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8. 구원회-53-
* * *
이제 마지막 시험만 남았다.
시간표를 잘 짠 덕인지, 5일이라는 시험 기간은 3일로 단축되었다. 시험지를 받자마자 안경을 꺼내 썼다.
평소 안 쓰던 안경을 쓰는 것에 의아하게 생각하는 학생들도 있었지만, 원래부터 렌즈를 끼고 다녔다고 둘러대면 그만이었다.
시험지를 받고 커닝 안경을 착용하자 곧 이어 시험지 위로 모범답안이 떠올랐다. 나는 최대한 천천히 답안의 뜻을 충분히 되새기면서 글자를 옮겨 나갔다.
'너무 똑같이 배끼면 오히려 귀찮아 질 수 있으니···.'
뻔히 정답을 알고 있으면서 일부러 틀리게 적는 것도 곤욕이었다. 10개 의 문제가 있다면 한 두개는 확실하게 틀린 답안으로 적었다. 운이 나쁘면 A나 받을 수준. 하지만 기존에 잘 본 과목이 있으니 2학기 수석도 따놓은 당상이었다.
'좋아. 이것으로 중간시험도 끝이로군. 빛나나 나래가 찾아올 일도 없고, 별다른 약속도 잡히지 않았으니 마음껏 휴식을 취해볼까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불쑥 로시가 말했다.
[주인님. 인벤토리에 넣어 둔 대포폰에서 전화벨이 울리고 있습니다.]
'뭐라고? 이 시간에 누군데?'
[저···. 생소한 번호긴 한데 검색해 보니 구원회 쪽 같습니다.]
'구원회라니? 수요일 오전부터 구원회가 무슨 일로 나한테 전화를 다···.' 일요일에나 구원회에 다시 찾을 생각이었으므로, 갑작스러운 연락에 버럭 짜증이 밀려왔다.
'거참, 잠깐 쉬겠다는 데 그걸 못하게 하는군,'
[전화가 끊겼습니다.]
'안 받을 거야. 구원회건 뭐건 나중에 하자고. 시험보고 있는데 통화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다시 전화가 걸려옵니다.]
'받지마, 그냥.'
두 번이나 전화를 거절하자 이번엔 문자가 날아왔다.
[주인님, 문자가 도착했는데요.]
'뭐라는데?'
[읽어드립니까?]
'어.' 로시가 인벤토리 안에서 띄워진 대포폰의 문자를 읽었다.
-조승아 : 민용씨. 잘 지내셨어요? 저 승아예요. 기억하시죠?
양 권사님 비서.
-조승아 : 다름이 아니라, 접때 2차 면접 하기로 한 거 오늘 시간 되실까요? 권사님께서 급하게 찾으시는데.
[···라고 하는군요.]
'흐음. 왜 하필 오늘이지? 교회는 일요일에만 모이는 거 아니었나?' 모처럼 시험이 끝난 해방감을 만끽하려던 나는 또 다시 코 꿰인 신세가 되고 말았다.
'보나마나 권 미숙 그년이 보챈 것 같지?'
[장만석의 애첩 말이군요.]
'정확히는 애첩 출신이겠지. 지금은 나이 먹고 팽 당한 거 같고.'
[근데 미숙은 주인님한테 실망한 거 아니었습니까? 성에 차지 않는 눈치였는데요.]
'그럴리가. 내가 그때 기력이 달려서 제대로 마무리는 못 했지만, 나름 깊은 인상을 남겼잖아. 미숙의 입장에선 다시 한 번 보고 싶긴 할 거야.'
[어쩌실 생각입니까? 다행히 나래양은 어제 확실히 눌너놔서 한 동안 찾아오지 않을 거고, 빛나양도 부산에 내려간 상태긴 한데요.]
'어쩌겠어. 까라면 까야지. 무려 신께서 직접 하사한 미션인데.'
대충 시험을 마무리하고 승아에게 답장했다.
-이도훈 : 지금 시험보는 중이라서 오후에 다시 연락할게요.
-조승아 : 아, 그러시구나. 최대한 빨리 답장 주세요. 권사님께서 꼭 오늘 오셨으면 한다고.
-조승아 : 아시죠? 아직 입단 결정 안 난거? 오늘 놓치면 기회다 다시 없을지도 몰라요.
은근히 압박을 주는 승아였다.
[그나저나 어째서 승아양이 주인님에게 존댓말을 쓰는 걸까요?
서로 말 편하게 하는 사이가 아니었습니까?]
'모르지. 옆에 양 권사가 붙어서 감시하고 있는 지도.'
[역시 주인님은 쉽게 쉴 운명은 아니신가 봅니다. 모처럼 휴식인가 싶었더니 오늘은 구윈회로 출장을 가셔야겠군요.]
'어차피 한 번은 마무리해야 할 일이었어. 차라리 잘 됐어. 이번 기회에 미숙이 고년을 확 찍어 눌러서 내 좆집으로 만들어 버리지 뭐.'
[자신 있으십니까? 미숙은 초보인 나래양과는 비교도 안되는 거물인데요.]
어제 상대한 나래가 이제 막 성에 눈을 뜬 섹린이라면, 미숙은 노회한 원로고수나 다름 없었다. 처녀적 시절부터 괴물 같은 장만 석에게서 단련되었고, 이후로도 수많은 대물들을 섭렵하면서 엄청난 내공을 쌓아왔다. 만약 섹스에도 경험치라는 게 존재한다면, 미숙은 만랩 고수라고 불러도 딱히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커져라 여의봉으로 계속 버티는 게 어려워서 그렇지, 절대 못이길 상대는 아니야. 지금 내공으로 얼마나 유지할 수 있지?'
[아마 다른 개입 없이 온전히 힘을 미숙에게만 힘을 쏟는다면 최대 5시간은 가능할 겁니다. 내공이 모두 회복되었으니까요.]
'그 정도면 충분해. 그리고 정 힘들 것 같으면 어제처럼, 쾌락없응 책임을 지면 그만이야.'
[주인님이 너무 고생하시던데요.]
'어쩔 수 있나. 원래 섹스라는 게 남자가 뻘뻘 땀을 흘리면서, 여자를 만족시키는 게임인데. 내가 즐기려고만 하지 않으면 얼마든지 버틸 수 있어.'
시험은 끝났지만, 일단 대학 안에서 마무리해야 할 일이 있었다.
새벽 내내 정리한 요약본을 정음에게 건내줘야 하는 것이다. 마침 정음이 나와 같은 시간에 시험을 봤기 때문에, 그녀가 시험을 치르는 강의실 앞에서 기다렸다.
다른 학생들이 하나둘씨 고사장을 나오는데, 정음은 거의 마지막에나 모습을 드러냈다. 전혀 꾸미지 않고 대충 걸치고 나왔는데도, 미모를 숨길 수 없었다.
"정음아, 여기."
"아, 앗. 오빠!"
정음이 기쁜 표정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오빠, 저 방금 시험 엄청 잘 본 거 같아요!"
"응?"
"오빠가 어제 커피숍에서 요약해 주신 내용만 달달 외웠거든요? 근데 정말로 거기서 엄청 많이 나왔어요!"
"정말? 축하해."
"예감이 좋아요. 나머지 시험만 잘보면···."
[이런. 정음양이 예상외로 선전하고 있군요.]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모르겠군. 이대로 시험 잘 보면 나만 피곤해지는 건데.'
복잡한 심경이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가방에서 요약집을 꺼내 정음에게 건넸다.
"자, 받아. 시험 끝내고 나오자마자 또 공부거리를 주는 게 미안하긴 하지만."
"아앗, 오빠 정말로 남은 과목 전부 정리해 오신 거예요?"
정음이 감격한 표정으로 물었다.
하긴, 감격을 안 할수가 없을 것이다.
자신의 시험도 아니고, 남의 시험을 이렇게까지 도와주는 경우는 드물테니까. 솔직히 커닝 아이템이 없었다면 나도 힘들었을 것이다.
"별로 안 걸렸어."
"아···. 고마워서. 어쩌죠? 저는 오빠한테 드릴게···."
정음은 당장이라도 고마움을 보답하고 싶은 눈치였다.
하지만 그녀의 보답이라는 게 분명 몸으로 떼우는 것이기 때문에 얼른 자제시켰다.
"에이, 뭘 바라고 해준 건 아니야. 그냥 넌 시험이나 잘 봐. 그게 나한텐 가장 큰 보답이니까."
"오, 오빠···."
정음은 금방이라도 울것 같은 표정이었지만,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알겠어요. 오빠 뜻대로 제가 이번 시험은 꼭 잘 볼게요. 당장 공부하러 가야겠어요."
"당장? 시험 막 끝낸 거 아니야?"
"네. 그치만 내일은 두 과목 보거든요. 지금부터 잠들때까지 봐도 힘들 것 같아서요."
뇌까지 청순한 정음에게 하루 두과목 공부는 아무리 요약본만 달달 외워는 것이라도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렇구나."
"맞다. 오빠는 이제 시험 끝나신 거죠?"
"응."
"혹시 심심하시면 제가···."
"응?"
"아니 제 공부는 저녁에 해도 괜찮으니까···."
정음은 내가 시험 끝나고 혼자 심심해 할 줄 알고 함께 데이트를 해주겠다는 뜻이었다.
"아니야. 어차피 나도 일정 있어."
"일정이요?"
"응. 부산에 잠깐 다녀와야 하거든."
"부산은 왜요?"
"친척 집에 가기로 했어."
"아···. 그럼 갔다가 언제 오세요?"
"아마 일요일? 서울 다시 도착하면 저녁이나 되려나?"
"그러시구나···."
정음이 살짝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도 그녀는 자신의 시험이 끝나는 금요일부터 나와 놀 생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구원회 미션이 남은 나로서는 어쩔 수 없이 핑계를 대야 했다. 특히 일요일인 주일은 꼭 비워두어야 했다.
"왜? 무슨 일 있어?"
"아, 아니에요. 조심히 다녀 오세요. 시험 공부하시느라 고생하셨을텐데."
"고생은 이제 정음이 네가 해야지. 난 어쨌든 끝났으니까."
"오빠가 주신 이걸로 정말 열심히 해 볼게요."
"그래. 할 수 있어 정음아."
"네!"
정음은 잔뜩 기합이 들어가 있었다. 시험을 잘 치르면 나와 사귈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인 것 같았다. 더욱이 어제 요약해서 넘긴 자료로, 오늘 시험을 잘 봐서인지 더더욱 자신감이 붙은 모습이었다.
"그럼 난 이만 가볼게."
"네, 오빠. 저도 그럼 이제 공부하러 갈게요!"
정음이 꾸벅 인사를 하더니 커다란 가방을 메고 사라졌다.
[정음양은 참 씩씩하군요.]
'그게 매력이니까.'
[이제 구원회로 가시는 건가요?]
'피곤하지만 별 수 있나.'
* * *
미숙은 자신의 저택에서 단장을 하는 중이었다.
저택은 구윈회 교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값비싼 보이는 고급 주택들이 모여있는 곳이었는데, 이곳은 사실 교회측에서 장로급 인사들에게 마련해 준 일종의 공관과도 같았다.
구원회는 계급에 따른 차등과 그 보상을 확실하게 주었다.
교주인 장만석은 대기업 재벌 부럽지 않은 재력을 과시했고, 그 부의 일부를 피라미드식으로 배분했다. 12명의 장로들은 고급 주택과, 전용 차량과 기사, 수행 비서, 심지어 가사도우미까지 제공받을 수 있었다.
바로 아래 있는 권사가 꼴랑 비서와 집무실을 제공받는 것에 비하면 어마어마한 차이였다. 바로 이러한 현격한 차이가 권력을 탐하게 만드는 주 요인이었고, 양 권사가 그렇게 장로 자리에 집착하는 이유기도 했다.
미숙의 경우는 본인은 권사 신분이지만, 남편인 한 장로덕에 저택에 머무를 수 있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의 개인 비서와 함께 소파에 앉아 얘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중요한 내용만 얼른 보고해. 오늘 피부관리 받으러 가야 하니까."
"피부관리요? 원래 금요일 아니셨나요?"
비서가 새삼스럽다는 듯 되물었다. 미숙이 다니는 강남의 최고 급 피부관리실은, 매주 금요일에 정기적으로 예약이 잡혀 있었다.
"이번 주만 급하게 당기기로 했어. 저녁에 중요한 손님을 만날예정이거든."
"아···. 네."
비서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다만 중요한 손님이라는 게 필시, 젊고 건장한 사내일거라는 추측만 할 뿐이었다.
"다름이 아니고, 이번에 괜찮은 어린 양을 찾은 것 같습니다."
"누군데? 대충 설명해봐."
"네. 남편이 죽고 혼자 사는 미망인인데, 물려받은 재산이 상당히 많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얼마나 되는데?"
"대략··· 30억 이상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괜찮네. 사별도 했겠다, 밤마다 적적할테니 남자 하나만 붙여주면 홀라당 넘어오겠는데?"
"그런데 좀 법적인 문제가 있더라고요."
"법적인 문제라니?"
"그게···. 실은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재판? 무슨 재판."
"상간남과 남편의 살해를 공모한 죄로요."
"뭐?"
손톱을 손질하고 하고 있던 미숙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만약 재판에서 지게되면 감옥가는 거 아니야?"
"그렇죠."
"재산도 상속받지 못할 테고."
"아마도 슬하에 딸이 한 명 있는 것으로 아는데, 너무 어려서 친권은 조부모에게 넘어갈 것 같습니다."
"너무 까다로운 조건 아니야? 굳이 그런 대상을···."
"물론 변호사 쪽에 자문을 구해 봤습니다. 재판이 진행중이긴 하지만, 명확한 혐의점이 드러나지 않아서 잘하면 2심에서 무죄가 나올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남편을 잡아먹은 년이 무죄라고? 참나. 어이가 없군."
"그게, 직접 살인을 한 것은 아니고 방조 혐의 정도인데, 그쪽에서 유능한 변호사를 썼는지 위협을 당해 어쩔 수 없었다는 식으로 변호를 하는 모양입니다. 아무튼, 불구속 기소 상태라 접근도 용이하고요."
"흐음. 근데, 사이즈가 나와? 전도사는 뭐라는데?"
"충분하답니다. 뒷조사를 좀 해봤더니, 처녀적부터 바람기로 유명한 여자였다더라고요."
"그 여자 남편은 완전히 설거지 당했네."
"맞습니다. 바람 피우는 현장을 적발한 뒤 상간남에게 칼을 맞고 현장에서 즉사했다고 하던데···. 불쌍한 사람이죠."
"알았어. 일단 진행시켜. 확실히 전도가 되면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하는 걸로."
"네."
미숙이 권사로서 하는 일은 VIP, 특히 여성을 상대로 재산을 갈취하는 일이었다. 때문에 일하는 빈도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한번 성공하면 교회에 커다란 이득을 안겨주는 사업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