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7. 구원회-92-
* * *
"왜 자꾸 힐끔거려요?"
"···예, 예?"
"아니, 왜 자꾸 거울로 절 쳐다보시냐고요."
생각보다 눈치가 빠른 여자였다.
물론 티나게 쳐다보긴 했지만, 핸드폰에만 집중하는 줄 알았더니 은근히 내 행동을 신경 쓰고 있었던 모양이다.
일단 관심을 끄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문제는 그것이 단순히 새로 바뀐 운전기사가 불편해서인지 아니면 이성적인 호기심인지는 알 수 없었다.
만약 내가 평소의 모습이었다면 후자의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겠지만, 정황상 시선이 불편하다는 뜻으로 들렸다.
"저기, 정기사님에게 무슨 얘길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내가 딱히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편하게 대해주는 편이긴 하지만 그래도 무례한 건 못 참거든요. 사람을 몰래 힐끔거리는 건 매너가 아니지 않나요?"
"죄송합니다. 실은 너무 예쁘셔서···."
"뭐, 뭐라고요?"
나는 그녀의 외모를 칭찬했다.
아무리 장만석에게 오래 세뇌된 여자라도, 외모를 칭찬하는데 싫어할 여자는 없을거라는 생각에서였다.
동시에 평소 봉인해 둔, 온갖 패시브 페로몬을 풀로 개방했다.
외모는 평소보다 매력이 떨어졌지만, 이성을 끌리게 만드는 요소는 꼭 겉으로 보이는 외모만은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흐음. 운전에나 집중하세요. 초면에 별 소릴 참···."
구혜진이 쌀쌀맞게 말하긴 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느낌이 들었다.
'반응이 있군.'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니까요. 아부 전략을 쓰시는 겁니까?]
'실제로 예쁘니까 아부는 아니지. 조금만 더 푸시해 볼까?'
"진심입니다, 실장님. 처음 뵀을 때부터 눈을 떼지 못하겠더라고요. 제가 원래 어디 가서 이런 얘기하는 스타일은 아닌데···."
"참나. 말만 잘하시는데요?"
"아닙니다. 사실 지금도 엄청 심장이 떨립니다."
심장이 떨린다는 상투적인 표현에 혜진이 불쑥 질문을 던져왔다.
"민용씨 올해 몇 살이죠?"
"예?"
"나이가 어떻게 되느냐고요."
"스물 넷입니다."
"어쩐지. 어려보인다고 했더니. 나 서른이에요. 제가 한참 누나 뻘이라고요."
"저, 정말요?"
"왜요? 제가 실제보다 더 늙어 보여요?"
"아닙니다. 실은 저랑 동갑인 줄 알았습니다."
"푸흡-. 뭐래요, 진짜."
구혜진이 처음으로 웃음을 띄었다.
어이없다는 느낌의 웃음이었지만, 그래도 폰을 들여다보기를 멈추고 룸미러를 통해 나의 얼굴을 살피기 시작한 건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일단 흥미를 끄는 데까진 성공한 것 같다.
"정말로요. 진짜 저랑 비슷한 또랜 줄 알았어요."
"제가 장로 중에선 가장 어린 편이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20대 중반이랑 맞먹을 나이는 아니죠. 앞자리부터 다른데요."
"그래도, 정말 어려보이세요."
"운전병을 하셨다고요?"
거듭된 칭찬이 부담스러웠는지 혜진이 불쑥 화제를 바꿨다.
"네, 네. 군대에서 원스타 운전병이었습니다."
"원스타면 장군이요?"
"원래 노비 짓을 하더라도 대감댁에서 해야 한다잖아요. 장군님을 가까이서 모신 덕에 군 생활은 엄청 편하게 했습니다. 위관급 장교들도 저한테 잘 보이려고 잘해주더라고요."
"호오. 그랬구나. 근데 장군 운전병을 맡을 정도면 운전을 엄청 잘하시나봐요?"
"네, 제가 집안 사정이 어려워서 택시 기사 일을 하다가 군에 입대했거든요. 그래서 같이 후반기 교육받았던 동기 중에선 제가 제일 운전경력이 많았습니다."
"호오, 택시도 몰았어요? 엄청 일찍 시작한 거 아니에요?"
"원래부터 운전을 좋아해서 일찍 운전대를 잡았습니다. 저희 어머님이 늘 하시던 말씀이, 돌잡이 때 핸들이 있었으면 분명 그걸 잡았을 거라고."
"푸흡-. 원래 그렇게 말을 웃기게 잘해요?"
"제가 또 손님을 태우는 일을 했다 보니까, 처음 보는 사람들하고도 곧잘 말을 섞었거든요. 일종의 직업병이랄까?"
"그렇구나. 듣고 나니 이해가 되네요. 근데 운전이 뭐가 그렇게 재밌어요? 나는 10년째 장롱면헌데."
물론 난 운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겨워하는 쪽에 가깝다. 하지만 강화된 신체 능력은 완벽에 가까운 컨트롤로 차를 몰고 있었다.
스무스한 브레이크 타이밍, 부드러운 코너링 정도는 의식하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해내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차가 워낙 좋은 차였기 때문에, 밟으면 밟는 대로 쭉쭉 치고 나갔다.
"이상하게 저는 어려서부터 운전이 재밌더라고요. 그래서 원래 꿈도 카레이서였습니다."
"카레이서요? 한국에도 그런 게 있어요?"
"네, 당연히 있죠. 아직 세계적인 수준에는 못 미치지만요···."
"그렇구나."
"혹시 실장님은 원래 꿈이 뭐셨어요?"
조금 주제넘은 질문이었지만, 구혜진이 허용적이란 걸 깨닫고 일부러 화제를 넘겼다. 왜인지 모르지만 혜진은 나와 대화하는 걸 즐거워하는 느낌이었다.
"전 간호사요."
"엇, 정말로요?"
"실제로 간호사 생활도 잠시 했었어요."
"어느 병원에서요?"
"음, 국내는 아니고···. 미국에 있을 때?"
"미국에 계셨었어요? 설마 한국 국적이 아닌 건···."
"그건 아니에요. 한국에 있다 유학을 갔죠. 암튼, 민용씨 나이 때는 미국에서 한참 공부하고 있었을 거예요."
"대단하시네요! 영어도 엄청 잘 하시나보다!"
"그냥 의사소통이나 겨우 할 정도죠."
[구혜진이 주인님 말 빨에 술술 넘어오는 군요. 역시 치명적인 바람둥이다운 화술입니다.]
'그게 아닌 것 같아.'
[그게 아니라고요? 이 정도면 대화가 엄청 잘 통하는 것 같은데요?]
'어쩌면 구혜진은 굉장히 심심했던 게 아닐까?'
[심심하다뇨?]
'어린 나이에 일찍 높은 자리에 오른다는 건, 무조건 좋은 일만은 아니야. 그만큼 맡은 책임이 커진다는 소리기도 하니까.
아마도 혜진은 평소에 업무 스트레스가 극심했던 것 같아. 근데 주변에 대화를 나눌 또래라곤 거의 없고, 다들 한참 나이 차 나는 장로들 뿐이니 대화할 사람이 거의 없었을 거 아니야. 높은 자리에서 오는 고독감을 홀로 견딘 셈이지. 보통 사람들은 나이가 비슷해도 자기보다 한참 직급 높은 사람에겐 말을 편하게 못 하니까.'
[아하. 그리고 주인님은 그런 걸 전혀 괘념치 않으시고요.]
'맞아. 게다가 내가 내뿜는 페로몬 효과도 어느정도 영향이 있는 것 같아.'
[역시 패시브 효과가 크네요.]
'밀폐된 공간에선 후각이 가장 강렬한 자극인 법이지.'
"그럼 쭉 미국에 계시다가 한국으로 넘어오신 거예요?"
"그렇다고 봐야죠."
"대단하세요. 실은 사수분에게 대충은 들었거든요."
"뭘요? 저에 대해서요?"
"장로님, 아니 실장님이 저희 구원회에서 최연소에 장로에 오르신 인텔리시라고."
"아니, 그건···."
"저도 장로님처럼 얼른 위로 올라가고 싶어요. 저는 언제쯤 집사가 될 수 있을까요?"
"왜 올라가고 싶은데요?"
"그야···."
나는 이쯤에서 살짝 19금으로 주제를 틀어볼 생각이었다.
과연 그녀가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지만, 구원회에 있는 간부급여자들 성향으로 볼 때 섹스를 싫어하는 여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오히려 그런쪽으론 다른 집단보다 훨씬 개방적이고, 자유롭다고 볼 수 있었다. 그말인즉슨, 변태에 대한 포용력도 충분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계급이 높아지면 구원회 내에서 예쁜 여자들하고 실컷···.
아, 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소리를···."
혜진은 너무 솔직한 나의 대답에 살짝 놀란 눈치였지만, 괜히 분위기가 어색해질까봐 자연스럽게 받아주었다.
"아니에요. 남자라면 당연히 그런 로망이 있어야죠. 충분히 이해해요. 나 그렇게 보수적인 타입은 아니라서."
"아···. 그러시구나."
"뭐, 그리고 그 나이 때는 솔직히 한창이잖아요. 안 그래요?"
나는 '한창'이라고 말하는 혜진의 어투에서 독특한 뉘앙스를 느꼈다.
아쉬움? 아니면 질투?
뭔가 설명하기 복잡한 감정이 담긴 단어였다.
'흐음, 확실히 구혜진은 장만석에게 서운함을 가지고 있군.'
[네? 어떻게 아십니까?]
'아마도 장만석이 자신을 안 건드리는 이유가, 늙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
[근데 그녀가 장만석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미 환갑이 넘은 나이 아니었습니까?]
'원래 그 나이 때는 1년, 1년이 다른 법이거든. 게다가 정보창설명에 따르면 장만석은 가스라이팅으로 그녀의 네토 성향을 개발한 뒤, 다른 여자랑 하는 장면만 훔쳐보게 강요했잖아.'
[그건 확실히 충격이었습니다. 저런 미인을 두고···. 어찌 그런 짓을···.]
'네토 성향을 가진 여자라는 게 좀 특이하긴 하지만, 아예 없는 것도 아닐 거야. 남자도 그렇지만, 여자도 자기 남자가 다른 여자랑 붙어 먹고 있는 걸 보면 눈에 불꽃이 튈 정도로 질투하기 마련이니.'
[그렇겠죠.]
'하지만 이미 네토 성향이 정착된 혜진은 오직 그것만으로 대리 만족을 하고 있을 거야.'
[대리만족이라뇨?]
'장만석이 다른 여자를 따먹는 모습을 훔쳐보면서 자위를 하는 것으로 성욕을 풀고 있다고.'
[정말요? 저런 미인이요?]
'왜? 미인은 성욕이 없나? 자위도 안 해?'
[아니, 자위를 할 이유가 없잖···. 아! 장목사의 여자라서 아무도 못 건드리는 군요!]
'맞아. 그게 가장 큰 문제야. 혜진은 공인된 장목사의 애첩이지. 미국에서 간호사로 있던 그녀를, 한국까지 데려와 측근으로 부리면서 장로 자리까지 앉혀놓았으니까.'
[그랬죠.]
'그런 그녀를 장목사 본인이 아니고서야 누가 감히 건드릴 수 있겠어? 교주의 애첩을.'
[미치지 않고서는···. 아, 그런데 장목사가 혜진을 방치하고 있군요.]
'맞아. 네토 성향을 충족시키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처녀랑 하는 것 때문에 기력이 달려서 인지는 몰라도 혜진은 장목사와 거의 섹스리스 상태인 것으로 보여.'
[그럼 혼자 자위만 하는 게 성욕해소의 전부일 거라고요?]
'아마도. 그리고 앞서 말한대로 혜진은 그 이유가 장목사가 나이가 들어서 기력이 달려서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그러니 내가 어리다는 점을 콕 찝어서 말한 거야. 그게 진심으로 부럽다는 거지.'
[호오, 그럼 구혜진을 공략할 틈이 보이는 거 아닙니까?]
'세뇌가 너무 강해서 힘들 것 같았는데, 균열이 약간 보이는 것 같긴 해. 한 번 더 딥하게 들어가 봐야겠어.'
[딥하게요?]
"예? 한창이라뇨?"
"아니···. 뭐. 아직 어리니까."
"아아, 그 말씀이군요. 혹시 이 이야기 들어 보셨어요?"
나는 운전대를 왼손으로 잡으며 운전석과 보조석 가운데 틈으로 오른손을 활짝 폈다.
"뭔데요?"
내 손가락은 보조석 쪽을 향해 펼쳐져 있었다.
"이게 남자 나이에 따른 각도래요."
"각도?"
처음 듣는 얘기였는지, 혜진이 부쩍 흥미를 보였다.
"엄지가 위로 발딱 서 있잖아요."
"네."
"이건 10대."
"10대?"
"그리고 45도 각도로 뻗은 검지는 20대."
"아, 설마 지금···."
"맞아요. 순서대로 30대, 40대, 50대죠. 50대는 아예 밑으로 쭉 쳐져있죠? 제대로 세우지도 못한다는 거죠."
"아니···. 그럼 60대는···."
"없어요."
"네?"
"꼴리지도 않나보죠. 하하하!"
나는 이미 장만석이 환갑을 넘었다는 사실을 알고 일부러 도발한 것이었다.
구혜진 너의 기둥서방은 이제, 늙어서 꼴리지도 못한다고.
"참나···. 초면에 너무 야한 농담 아닌가?"
"네, 네?"
갑자기 잘 받아주던 구혜진이 정색하자 나도 모르게 당황하고 말았다.
아슬아슬 줄타기를 잘 해왔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내가 선을 넘어버린 걸까?
"내가 나이가 어려도 구원회 장로라는 건 알죠? 12명밖에 없는 12장로 중 하나라는 거요."
"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혜진이 갑자기 활짝 웃더니 내 검지 손가락을 감싸쥐었다.
"더 해봐요."
"예, 예?"
"재밌어서 그래요. 이런 농담은 어디서 배운 거예요? 택시 기사 일할 때?"
"아···."
알고 보니 혜진이 나에게 장난을 친 것이었다.
[혜진양 성격이 엄청 밝고 쾌활하군요.]
'그러게. 의왼데? 난 진짜 정색 빠는 줄.'
[주인님에게 확실히 호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야한 농담을 즐기는 여자라니···. 분당까지 가는 길이 심심하진 않겠는데.' 그때 내 검지를 손바닥으로 감싸 쥔 혜진이 오토바이 핸들을 돌리듯 손을 앞뒤로 돌리며 말했다.
"그럼 민용씨는 20대니까, 이 각도라는 건가?"
"아, 저요? 저는 몸이 동안이라서요."
"몸이 동안은 또 뭐예요?"
"그러니까, 엄지 손가락에 가깝다는 거죠. 얼굴은 늙었는데, 몸은 아직 10대 같아서."
"꺄하하하! 발딱 선다고요?"
"그죠."
"푸흡!"
구혜진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웃으니 황홀할 정도로 미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