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4. 구원회-59-
도훈은 그때까지도 양 권사의 속내를 전혀 읽을 수 없었다.
방금전 만해도 사전에 성국대학교-도훈이 일부러 둘러댄 다른 대학 이름-의 중간시험 일정을 확인해 도훈을 유도심문하지 않았던가?
만에 하나 이 제안이 양 권사의 속임수라면 도훈은 미숙에게 접근할 기회를 완전히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 이 새끼가 가불기를 거는데?'
[네? 가불기요?]
'본인 말대로 미숙과 차기 장로 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상관없지만, 만약 미숙이 나를 시험하기 위해 양 권사를 이용한 거라면 완전히 나만 당하는 거잖아?'
[그러면 주인님은 배신자 프레임에 갇히겠지요. 미숙에게 신뢰를 잃을 테니까요.]
'안 되겠군. 스킬을 최대한 아끼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겠어. 로시, 마음의 소리 켜. 속이 시커먼 새끼 같으니.'
[넵.]
도훈이 양 권사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러자 양 권사의 머릿속 생각들이 또렷이 들려왔다.
{이번 신입을 그 갈보년에게 붙일 수 있다면, 그년이 대체 무슨 짓을 벌이는지 속속들이 알 수 있을 거야.}
"음···."
"왜? 고민되나? 나는 패를 다 까줬는데?"
{쳇. 의심 많은 놈 같으니라고. 내가 이렇게까지 제안을 했는데도 못 믿겠다는 말인가?}
"그것은 아니고 정확히 제가 뭘 해야 하는지 몰라서요."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말인가?"
"네. 권사님과 같이 일하다는 것이 성기사단 일을 말씀하시는 것 같지는 않고···. 만약 제가 할 수 없는 일인데 무작정 한다고 할 수도 없으니까요."
{요 맹랑한 녀석을 보게? 신중한 척 하면서 감히 나에게 딜을 걸겠다는 건가?}
"으음, 무슨 뜻인지는 알겠네. 하지만 나 역시 쉽게 속내를 드러낼 수 없지 않는가? 자네가 내 제안을 거절하는 날에는 나만 곤란해 지는 꼴이니 말일세."
"······."
"하면 이렇게 하는 건 어떤가?"
"말씀하시죠."
"내가 지금부터 자네에게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하겠네."
"예?"
"자넨 제안을 다 듣고 내 부탁을 들어줄지 말지만 결정하면 되는 것일세."
"······."
"지난번 면접 때 자네가 돈이 필요하다고 했지? 내가 지금 바로 자네에게 10달란트를 주겠네."
양 권사가 책상 서랍을 열더니 황금으로 된 동전을 꺼냈다.
달란트를 처음 본 도훈은 눈이 휘둥그레 졌다.
'설마 진짜 금이라고?'
[구원회는 금화를 달란트로 쓰는 것이었습니까? 미쳤군요.]
"왜 그렇게 놀라나? 달란트를 처음 보는가?"
"네, 네. 그거 진짜로 금인가요?"
"그렇네. 대략 현금 환산 시 100만원 가량의 가치지. 그렇다고 금은방에 넘기지는 말게나. 교회에서 환전하면 하나에 500만원이니까."
"그럼 20달란트면···."
"현금 1억이네."
"헉!"
도훈은 일부러 놀란척 했다.
평범한 대학생에게 1억은 적지 않은 돈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도훈에게는 푼돈이나 마찬가지였다.
다만 성기사단에 합격한다고 해도, 한 달에 받게 되는 달란트가 2개라고 했으니, 한 방에 10달치의 품위유지비를 받는 셈이었다.
"이, 이걸 정말 저에게···."
"참고로 이건 약소한 성의 표시일 뿐이네. 내가 장로에 오르면 자네에겐 특별히 3달란트를 매달 보너스로 줄 생각이야. 그럼 한 달에 5달란트를 받을 수 있지. 난 성기사단의 단장이기 때문에 그 정도 권한은 가지고 있다네."
꿀꺽도훈이 놀란 척 침을 꿀꺽 삼켰다.
{후후, 역시 돈을 보니까 눈이 뒤집히는 구만? 이렇게 쉬운 녀석이 감히 튕기기는···.}
도훈은 금화 10개를 집으려다 잠시 멈칫했다.
"왜 그러나? 손만 뻗으면 그 달란트는 자네 걸세. 자네는 내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약속만 하면 되네."
"저···. 외람된 말씀이지만, 방금 내용을 문서로 남겨주실 수 있을까요?"
"뭐라?"
"그럴 일을 없겠지만 혹시 나중에라도 말씀이 달라지면···."
도훈의 선 넘는 요구에 시종일관 여유가 넘치던 양 권사의 미간이 크게 일그러졌다.
"지금 내 약속을 못 믿겠다는 소리야?"
노한 양 권사가 길길이 날뛰었다. 이는 구원회의 권사인 자신을, 한 입으로 두말하는 사람이라고 의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내년에 장로에 오를 꿈으로 부풀어 있던 양 권사의 처지에선 모욕을 당하는 셈이었다.
양 권사의 격한 반응에 도훈이 다급히 변명했다.
"죄, 죄송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다름이 아니라 뭔가?"
"실은 제가 대학교 1학년 때 구두로만 계약을 했다가 월세 보증금을 떼인 기억이 있어서요. 그 뒤로는 돈과 관련된 거래는 무조건 증거를 남기는 편입니다. 재판까지 갔었는데도, 말만 가지곤 아무 효력이 없더라고요."
"하-."
양 권사는 기가 막히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뭐 이딴 새끼가 다 있담? 성질 같아선 확 그냥···.}
하지만 양 권사도 도훈이 아쉬운 입장이었다.
미숙이 간만에 탐낸 인재니 만큼, 그만한 인물을 또 다시 찾아 내기란 요원한 일임을 알고 있었다.
특히 내년 장로 선발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어떻게든 미숙의 옆에 스파이를 심거야하는 양 권사의 입장에선 도훈이 무척이나 필요했다. 결국 졌다는 듯이 양 권사가 절레절레고개를 가로저었다.
"거참, 자네에겐 못 당하겠군. 알겠네. 자네 뜻대로 해줌세. 조비서."
"네!"
"빈 종이랑 팬 하나만 가져오게나."
"네, 알겠습니다."
승아가 종이와 팬을 들고 집무실로 들어왔다.
그녀는 일부러 도훈을 보고도 관심 없는 척 시선도 주지 않았다.
"가져왔습니다."
"자네가 옆에서 직접 써주게. 내가 워낙에 악필이다보니."
"네. 뭐라고 쓰면 될까요?"
양 권사는 똥씹은 표정을 지으며, 도훈이 명시적으로 요구한 조건들을 빈종이에 주르륵 적기 시작했다.
특히 차기 장로에 오르면 도훈에게 매달 3달란트씩 추가 지급 한다는 내용에 이르러선 승아도 살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도훈을 한 번 쳐다보았으나, 양 권사의 눈치를 살피며 아무말 없이 써내려갔다.
서류에 조항을 모두 기록하자 양 권사가 팬을 들어 서명했다.
"됐나? 자네가 원하는 서류일세."
"감사합니다."
도훈도 종이를 돌려받더니 자신의 이름 역시 기입했다.
박민용이라고 글씨를 쓰는데 양 권사가 도훈을 향해 물었다.
"참으로, 맹랑한 친구로군. 서류도 남겼겠다, 이제 내가 자네에게 부탁할 차례로군."
"저 근데 비서님이 아직···."
"들어도 괜찮아. 어차피 조양은 내 편이니까 말이야. 그렇지?"
양 권사가 갑자기 서 있던 승아의 허리를 휘감더니 자신의 무릎위에 강제로 앉히는 것이었다. 승아는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으나, 감히 거역하지 못하고 그의 허벅지 위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양 권사는 자신의 지배력을 과시하려는 것처럼 불쑥 손을 뻗더니 승아의 상의 위로 젖가슴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아, 아···. 궈, 권사님."
어지간해선 당황하지 않는 승아마저 의외의 사태에 귀밑까지 빨개지고 말았다. 방금 전 정을 통한 도훈 앞에서, 양 권사에게 성추행 당하는 모습이 수치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도훈이 자기도 모르게 테이블 밑에서 주먹을 굳게 쥐었다.
'저 개새끼가 지금 뭐하는 거야?'
[주인님. 자중하십시오. 자칫하면 살기가 뿜어 나올 것 같습니다.]
도훈이 가까스로 감정을 자제하는데 양 권사가 말했다.
"자네가 내 말만 잘 따라준다면, 이렇게 예쁘장한 수호 천사도 얼마든지 마음껏 주무를 수 있다네. 어때? 최고의 근무조건 아닌가?"
"······."
도훈이 감정을 숨기고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양 권사는 일부러 더 도발하는 것처럼 승아의 상의 단추를 하나씩 풀더니 브래지어 안으로 손을 쑥 밀어넣었다.
"하, 하읏."
"이것 보라고. 내 나이에 언제 또 이렇게 젊은 여자를 마음껏 주무를 수 있겠나? 자네가 내 말만 열심히 따른다면 후에 집사가 되고 권사가 될 때까지 내가 끝까지 밀어주겠네."
도훈은 면전에서 승아의 젖가슴을 주무르는 양 권사를 패 죽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승아에게 큰 감정은 없었지만, 방금 전 자신과 섹스를 하고 온 그녀를 멋대로 주무르는 모습을 보자 스스로가 능멸당하는 기분을 느낀 것이었다.
특히 NTR에는 전혀 면역이 없는 도훈으로서는, 보고 있는 것 자체가 곤욕이었다.
'저 개새끼, 확 대가리 깨버릴까?'
[주인님. 참으셔야 합니다. 승아양도 충분히 감내할 것입니다.]
'딱 1초면 될 것 같은데? 양 권사 저새끼 대가리 깨서 뇌수가 어떤 색인지 확인하는 거 말이야.'
[안 됩니다. 이제 거의 다 왔습니다. 여기서 분을 못 참고 난동을 부렸다간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 될 것입니다. 그간 공들인 시간을 생각하십시오.]
'씨발 진짜, 역겨워서 못 봐주겠네.'
양 권사는 수치심에 흐느끼는 승아의 신음을, 좋아서 그렇다고 오해했는지 점점 더 대담해졌다. 도훈의 앞에서 이제 치마속까지 손이 미끄러져 들어간 것이었다. 승아는 감히 양 권사의 못된 손에 저항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다.
"후후, 우리 조비서가 한동안 안 눌러줬더니 제법 예민하게 반응하는···."
"양 권사님!"
결국 참다못한 도훈이 목소리를 높였다. 분노 덕분에 살짝 내공이 들어가 있어, 듣는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불호령 같았다.
"아앗! 깜짝이야, 갑자기 왜 소릴 지르나?"
"한 가지 더 부탁이 있습니다."
"부탁?"
"사실 지난번 면접 때 봤을 때부터 비서분이 제 맘에 들었습니다."
"호오? 그래?"
"저한테 따먹을 기회를 주시면, 무슨 일을 시키시든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주, 주인님.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어떻게 해, 그럼? 승아가 눈앞에서 저 꼴을 당하는 데 입 꾹닫고 참아? 내가 병신이야?'
[하지만 주인님의 방금 발언은 스스로 약점을 잡히는 것이나 마찬가집니다.]
'이게 아니면 저 새끼 대가리 깨는 방법밖에 없다고. 그냥 뚝배기 깰까?'
[아, 아니 주인님.]
그 사이 도훈의 반응을 재밌게 보고 있던 양 권사가 승아의 치마에서 손을 빼더니 껄껄 웃었다.
"푸하하하, 내가 사람을 영 잘못 봤군."
"···네?"
"난 지난 면접 때 모습을 기억해서 자네가 여자보다 돈을 더 좋아한다고 오해했지 뭔가?"
"······."
"그런데 지금 모습을 보니까, 오히려 돈 보다는 여자 쪽이었구만? 이거이거 아주 로멘티스잖아?"
"제가 원래 마음에 드는 여자를 눕히지 못하면 계속 마음에 담고 있는 편이라서요. 지금 보니까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렇지. 사내라면 하고 싶은 여자를 가만 두면 안 되지. 그 패기하난 마음에 드는군. 좋아, 그럼 이렇게 함세."
양 권사가 기껏 계약서로 쓴 종이를 제 손으로 부욱 찢어버렸다.
"달란트를 추가 지급은 없던 걸로 하지. 대신 자네는 조비서를 가져도 좋네."
"···받겠습니다."
"푸하하하하하하, 이렇게 일이 쉽게 풀릴 줄 알았으면 진작 조비서를 자네에게 주는 건데 말이야. 실은 난 예전에 실컷 먹어서 살짝 질렸거든."
"······."
승아는 자신을 두고 노예 거래라도 하는 듯한 양 권사에게 극심한 모욕감을 느김과 동시에 반대로 도훈의 희생적인 행동에 고마움을 느끼는지 눈시울을 붉혔다.
"알겠네. 일단 일 얘기도 해야 하니까, 조양은 그만 내보내지.
나가봐."
가까스로 양 권사에게서 풀려난 승아는 옷매무새를 다시 갖추더니 꾸벅 고개를 숙이고 집무실을 물러났다. 마지막까지 싫은 소리 한 마디 못하는 그녀를 보고 양 권사가 입맛을 다셨다.
"고년 참, 예의도 바르단 말이지? 민용군 자네가 여자보는 안목이 있군."
"그렇습니까?"
"내가 자주 먹어봐서 아는데, 조양이 기똥찬 데가 있다네. 앞으로 주로 나이 든 여신도들을 상대해야 할테니, 어린 조양으로 한번씩 입가심을 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걸세. 껄껄."
'···저 새낀 장만석 해치우고나서, 무조건 죽인다.'
[주, 주인님. 사람을 죽이면 살인입니다.]
'두고 봐. 살아 있더라도 숨쉬는 것조차 고통스럽게 만들어줄테니.' 일련의 사태가 정리되자 양 권사가 다시 도훈에게 말했다.
"자, 그럼 일 얘기를 해볼까? 실은 자네에게 권 권사에 대한 감시를 맡기려고 하네."
"감시라면···."
"그년이 어디서 뭘 하는지 일거수일투족을 나한테 속속들이 보고하란 소리지. 특히, 교주 아들과 언제 접선하는 지를."
"무슨 말씀을 하시는 지 잘 모르겠습니다."
"몰라도 상관없네. 권미숙 그년이 대체 뭘하고 돌아다니는 지나에게 모두 알려주면 그만이니까."
"······."
"물론 그러려면 자네가 오늘 권 권사의 입맛에 쏙 들어야겠지? 자신은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