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8. 구원회-43-
정음은 도무지 수긍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도 그럴것이 정음은 원체 고지식하고 성실한 타입이었다. 그녀는 태권도를 처음 배울 때도 정권지르기만 하루에 천번씩 할 정도로 단순무식한 방식으로 기초를 다졌다.
시작은 남보다 느렸지만, 꾸준하게 동작을 가다듬었던 연습 태도가 그녀를 국가 대표 선발전까지 이끌었던 원동력인 것이다.
운동을 그런식으로 익혔던 정음이었기에, 공부 역시 비슷한 태도로 접근했다. 교수님의 강의를 한 글자도 놓치지 않고 책에 빼곡히 적고, 시험 공부를 할 때도 교재의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싹 다 정독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타입이었다.
하지만 도훈이 생각하는 문제점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정음이는 지나치게 성실해서 문제야.'
[성실한 게 왜 문제죠? 그 성실함 덕분에 자신이 좋아하는 태권도 분야에서 괄목할만한 성취를 거두었는데요? 주인님도 지난번에 말씀하셨잖습니까? 국대 선발전에서 불의의 사고만 없었다면, 이미 올림픽 대표로 출전해서 메달도 목에 걸었을 거라고요.]
'그런 뜻이 아니야. 태권도에선 정음이가 선천적으로 타고난 재능이, 꾸준한 노력과 결합되었으니까 그런 성취가 가능했던 거야.
막말로 정음이 배구를 배웠거나, 혹은 양궁을 익혔어도 결과는 마찬가지로 훌륭했을 걸? 운동 신경만 봐선 거의 만능이잖아. 무엇하나 빠지는 게 없는.'
[아···. 그런 뜻이었습니까?]
'하지만 공부를 같은 방식으로 접근하기엔 정음의 타고난 공부 머리가 상당히 부족하단 뜻이야. 물론 시간이 무한대로 주어진다면 언젠가 결실을 얻을지도 모르지. 다만 시험은 짧은 기간 동안 전략적으로 시간을 배분해야 높은 점수를 얻을 수 있는 거거든.'
[그러니까 주인님 말씀은, 정음양의 방식이 정석이긴 하지만 그녀에게 별로 어울리지 않는 방법이라는 거군요.]
'맞아. 저런식으로 공부 해선 날밤 새면서 죽어라 공부해도 성적은 절대 못 올려. 겨우 낙제나 면하는 수준이겠지. 노력에 비해 성과가 안나오면 계속 자존감만 떨어뜨릴 뿐이라고. 결국에는 지쳐서 포기하겠지.'
정음의 문제를 완벽히 진단한 도훈은 그녀를 설득하기 위해 한가지 보상을 걸었다.
"정음아. 너 오빠 믿지?"
"네? 당연하죠."
정음은 도훈을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애초에 곰같은 타입이었기 때문에, 누군가가 자신을 기만한다는 사실을 상상도 못하는 성격이었다.
"그럼 이번 한 번만 나 믿고 내가 하라는대로 해봐."
"오빠가··· 하라는 대로요?"
"응. 그렇게 해주면 네가 바라는 거 다 들어줄게."
"···정말요?"
"난 한 입으로 두 말 안 해."
정음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얼굴이 살짝 빨개졌다.
"정말 다요?"
"응?"
"그니까···. 제가 바라는 거 정말로 다 들어주실 거예요?"
"당연하지."
"알겠어요. 그럼 정말 오빠 믿고 한 번 해볼게요."
정음은 갑자기 의욕이 솟구쳤는지, 도훈이 알려준 시험 공부 계획에 따라 교재를 펼쳐 시험 공부를 시작했다. 도훈이 흐뭇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후후. 됐다. 이대로만 하면 무조건 1학기 때보단 성적 잘 나올거야.'
[자신만만하시군요.]
'당연하지. 내가 왜 학창시절 천재라고 불린 줄 알아? 공부를 잘한 것도 있지만, 시간 계획을 분 단위로 쪼개서 했거든.'
[분 단위요?]
'어쩌면 내가 가진 재능 중에서 가장 자랑할만한 능력을 딱 하나만 꼽자면 바로 계획을 세우는 능력일지도 몰라.'
[호오, 정말입니까?]
하지만 호언장담했던 도훈도 잠시 후 정음이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 낭패감을 감추지 못했다.
정음의 속도가 자신의 생각보다 현저하게 떨어졌던 것이다. 도훈의 예상으로는 5분이면 끝날 분량을 무려 20분째 붙들고 있었다.
'아뿔싸!'
[왜 그러십니까?]
'파일럿을 간과했다.'
[네? 갑자기 파일럿이요? 그건 비행기 조종사 아닙니까?]
'기체가 아무리 훌륭해도 결코 조종사의 역량을 넘어설 수 없다는 뜻이야. 작전이 기가막혀봐야 뭐해? 정음이 수행해 내질 못 하는데.'
[저런!]
"저, 정음아."
"네, 오빠."
"혹시 지금까지 계속 그 페이지만 보고 있는 거야?"
"아···. 네. 제가 좀 이해가 느려서."
도훈은 자신의 계획에서 예상치 못한 변수를 발견했다.
'그렇군. 정음이는 애초에 책 읽는 속도가 엄청 느린 편이었어.
그러니 같은 시간을 공부해도 남보다 속도가 안날 수밖에.'
도훈은 정음이 혹시나 난독증이 있는지 의심할 정도였다. 그러나 몇번을 확인한 끝에, 단순히 그녀의 문해력이 평균적인 대학생과 비교하면 무척 떨어진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태권도에 올인 하느라 책을 거의 안 읽었나 보구나. 하긴 엘리 트 체육을 했던 애가 얼마나 공부를 해봤을라고? 하루 24시간 중에 16시간은 매일 운동만 했을 텐데. 그나저나 이러면 완전히 나가린데···.'
[뭐가 잘못 되었습니까?]
'정음이가 보통 사람보다 훨씬 읽는 속도가 느리다는 걸 간과했어. 내가 세운 계획은 평균적인 대학생 수준을 고려해 짠 거였거든.'
[헐, 그럼 지금까지 완전 헛짓을 한 거 아닙니까? 계획을 처음부터 다시 세워야겠는데요?]
'아니야. 정음이 속도에 맞췄다간 절대 평균을 못 넘을 거야. 중간이라도 가려면 이게 최선이었다고. 다른 계획은 없어.'
[그럼 어쩝니까? 그렇게 호언 장담까지 했는데요.]
'젠장, 전교 꼴찌를 중간까지 올리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다니.'
[제아무리 1타강사라도 둔재를 단기간에 변화시키긴 어려운 법이죠. 주인님 잘못이 아닙니다.]
'가만 있어봐. 아이템 중에 그거 있지 않았어? 머리 좋아하지게 하는 열매.'
[당연히 있습니다.]
'포인트를 들여서라도 정음이 지능을 올려주면 어떨까? 어차피 남아도는 포인트로 정음이를 도와주고 싶은데.'
[주인님도 아시겠지만, 해당 아이템은 굉장히 느리게 지능이 개선시킵니다. 아마 구매하셔도 시험 기간 중에는 거의 효과를 못보실 겁니다.]
'진퇴양난이네 진짜. 내 커닝 안경을 빌려줄수도 없고.'
도훈은 고민을 거듭하다 결국 정음에게 새로운 제안을 건넸다.
"안 되겠다. 이제와서 교재를 천천히 보는 것은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아."
"네? 그럼 뭘 보고 공부해요?"
도훈은 정음이 보고 있는 교재를 빼앗더니 노트를 꺼내 직접 요약을 시작했다.
"넌 잠깐 다른 과목 보고 있어. 내가 보기 편하게 요약해 줄게."
"네? 오, 오빠가요?"
"응. 핵심 내용 위주로. 내가 그런건 또 빠삭하거든."
"괜찮아요. 오빠도 내일 시험이신데 저를 위해 그럴 필요까진 ···."
정음이 무척 난감해했다. 그녀는 순수한 마음으로 도훈과 함께 시험 공부를 같이하고 싶었을 뿐, 그에게 일방적인 희생을 요구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괜히 자신 때문에 도훈만 고생시키는 꼴이었다.
"아니야. 내가 도와주기로 했으니 끝까지 도와야지. 나한텐 크게 어려운 일 아니야. 넌 일단 다른 과목 훑어보고 있어. 요약하는데 1시간도 안 걸릴 것 같으니."
"아···. 그럼 제가 너무 죄송해서···."
정음은 몸둘 바를 몰라했다.
그녀는 주는 것에만 익숙했지, 받는 것은 무척 어려워하는 편이었다.
"신경안써도 돼. 내가 도와주고 싶어서 그런 거니까."
"그래두요···."
"정음이 너 나중에 교사 안 할 거야?"
"···네?"
"나중에 우리 둘 다 교사돼서 교단에서 또 만나야지. 안 그래?"
"그, 그러고야 싶죠."
"그럼 학점 관리도 꾸준히 해야해. 어차피 지금 공부하는 것들이 다 임용 시험이랑 연결되는 내용이니까. 그리고 만에하나 낙제라도 받아봐. 계절학기 재수강으로도 때우지 못하면 졸업이 밀린다고."
"그건 그렇지만···."
"정음아. 난 나중에 너랑 함께 교사를 하고 싶어. 그러면 너무 좋을 것 같아."
정음이 감격한 듯 도훈을 우러러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훈은 너무나 근사한 남자였다.
"오빠···."
"알았지? 그리고 내가 여유가 있어서 도와주는 거니까, 너무 신경쓰지 않아도 돼. 난 내일 시험 두과목 밖에 안 남았고, 그마저도 완벽하게 끝냈거든."
"제가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너한테 내가 뭘 바라고 해주는 게 아니야. 오히려 네가 이제까지 나한테 보여준 성의에 내가 약소하게 나마 보답하는 거라고 생각해."
정음은 이제껏 도훈의 내조를 톡톡히 했다.
첫 교생실습을 나갈 때도 태권도 사범 아르바이트한 돈으로 옷을 맞춰준 것도 그렇고, 그가 학회장을 맡았을 때 자진해서 1학년과대를 맡음으로서 물심양면으로 그를 지원했다.
늘 헌신을 보여준 그녀였기에, 도훈은 지금 정음을 돕는 게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그녀는 그만한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오빠···, 제가 무슨 말씀을 드려야할지."
"굳이 뭘 말로 하려고 해?"
마음으로도 충분하다는 의미였지만, 정음은 이를 완전히 오해 하고 말았다.
'말로만 하지 말라고? 혹시 몸으로 보답하라는 걸까?'
정음은 생각이 단순했기 때문에 행간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 말았다. 저녁에는 급히 호텔로 돌아가야하는 도훈이 급하게 정신없이 교재를 요약하고 있는데, 정음이 스윽 도훈의 옆으로 다가왔다.
'응?'
도훈은 무슨 의도인지 몰랐기 때문에 열심히 요약을 계속할 뿐이었다.
그때 정음의 손이 테이블 밑에 있는 도훈의 허벅지 위로 올라왔다.
'뭐, 뭐야?'
[정음양이 자신의 손을 주인님 허벅지 위에 올렸습니다. 아, 사타구니 안 쪽으로 파고드는데요?]
'나는 눈 없냐? 중계하지 말라고. 아니 공공장소에서 갑자기 왜 저러는 거야?'
정음은 도훈과의 섹스를 무척 좋아했지만, 공공장소에서 티를 낼 정도로 밝히는 편은 절대 아니었다. 물론 도훈이 원하면 언제나 응하긴 했지만 스스로 나서서 도훈을 먼저 유혹한 적은 한번도 없었기 때문에, 도훈이 흠칫 당황하고 말았다.
"뭐, 뭐하는···."
"쉿-. 오빠는 할 거 하세요. 저도 제가 할 수 있는 걸 할게요."
"아니 그게 무슨···."
뭔가 이상한 방향으로 상황이 전개되는 바람에 도훈은 그녀를 말려야 할지 말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얼굴이 빨개진 채 몰래 사타구니 안쪽을 조물딱 거리는 정음의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러워 보였기 때문에 함부로 밀어내지 못한 것이었다.
'아니,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혹시 주인님의 말을 오해한 거 아닙니까?]
'내가 뭘?'
[말로만 하지 말라고 한거요.]
'엉? 아니 그건 굳이 말로 감사를 표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잖아.'
[하지만 사람에 따라 충분히 오해할 수 있는 대사기도 하죠.]
'그럼 그것때문에 날 만져주는 거라고? 기분 좋게 해주려고?'
[정음양 입장에선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 참, 하필 공공장소에서.'
정음의 '나쁜 손'은 이미 바지 지퍼를 끌어내리고 있었다.
공공장소에서 추행을 당하는 셈이었으나, 도훈은 차마 그녀를 거부할 수 없었다. 여기서 그녀를 밀어냈다간 상처 받을 게 미안했고, 결정적으로 그 역시 간만에 정음을 보자 음심이 동했던 탓이었다.
정음이 바짝 달라붙어서 은은하게 샴푸향을 흩뿌리자 강력한 최음제를 들이켠 것처럼 도훈의 이성이 마비되어 왔다.
'아아, 안되는데···. 다른 사람들한테 들키면···.'
도훈은 워낙에 난봉꾼이었기 때문에 창피를 당하는 것은 상관없었지만, 괜히 순진한 정음이까지 도매금으로 싸잡아 변태 취급을 받을 것이 두려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손님들이 이렇게 많은데, 대놓고 남자친구의 잦이를 지퍼를 열어 꺼내 만지려는 정음이 과연 순진한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러고보니 정음이가 약간 밝히긴 하는구나.'
[네? 정음양이요? 원래 순진하지 않았습니까?]
'맞아. 순진했지. 근데 내가 계속 따먹는 바람에 섹맛을 알아 버렸잖아. 지금 표정 보면 정말로 순진한 건지도 모르겠네.'
정음의 숨소리가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외설적인 행위를 하면서 스스로도 흥분한 것 같았다. 만지기도 전에 발기된 잦이를 밖으로 끄집어낸 정음이 부드러운 손길로 도훈의 잦이를 쓰다듬었다.
"아아···. 단단해요 오빠."
"뭐, 뭐하는 건데 지금?"
"제가 생각해봤는데, 오빠한테 보답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밖에 없는 것 같아서요."
"아니야 정음아, 괜찮아 나는."
"오빠는 괜찮을지 몰라도, 여긴 안 괜찮은 거 같은데요?"
도훈의 단단히 발기된 대물을 손으로 콱- 붙잡으며 말했다.
"으, 읏."
"지금 사람들이 이쪽 안 보고 있는 거 같아요."
두 사람이 앉아 있는 곳은 2층 모퉁이자리였기 때문에 손님들의 동선이 한 눈에 들어왔다. 정음은 아무도 자신을 보지 않다는 걸 깨닫고 갑자기 테이블 밑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