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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836화 (1,816/2,000)

1836. 구원회-41-

불가피하게 호텔 연금(?) 생활을 하고 있던 도훈으로서는 수락하기 어려운 제의였다.

오전에는 나래도 근무중이기 때문에 상관없지만, 민주와 저녁을 먹거나 혹은 뻑적지근하게 회포라도 푸는 도중 불시에 나래가 호텔을 찾아오는 날엔 그 즉시 외출 중인 사실을 들킬 우려가 있었다. 그렇다고 호텔 안으로 민주를 끌어들였다가 걸리면 그것은 그것대로 피바람이 불 일이었다.

"아, 조교 선생님, 죄송한데 이번 주는 좀 힘들것 같아요."

-왜? 혹시 다른 약속있어?

"그게 아니라···. 제가 수요일 시험 끝나자마자 부산에 있는 외할머니 댁에 방문하기로 약속했거든요."

-외할머니? 아···.

"저희 부모님이 모두 외국에 계셔서 제가 가끔 찾아뵙는데 이번엔 꼭 가겠다고 해가지고요."

-그렇구나. 미안해. 난 그런 줄도 모르고.

"아니에요. 제가 죄송하죠. 다음 주는 괜찮아요."

다음주는 괜찮다는 말에 시무룩해 있던 민주의 목소리가 확 밝아졌다.

-정말? 다음주 언제?

"조교 선생님 편한 시간에요."

-아···. 맞다. 다음주 나 생리기간인데···.

"정말요?"

-아니야. 신경 쓰지마 피임약 먹으면 돼.

생리를 늦추기 위해 피임약까지 먹겠다는 말에 도훈이 답했다.

"선생님. 저 떡볶이도 상관없어요."

-지, 진짜?

"네. 떡볶이 좋아해요. 그럼 다음주 같이 떡볶이 먹는 걸로 알게요."

-아···. 응.

"그리고 그 심리학과 조교 선생님한테는 제 연락처 알려주지 않아줬음 좋겠어요. 귀찮은 건 딱 질색이라."

-당연하지. 알려줄 생각도 없었어.

"네. 그럼 전 다음 시험 준비할게요. 오후에 하나 더 남아있어서요."

-응,응. 시험 잘 봐.

"네. 선생님. 저 도훈이에요."

-맞다. 그렇지 우리과 에이스.

웃으며 통화를 끝낸 도훈은 골머리가 아픈지 미간을 찌푸리며 이마를 짚었다.

'아놔. 귀찮게 됐네.'

[왜 그러십니까? 민주양과 다음주 약속 때문에 그러십니까?]

'아니. 민주는 상관없지. 이따금 관리해 주는 것도.'

[그럼요?]

'심리학과 조교가 하는 짓을 보니까, 괜히 커닝을 너무 완벽하게 했나 싶어서 말이야. 만약 다른 교양 시험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면 어떻게 하지?'

[주인님을 자기과로 데려오려고 영입제안을 하면요?]

'응. 아직 2학년 이라 편입이 가능한 시기거든.'

[뭐, 신경 쓸 필요 있을까요? 무시하면 그만인걸]

'그렇긴 한데, 괜히 교수들 사이에서 내 이름이 오르내리면 그것도 피곤한 일이라. 수상하지 않겠어? 체육교육과 출신의 공부 천재라니. 심지어 알고보니 미스터 국성 출신이기까지 한.'

[흐음. 모아놓고 보니 확실히 수상하네요. 무결점의 대학생이 랄까? 그냥 다음 시험부터는 일부러 하나 씩 틀리는 것도 방법일 것 같습니다.]

'그러다 수석 놓치면? 그럼 괜한 짓 한 거잖아. 양심을 속이고 커닝까지 했는데···.'

[거참 골치 아프군요.]

'그러게 말이야.'

도훈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다음 시험을 확인했다.

두번째 시험마저 민주의 전화로 인하여 일찍 나왔기 때문에 다음 시험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은 상태였다.

어차피 공부를 해야할 필요도 없었기 때문에 도훈은 사범대 구석에서 담배를 피우며 시간을 때웠다. 그때 멀리서 누군가가 고개를 숙이고 터벅터벅 걸어오는 게 보였다.

'응? 쟤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멀리서 봐도 굉장한 미인임을 알 수 있었다.

1학기 때 숏컷에 가까운 단발에서, 가을이 되자 어깨까지 닿을 만큼 머리가 긴 정음이었다.

도훈은 반가운 마음에 정음에게 다가갔다.

"정음이 안녕?"

"아, 아앗 오빠."

모자를 깊이 눌러 쓴 정음이 몹시 난처한 표정으로 도훈을 맞이 했다.

"뭘 그렇게 놀라?"

"시, 시험 본다고 너무 안 꾸미고 나와가지고···."

정음은 맨 얼굴로 도훈 앞에 있자니 부끄러운 듯 했다.

하지만 도훈은 그 대답이 더 어이가 없었다.

맨 얼굴이라고 하기엔 너무 피부가 뽀얗고, 예뻤던 것이다. 아무거나 막 걸치고 나온 옷차림이었지만, 지난 번 가슴을 키워준 이후로 몸매 비율이 워낙 좋아져 눈을 뗄 수 없게 만들 정도였다.

[정음양은 갈수록 미모에 물이 오르는 군요.]

'그러게. 저게 안 꾸민 거라니, 꾸미면 진짜 연예인 포스 나겠네.'

"안 꾸며도 예쁜 데 뭘."

"그, 그래도 부끄러워서···. 오빠 시험 다 보셨어요?"

"아직 오후에 하나 더 남았어. 넌?"

"아···, 저는 오늘은 끝났고 이제 내일 볼 과목 공부하러 가려고요."

도훈은 축 처진 그녀의 어깨를 보고 오늘 시험을 망쳤음을 직감했다.

정음은 인성도 훌륭하고 외모도 더할 나위 없지만, 유일하게 공부를 못하는 약점이 있었다. 그것도 보통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사범대 꼴찌 수준이었다. 체육교육과 입학도 체육 특기생 자격으로 겨우 입학했을 만큼, 공부 머리는 다른 동기들에 비해서도 상당히 떨어졌다.

"날새서 공부했는데도 방금 시험을 너무 망쳐서···."

알고보니 정음은 공부를 열심히 하고도 시험을 못 봐 속상한 모양이었다. 도훈으로선 상상할 수 없었지만 평생 태권도만 했던 정음에게 공부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 무슨 과목 보는데? 내가 좀 도와줄까?"

"오, 오빠가요? 괘, 괜찮아요. 오빠 곧 시험 있으시다면서요."

"난 공부 다 끝냈어. 잠깐이라도 봐줄게. 내일 보는 게 무슨 과목인데?"

정음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저희과 전공이요."

"전공시험? 교수님 누군데?"

"강창욱 교수님요."

"강창욱 교수님이면 체육교과교수법의 이해 과목인가?"

"네."

"잘 됐다. 나도 이미 한 번 봤던 거잖아. 내가 문제 나올만 한 거 짚어 줄게."

"저, 정말요?"

정음은 구세주라도 만난 것처럼 감격의 눈빛을 보냈다.

도훈이 1학기 때 사범대 전체 수석을 한 것은 이미 같은 학과학생들 사이에 소문이 파다했다.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심지어 잘생긴 알파남이라며.

"저기 잠깐 앉아 볼래?"

도훈이 비어있는 벤치를 가리켰다.

"네."

도훈과 정음은 긴 나무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정음이 주섬주섬 가방에서 교재를 꺼내는데, 딱 봐도 두꺼운 체육교육학 이론서였다.

[근데 주인님. 1학년 때 본 시험은 주인님이 아니라 원주인이 본 것 아닙니까? 그 낙제를 겨우 면했다는.]

'맞지.'

[주인님은 본 적도 없는 시험에 대해서 알려주시겠다고요?]

'나도 수업은 빡세게 들어서 뭐가 중요한 지 정도는 알거든. 어차피 1학년 때 배우는 건 개론 수준이라 지금 배우는 심화랑 연관도 있고.'

[호오.]

"시험 범위가 어디서부터야?"

"이쪽이에요."

정음이 교재를 펼치는데 페이지마다 빼곡하게 깨알같은 메모가 적혀 있었다. 도훈은 그녀가 수업 시간 중 필기한 것으로 보이는 메모를 보고 속으로 적잖이 놀랐다.

'헐, 생각보다 충격적인데?'

[왜 그러십니까?]

'수업 시간에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는데 겨우 낙제를 면하는 수준이라는 거잖아? 대체 얼마나 빠가 인거지?'

[주, 주인님···. 그래도 본처에게 빠가라뇨. 말씀이 좀.]

'아, 그렇지. 내가 좀 말이 심했네. 여자가 공부좀 못하면 어때?

예쁘고 착하면 장땡이지.'

[시대착오적인 여성관을 가지고 계시는군요.]

'40대 아재라 어쩔 수 없어.'

"흐음. 이걸 다 본 거야?"

"네. 처음부터 끝까지 봤는데···. 너무 어려워요."

도훈은 곧바로 문제점을 깨달았다.

시험 범위가 교재의 절반인 150쪽 가량이었는데, 그걸 처음부터 끝까지 달달 읽고 외우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누구에게라도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음, 시험이라는 건 어차피 나올만한 주제가 어느정도 정해져 있어."

"나올만한 주제요?"

"응. 어떤 학생도 여기 나온 모든 내용을 다 기억하진 못 하거든. 이 책 한권만 파라고 하면 가능하겠지만, 중간 시험이라는 게 최소 5과목 이상은 보는데 이 과목만 파고 있을 순 없잖아."

"그, 그쵸, 그래서 날을 샜는데···."

도훈이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정음이는 공부 머리가 전혀 없구나.'

[공부 머리요?]

'응. 좀 더 어려운 말로 메타인지라고 하는데, 공부 자체가 아니라 일종의 학습 전략과 관련된 개념이야.'

[학습 전략은 또 뭡니까?]

'잘봐. 시험이라는 건 수많은 학생들의 학업 성취를 점검하는 거야. 학생들이 얼마나 공부를 열심히 하는지 확인하는 이유가 가장 크지.'

[그렇죠.]

'하지만 또 다른 기능은 바로 변별이야.'

[변별이요?]

'응. 순위를 나누고, 성적을 매기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줄을 세워야 하거든. 누군가 에이플을 받으면 누군가는 필연적으로 디를 받을 수 밖에 없다는 뜻이야.'

[그렇겠죠.]

'하지만 평점은 전체 과목에서 얼마나 골고루 잘보느냐로 정해 지거든. 즉 한 과목만 파서는 무조건 망한다는 거야.'

[당연한 말씀입니다.]

'메타인지란 그런 시험과목들 중에서 어떤 것에 얼마나 시간을 투자했을 때 가장 효율적으로 성적을 거둘 수 있을지 판별하는 능력이야. 공부 자체를 잘한다기 보다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할 지 계획을 잘 세우는 능력이지.'

[그렇다면 정음양은 그 메타 인지 능력이 부족하다는 말씀인가요?]

'아니. 정음이는 그냥 빠가야.'

[네?]

'공부도 못하고 공부 전략도 못 세운다는 뜻이야. 그러니 저렇게 날밤을 새우고도 낙제를 겨우 면하는 수준이지.'

[아···. 총체적 난국이군요.]

'어떻게 보면 너무 안타까워. 사람들은 가끔 공부에 대해서는 노력이 재능을 이길 수 있는 분야라고 착각하는데 공부야 말로 사실 재능이 가장 많이 요구되는 분야거든.'

[그렇습니까?]

'우리가 노래를 잘 부르거나, 악기를 잘 다루거나, 혹은 특정 운동을 빼어나게 잘하면 저 사람은 재능을 타고 났다고 그러잖아.'

[네.]

'근데 꼭 이상하게 공부로 주제가 바뀌면 공부는 또 재능이 아니라 노력이래. 그야 말로 자가당착이지. 관련 논문만 찾아봐도 재능이 가장 필요한 분야를 공부라고 하는데.'

[하지만 머리가 나빠도 공부를 잘하는 사람들의 반례는 얼마든지 있지 않습니까? 자기가 학창시절엔 정말 성적이 나빴다가 노력해서 극복했다는 사람들도 많고요.]

'그거야 당연하지.'

[네?]

'수학 능력 시험 정도로 지능을 판별하니까 벌어지는 착각이야.

막말로 수능은 공부지능이 별로 필요하지도 않는 시험이거든. 그건 정말 노력하면 높은 성취를 이룰 수 있는 분야기도 해. 비교적 문턱이 낮은 시험이니까.'

[아···.]

'근데 진짜로 나중에 어려운 학문을 배우게 되면, 머리가 나쁜 애들은 아예 따라가지도 못한다고. 노력으로 극복이 안되는 순간이 온 단말이야.'

[그렇습니까?]

'전교에서 1등들 싹 다 모아서 시험 보면 그 와중에 또 꼴등이 안나 올거 같아?'

[당연히 나오겠죠.]

'그렇지. 그게 바로 재능이라는 거야. 진짜 머리가 좋다는 건, 그렇게 계속된 경쟁 속에서도 굳건하게 상위권을 놓치지 않는 사람들을 말하거든. 수준 낮은 수능 따위가 아니고 말이야.'

[무슨 말인지 대충은 알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정음양을 어떻게 도와주시겠다는 겁니까? 커닝안경이라도 빌려주시려고요?]

'그건 아이템의 존재를 들키는 거니까 좀 그렇고. 어디 한 번 봐보자.'

도훈은 정음에게서 교재를 뺏어, 시험 범위 전체를 빠르게 훑기 시작했다. 정음은 매 수업마다 교수가 필기한 것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책에 기록해 두었기 때문에 필기가 된 부분 위주로 훑다보니 중요한 개념들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 그리고 여기. 그 다음에 여기."

도훈은 페이지를 접어서 표시하면서 빠르게 전체 진도를 훑어주었다.

"이게 다 뭐예요?"

"정음아. 내일 시험 보기 전까지 내가 방금 표시해준 부분만 여러번 정독해."

"표시해주신 부분만요?"

정음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도훈을 쳐다보았다.

도훈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는 정음이지만, 150페이지에 이르는 분량에서 딱 10페이지만 짚어주는 모습이 어딘가 못 미더워하는 눈치였다.

"응. 내 말 믿고 한 번만 해봐. 어차피 시험이라는 것은 누가봐도 중요한 부분을 출제하는 거야. 일부러 변별을 위해 문제를 꼬지 않는 이상 그게 기본이거든."

"아···."

"주어진 시간안에 최대한 점수를 잘 받는 방법은, 시간을 효율적으로 분배하는 것 뿐이야. 그러니 ···책을 싹 다 훑지 말고 내가 찝어 준 부분 위주로 봐."

도훈은 '미련하게'라는 부사를 덧붙일까 하다가 말을 입속으로 삼켰다.

정음이 머리가 나쁜 것은 정음의 잘못이 아니었고, 그녀가 노력 한다고 달라지는 부분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다른 재능을 과하게 타고 났으니, 공부 정돈 좀 부족할 수 있지. 그래도 낙제하면 큰 일이니 이 정도는 도와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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