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7. 구원회-42-
"그래도 너무 적게 보는 게 아닐까요? 좀 불안한데···."
정음은 여전히 반신반의하는 표정이었다.
도훈을 믿고 신뢰하는 것과 별개로, 평생해온 자신의 시험 공부 스타일에 갑자기 변화를 준다는 것이 떨떠름한 듯 했다.
도훈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떠 먹여줘도 못 하는 구나.'
[네?]
'솔직히 나 정도 공부 코치가 어딨냐? 우리나라 최고 대학도 우등으로 졸업했지, 미국에 유학도 다녀왔지, 그걸로 대기업 연구소에도 들어갔지···. 공부 커리어로는 어지간한 교수급과 비교해도 꿀리지 않는데 말이야.'
[에이, 그렇다고 주인님이 교수님급은 아니죠.]
'아니야. 내가 지금은 바람둥이 한량처럼 지내서 그러는데, 전생에는 정말 공부 하나는 알아줬어. 왜, 나 미국에 있을 때 지도교수가 나보고 기업체 취직 하지 말고 그냥 자기 밑에서 계속 배우라고 했다니까? 나중에 교수까지 시켜준다고.'
[정말요? 교수 제의까지 받으셨다고요?]
'아니. 그냥 대학원생 노예를 뽑으려는 거 같아서 거절했지. 물론 잘 풀렸으면 미국박사 따고 한국에서 교수 정도는 쉽게 하지 않았을까 싶지만···.'
[어쩐지 주인님이 유독 공부에 프라이드가 강하시다 했더니 정말로 대단한 분이셨군요. 갑자기 사람이 다시 보입니다.]
'칭찬 같은데 어째서 맥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걸까?'
[아닙니다. 주인님은 실제로 1학기 때 자력으로 단대 수석까지 이루어 내시면서 스스로를 증명해 내셨잖습니까? 사실 바빠서 시간이 모자랐기 때문에 그렇지, 커닝 아이템 없이도 충분히 잘하실 분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흐음. 모처럼 듣기 좋은 말이군.'
[그런 의미에서 오랜만에 본처에게 내조를 해주는 건 어떻습니까?]
'내조라니?'
[막말로 맨날 말로만 본처라고 하시고 거의 방치하다시피 하시니까요.]
'아니 그건 너무 바깥일이 바쁘니까···.'
[그것도 다 핑계죠.]
'음···. 인정. 그래서 어떻게 내조하라는 건데?'
[주인님은 단과대 수석을 달리는데, 여자친구는 전교 꼴등이라는 게 말이 됩니까? 정음양도 나중에 교사 임용 시험 합격하려면 어느정도 학점 관리를 하도록 도와주셔야죠. 그게 진짜 남자친구가 아닐까요?]
'틀린 말은 아닌데, 어폐가 좀 있네. 그렇다고 우리가 또 정식으로 사귀는 관계는 아니니까.'
[어쨌든요. 주인님이 정음양의 행복을 바란다면 그 정도 노력을 하는 게 맞지 않나 싶습니다.]
'음···. 내가 정음이에게 내조라.'
이런 저런 일로 바쁜 상황이었지만 도훈은 로시의 조언을 곱씹어 보았다.
말로는 본처라고 떠받들면서 실제로는, 늘 밖으로만 돌면서 정음의 헌신을 외면했던 것도 일정 부분 사실이었다. 만약 정음이 질투심이 강한 타입이었거나, 집착이 심했다면 진즉 둘 사이가 소원해 졌을 것이다.
'그래. 어차피 내 시험은 대비할 필요가 없으니, 이번엔 정음이나 도와야 겠다.'
[오, 정말입니까?]
'생각해보니까 어차피 구원회 일정은 주로 주말에 집중되어 있잖아. 주말이 아니라 주일이라고 불러야 하려나? 어쨌든 평일에는 크게 바쁜 일이 없으니까.'
시험기간은 어떤 면에선 연휴와 비슷한 측면이 있었다.
특히 시험 성적을 아예 포기한 학생이거나 혹은, 공부를 너무 잘해서 준비를 할 필요가 없는 학생에겐 일주일 내내 휴식이었다.
특히 함께 시험을 치르는 입장인 동기나 후배들 모두 자연스럽게 연락이 뜸해지기 때문에 인맥관리 차원에서도 상당히 여유로웠다.
'그러고보니 잘 됐네. 호텔 연금 때문에 어디 멀리 나가지도 못하는 상황인데, 오전에 정음이 시험 공부나 좀 봐줘야겠다.'
결심을 굳힌 도훈이 여전히 아리송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정음에게 말했다.
"너 오후에 어디서 공부할 거야?"
"네? 어, 집 근처 커피숍가는데···."
"커피숍? 도서관이 아니고?"
"네. 너무 조용하면 집중을 잘 못하는 타입이라···."
[저런. 또 다른 문제점을 찾았군요. 공부는 원래 조용한 도서관에서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사람도 많고 시끌벅적한 커피숍이라니···. 저러니 공부가 안 되죠.]
'아니야. 장소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주인님은 늘 공부할 때 도서관에서 처박히셨잖습니까?]
'그거야 내 스타일인 거고. 어디 공사장에서 하는 게 아니면, 어느정도의 백색 소음이 심리적으로 편안한 사람도 있는 법이거든.]
[그렇습니까?]
'생각해봐. 정음은 평생 운동만 했던 아이잖아. 체육관에서 맨날 기합 지르고 미트 차고, 겨루기를 해왔단 말이지. 그게 정음이에게는 가장 익숙한 환경이야. 책장 넘기는 소리마저 신경 쓰이는 침묵의 도서관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소음이 있는 커피숍 같은 곳에서 오히려 심적인 편안함을 느낀다고. 정음이가 공부를 못 하는 건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는 소리야.'
[아···. 이해했습니다. 그럼 원인이···.]
'뭘 자꾸 원인을 외부에서 찾고 있어? 그냥 빠가라니까.'
[앗.]
'공부 머리의 부재. 학습 전략의 부재. 그 두가지가 가장 문제야. 그리고 단기간에 내가 도와줄 수 있는 부분도 학습 전략에 국한되어 있고.'
[학습 전략이라 함은···.]
'남은 시험 기간 동안 어떤 과목에 얼마나 투자하고, 어느 부분을 집중적으로 봐야 하는지 봐주는 정도지. 그렇게만 해도 성적을 상당히 끌어 올릴 수 있을 거야.'
[호오, 자신 있으십니까?]
'왜 이래? 이래봬도 공부에 있어서 만큼은 1타 강사 못지 않다고.'
"그렇구나. 그럼 어차피 나도 내일 시험 볼 거 있는데, 오후에 같이 공부할래?"
"가, 같이요?"
"응. 나 마지막 시험 끝나면 정음이 네가 공부하는 커피숍으로 갈게. 어디로 가면 돼?"
"아, 아니에요. 굳이 무리하실 필욘 없는데···. 저 혼자 할 수 있어요."
"너랑 같이 있고 싶어서 그래."
"아···."
정음은 감동한 눈빛이었다.
늘 방치당하던 그녀의 입장에선 도훈이 먼저 데이트 신청을 한 것은 오랜만이기 때문이었다.
"알았지? 금방 보고 나올테니까 먼저 커피숍에 가 있어."
"네!"
정음에게 가게 이름을 전해 들은 도훈은 그녀와 헤어지고 오후 마지막 시험을 보러 갔다. 사실 시험이랄 것도 없는 게, 커닝 안경을 쓰면 답이 술술 튀어나왔기 때문에 글씨를 옮겨 베끼는 필경사가 된 기분이었다.
바닥에 뜬 글씨를 똑바로 옮기기만 하면 만점이 보장되는 시험.
도훈은 누구보다 빠르게 정답을 적어 제출했다.
"시험 끝냈는데 먼저 나가봐도 되나요?"
"안됩니다. 자리에 돌아가 기다리세요?"
"네?"
하지만 마지막 시험 감독 교수는 지나치게 깐깐했다.
가끔 먼저 시험을 끝낸 학생이 밖에 나가서 핸드폰으로 정답을 공유해 뿌리는 일이 있었기 때문에, 원천적인 가능성을 차단하려는 것이었다.
"못 들었나요 학생? 시험지는 동시에 거둘 겁니다. 그러니 자리에 앉으세요."
"음···. 알겠습니다."
결국 꼼짝없이 붙잡히게 된 도훈은 혼자 멍하니 무료한 시간을 보낼 수 밖에 없었다.
'정음이가 기다릴텐데···.'
[어쩔 수 없죠. 1시간 정도 늦어지는 건데요 뭘.]
시험을 마치자마자 정음이 알려준 커피숍으로 간 도훈은 1층과 2층을 모두 뒤졌지만 정음을 찾을 수 없었다.
'어? 왜 없지?'
의아한 마음에 도훈이 정음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디야? 이리야 커피숍 아니었어?"
-아, 오빠 죄송해요 지금 뛰어 가고 있어요.
"응? 아직 도착을 안했다고?"
정음이 1시간도 전에 일찍 출발했기 때문에 당연히 커피숍에서 기다릴 줄 알았던 도훈이 의아해했다.
-아, 그게 몰골이 너무 초췌해서 집에서 씻고 나간다고. 금방 갈게요.
"아, 그랬구나. 천천히 와. 2층에 자리 잡아 놓고 있을게."
-네, 금방갈게요 오빠. 죄송해요.
[정음양이 주인님을 너무 의식하는 군요.]
'하긴 여자애니까 그럴수도 있겠다. 시험 기간이라도 풀메이크업 다 하고 도서관 다니는 애들도 있으니.'
[정음양은 원래 잘 안꾸미고 털털한게 매력인데 말이죠.]
'그런 애들이 한 번 제대로 꾸미면 진짜 사람이 달라 보이잖아.
원판이 워낙 좋으니까···.'
도훈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급하게 달려온 정음이 2층 계단 위에서 두리번 거렸다.
정음의 모습을 본 도훈은 자기도 모르게 마시고 있던 커피를 주르륵 다시 잔으로 흘리고 말았다.
"크헉!"
[에이 더럽게 뭐하십니까?]
'그게 아니라 정음이가 옷을 갈아입고 왔는데?'
[네?]
집에 가서 씻고 나온다던 정음은, 아까 사범대 앞 벤치에서 만날 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한껏 신경써서 데이트를 나가는 것처럼 짧은 치마에 얼굴엔 은은하게 화장도 했다.
너무나 압도적인 비주얼에 2층에 있던 손님들이 정음을 힐끔거릴 정도였다.
'어우야, 각잡고 꾸미니까 예상대로 연예인 포스 작렬하네.'
[입에 커피나 닦으십시오, 칠칠치 못하게.]
"정음아 이쪽."
"아! 오빠."
정음이 총총 거리고 뛰어오는데, C컵 넘게 커진 가슴이 위아래로 마구 출렁거렸다. 과거에는 볼 수 없었던 슴부먼트였다.
'오, 훌륭하군. 내가 만든 작품이지만, 정말이지 예술이야.'
[정말 주책이 따로 없군요.]
"죄송해요. 제가 좀 늦었죠? 실은 아까 세수도 못하고 나와가지고···. 집에 가서 급히 씻고 왔어요."
"옷도 갈아입었는데?"
"아, 앗···. 오빠 만나는데 너무 초라해 보일까봐···."
도훈은 자신을 신경쓰는 정음의 모습이 기특했다.
언제나 늘 좋아하는 남자 앞에서 예뻐보이고 싶어하는 게 당연한 심리지만, 시험 기간임에도 공부보단 자신을 더 배려했다는 생각에서였다.
'역시 정음이는 사랑 받을 수 밖에 없다니까?'
[라고 하기엔 너무 많은 여자들과 염문을 뿌리고 다니시는 건 아닙니까?]
'그래도 만날 땐 늘 최선을 다한다고.'
"알았어. 일단 이쪽에 앉아봐. 알려줄 게 많을 것 같으니까"
"네···."
정음이 다소곳이 도훈의 옆에 앉았다.
그녀의 머리에서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샴푸냄새가 도훈을 기분좋게 만들었다.
'아씨, 갑자기 또 꼴리려고 하네.'
[자제 하시죠. 오늘은 내조에 최선을 다하셔야 합니다.]
'그래. 목적을 잃지 말아야지.'
"남은 시험이 모두 몇 과목이야? 아니, 오늘까지 본 시험까지다 알려줘."
도훈은 정음의 시험 스케줄부터 파악했다.
전체적인 일정을 재점검하기 위해서였다.
"음, 아직 절반도 안 봤구나. 그럼 승산이 있겠는데?"
"무슨 승산이요?"
"이번 시험에서 평균 이상은 갈 수 있는 확률."
"네. 네? 제가요? 저 특기생 출신인 거 아시잖아요···."
"왜? 너도 할 수 있어. 체육 특기생이라고 꼭 공부를 못하라는 법은 없지."
"아···."
"내가 널 만들어 줄게. 나만 믿어."
"자, 잠시만요. 오빠도 내일 시험 남으신 거 아니에요? 저는 같이 공부하는 줄 알았는데, 이건···."
정음은 그제야 도훈의 의도를 깨닫고는 당황스러워 했다.
같이 시험을 보는 처지에, 자신의 시험에만 신경쓰는 도훈에게 미안해진 것이었다.
"난 이미 내일 볼 과목도 공부 끝냈어. 그러니 걱정 안해도 돼."
"정말요? 저 때문에 거짓말 하시는 거 아니죠?"
"음···. 나를 너무 준비성 없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건 아니지?"
"아, 앗.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
"원래 공부라는 건 닥쳐서 하는 게 아니야. 평소에 꾸준히 수업잘 듣고 예습복습 해놓으면 막상 시험 기간이 닥쳐도 늘 여유로울 수 있는 거야."
"역시···. 수석은 다르군요!"
[그런 개소리를 잘도 뻔뻔하게 하시는군요. 주인님이 언제 그렇게 공부를 열심히 하셨다고요? 맨날 여자나 따먹을 궁리만 하셨으면서.]
'정음이는 내가 모범생인줄 알잖아. 평소에 자주 못보는 핑계를 재확인 시켜주는 거니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
"일단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내가 너한테 지금부터 몇가지 전략을 알려줄거야."
"전략이요?"
"응. 시험 기간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방법이니까 잘 들어봐."
정음의 시험 스케줄을 확인한 도훈은 남은 시험 기간동안 어느 과목을 어떤 식으로 얼마나 공부할지 세세하게 조율하기 시작했다. 각 과목의 특성과 시험범위에 따라 공부양을 정하고, 시간 투자 대비 효율이 떨어지는 과목은 과감히 포기하는 다소 극단적인 전략이었다.
"저, 정말 이렇게만 공부해도 된다고요?"
"당연하지. 물론 최고가 되려면 이렇게 하면 안되고. 하지만 중간 이상을 가는 것은 이런 날빌로도 얼마든지 가능하단 말씀이야"
"날빌이 뭐예요?"
"어, 그러니까 날카로운 빌드라는 건데, 날로 먹는 빌드라고도 하지."
"무슨 말씀인지 하나도 못 알아 듣겠어요."
"이해 못해도 돼. 그냥 내가 짜준 계획대로만 하면 돼. 그럼 정음이 너 무조건 평균은 갈 수 있어."
도훈의 호언장담에 정음이 반신반의하는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