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888화 (1,868/2,000)

1888. 구원회-93-

* * *

혜진이 모처럼 웃었다.

이렇게 마음 편히 웃어 본적이 언제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할 지경이다.

사실 그녀는 몇 년째 신경쇠약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유는 바로 장만석 때문이었다.

원래 장만석은 대단히 매력적인 사내였다.

나이가 들수록 기품이 넘치는 숀 코네리나, 피어스 부르스넌 같은 영미권 배우들처럼, 잘생긴 얼굴에 한없이 자상한 성격이었다.

게다가 섹스는 오죽 잘했던가?

그를 따라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했을 때, 미친년 제발 정신차리라고 친구들이 했지만, 그녀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그만큼 그때의 장만석은 자신의 평생을 맡길 수 있는 사내였다.

비록 나이 차가 많긴 했지만, 상처하고 제법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딱히 불륜도 아니었다. 하지만 한국으로 돌아온 장만석은 그녀와 결혼할 생각까진 없는 듯 보였다.

종교적인 이유라고 하니 더 요구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와 결혼을 못 한다고 해도 별 상관은 없었다.

그는 대형 교회의 담임 목사 신분에, 이미 자신보다 나이 많은 장성한 아들마저 있었다. 괜히 의미없는 법적 혼인 문제로, 그와의 좋은 관계를 파탄 내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그의 재산을 바란 것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어느 날부터 장만석은, 양생술을 익힌다며 사람이 조금씩 달라 지기 시작했다. 워낙에 독특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처음엔 지나가는 바람이거니 했지만, 장만석의 양생술에 대한 집착은 나날이 심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결심하듯 말했다.

이제부터 천일 간 매일 밤 처녀와 교합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자신이 깨달은 양생치료법이라고 했다.

혜진은 황당하고 어이가 없었지만, 이미 그에게 정신지배를 당한 뒤였기 때문에 감히 그의 뜻을 거스르지 못했다. 하지만 매일 새로운 처녀를 취하고, 이후 처녀 혈을 빨아마시는 장면을 몰래 관찰하면서 그녀의 굳건한 믿음도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장만석은, 정말로 세간의 소문처럼 혹세무민하는 사이 비 교주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믿음이 흔들리려 할 때마다 그녀는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그는 자신의 이상형이자, 우상과도 같은 사람이었다.

그를 따르기 위해 자신의 인생 진로마저 돌린 그녀였다.

이제 와 그를 의심한다는 것은, 자신의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과도 같았다.

그것은 스스로를 부정하는 일이었다.

억지로 버텨야 했다. 버티고 또 버티며, 장만석의 주구가 되어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을 수행했다.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도 느낄만큼 점점 지쳐갔다. 웃음이 많던 그녀가 웃음기를 완전히 잃고 말았다.

일시적인 우울증이라 믿었지만, 증상은 해가 갈수록 심해졌다.

잠이 들어도 깊이 자지 못하고, 업무 스트레스는 날이 갈수록 쌓여갔다. 점점 고립되는 그녀였지만, 그녀에게 먼저 다가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린 나이에 집사에 권사, 장로까지 오르고 나니 주변인들의 시기와 견제가 심했다.

장만석의 비호 때문에 드러내놓고 그녀를 배척하진 못했지만, 대다수 장로들은 그녀를 은근슬쩍 무시하고 따돌렸다. 휘하의 부하들도 그녀를 대하는 것을 어려워했다.

괜히 친하게 지냈다가 다른 장로들의 눈밖에 나면 이후의 교회생활 자체가 무척 힘들어 질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장만석은 차기 후계자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늙어가고 있었으니까.

그녀는 고립감을 느꼈고, 점점 외로워졌다.

하지만 외로움을 느낄 새도 없이 쉴 새 없이 일이 밀려왔다.

말이 쉽지 3년여간 매일 밤 침소에 처녀를 구해다 바치는 일은, 온갖 정성을 쏟아야 겨우 해낼 수 있는 일이었다. 아무리 구원회가 크다고 한들 처녀 1,000명은 너무나 많았다.

그때마다 그녀는 무리하다 싶을 만큼 전력을 다해 대상을 설득하고 회유하고 협박해서 밀어붙였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점점 마모되었고, 그 결과 신경쇠약 증상까지 얻고 말았다. 강한 의지와 정신력이 아니었다면, 이미 지쳐 쓰러지거나 돌아버렸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이런 점을 장만석이 배려하고 챙겼어야 했지만, 그는 그대로 점점 파괴되고 있었다.

남의 피를 매일 들이켜는 것이 몸에 좋을 리 없겠지만, 생각 이상으로 그는 빠르게 변해갔다.

중후하고 잘생겼던 그의 얼굴은 주름이 자글자글해 졌으며, 몸도 살이 점점 빠지면서 앙상한 가시처럼 말라갔다. 심지어 대단한 정력을 자랑하던 그의 대물마저 불어 터진 어묵처럼 흐물흐물해졌다.

신체적 변화뿐 아니라, 정신에도 약간의 문제가 생겼다.

그는 이따금 포악하고, 신경질적으로 굴었고 아랫사람들에게도 함부로 대했다. 치매를 겪는 노인처럼 뭔가를 금방 잊어버리기 일쑤고, 시간 개념도 점점 희박해져갔다.

종래에는 모르핀을 맞지 않으면, 혼자 일어서지도 못할 정도로 몸상태가 엉망이 되고 말았다.

혜진은 죽어가는 게 분명한 장만석을 여러 차례 말렸으나, 장만 석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역정을 내며 그녀를 나무랐기 때문에, 혜진도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그가 죽기전 버킷리스트를 완성하듯 그의 기행을 묵묵히 응원할 뿐이었다.

그런 그녀에게도 유일한 희망이 있다면, 장만석이 처음 공언했던 천명의 처녀가 거의 다 채워졌다는 사실이었다.

어젯밤으로 998명째.

이제 이틀만 더 지나면, 그의 버킷리스트도 완성이었다.

혜진은 어떻게든 그때까지만 버텨볼 생각이었다.

그 이상은, 도무지 자신이 없었다.

'참, 이상한 청년이야···. 앞선 정기사는 나랑 눈도 제대로 못마주 쳤는데, 친한 사이에도 하기 힘든 야한 농담을 스스럼 없이 하다니. 이걸 겁이 없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용기가 있다고 해야 하나?'

혜진은 운전을 하면서 혼자 열심히 떠들고 있는 도훈을 독특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이는 어린데, 하는 농담이나 말투를 들어보면 오히려 자기보다 더 나이가 많은 사람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부분이 혜진에게 매력으로 다가왔다.

장만석을 만나기 이전에도 그녀는 자기보다 나이 많은 사람을 이상형으로 여길 만큼 특이한 취향을 가졌던 것이다.

'안 그래도 우울했는데, 얘기를 할 때마다 너무 즐거워. 신기해. 이런 느낌은 너무 오랜만이라···.'

혜진은 마치 장만석을 미국에서 처음 만났을 때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당시의 장만석은 자신의 마음을 꿰뚫어 본 것처럼, 자신을 매번 놀라게 만들었다. 그러다 우연히 섹스를 하게 되고···.

'앗, 내가 지금 무슨 망측한 생각을. 처음 보는 애한테···.'

혜진은 자신이 운전기사인 도훈을 상대로 야한 생각을 했다는 것만으로 충격을 받았다.

이제껏 장만석을 제외하고 다른 남자랑 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녀가 원했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구원회내에서 그녀에게 들이댈 남자는 아무도 없었다.

"민용씨랑 얘기하니까 시간이 너무 잘가는 것 같네요."

"정말입니까? 저도 방금 딱 그생각했는데."

"정말요?"

"하하. 잠시 후 휴게소가 나오는데, 혹시 화장실 들르실 생각있으신가요?"

"아니요. ···아, 아니다. 들러요. 운전하느라 고생하시는데 제가 간식이라도 사드릴게요."

"간식이요? 괜찮습니다."

"이거 뇌물이니까 그냥 받아도 돼요,"

"뇌, 뇌물이라뇨?"

"농담이에요. 분당 갔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 왕복해서 바로 돌아와야 하기 때문에 많이 피곤하실 거예요. 커피라도 한 잔 사드릴게요."

"아···. 감사합니다."

혜진은 민용에게 호의를 베풀면서도 스스로도 조금은 어색함을 느꼈다.

'이상해. 이렇게까지 잘해줄 필요까진 없는데···. 근데 참 매력적인 아이구나. 얼굴은 평범한데, 몸은 되게 탄탄해. 게다가 아까부터 어딘가 좀···.'

혜진은 연유를 몰랐지만, 그의 패시브 스킬 개방이 미치는 효과가 상당했다. 온갖 버프가 걸린 도훈의 패시브 스킬은 전면 개방되었을 때, 대부분의 이성이 호감을 느낄만한 요소로 이루어졌다.

게다가 최근 내공 상승의 영향으로 스킬 효과까지 강화되어 일부 여자는 곧바로 사랑의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정도였다.

도훈이 고속도로 휴게소에 차를 대자 혜진이 차 문을 열었다.

"앗, 실장님 제가···."

"아니에요. 운전하느라 피곤하실 텐데 안에 있어요. 내가 금방 다녀올 테니."

혜진은 도훈을 만류하고 쪼르르 차에서 내리더니 고속도로 휴게소로 뛰어갔다. 그녀의 뒤태를 차안에 앉아 구경하며 도훈이 씩웃었다.

'몸매도 훌륭하군, 구혜진은.'

[거의 완벽한 여자 아닙니까? 서울대를 나올 정도의 머리에, 유학파에, 얼굴이며 몸매며···. 장만석의 꾐에 빠진 것이 안타까운 여자는 처음이군요.]

'그러니 개새끼란 거야. 장만석은.'

[주인님이랑 하등 다를 바가 없는 것 아닙니까?]

'내가 뭘?'

[주인님도 예쁜 여자만 보면 혼자서 독차지하려고 하잖습니까? 장만석도 똑같고요.]

'비슷하니까 더 싫어.'

[네?]

'세상에 나 같은 사람은 나 혼자면 충분하거든.'

[아니···.]

도훈이 잠시 차에서 내려 담배를 피우는데, 혜진이 한 손에 커피 트레이를 들고 돌아왔다. 도훈이 담배를 급히 비벼 끄려는데, 혜진이 말렸다.

"괜찮아요. 잠 깨려고 피우는 거죠? 다 피우고 출발해요."

"아까 급하시다고 해서."

"방금 시간 확인했는데, 생각보다 빨리 와서 아직 여유가 있는 것 같아요."

"그렇군요. 아무튼 감사합니다."

"뭘요."

도훈은 담배를 피우며 어떻게 하면 혜진을 공략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현재는 운전석과 뒷좌석으로 나뉘어 있기 때문에, 대화는 할 수 있지만 스킨십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말로만 하는 건 한계가 있는데···. 어떻게 하면 좋담?'

그때 혜진이 커피 트레이와 함께 들고 온 검은 봉지를 열어 보이며 말했다.

"혹시 몰라서 같이 먹을 간식도 좀 사왔어요."

"간식이요? 어떤 거예요?"

"음, 호두과자랑···. 맥반석 오징어 좋아해요? 이것도 같이 팔길래···."

도훈이 오징어를 보고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아, 제가 정말 좋아하는 간식이네요. 휴게소 들를 때마다 꼭 사먹는 건데."

"뭐요? 호두과자?"

"아뇨. 맥반석 오징어요."

"그렇구나."

"근데 문제가 좀 있네요."

"네?"

"아니 운전대 잡고 그걸 먹기가 좀···. 이게 제 차도 아니고 ···."

"아."

"옆에서 누가 먹여주면 먹을 수 있긴 한데···."

도훈이 은근슬쩍 혜진을 보조석으로 유도했다.

어쩌면 그것은 무척이나 시건방지고, 무례한 요구일수도 있었다.

혜진이 아무리 친절한 성격이라고 해도 엄연히 상급자.

더구나 구원회 12장로에 속할 정도로 최상위 권력자였다.

그런 그녀에게 감히 보조석에 앉아 맥반석 오징어나 뜯어 달라는 요구는 주제넘다 못 해 운전기사에서 잘릴 수도 있는 사유였다.

혜진도 순간 도훈의 요청을 듣고 당황했으나, 한편으로는 다른 생각도 들었다.

그와 고속도로 휴게소까지 달려오는 동안의 대화가 너무나 즐거웠기 때문에, 그의 옆에서 얘기를 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는 생각이었다.

게다가 혜진은 원래부터 성격이 아랫사람에게 막 대하고, 권력을 뽐내는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도훈의 무리한 요청에 크게 거부 감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간만에 자신을 겁내지 않고 편하게 대하는 도훈이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렇네요. 제가 그럼 앞자리에 앉을 게요."

"엇, 정말요? 실장님이요?"

"왜요? 오징어 다리 먹기 싫어요? 아님 핸들에 다 묻히고 먹을 거예요?"

"아, 아뇨. 너무 죄송해서···."

"피. 할 말 다해 놓고선, 갑자기 죄송한 척은."

"아닙니다."

"담배 다 태웠으면 출발해요. 이제 좀 빠듯해졌네요."

"넵.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도훈과 혜진은 이제 나란히 차를 타고 목적지로 다시 출발했다.

차를 몰고 고속도로 휴게소를 빠져나가려는데, 벨트 미착용 경고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응? 뭐지? 혹시 차에 문제있어요?"

혜진이 낯선 소리에 당황하는데, 도훈이 갑자기 차를 옆으로 멈추더니 혜진을 껴안 듯이 팔을 내밀었다.

"어, 엇!"

혜진은 지나치게 가깝게 접근하는 도훈을 보고 당황하며 어쩔 줄 몰랐다. 그러나 도훈은 보조석의 벨트를 주욱 잡아당겨 안전 벨트를 채워주었다.

"앞좌석엔 오랜만에 타보셨나봐요. 운전석과 보조석은 벨트를 안하면 방금처럼 경고음이 울리게 되어 있습니다."

"아···."

혜진이 겉으로는 태연한 척 고개를 끄덕였으나, 속으로는 심장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우연히 도훈과 가까이 마주한 순간, 참을 수 없는 강렬한 욕정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내가, 왜 이러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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