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852화 (1,832/2,000)

1852. 구원회-57-

* * *

강남의 유명 피부과.

수간호사가 지하 주차장까지 슬리퍼 차림으로 달려 나와 VIP를 응대했다. 선글라스를 쓴 미숙이 멋들어진 차림으로 차에서 내리자 나이 많은 수간호사가 깍듯이 허리를 숙였다.

"바로 시술 가능하도록 준비해놨습니다."

"호호, 그래. 갑자기 예약 변경해서 미안."

미숙이 마음에도 없는 사과를 건네자, 수간호사가 넉살 좋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VIP님 요청인걸요. 자, 이쪽으로."

지하 주차장에는 일반 손님들이 이용할 수 없는 귀빈 전용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비밀리에 병원을 방문하는 VIP만을 위한 출입구였다.

해당 피부과는 한 때 대통령까지 드나들었다고 할 만큼 빼어난 실력으로 유명했다. 연예인은 말할 것도 없고, 사회 각계 각층의 유명인사들이 애용하는 곳이었다.

최상의 의료진과 실력파 간호사들이 몸소 수발을 드는 만큼, 가격 또한 보통의 피부과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사실 수간호사가 직접 마중까지 나오는 손님은 거의 없었는데, 미숙은 바로 그중 한 명이었다.

병원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그녀가 국내 유명 재벌의 애첩이 아닐까 의심했다. 그만큼 미숙은 돈이 많기로 유명했고, 결제도 늘 현찰로 넉넉하게 주었다.

미숙은 VIP전용 엘리베이터에 오르며 생각했다.

'시술받으러 오는 것도 귀찮은데, 그냥 개인 주치의 하나 고용해서 집에 두는 것도 괜찮을 것 같기도.'

피부과의 의료장비는 수억원을 호가했다. 그것도 한두 종류가 아니라 용도별로 제각각이었다.

이를 집 안에 들일 생각을 할 만큼 미숙은 돈이 많았다.

미숙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이번엔 병원장이 직접 그녀를 마중 나왔다. 나이가 희끗한 병원장은, 강남 최고의 피부과를 운영할 정도로 수완 좋고 능력 있는 부자였지만, 미숙을 마치 영부 인이라도 모시듯 깍듯하게 대했다.

그만큼 미숙의 영향력을 높이 산 것이었다.

"오셨습니까, 사모님."

"네. 갑자기 연락드려서 죄송해요. 선약이 잡혀 있었을 텐데 ···."

"아닙니다. 저희는 VIP님이 우선이니까요. 안으로 드시죠."

피부과는 당연히 예약제였다.

더욱이 이곳은 철저하게 회원제로 운영되니만큼, 미숙의 불시예약을 잡기 위해 다른 누군가의 예약을 강제로 캔슬시켜야 했다.

병원장은 당연히 미숙을 선택했다. 그녀가 병원에 뿌리고 가는 돈이 한달에 수천이 넘었으니까. 그것도 모조리 현금으로.

'대체 뭐하는 여자길래 저렇게 돈이 많담? 정말 신분이 궁금해 진단 말이야?'

병원장도 사람이니 만큼 미숙의 정체에 대해 궁금해했다.

하지만 운전 기사인 덩치 사내의 위협적인 눈빛을 마주한 뒤로는 호기심을 바로 접었다.

미숙은 피부과에서 각종 주사를 맞으며 피부를 관리받았다.

직원 한 명 한 명이 다른 병원에서 에이스급 간호사를 사카우트해 왔기 때문에 실력과 더불어 손님을 응대하는 태도도 훌륭했다.

"사모님은 정말···. 피부가 너무 좋으세요."

"응?"

젊은 간호사의 아부에 병원 침대에 누워있던 미숙이 반문했다.

"아니, 관리를 받으실 필요가 없으실 정도라고요. 어쩜 이렇게 피부가 비단결 같으신지."

"호호. 별 소릴 다듣겠네."

"빈말 아니고, 여기 오시는 VIP중에서 제일 피부가 좋으신 것 같아요."

미숙이 웃는 것을 본 간호사가 옆에서 계속 조잘거렸다. 뻔한 아부인 줄 알지만,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젊었을 때도 시골에 어울리지 않는 미인이었지만, 나이가 들면서 어쩔 수 없이 미모가 빛을 바래고 있었다. 피부 좋다는 칭찬에 자기도 모르게 우쭐해지는 것을 보면 확실히 나이가 들었다는 것이 느껴졌다.

'나도 한때는 저렇게 꽃다울 때가 있었는데···.'

전신 관리를 해주는 간호사의 나이는 끽해야 20대 중반 쯤. 아직 시집도 안간 처녀로 보였다.

미숙은 간호사를 보면서 자신의 20대 시절을 회상했다.

'만석씨를 안 만났으면 내 인생이 지금과 달라졌을까?'

젊었을 때 미숙인 인기가 많았다.

조그만 시골 동네긴 했지만, 미모 하나만큼은 인근 도시까지 소문이 날 정도였다. 사거리 약국 막내딸 권미숙이 길거리를 지나간다고 하면, 동네 개새끼까지 뛰쳐나와 쳐다볼 정도였다.

사람들은 미숙이 미스코리아나 탤런트가 될 수도 있다고 믿었다. 시골에서 썩기엔 너무나 아까운 인물이라는 평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미인박명이라던가.

어느 날부터 미숙은 이유도 없이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처음엔 심한 편두통인 줄 알았으나, 한 달이 지나도 두 달이 지나도 낫질 않았다.

약사인 아버지가 서울의 큰 병원으로 데려가 정밀 진단을 받았으나, 그녀의 병에 대해 원인을 찾을 수 없었다.

도무지 원인 모를 두통이 계속되자, 그녀는 이따금 환각을 보았고 헛소리를 지껄였다. 야밤에 벌떡 일어나서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비명을 질러대는 그녀를, 가족 모두가 불안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결국 보다 못 한 그녀의 어머니가 동네에 유명한 무당까지 불렀다.

무당은 그녀가 신병에 걸렸다고 했다. 무당이 되지 않으면 필시한해를 못 넘기고 죽을 거라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막내딸을 살리고 싶었던 미숙의 부모님은 무당의 말에 속아 굿판을 벌이고 조상신께 용서를 빌었다.

제발 목숨만 살려달라고.

하지만 미숙의 병세는 나아지기는커녕, 점점 더 심해졌고 나중에는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격한 고통에 몸져눕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시름시름 야위어가는 미숙은 화사했던 미모를 잃고 앙상한 몰골로 변하고 말았다. 그녀는 몇 달 사이 폭삭 늙은 모습이었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병약해 보였다.

그때 시골 개척교회의 목사였던 장만석이 미숙을 방문했다.

그는 미숙의 상태를 보고는, 이는 신병이 아니니 굿으로 해결할 수 없으며 자신의 기도로만 치유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던 미숙의 부모님은 장목사의 말을 금과옥조처럼 따르며 안 믿던 교회를 다니고 미숙을 위해 기도했다.

장목사 역시 매일 밤 그녀를 찾아와 성경책을 펼쳐놓고 기도를 올렸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기적적으로 미숙의 병세가 완화되기 시작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장목사의 기도 이후 미숙이 다시 건강을 되찾자 미숙의 부모님은 종교의 힘으로 그녀가 나았다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미숙 또한 이후 열렬한 기독교 신자가 되어 장목사를 삼촌처럼 따랐다. 그녀의 입장에선 장목사가 생명의 은인이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건강해진 미숙은 다시금 과거의 미모를 회복했다.

삐쩍 말랐던 살이 차오르며, 피부가 탱탱해졌고 짧게 잘랐던 머리가 길어지면서 누가 봐도 눈이 돌아갈 만큼 전성기의 미모를 되찾게 되었다.

그녀는 다시 예뻐졌지만, 과거처럼 남자에게 흘리고 다니는 헤픈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매일 새벽 기도를 올리는 독실한 신도가 되었고, 모든 교회 행사에 솔선수범해서 나서는 등 장목사의 가난한 개척교회를 지탱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다 두 사람이 눈이 맞고 말았다.

장목사에게 마음은 있었으나, 유부남인 그를 차마 유혹할 수 없었던 미숙은 먼저 다가오는 장목사를 거절하지 않았다. 그렇게 정을 통하게 된 두 사람은 완전히 불이 붙고 말았다.

하필 두 사람의 속궁합이 너무 완벽하게 잘 맞았던 것이었다.

미숙은 타고난 옹녀였고, 장목사는 보기드문 대물이었다.

두 사람이 한 번 떡을 치는 날이면 밤을 새우는 게 일상이었다.

어찌나 합이 좋은지 아귀가 딱 맞는 열쇠와 자물쇠가 천생 연분으로 만난 느낌이었다.

유부남임에도 불구하고 미숙은 장목사의 말이라면 껌뻑 죽을만큼 모든 걸 바쳐 따랐다. 자신이 그의 좆 집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후에도, 도저히 그를 떠날 수 없었다.

미숙이 가장 젊고 예뻤던 시절은, 그렇게 장목사와의 추억으로 가득했다.

비록 끝은 비극으로 끝나버렸지만 말이다.

"사모님, 이대로 15분만 기다리시면 됩니다. 음료라도 가져다드릴까요?"

"아니. 괜찮아. 수고했어, 밖에 내 비서 좀 불러줘."

상념에서 깨어난 미숙은 얼굴에 팩을 붙인 채 천장을 쳐다보았다. 잠시 후 비서가 개인 룸으로 들어오자 미숙이 물었다.

"아까 작업중이라는 여신도 파일 챙겨왔어?"

"네."

"가만히 있기 심심해서 프로파일 좀 볼까 해서."

"알겠습니다."

비서가 서류가방에서 파일철을 꺼내더니 좌우로 펼쳐 미숙에게 건넸다.

마스크 팩의 뚫린 눈구멍으로 미숙의 눈이 빠르게 좌우로 움직였다.

'최지안. 남편과는 올 초에 사별. 슬하에 딸 하나. 하지만 재판 중.'

내용을 쭉 훑어보던 미숙은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어? 형사 재판에 기소된 이름이 최지안이 아닌데? 최윤하? 개명한 거야?"

미숙의 옆에 서 있던 비서가 곧바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형사 사건으로 입건 중이라 아직 정식 개명 절차를 밟지 못 했습니다. 다만, 불미스러운 사건에 연루되어 개명할 이름을 먼저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주변 사람들에게도 자신을 최지안으로 소개하고 있고요."

"훗-. 굳이 이름까지 바꾸려는 거보면 정말로 사건하고 연루되어 있는 거 아니야?"

"저희 자문 변호사 말로는 심증은 있으나 확실한 물증이 없다고 합니다. 어쨌든 실제로 그녀의 남편을 직접 살해한 사람은 상간남이었고, 이후 벌어진 암매장 등은 협박에 의한 강요를 주장하고 있으니까요."

"그치만 1심에선 유죄가 나왔다면서?"

"여전히 법적인 다툼의 여지는 있습니다. 1심에서도 적극적인 공범이라기 보다 우발적 살인에 대한 방조죄를 더 크게 다루었으니까요."

"어쨌든 썩 질이 좋은 여자가 아닌 건 확실하네. 남편 몰래 바람을 피운 것도 모자라, 상간남이 남편을 살해하는 것을 지켜보고도 신고도 안 했다는 건 팩트니까."

"그건 그렇습니다. 혹시 이러한 점이 저희 교인으로 받기엔 결격사유가 될까요?"

비서의 말에 미숙이 마스크가 벌어지도록 깔깔 웃었다.

"호호호호호! 아니? 딱 좋은데?"

"···네?"

"죄 많은 자 교회로 오라. 우리 교회하고 딱 어울리는 인성 아니야? 여기 와서 구원을 받아야지. 최지안인가, 최윤하인가 하는 그 여자도."

"그, 그렇죠?"

"오히려 좋아. 궁지에 몰린 여자는 판단이 흐려지거든. 게다가 남자도 엄청 밝힌다면서?"

"네. 맞습니다. 불륜건에서 봐도 그렇지만, 젊은 시절부터 행실이 훌륭한 편은 아닌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남자를 워낙 밝히는 타입이라고요."

"푸하하하. 이건 너무 쉽잖아? 형사 재판으로 곤란한 처지에 있는데다, 남자까지 밝히는 여자라면 조금만 꼬드겨도 금방 넘어 오지 않겠어?"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희 쪽으로 이관된 케이스니까요."

미숙이 마스크 팩이 들뜰 정도로 웃었다.

"재밌네, 재밌어. 그 죽은 남편은 대체 뭐하는 사람이길래 그런 여자랑 결혼했대?"

"어···. 죽은 남편에 대한 기록은···. 아, 대기업 연구원이었던 걸로 알려졌습니다. 유학파 출신의."

"제대로 퐁퐁 당했네. 쓰레기 같은 년에게. 이거 완전 계곡 엔딩인데?"

"네? 계곡 엔딩이라뇨?"

"아니야 있어, 요즘 유행하는. 알았어. 일단 박비서가 계속 진행시키고 있어 봐. 내가 적절한 시점에 선수 투입 시킬 테니까."

"이번에도 성기사단의 협조를 받으실 계획인가요?"

미숙이 맡은 여신도 재산 갈취는 주로 남자 신도들이 선수로 기용되었다. 그리고 대부분 그 선수들은 구원회 내의 에이스로 뽑히는 '성기사단'에서 차출되었는데 이는 미숙이 성기사단 인원들을 돌려가며 직접 확인하는 과정과도 관련이 있었다.

본인이 직접 맛본(?) 사내여야지만 적절한 선수를 추천할 수 있는 것이다. 오히려 그런 부분에 있어선, 성기사단의 단장인 양 권사보다 훨씬 더 안목이 있는 편이었다.

"그래야지. 놀아 본 여자에겐 대물만한 게 없거든. 작은 애들 붙여줘봐야 성에 안 차니까."

"그렇군요."

"마침 내가 눈여겨 보고 있는 신참이 하나 있는데, 그 아이를 투입해 보는 것도 괜찮겠어."

"신참이요? 처음부터 이런 임무를 맡기기엔 너무 버겁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30장 짜린데요."

30장이란건 둘 사이에 통하는 은어였다.

1장이 1억이니 30장이면 최대 30억이 걸려 있다는 의미였다.

갈취할 재산 규모가 클 경우 당연히 경력있는 실력자들을 배치하는 게 원칙이었다. 비서는 굳이 신참을 거론하는 미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야. 충분히 역량이 있는 아이야. 내가 이렇게 관심을 보일정도면."

"네?"

"호호호. 일단 그렇게 알고 있어. 나도 오늘 한 번 더 테스트를 해봐야 알 것 같으니까. 잘하면 굉장한 원석을 발견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들거든."

박비서는 여전히 아리송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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