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5. 구원회-70-
도훈은 발소리를 죽인 채 병동을 빠져나갔다.
그가 쓰러져 있는 동안 시간이 경과 하면서 어느새 늦은 저녁이 되는 바람에, 주변은 어두워졌고 건물 안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도훈은 일단 자신이 어디에 있으며, 무슨 상황인지부터 파악해야 했다.
'로시, 혹시 여기가 어딘 줄 알겠어?'
[주인님이 들것에 실려 오실 때 미리 동선을 파악했습니다. 현위치는 교회 동 전체로 볼 때 본관 옆에 붙은 부속 건물입니다. 5층 정도의 높이였습니다.]
'5층 건물?'
마침 계단이 등장하자 도훈이 환자복을 입은 상태로 따라 올라갔다. 마지막 층에 다다르자, 옥상으로 통하는 문이 개방되어 있었다.
'문이 열려 있군.'
도훈이 옥상으로 나갔다.
늦은 가을 밤의 날씨는 제법 쌀쌀한 편이었으나, 얇은 환자복만 입은 도훈은 추위를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무공을 익힌 이후로 체온 조절이 용이한 편이긴 했으나 아예 한기조차 느껴지지 않는 것은 처음이었다.
'확실히 몸이 달라진 느낌이군. 건물 밖이랑 안이랑 온도 차를 거의 못 느낄 정도야. 아님 그만큼 빠르게 환경에 적응한다는 건가?'
[아무래도 주인님의 몸 상태에 대한 정밀 점검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한 번 스캔해봐. 그리고 휴게시설인가 본데?'
건물의 옥상은 바닥엔 인조 잔디가 깔려있고, 군데군데 6인용 테이블과 의자가 배치되어 있었다. 흡연실 용도로 별도의 부스까지 만들어 놓은 것을 보니 옥외에 설치된 테라스인 것 같았다.
도훈이 흡연 부스 의자에 앉아 허공에서 담배를 꺼냈다. 죽다 살아나서 가장 먼저 한다는 짓이 옥상에 올라와 담배를 피우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자신도 모르게 쓴웃음이 났다.
'젠장. 중독은 확실히 중독인가 보네.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게 담배라니.'
[담배라면 얼마든지 피우십시오.]
'갑자기 왜 그래? 말리진 않았어도 담배 피우는 걸 그리 좋아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이번 사태를 겪으면서 저도 많은 후회를 했거든요.]
'후회라니?'
[주인님이 언제 어떻게 불귀의 객이 될지도 모르는데, 살아있는 동안 하고 싶은 건 실컷 하게 두는 게 맞는 것 같다고요.]
'풉-. 무슨 사람처럼 말하고 있어. 인공지능도 후회를 하나?'
도훈이 피식 웃으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여느 때처럼 기를 응축해 손가락 끝에 불꽃을 일으키는데 갑자기 푸른색의 불꽃이 일렁이더니 단검처럼 쑥 뿜어져 올라오는 것이었다.
"우앗!"
화들짝 놀란 도훈이 가까스로 불꽃을 피했지만, 머리카락이 살짝 탔는지 퀴퀴한 탄내가 코를 찔렀다.
하마터면 되살아나자마자 얼굴을 익힐(?)뻔한 도훈이 담배를 입에서 떨어뜨리며 놀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뭐, 뭐야 씨발. 토치 쏘는 줄 알았네? 이거 왜 이래? 몸이 아직도 고장인가?"
[그게 아닙니다. 주인님의 내공이 비약적으로 증가하면서 무공의 위력 또한 덩달아 강해졌기 때문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종전과 같은 정도로 내력을 사용하실 경우 어마어마한 내공이 분출되는 것 같습니다.]
'헐, 가만. 그럼 이게 늘어난 내공 탓이라고?'
도훈은 가스 밸브를 줄이는 것처럼 내공을 조금씩 줄여가며 불꽃을 다시 피워 올렸다.
한참 조였다고 생각했는데도 종전처럼 촛불 크기로 줄이기가 쉽지 않았다. 늘어난 내공의 양을 쉽게 가늠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겨우 담배에 불을 붙인 도훈은 불꽃이 닿은 담배 부위가 산화되듯 증발해 버리는 것을 보고 기가 막혔다.
'뭐지? 어째 불꽃심의 온도가 이전보다 훨씬 올라간 느낌인데?'
통상 빨간 불꽃이 600도, 노란불이 1100도, 파란불이 1400도 이상에서 발현된다고 할 때 불꽃의 크기도 그렇지만, 온도 또한 두 배 이상 상승한 것으로 보였다.
도훈은 이러한 기이한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했다.
'분명 나는 죽을 뻔했어. 추정컨대 성수가 독극물처럼 작용해서 전신에 기혈을 흩트려놓은 것 같아. 그 와중에 성욕까지 들끓어 무리하게 힘을 썼으니 훨씬 빨리 독이 전신으로 퍼졌겠지.'
도훈은 계속 생각을 이어갔다.
'내가 쓰러진 건 쉽게 말하면 음독 증상이었어. 단전에 쌓아있던 내공까지 모두 오염되면서 주화입마가 벌어진 거지. 그런데 그 와중에 뭔가 알 수 없는 작용이 일어난 것 같아. 그게 날 다시 살렸고. 대체 무엇일까?'
도훈은 일전에도 한 번 주화입마를 겪은 적이 있었다. 정확히는 산속 암자에서 희원 보살과 정을 나누다가 기가 빨리기 시작했고, 그대로 복상사할 뻔한 위기에서 쌍둥이 고승 혜공과 혜민의 도움으로 내공을 전수받아 살아남았던 것.
그들에게 받은 진신내력은 도훈의 내공을 이루는 근간이 되었고, 그 위에 음양보합술로 얻은 내공이 켜켜이 쌓여가며 지금에 이르게 된 것이었다.
'만약 두 스님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희대의 명기였던 희원 보살에게 잡아 먹혔을지도 모르지. 그러고 보면 이번에도 비슷한 상황이구나. 미숙은 희원 보살보다 배는 뛰어난 옹녀야. 100년에 한 번 나올까말까 한 타고난 옹녀. 그런 옹녀에게 겁도 없이 덤비다가 이 사달이 나버린 거지. 하지만 저번처럼 외부의 조력도 없었는데 어떻게 심마를 벗어날 수 있었을까?'
도훈은 담배를 피우며 계속 꼬리에 꼬리를 물고 추리를 전개했다.
다행히 과거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기 때문에 비교할 케이스가 있는 것이 도움이 되었다.
'음독으로 인해 내공이 흐트러졌고, 도저히 자력으로 극복할 수 없는 상태였어. 근데, 어느 순간 몸속에 내공이···. 가만 설마 이거 음양보합술인가?'
퍼뜩 떠오른 아이디어에 도훈이 계속 생각을 확장시켰다.
'그렇구나! 과거에 두 분 스님에게 내공을 전수받을 땐 별도의 내공 심법을 익히지 못했어. 음양보합술은 희원 보살을 공략한 후 미망인을 공략하라 미션을 클리어한 보상으로 받은 거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나에게 음양보합술이 있었지. 그리고 음양보합술은 ···.'
[설마! 미숙의 음기를 주인님의 내공으로 전환하신 겁니까?]
'맞네! 이제 알겠다. 미숙에게 받은 음기가 전환되며 그때 스님이 나에게 전수했던 외부의 내력처럼 작용한 거야!'
[대체 미숙의 음기가 얼마나 거대했길래···. 이런 어마어마한 공력이···.]
'도저히 믿을 수 없군. 플레이어도 아닌 일개 개인의 음기가 이만큼 거대할 수 있나? 대체 내 내공이 얼마나 늘어난 거지? 스캔은 아직이야? 일부러 집중하라고 말도 안 걸고 있었는데.'
[거의 끝나갑니다. 잠시만···. 이제 다 되었습니다.]
'말해봐.'
[와, 이건 정말 놀라운 결과군요!]
로시가 호들갑을 떨었다.
'아니, 말을 해줘야 나도 같이 놀라지.'
[주인님의 내공이 3배 이상 뻥튀기되었습니다.]
'뭐라고? 3배라고? 갑자기?'
[저도 이 부분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아니. 대체 미숙의 음기가 얼마나 크길래 이 정도까지 내공을 흡수한 거야?'
[어쩌면 제 추측인데 이럴 가능성도 있습니다.]
'뭔데?'
[주인님의 몸에 쌓인 내공은 온전히 주인님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지. 고명한 스님의 진신내력을 우연한 계기로 물려받은 거니까.'
[본래 타인에게서 전승받은 내력을 자신의 것으로 온전히 소화시키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게다가 음양보합술의 특성상음기를 양기로 전환하면서 축기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단전의 내 공은 더더욱 혼탁해질 수밖에 없고요.]
'내공이 혼탁해지다니?'
[내공은 그 종류도 다양하고, 수련 방법도 백인 백색입니다. 하지만 대체로 정의하길 정파의 내공은 느리지만 단단하게 쌓이며, 사파의 내공은 빠르지만 위태롭게 쌓입니다. 주인님의 경우 정파의 정순한 내공 위에 사파 계열인 색공으로 내공을 더했기 때문에 매우 불순한 성질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웃기는 짬뽕이었다는 소린가?'
[웃기진 않지만 짬뽕 비유는 적절합니다.]
'근데 그게 뭐? 내공을 쓰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잖아?'
[그렇죠. 불순한 내공을 비효율적인 출력으로 꺼내 쓰는데도 충분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죠. 하지만 이번에 새롭게 유입된 미숙의 음기는 다른 의미에서 무척 정순한 내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음기가 정순해? 그게 말이야 방구야? 처녀 빗치같은 형용모순아니냐?'
[양이든 음이든 극단에 이르면 결국 똑같은 것입니다. 아무튼 순수한 음의 기운이 물밀듯 밀려들어 오면서 주인님이 본래 가지고 있던 내공과 뒤죽박죽 되며 뒤섞인 것입니다.]
'뒤죽박죽? 그럼 짬뽕도 아니고 이젠 음식물 쓰레기 수준이라는 거잖아?'
[아닙니다. 물론 그럴뻔도 했지만 주인님이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심마를 이겨냈고 그 순간 완전한 내공의 통일을 이루게 된 것 같습니다 일종의 핵융합 반응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성질이 전혀 다른 내공이 융합되면서 전혀 다른 종류의 성질로 변화한 것 같습니다.]
도훈은 비로소 막 심마에서 벗어났을 무렵 단전에서 폭발하는 증상이 일어났던 현상을 이해할 수 있었다.
바로 그 순간이 서로 다른 원류를 가진 내공이 완전히 뒤섞이며 융합되는 과정이었던 것.
'잠깐. 만약 너의 추측이 맞는다고 해도 다른 의문이 생기는데?'
[어떤 의문 말씀입니까?]
'방금 담뱃불 붙일 때 봤지? 원래 촛불 정도로 일어나는 불꽃이었는데 무슨 토치에서 최대 출력으로 뿜어내는 것처럼 뿜어져 나왔잖아. 근데 내공이 고작 3배밖에 안 는 거라고?'
[고작 3배라뇨? 주인님의 몸속에 든 내공의 합은 1갑자가 훌쩍넘습니다. 보통 사람이 기연 없이 1갑자의 내공을 쌓으려면 몇 년의 세월이 필요한 줄 아십니까? 무려 60년입니다. 게다가 중간에 백년산삼으로 영약까지 얻으셨죠. 그러면 거의 100년의 내공입니다. 거기에 3배면 거의 300년에 가까운 내공이 쌓인 셈입니다.
이걸 적다고 해버리시면···.]
로시가 살짝 흥분한 통에 도훈도 민망했는지 말꼬리를 흐렸다.
'아니 내 말은 3배의 출력이 아니라 그 곱절은 되어 보여서 그랬지.'
[그건 다른 이유입니다.]
'뭔데?'
[내공이 이전보다 훨씬 정순해졌기 때문에 3배 이상의 고출력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정순해졌다고?'
[네. 주인님 말마따나 웃기는 짬뽕에서 이젠 온전한 주인님의 내공으로 변했으니까요.]
'오호. 그렇다면 다른 스킬도 설마···.'
[맞습니다. 이전보다 훨씬 고강해졌을 겁니다.내공의 비약적 상승은, 일신의 모든 무공과 스킬을 강화시키니까요.]
그때였다.
누군가 옥상으로 급히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슬리퍼가 바닥을 때리는 소리가 귓전에서 직접 바닥을 두들기는 것처럼 크게 울려왔다.
'뭐지? 설마 청력도 좋아진건가?'
[맞습니다. 오감 역시 상승했습니다.]
과연 도훈이 높은 곳에서 멀리 건물들을 보니, 수 킬로미터 떨어진 가게의 조그만 간판 글씨까지 정확하게 읽힐 정도였다. 마치 고성능 카메라로 100배 줌인을 한 것처럼 바짝 당겨지는 느낌에 도훈이 자기도 모르게 감탄했다.
'캬, 인생사 새옹지마라더니 죽을 뻔한 위기를 넘기니까 오히려 더 강해졌구나!'
[그래서 제가 말했잖습니까? 주화입마의 위기를 넘긴 무인은 도리어 깨달음을 얻어 내공이 비약적으로 증가하는 경우가 있다고요. 주인님이 바로 그런 사례입니다.]
그때 계단을 뛰어 올라온 여자가 흡연 부스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도훈을 발견하더니 빼액 소리쳤다.
"화, 환자분! 멋대로 돌아다니시면 어떻게 해요! 사라져버린 줄 알고 얼마나 놀랐다고요!"
"예? 저요?"
'누구지? 저 망둥어 같이 생긴 여자는?'
[주인님을 1:1로 간호하던 간호사였습니다. 잠시 화장실을 간사이 주인님이 깨어나신 거거든요. 아마도 주인님이 사라진 줄 알고 계속 병동을 찾았었나 봅니다.]
'가만, 간호사? 교회 안에 무슨 병원이 있고 간호사까지 있어?'
[구원회는 좀 특이한 것 같습니다. 병원 시설은 아닌데 응급의 학과 전문의가 상주하고 있고, 거기 딸린 간호사도 셋이나 있더군요. 아마도 교회 내에서 기본적인 응급처치를 하기 위해 만든 것 같습니다.]
'그거 의료법 위반 아니냐?'
[맞습니다. 5만에 이르는 신도가 외부로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한 불법적인 조처로 보입니다. 더 큰 병은 어쩔 수 없겠지만요.]
'온갖 불법과 비리는 다 저지르는 군.'
"아니! 잠깐 화장실 간 사이에 말도 없이 그렇게 멋대로 나가버리시면···. 예? 누, 누구세요?"
"네?"
"죄, 죄송합니다. 제가 사람을 잘 못···. 근데 왜 저희 환자복을 입고 계세요? 오늘 병실에 입원한 사람은 아까 그 환자 밖에 없었는데?"
도훈은 그제야 자신의 역용술이 시간이 지나면서 풀려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