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2. 구원회-47-
[주인님 말마따나 약속을 하셨으면 지켜야죠. 근데 정말 담배피우려고 남으신 겁니까?]
'아니. 문을 다시 잠가야 할 거 아니야. 여기서 잠그고 옥상에서 투신하려고.'
[아니, 단어 선정을 해도 꼭 그렇게···.]
'콱 떨어져 죽고 싶을 만큼 지금 절망적인 심정이란 뜻이야.'
도훈은 옥상문을 다시 잠근 뒤 건물 아래로 서슴없이 뛰어 내렸다.
남들이 보면 정말로 투신자살이라도 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머리부터 수직으로 떨어지던 도훈은 마지막 순간 몸을 180도 돌리며 깃털처럼 가볍게 아스팔트 위에 착지했다.
마치 올림픽 출전 선수의 착지 동작을 보는 것처럼 한치의 흐트러짐 없는 자세였다. 기가 막힌 일을 해낸 도훈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2층 커피숍으로 올라가 테이블로 복귀했다.
옥상에 올라갔다 내려온 정음은 갑자기 의욕이 충만해졌는지 눈에 불을 켜고 교재를 훑고 있었다. 도훈이 자리로 돌아가며 정음에게 물었다.
"오, 열공하는데?"
"당연하죠. 저 진짜로 열심히 할 거라고요!"
정음은 완벽하게 동기부여가 된 모습이었다.
그녀의 뜨거운 열정에 도훈은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거참, 내 도끼로 내 발등을 찍은 꼴이로군.'
[어쩔 수 없습니다. 돕기로 한 이상 팍팍 밀어 주시죠. 또 압니까? 정음양이 전력을 다해도 평균 B+에 실패 할지도.]
'하긴. 확정적인건 아니구나. 이번엔 정음의 빡대가리에 걸어야 하나?'
도훈 역시 열공하는 정음 옆에서 교재 요약을 시작했다.
서로 한바탕 회포를 풀고 나서 그런지, 잡생각도 전혀 안들고 오히려 집중력이 더 올라간 기분이었다.
'이래서 운동선수들이 경기 전날 질펀하게 노는 거였군.'
[운동선수들이요? 무리하게 힘을 쓰면 오히려 다음날 경기력에 영향을 주는 게 아니었습니까?]
'전혀. 유명한 축구선수 얘긴데 원정 경기만 되면 그 지역 콜걸들을 불러다 밤새 즐기고 다음날 경기에 나갔다더라고.'
[그래서요? 결과는요?]
'골이나 어시는 말할 것도 없고, 해트트릭도 몇번 했지.'
[정말입니까?]
'당연하지. 은퇴한 후에 가십 기자랑 인터뷰하면서 다 밝혔거든, 오히려 섹스를 하고 난 다음날이면 리프레시된 기분에 컨디션이 올라간다고. 물론 경기 바로 직전에 물을 빼는 건 체력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지만 꼭 섹스가 부정적인 영향만 주는 것은 아니라는 반례야.'
[그렇군요. 하긴 남자들은 사정 후엔 현자타임을 갖게 되니 더 냉철해지는 측면도 있을 것 같습니다.]
'맞아. 그것도 본능이지. 사실 인간은 섹스할 때 무방비가 되거든. 아니 모든 동물들이 다 그렇지. 섹스 중에는 포식자에게 적절한 대응을 못 하니까. 그래서 수컷들은 사정 후에 급격하고 차갑게 흥분이 가라 앉는 거야. 섹스를 하느라 정신이 팔린 동안, 공격위협이 증대했는지 빠르게 점검해야 생존확률을 높일 수 있으니.'
[그런데 주인님 말을 들으면 조금 이상한 부분이 있습니다.]
'뭐가?'
[섹스가 그렇게 생존에 불리한, 혹은 위험천만한 행동이라면 인간은 어째서 그렇게 오랫동안 짝짓기를 하는 걸까요?]
'응?'
[그렇지 않습니까? 섹스 후 현자타임으로 냉정을 되찾을 필요가 없이, 최대한 빠르게 사정을 마치면 적의 위협에 대비하기 더 수월하지 않겠습니까? 조루 특성이 오히려 자연 선택이 되었어야 할 것 같은데요. 하지만 조루는 이성에게 인기가 없으니까요.]
'전형적으로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로군.'
[네?]
'로시 네말대로 섹스로 인해 포식자에게 잡아먹힐 위험에 대비하기는 조루가 제일 낫겠지. 솔직히 3분 찍 한다고 임신이 안되는 것도 아니니까.'
[그런데요?]
'비밀은 바로 좆대가리의 모양에 있어.'
[좆대가리요? 귀두 말씀입니까?]
'응. 남자들 잦이를 잘 보면 귀두가 버섯머리처럼 생겼잖아.'
[네, 삿갓을 쓴 모양새죠.]
'그래서 사까시 인가?'
[네?]
'아니 이건 딴 소리고. 암튼 그 모양이 화살촉처럼 봊이에 깊숙이 들어갔다 나오면서 안에 있는 이물질을 밖으로 긁어내는 형상이란 말이지.'
[설마.]
'맞아. 잦이가 크고 오래하는 남자들이 여성의 선택을 더 받게 된 데는, 다른 남성의 정액을 밖으로 퍼내는 능력이 뛰어날수록 자신의 씨를 잉태시킬 확률이 높기 때문이야. 즉, 조루가 아무리 찍 싸고 가봐야, 암컷이 그 즉시 다른 수컷을 맞이했을 때 자신이 싼 정액이 밖으로 밀려나고 다른 정액이 그 자릴 대신한다는 거지.'
[관계를 오래하고 물건이 클수록 유전자를 남길 확률이 높았겠군요.]
'맞아.'
[하지만 그것도 조금 이상합니다. 인간은 대부분 일부일처제를 이루는데, 세상에 어떤 여자가 다른 남자랑 섹스를 한 직후 또 다른··· 아! 그렇군요.]
'그치? 일부일처제는 인간의 본능을 억제시키고,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낸 후기의 발명품이나 마찬가지야. 원래 호모사피엔스 종은 오랜 기간동안 다양한 방식의 혼인을 용인했고, 실제로 고대에는 가장 흔하게 이루어진 짝짓기 방식이 집단 난교야.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정력이 약한 수컷은 절대 자신의 정액을 암컷의 난자에 도달시킬 수 없었던 거지.'
[모든 게 다 귀두의 모양 때문이군요.]
'그렇지. 모든 비밀은 바로 좆대가리에 숨어 있다고.'
[근데 저랑 잡담을 나누시면 요약은 대체 언제···. 어, 많이 하셨네요?]
'응. 좌우 뇌를 나눠 쓰고 있었지.'
[그게 가능하단 말씀입니까? 지금 멀티태스킹을 하셨던 겁니까?]
'아까도 했었잖아. 필기하면서 핑거링.'
[아니 그건, 하나는 몸으로 하나는 머리로 하셨으니까 가능했던 게 아니었습니까?]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해보니까 또 되는데?'
[호오, 주인님의 두뇌는 일종의 듀얼 코어같습니다.]
'그러게. 이게 가능할 줄이야. 난 이제 좌뇌와 우뇌를 완벽히 통제할 수 있다는 소릴까?'
도훈은 놀랍게도 로시와 잡담을 나누면서도 동시에 정음의 교재를 요약하고 있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이 보면 필기에 집중하고 있는 것 같지만, 정신은 다른데 두고 기계적으로 눈과 팔이 움직이는 중이었다.
"와···. 오빠 집중력이 정말 대단하세요!"
"응?"
"제가 아까부터 오빠 쳐다보고 있는 거 모르셨죠?"
"그랬어?"
정음이 대화를 거는 바람에 도훈이 잠시 필기를 중단했다.
"네. 오빠가 너무 열심히 하시길래 말없이 쳐다보고 있었거든요? 근데 진짜로 미동도 안하고 계속 기계처럼 움직이셨어요."
도훈은 단지 정신을 두군데로 나누느라 정음의 시선을 의식하지 못했던 것이지만, 자연스럽게 둘러댔다.
"하하, 내가 좀 집중력이 좋은 편이라."
"비결이 대체 뭐예요?"
"글쎄? 어렸을 때 MC스퀘어를 해서인가?"
"네? MC그게 뭐죠?"
[주인님. 그 빌어먹을 아재 개그는 도저히 절제가 안되는 부분입니까?]
'미안. 나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튀어나오네.'
"아, 아니야, 아무것도. 일단 절반 넘게 한 것 같아. 앞으로 30분만 더 하면 요약을 끝낼 수 있겠다."
"벌써요? 정말 근데 그렇게 빠르게 훑으면서 정말로 요약이 가능하신 거예요?"
정음이 너무나 놀라워했다. 그녀가 직접 했으면 10시간을 줘도 도훈이 방금 해낸 분량까지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도훈에겐 너무나 가뿐한 일이었다.
전생에 미국에서 공부할 때는 영어 원서를 속독하며 읽었을 정도로 공부에 있어서 만큼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났다.
도훈은 갑자기 가능해진 멀티태스킹을 보고 뭔가를 떠올렸다.
'어, 그렇구나!'
[네?]
'저번에 섭취했던 자라나라머리머리 열매 말이야. 이제 거의 다 소화가 된 거 아니야? 꽤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똑똑해져라 열매겠죠.]
'아차. 실수. 나도 모르게 탈모 주문을 외웠지 뭐야?'
[탈모 주문이라뇨? 주인님 설마 탈모셨습니까?]
'아니. 전생에 살짝 기미가 보였거든. 지금은 전혀 아니고.'
[아니, 난똥에 탈모충이라니···.]
'뭐 인마? 너 방금 나보고 난쟁이 똥자루 대머리라고 놀렸냐?'
[에이, 그건 놀린 것도 아니죠. 소추 한남이라는 말까진 안했으니까요.]
'하, 인공지능이 이제 주인을 기만하는 구만?'
[그나저나 주인님 말이 맞습니다. 주인님의 지능은 이제 경계 선을 넘어 평균 이상을 훌쩍 넘으셨습니다.]
'이봐, 불리할 때 말 돌리지 말라고. 그리고 97이 어떻게 경계 선이야? 평균에서 살짝 모자라는 거지.'
[그건 주인님이 직접 말씀하셨는데요? 아이큐 100도 못 넘는 빡대가리는 경계선 지능이나 다름없다고요.]
'내가 그랬다고? 흠흠. 아무튼 지금은 아니야. 그럼 내 지능이 대충 얼마나 오른 거지?'
[현재 110을 돌파하셨습니다.]
'어쩐지. 책을 읽고 요약하는데 처리 속도가 예전보다 빠른 느낌이 들더라니.'
[주인님이 지능을 다시 되찾으면 정말 괴물이 되는 거 아닙니까?]
'내가?'
[네. 지금 110을 넘는 지능으로도 멀티태스킹을 해내시는데, 원래 아이큐인 145에 다다르면···. 쿼드코어급 두뇌를 장착하는 게 아닌가 해서요.]
'호오. 좌뇌 우뇌에 이어 전두엽과 후두엽을 또 쪼개는 건가?
암튼, 머리가 다시 회복되고 있다니 기쁘군. 아마 내 예측인데, 환골탈태를 하면서 두뇌까지 다시 태어난 기분이야. 그래서 과거에는 못했던 것도 가능해진 것 같아.'
[과연 천무지체!]
"아, 아. 다시 집중해야 겠다. 죄송해요. 제가 가끔 이렇게 정신이 팔려서."
"응. 다시 공부하자 정음아."
두 사람은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다시 공부에 매진했다.
불과 1시간 전만해도 당장 커피숍에서 떡을 칠 것처럼 음탕한 짓을 벌이던 커플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마침내 요약을 마무리한 도훈이 정음에게 요약본을 건넸다.
"끝. 정음이 넌 내일 시험 들어가기 전까지 이것만 달달 외워."
"정말요? 고작 5장만 보면 된다고요?"
"그렇다니까. 교재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 부분만 요약했으니까, 설사 여기서 벗어난 문제가 나오더라도 20프로 내외일거야.
즉 이것만 싹 외우고 들어가도 80프로는 맞는다는 말이지."
"우아, 정말로 그게 가능하다고요?"
정음은 여전히 반신반의하는 눈치였다.
늘 책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빼놓지 않고 공부하던 자신의 스타일과는 극단적으로 상반된 방식이었다.
"믿어봐. 무조건 가능하니까. 물론 이건 완벽한 공부법은 아니야. 100점을 맞기 위해선 90점을 맞는 사람보다 2배는 더 공부 해야 하는 법이거든."
"아아."
"하지만 80점 정도를 맞는 건, 그보다 훨씬 적은 시간으로도 이룰 수 있어. 너에게 필요한 건 부족한 시간을 어떻게 쪼개서, 어떻게 공부하느냐야."
"그렇구나···. 오빠한테 정말 많이 배우는 것 같아요."
"그리고 나머지 3과목 더 있다고 했지? 그것도 나한테 줘봐."
"나머지 과목이요?"
"응, 목요일, 금요일에 보는 시험 과목 교재."
정음은 책가방에 공부할 책들을 바리바리 싸들고 다녔기 때문에 가방안에 모든 책이 담겨 있었다. 정음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교재를 꺼내자 도훈이 냉큼 받아들더니 그녀에게 말했다.
"이건 내가 나중에 집에 가서 다시 요약해서 내일 줄게. 이것도 마찬가지야. 핵심만 콕 찝어서 80점을 노리는 방법이야. 남은 시간은 부족하고, 봐야할 내용은 많기 때문에 다음날 시험 보는 과목 위주로만 공부해. 그 다음에 보는 과목은 거들떠 보지도 말고."
"아···."
정음은 도훈의 조언을 가슴 깊이 새겼다.
역시 사범대 톱의 공부법은 남다른데가 있었다.
"저, 이번엔 정말 시험 잘 봐서 B+ 넘어 볼게요."
"그래야지. 내가 이렇게 도와주는데."
"그래서 꼭 오빠랑 사귈 거예요."
"응. 할 수 있을 거야 정음아."
도훈은 태연히 말하면서도 등 뒤에 식은 땀이 나는 것 같았다.
'어휴, 진짜 시험 잘봤는데 안 사귀면 뒤돌려차기로 턱주가리 날아가겠구먼.'
[설마 기만하시려는 건 아니죠? 저 사랑스러운 정음양을.]
'아니야. 약속은 당연히 지킬 거야. 물론 지키는 방법이야 내가 정하겠지만.'
"그래. 난 이제 다른 약속 때문에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아."
"아···. 네."
"넌 더 공부할 거야?"
"네. 지금부터 커피숍 문 닫을 때까지 해보려고요."
"그래 열심히 하니까 보기 좋다."
"헤헤. 오빠 덕분이에요. 정말 오빠한테 어떻게 감사를 표해야 할 지 모르겠어요."
"감사는 아까 위에서 다 받았어."
"위에서요?"
"옥상에서."
"아, 앗!"
"그럼 열심히 해. 알았지?"
"네, 오빠."
정음은 가게 밖까지 따라나와 도훈을 배웅했다.
도훈이 호텔로 돌아가는데 아니나 다를까, 강나래 PD에게 확인 전화가 걸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