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1. 구원회-76-
"야, 어쩌려고 그런 말을 해?"
"맞아. 이 시간에 여자 합숙소를 무슨 수로 들어온다고?"
"그냥 하는 말이지. 얼마나 간절한지는 확인해야 하니까."
도훈은 바로 옆에서 그들의 대화를 엿들으며 답장을 남겼다.
-이도훈 : 지금요? 합숙소 사시는 거 아니세요?
-박하연 : 맞는데? 왜요?
-이도훈 : 아니. 지금은 통금시간 이잖아요? 제가 여자 합숙소에 들어갈 방법도 없고요.
"꺄하하. 얘 엄청 진지한데?"
"그러게. 농담이었는데 이렇게 반응하니까 더 놀리고 싶어 지잖아?"
"한번 알려줘봐."
"뭘?"
"개구멍."
"응?"
여사감 셋은 서로를 쳐다보며 키득거렸다.
'개구멍'이란 사실 사감들만 알고 있는 지하실 쪽문을 뜻했다.
이는 여사감들에게만 전해내려오는 비밀 통로로, 역대 소장들도 매번 시설 점검때도 발견하지 못하는 장소였다. 지하층 보일러실에서 지상으로 통하는 비상출입구가 있는데, 아주 급한일이 있을 땐 그곳을 통해 밖으로 드나들 수 있었던 것.
"진짜로 개구멍을 알려주려고?"
"뭐 어때 어차피 남신도인데."
"아니 근데, 민용이라는 얘도 점호 받았다는 걸 보면 어차피 남자 합숙소 살텐데 밖으로 나올 수 있을까?"
"그거야 본인이 해결할 일이지. 남자 사감들한테 들어보니까, 걔들도 비밀 출입구가 있다고는 하던데."
의기투합한 세 사람이 다시 문자를 보냈다.
-박하연 : 방법을 알려주면 진짜로 올 거예요?
-이도훈 : 방법이 있어요?
-박하연 : 의지만 충만하다면 충분히 가능해요. 하지만 그 쪽이 그만큼 절실한지 모르겠네.
-이도훈 : 오늘 당장 뵈러 안 가면 신고하신다면서요. 승아가 오늘 불려갔는데, 혹시 저 때문인가 해서요.
도훈은 승아가 외박한 이유가, 아마도 자신이 쓰러졌을 때 보건 시설에서 보였던 행동 때문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저들은 아직 승아의 외박사유를 모르니, 걱정하는 척 둘러댄 것이었다.
"어? 승아가 불려갔다고?"
"혹시 그것 때문에 오늘 갑자기 외박한 거야?"
"본부에서 차출한 거 아니었어? 혹시 누가 찔렀니?"
"난 아닌데?"
"나도 아니야. 우리끼리 비밀로 묻기로 했잖아."
"이상하네. 암튼 민용이라는 애가 안달내는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구나. 승아가 갑자기 본부 차출로 끌려가서 연락이 안 되니까."
"그런가봐. 우리 이걸 이용하면 진짜로 오늘 방으로 부를 수 있겠는데?"
"정말로 부르려고?"
"왜? 정미 넌 막상 부른다고 하니까 겁나니?"
"내, 내가 뭘 겁난다고. 그게 아니라 남신도를 밤늦게 여자 합숙소에 몰래 들였다가 마녀한테 걸리기라도 하면···."
일행 중 가장 발언력이 세 보이는 수빈이 정미를 구슬렸다.
"쫄지마 이년아. 우리가 사감이야. 누가 우릴 감시한다고 그래? 우리가 감시잔데."
"그, 그런가?"
합숙소내에서 사감은 매우 독단적인 권력을 가진 존재였다.
체계상 집사가 합숙소를 관리하는 소장 역할을 맡고 있지만, 실제로는 16명에 이르는 소수의 사감들이 1000명이 넘는 인원들의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 이유는 사감의 눈밖에 나면, 무슨 꼬투리를 잡아서라도 합숙소에서 내쫓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완장을 찬 사감들의 횡포는 대단했으며, 어렵게 사감이 된 신도 역시 자신의 특권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반입 금지된 술을 몰래 마시고, 밤늦게 멋대로 떠드는 것도 사감에게만 허용된 자유였다.
이들은 겉으로 보이는 숙소의 사이즈보다 훨씬 큰 특권을 누렸던 것이다.
"흐흐, 어차피 임 집사님 이 시간이면 당직실에서 퍼 자는 거 다 알잖아. 내 방은 너네 두 사람 방 사이에 끼어 있으니까, 설사 누가 와도 옆방으로 소리가 새어나갈 일도 없고."
"그, 그렇긴 한데···.."
소소한 비행은 서슴없이 저지르던 세 사람이었지만, 막상 금남의 구역에 남신도를 몰래 불러들인다고 하니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만약 걸리기라도 하는 날에는 강등이 아니라, 탈회까지 가능한 사안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미 알량한 권력에 취하고 살짝 술에도 취한 수호천사들은 욕망을 막을 수 없었다. 특히나 오늘 목욕탕에서 도훈의 먹음직(?) 스러운 대물을 이미 두 눈으로 본터라 유독 당겼다.
"일단 말이나 꺼내보자. 어차피 안돼도 우리가 손해 볼 건 없으니까."
"맞아. 시도해보고 안되면 마는 거지 하기도 전에 쫄 필욘 없다고 봐."
"그, 그래."
중지를 모은 세 사람이 다시 도훈에게 문자를 남겼다.
-박하연 : 합숙소 뒤편 지하 보일러실로 통하는 쪽문이 있어요.
거기 문 열어 놓을테니 할 수 있으면 들어와 보시든가. 8층 823호예요.
도훈은 이미 문자를 보내기 전부터 세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었기 때문에 곧바로 대답했다.
-이도훈 : 제가 오늘 거기로 가면 승아는 별 일 없는거죠?
-박하연 : 당연하죠. 저흴 믿어보세요. 어차피 그쪽이 여기 들어오면 다같은 공범인데, 설마 우리가 같이 자폭할리가 없잖아요?
"와, 얘 승아랑 엄청 진지한 사이였나본데? 태도를 봐서는 단순히 섹파 정도가 아닌데?"
"찐사랑이네 찐사랑. 여자친구를 지키기 위해 목숨 건 합숙소탈출을 감행하다니!"
"괜히 질투나는데? 확 우리가 뺏어 버려?"
"흐흐. 못 됐단 말이야? 주님께서 그러셨잖아. 네 이웃의 연인을 탐하지 말라고."
"뭐래? 교주님께선 세상 모두를 온몸으로 사랑하라고도 하셨지. 그리고 솔직히 이렇게까진 안하려고 했는데, 승아만 몰래 재미 보고 있었다니까 괜히 샘나잖아."
"맞아. 승아가 나빴어. 같이 승급한 동기들은 합숙소 사감하느라 맨날 고생하는데 자기만 몰래 섹파 만들어 즐기고 있고 말이야."
"그니까. 성기사단이라도 한 놈 새끼 쳐 줬으면 우리가 이렇게까진 안했지. 양 권사님 밑에서 일하면서 소개도 한 명 안시켜주고."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세 사람에게 도훈이 문자를 남겼다.
-이도훈 : 제가 10분 안에 가보겠습니다. 미리 문만 열어주세요.
-박하연 : 그렇게 빨리요? 남자 합숙소에서 나올 수는 있어요?
-이도훈 : 네. 저희도 밖으로 통하는 탈출로가 있거든요. 같이 있는 성기사단 형님이 알려주셨어요.
"와, 남자 합숙소도 개구멍이 있구나."
"성기사단 출신 사감들 몇명 있잖아. 걔들이 후배들한테만 알려줬나 보네."
"10분 뒤면 지금 바로 보일러실 문 열어줘야하는 거 아니야?"
"내가 다녀올게. 어차피 1층 한 번 점검하려고 했어."
"응. 수빈이 네가 다녀와."
도훈은 수빈이라는 여사감이 나가는 틈을 타 함께 방을 빠져나왔다.
덩치가 큰 그가 성큼성큼 걷는데도 음소거를 한 것처럼 발소리 하나 나지 않았다.
이는 그가 내공을 이용해 기척을 완전히 죽였기 때문이었다.
강화된 내공은 일신의 무공 수위를 전부 끌어 올렸고, 그의 보법 또한 훨씬 고강해진 상태였다.
도훈은 수빈을 따라 엘리베이터로 1층까지 이동한 뒤 지하의 보일러실로 향하는 계단을 타고 쭉 따라갔다. 어둠 속을 걷느라 겁이 나는지 수빈은 혼자 소리내어 중얼거렸다.
"어휴, 내가 미쳤지. 오늘 좀 당기긴 했는데, 이런 짓까지 벌일줄이야. 걸리면 진짜 짤릴각이다, 각."
보일러실에 도착한 수빈이 지상으로 통하는 철문의 자물쇠를 풀었다.
원래 시설물 키는 소장실에서 보관하고 있지만, 몇년 전 용감한 여사감 한명이 열쇠를 몰래 빼돌려 복제했고 그것이 소수의 사감들에게만 전수되고 있는 것이었다.
이는 여사감들 사이에 '개구멍'이라 불리며 철저하게 비밀에 붙여졌다.
철컥열쇠를 연 수빈이 다시 중얼거렸다.
"에이 모르겠다. 될대로 되겠지 뭐."
수빈이 으슬으슬 추위를 느끼는지 몸을 떨며 돌아서는데 불쑥 철문이 열리며 도훈이 튀어나왔다.
"꺄악!"
"허, 헉! 누, 누구세요? 아, 수빈씨 구나. 맞죠?"
설마 자물쇠를 풀자마자 도훈이 바로 들이닥칠 줄 몰랐던 수빈이 놀라서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지고 말았다. 보일러실까지 그녀를 뒤따라온 도훈은 순식간에 옷을 갈아입고 밖에서 문을 열고 들어온 것처럼 연기를 했던 것이다.
"어떻게 벌써 왔어요? 방금 문 열었는데."
"창문에서 뛰어내려서 바로 오니까 은근히 가깝더라고요."
"까, 깜짝 놀랐잖아요. 귀신이라도 튀어나온 줄."
도훈이 손을 내밀어 수빈을 일으켰다.
겁나긴 했지만, 막상 도훈이 도착하자 수빈은 너무나 신기한 기분이었다.
'얘도 절대 정상은 아니구나. 어떻게 여길 기어들어올 생각을 했지? 그만큼 절실했다는 걸까?'
"근데 남자 합숙소도 개구멍이 있어요?"
"네?"
"아니 우린 여길 개구멍이라고 부르거든요."
"아, 저희는 2층 창문으로 뛰어 내립니다."
"뛰어내린다고요? 어떻게요? 쇠창살로 막혀 있지 않아요?"
"쇠창살 하나가 풀려 있어요. 그리고 밑에는 버린 침대 매트리 스를 받쳐놔서 뛰어내려도 안 다치게 되어 있고요."
"그렇구나. 전혀 몰랐어요."
"저도 몰랐어요. 여자 합숙소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있다는건."
"히히. 왜요? 다음에 또 애용하려고요? 승아 만나러?"
"아, 아뇨."
도훈이 당황한 척 고개를 가로 저었다.
"여기 열쇠는 사감들만 가지고 있어요. 열쇠 없이는 열 수 없고요."
"사감이요? 여자 합숙소 사감이셨어요?"
"몰랐어요? 아까 같이 목욕탕 간 동기들도 다 사감인데."
"그렇구나. 전혀 몰랐어요."
"수호천사부터 사감을 지원할 수 있어요. 우리도 마침 사감 자리가 비어서 지원했고요. 성기사단에도 사감 있지 않아요?"
"네. 저희 선배님도 남자 합숙소 사감입니다. 근데 진짜 예상도 못 했어요. 사감이실줄은."
"왜요? 갑자기 사감이라니까 쫄려요? 불알이 오그라든건 아니죠?"
수빈이 씩 웃더니 바지 위에서 도훈의 양물을 콱 움켜쥐었다.
도훈은 어쩔 줄 몰라하며 수빈의 손을 치우지 못했다.
이는 무척 상징적인 장면이었는데, 수빈은 나름대로 누가 갑인지를 확실하게 보여주려는 의도였고 도훈 역시 꼼짝없이 그들의 노리개가 된다는 것을 인정하는 모습이었다.
'오우, 묵직한 거 봐. 발기가 안돼도 이렇게 클 수가 있나?'
수빈이 만족스럽게 웃고 있는데, 잦이를 붙잡힌 도훈은 어쩔 줄 몰라하며 난처해 할 뿐이었다.
[캬, 연기력이 일품입니다, 주인님.]
'갑질하고 싶다는데 갑질하게 해드려야지.'
[정말로 저들의 패악질을 감당하시려고요? 주인님을 노리개로 쓴다는 데도요?]
'처음엔 누구나 그럴듯한 계획을 가지고 있지. 대물에 처박히기 전까지는.'
[오오, 역시 자신감.]
"저 어, 언제까지 잡고 계실건지."
"왜? 이제 우리 한 배를 타기로 한 몸 아니었어?"
"예?"
"승아···. 합숙소에서 잘려도 괜찮은 거야?"
[와, 치졸하게 승아양을 붙들고 늘어지는군요.]
'저년들은 이미 승아를 볼모로 나를 협박하기로 마음 먹었거든.
일부러 그러라고 흘리기도 했고.'
[한마디로 주인님 작전에 놀아나는 건가요?]
'그렇지. 지들이 아무리 날고 기어봤자 부처님 손바닥이지.'
"그건 아니지만."
"그럼 감당해. 우린 지금 너희 둘 때문에 굉장한 위험을 감수하는 거야.그러니 너도 그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해야지."
"아, 알겠습니다."
"풉-. 몇살이야? 비슷한 또래 같은데 말 놓을래?"
"혹시 몇살이신데요?"
"응. 우린 스물 네살이야. 아까 번호 주고 받은 하연이만 한 살 어린데 그냥 친구로 지내고 있고."
"저도 스물 넷입니다."
"에이, 그럼 말 놓자. 어차피 친군데."
"그, 그래도 될까요?"
"너도 성기사단이잖아. 우린 수호천사고. 같은 계급에 같은 나이인데 딱히 문제될 거 있어?"
"없습니다."
"그럼 말 놓는다?"
"으, 응. 그리고 놓는 김에 이것도."
도훈이 다시 수빈의 손을 가리켰다.
여전히 수빈은 도훈의 양물을 바지 위에서 콱 붙잡고 있었다.
"아차차. 미안. 아팠어?"
"아니 아픈건 아닌데 민망해서."
"풉-. 민망할 것도 많네. 어차피 목욕탕에서 서로 다 깐 사이에. 너도 내 몸 실컷 구경 했잖아."
"실컷은 아니고···."
"그래서 안 봤어?"
"아니, 보긴 봤는데···."
"히히. 너 은근히 부끄러움도 많네. 아까 승아랑 둘이 떡칠 때는 막 짐승처럼 들이밀더니."
"내가 좀 낯을 가려서."
"알았어. 여기서 이럴때가 아니라 얼른 8층으로 올라가자. 애들 기다리고 있어."
"어떻게 올라가? 엘리베이터는 위험할 것 같은데."
"계단으로 올라가야지. 내가 먼저 올라갈테니까 뒤 따라와. 혹시 누가 계단에 있으면 내가 일부러 말 걸테니까 잘 숨고."
"후우-."
"쫄지마. 남자 합숙소는 몰라도 여자 합숙소는 야간 점호 끝나면 대부분 자고 있으니까."
"응."
도훈은 수빈을 따라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