 것 같아. 얼른 가방에서 약을···."

"가방이요?"

도훈이 뒷좌석을 보니, 그녀가 들고온 조그만 명품 가방이 보였다. 뒷좌석에서 앞좌석으로 이동하느라 가방을 그대로 두고온 것이었다.

도훈이 긴 팔을 뻗어 뒷좌석에서 가방을 집더니 머리를 감싼 혜진에게 물었다.

"뭘 꺼내야 하죠? 안에 약이 있나요?"

"으, 응. 안에 약통이···."

도훈이 가방을 뒤지다 점안액처럼 보이는 조그만 약통을 발견했다. 안에 든 것은 걸죽한 용액이었다.

"혹시 어떻게 생겼어요?

"무, 물약 형태야."

도훈은 안에 내용물을 보다 혹시나 싶어 약통을 살짝 열었다.

혜진은 머리를 감싸고 있느라 도훈의 행동을 보지 못했다. 그의 예민한 후각으로 정액냄새가 훅- 퍼졌다.

'씨발, 성수다!'

[네?]

'약이라고 마시는 게 장만석의 정액이었다고. 성수 원액 말이야.'

[헉! 어떻게 그런 일이···. 근데 성수 원액은 위험한 것 아닙니까? 주인님도 폭주할 뻔했는데요?]

'나랑 미숙에게는 그렇게 작용했지만, 혜진에게는 전혀 다른 작용을 할지도 모르지.'

도훈의 막연한 추측이었지만, 그것은 실제로 사실이었다.

장만석의 직업은 연금술사.

자신의 정액을 이용해 무엇이든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는 구혜진을 노예처럼 부리면서 변심하지 못하도록 특수한 세뇌용액을 만들어 약이라고 속여서 섭취하게 한 것이었다.

혜진은 반신반의 했지만, 약을 마시고 나면 깨질것 같은 두통이 씻긴 듯 낫는 것을 보고 약효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진실은 정반대였다.

두통을 유발한 것이 오히려 그 약이었던 것이다.

다른 이성에게 성욕을 품거나, 자신을 불신하게 되는 순간 강력한 두통을 유발시켜 꾸준히 독약을 섭취하게 만든 것이었다.

약을 먹고 나면 증세가 현격히 완화되었기 때문에, 혜진은 영문도 모르고 계속적으로 섭취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도훈은 이런 내용까지 상세히 알 수 없었지만, 뭔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짐작했다.

'로시, 이거 먹여서는 안 될 것 같은데?'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장만석의 정액이 확실하다면 절대 구혜진양에게 좋을리 없으니까요.]

'내 생각도 그래. 근데 저렇게 아파하는데 어떻게 하지? 저러다 뭔일 나는 거 아니야?'

[흐음, 딜레마군요. 거의 다 유혹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변수가···.]

차를 세운 도훈은 약병을 집어들고 망설였다.

약을 주면, 이제껏 공들인 것이 물거품이 될 것 같았고 그렇다고 안 주자니 장만석이 건 금제 때문에 혜진이 금방 숨이 넘어갈 분위기였다.

'진짜 좆같네 씨발.'

[주인님. 아무리 미션이 우선이더라도 죄없는 혜진의 목숨부터 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긴 한데···.'

혜진은 장목사에게 처녀를 구해다 바친 채홍사였다.

그녀의 죄가 없다고 할 순 없지만, 만약 그 이유가 장목사의 세뇌 때문이라면 면죄부를 받을 수 있었다.

본인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고, 시키는대로 따랐을 테니까.

죄없는 혜진에게 고통을 줘야한다는 점에서 도훈은 갈등했다.

"크흣, 아직 못 찾았어? 얼른 약을···."

도훈은 당장이라도 약을 먹여 혜진을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장만석에게 놀아나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젠장. 죽이 되는 밥이 되는 한 번 해보자.'

[네? 뭘 말입니까?]

'내공 치료.'

[예?]

'장만석이 혜진에게 무슨 짓을 했던 간에, 어쨌든 스킬을 이용한 거잖아. 스킬은 기본적으로 마나를 이용한 힘이야. 내가 가진 내공도 따지고 보면 마나의 일종이지.'

[그렇긴 하죠. 근데 그걸 어떻게···.]

'지금 내 내공은 보통의 인간이 다다를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어. 이 정도 내공이라면, 상대의 스킬을 반대로 밀어낼 수 있지도 않을까?'

[확실치도 않는 도박을 거시겠다고요? 그러다 혜진양이 잘못되기라도 하면요?]

'그렇다고 독약인 줄 뻔히 알면서 먹일 순 없잖아. 일단 시도해 보고 도저히 안 될 것 같으면 바로 포기할게.'

[하아, 너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나도 남의 내공으로 살아난 적이 있었잖아. 시도할 가치는 있어.'

도훈은 무려 두번이나 주화입마에 빠졌고, 그 중 한 번은 쌍둥이 고승의 도움으로 살 수 있었다. 그때의 경험에 비추어 스스로 내공 치료를 해보기로 한 것이었다.

"실장님, 제가 잠깐만 봐도 될까요?"

"뭐, 뭐라고? 아니 약을 달라니까 무슨···."

도훈은 허락을 하지도 않았는데, 혜진의 정수리에 두 손을 얹었다. 그의 손에서 막대한 양의 내공이 쏟아지며 혜진의 몸으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으으으으!"

도훈의 가진 내공이 혜진의 몸 속으로 들어가자, 서로 다른 기운이 충돌하기 시작했다. 두뇌로 가는 혈관을 좁혀 두통을 유발하는 조건부 마법이 도훈이 주입한 양강의 기운에 부딪힌 것이다.

"끄으으! 머, 머리가 깨질 것 같아!"

급기야 혜진이 비명을 질러댔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팔다리를 휘저었다.

[주인님! 너무 위험합니다. 이 방법이 틀렸을지도 모릅니다!]

'조금만. 조금만 더.'

도훈이 한층 더 강력한 내공을 혜진에게 밀어넣었다.

3갑자가 넘는 내공의 힘이 해일처럼 쏟아져 들어갔다.

"흐읏!"

그 순간 혜진의 머릿속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막강한 내공에 힘입어 장만석이 건 사술이 밀려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는 혜진의 반응에서도 드러났는데, 금방 죽을 것처럼 비명을 질러대던 혜진의 숨소리가 점점 안정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아···. 아, 어떻게 된 거죠?"

"네?"

도훈도 결과에 놀라며 혜진에게 되물었다.

"이제 괜찮으세요?"

"갑자기 두통이 씻은 듯 사라졌어요. 이게 무슨···."

혜진은 자신을 괴롭히던 두통이 사라지자 제정신을 차린 듯 도훈에게 물었다.

"아, 효과가 있네요. 어렸을 때 저희 할머니가 해주셨던 건데."

"할머니가?"

"한번은 머리가 깨질 것처럼 지끈거리는데, 이렇게 정수리를 눌러주니까 훨씬 낫더라고요."

"저, 정말? 그게 가능해요?"

혜진은 간호사 출신이었다.

여러 민간요법에 대해서도 들어봤지만, 차가운 배도 아니고 정수리를 손으로 만진다고 낫는다는 것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저한텐 효과가 있더라고요. 실장님도 괜찮아 지신 거 아니에요?"

"그, 그렇긴 한데···."

혜진은 떨떠름한 기분이었지만, 어쨌든 깨질듯한 두통에서 해방된 것만으로 기뻤다. 도훈 역시 속으로 적잖이 놀라고 있었다.

'이게 되네?'

[말도 안 됩니다. 어떻게 하셨습니까?]

'뭘 어떻게 해? 너도 봤잖아. 그냥 내공을 밀어넣었지.'

[단순히 내공을 주입한 것만으로 상대의 스킬을 풀어 버렸다는 건가요?]

'나도 모르지, 원리까지는…. 암튼 하니까 되네?'

[허어, 참. 3갑자 내공이 힘이란 정말 예측이 안 되는 군요.]

'어쨌든 결과가 좋았으니 상관없지. 일단 이것부터 챙기자.'

도훈은 마술카드를 다루던 손기술을 이용해, 순식간에 물약을 인벤토리로 밀어 넣었다.

[그건 또 왜요?]

'이걸 가지고 있으면 혜진이 또 두통이 올 때 마시려고 할수도 있잖아. 아직 완벽하게 스킬이 풀렸는지 모르니까.]

[하지만 발작의 순간 주인님이 옆에 없으면 혜진 양이 위험할수도 있습니다.]

'걱정마. 장만석 이새끼는 내가 조만간 죽일 테니까.'

"하아-. 그나저나 추한 꼴을 보였네요. 미안해요."

"아닙니다. 아픈 게 미안할 일은 아니죠. 그래도 다행이네요.

괜찮아지셨다니."

혜진은 두통이 낫고 나자 머리가 명쾌해진 기분이었다.

마치 짙은 안개 속에 갇혀 있다가 가을의 청명한 하늘 날씨처럼 주변이 맑아진 느낌이랄까?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분명 뭔가 달라졌는데···.'

그녀를 옥죄고 있던 것은, 성수로 인한 세뇌와 지속된 심리적 지배. 그리고 최후의 방어 수단으로 걸어두었던 금제였다.

하지만 성수를 마셨다간 성욕이 솟구치는 문제 때문에, 일부러 마시지 않고 보관했고 심리적 지배는 그간의 장만석의 행동 때문에 어느 정도 풀려난 상태였다.

그리고 이번에 도훈이 그녀에게 걸린 스킬을 내공을 밀어냄으로써, 장만석이 그녀에게 걸어둔 최후의 방어막마저 해제되고 만 것이었다.

갑자기 제정신으로 돌아온 혜진은 어리둥절한 기분에 혼란스러워했다.

'내가 여기서 뭐하는 거지? 아···. 목사님 때문에 처녀를 구하러···.'

평소라면 아무 의심없이 따랐을 명령이었지만, 혜진은 갑자기 마음속에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아니, 잠깐만. 내가 이 짓을 왜···.'

그녀는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

다 죽어가는 늙은 장목사의 기행은, 의학적으로 노망이라고 밖에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으니까. 자신은 그것을 물심양면으로 돕고 있는 것이다.

"···잠시만요. 여기 화장실 있죠?"

"네?"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혜진은 복잡해지는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 차에서 내리더니 화장실로 달려갔다. 여자 화장실 문을 걸어 잠근 그녀는 세면대에서 세수를 시작했다.

그녀는 타고난 피부가 워낙 좋아 화장을 거의 안 하는 편이었기 때문에 얼굴을 바로 씻어도 아무렇지 않았다.

"하아···.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난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세뇌가 풀리면서 마주한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혜진은, 세면대 앞 거울을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

거울 속에 있는 건, 오랜만에 마주한 진짜 자신이었다.

한편 차에서 대기하던 도훈은 혜진의 속에서 뭔가가 달라진 걸 깨달았다.

'방금 눈빛 변한 거 봤지?'

[네, 맞습니다. 혹시···.]

'맞지? 세뇌 풀린 거?'

[그런 것 같습니다. 한순간에 사람이 달라진 것 같았습니다.]

'세상에. 이게 내공으로 풀리는 수준밖에 안 됐다고? 이걸 내가 왜 이제 깨달았지?'

[꼭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방금 봤잖아. 내공을 밀어 넣으니까 혜진이 눈빛이 싹 변한거?'

[제 말은 주인님의 내공이 늘어나서 가능해진 것일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아니면 혜진 양의 사례가 모두에게 적용되지 않을 수도 있고요. 확신하기엔 표본이 부족합니다.]

'하긴 그렇네.'

도훈이 차에서 혜진을 기다리는데, 화장실을 나온 혜진이 보조석이 아닌 운전석 쪽으로 오더니 갑자기 차 문을 훽 열며 소리쳤다.

"너, 정체가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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