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5. 구원회-40-
"그냥···. 혹시나 싶어서요. 끝나기 전에 한 번더 검토해 보려고."
"흐음."
도훈이 여전히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한 조교가 시험지를 멋대로 뒤집었다. 사실 해당 조교는 교수 대신 직접 출제를 했기 때문에, 정답을 알고 있었다. 교수의 밑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조교가 되었기 때문에 이따금 교수가 바쁘면 출제를 도왔던 것이었다.
'얼굴은 멀끔하게 생긴 녀석이 거짓말이나 하고 말이야.'
조교는 의외로 말끔하게 답안을 써놓은 도훈의 답안을 보고 속으로 피식했다.
'또 아무말 대잔치나 써놨겠지 뭐. 이번 시험은 교재 안에서 내긴 했지만 일부러 변별력을 위해 구석에서 출제한 문제라 절대 쉽게 못 풀었을 걸···. 어?'
눈대중으로 대충 정답을 확인하던 조교의 눈이 커다랗게 변했다.
얼핏봐도 도훈의 답안이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자, 잠깐만. 뭐지 이건?'
그는 조교이기 이전에 해당 전공의 박사학위 보유자였고, 심지어 관련 주제로 박사 논문을 쓰기도 했던 전문가였다. 어떤 면에선 해당 주제에 대해선 교수만큼의 실력을 갖춘 인재기도 했다.
'잠깐 지금 이게 학부생이 써낸 답안이라고?'
조교는 다른 학생들이 쳐다보는 줄도 모르고, 고사장 한 가운데서 도훈의 시험지를 들고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자신이 모범답안으로 작성한 것보다 훨씬 정교하고 완벽한 답이 일개 학부생이 기술한 답안지에 적혀 있었다.
'마, 말도 안돼. 이 이론은 일주일 전 겨우 학회에 발표되어서 아직 교재에 반영도 안된 내용이잖아? 이 학생 대체 정체가 뭐지?'
충격을 받은 조교가 부르르 떨고 있자 도훈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요? 무슨 문제있어요?"
"아, 아니···. 이대로 제출하고 나가도 될 것 같은데."
"정말요?"
"그, 그래."
조교는 다른 학생들이 웅성거리자 도훈의 시험지를 거둬 다시 교탁으로 돌아갔다. 도훈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멀리서 열심히 시험을 보고 있는 서현에게 눈인사를 건넨 뒤 고사장을 빠져 나왔다.
충격을 받은 조교는 시험 감독을 내팽개치고 혼자 도훈이 시험에 쓴 정답을 맹렬한 기세로 읽어 나갔다. 논술형 문제였기 때문에 정답을 벗어난 주제로 쓸데없이 양만 많은 학생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도훈의 경우는 글자 하나하나가 군더더기 없이 완벽하게 기술되어 있었다.
'어떻게 이럴수가 있지? 이건 이 분야의 최고 권위자들이나 쓸만한 수준의 정답이잖아? 이 내용을 정말 저 학생이 기술했다고?'
조교는 벽에 걸린 시계를 힐끔거리며 시간을 확인했다.
60분의 시험 시간 중 채 20분도 지나지 않은 상태였다.
게다가 아까부터 시험지를 덮고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실제로 시험을 치른 시간은 15분 가량.
그 시간동안 이 정도 길이의 정답을 쓰려면, 시험지를 받자마자 일필휘지로 휘갈겨야 가능한 수준이었다.
'이럴 수가!'
조교가 뒤늦게 도훈이 나간 문을 따라 뛰쳐나갔다.
감독을 보던 조교가 갑자기 시험장을 뛰쳐나가자 대학생들이 또 다시 웅성거렸다.
"뭐야?"
"왜 저래?"
"급똥인가 보지."
누군가 더러운 농담을 하는 바람에 고사장의 분위기가 바뀌며 킥킥 거리는 웃음소리가 전염병처럼 번져 나갔다.
한편 도훈을 뒤쫓아 나간 조교는 황급히 건물 밖에서 도훈을 찾았지만, 어디로 갔는지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아아, 이런 천재를 못 알아보다니!'
조교는 황망한 표정으로 다시 시험장으로 돌아오더니 급하게 도훈이 낸 시험지의 이름을 확인했다.
'체육교육과 이도훈? 체육교육과면 사범대 학생 아니야? 사범대 학생에게 어떻게 이런 박사급 수준의 전공지식이 있는 거지?'
파면 팔수록 미스테리한 일이었다.
조교는 자신이 마치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다.
'설마 정답이 유출되었나?'
이따금 관리가 소흘한 틈을 타 시험지가 유출되는 사고가 있었다. 정밀한 수준의 해킹이라기 보다는, 문제가 든 노트북에 USB를 꽂아 파일을 복사해 가는 식의 사고였다.
하지만 조교는 이내 해당 가능성을 접었다.
'아니야. 이번 문제는 교수님 지방 출장 일정 때문에 내가 대신 출제했어. 인터넷 연결도 되지 않는 노트북으로 문제를 작성했고, 교무처에 제출할 때도 내가 직접 USB에 담아서 가지고 갔고. 절대 파일이 유출되진 않았어.'
심지어 미약한 가능성으로 유출이 되었다고 해도 도훈이 써낸 정답의 수준은 말이 안되었다. 정답을 기술해낸 속도로 볼때, 그 많은 문장을 싹 다 외워서 빠르게 써내려갔다고 봐야 했는데 그 정도 암기력이라면 누가봐도 천재라고 부를 수 있었다.
'내가 미리 제출한 모범답안보다 더 수준이 높았어. 이 학생은 정말로 문제를 보자마자 스스로의 지식으로 풀어낸 거야.'
감독 시간이 끝나가는 동안에도 조교는 도훈의 일 때문에 도무지 집중을 할 수 없었다. 오죽하면 학생들이 시험 시간 다 끝났다고 말을 한 뒤에야 시험지를 거둘 정도였다.
시험을 끝낸 조교는 급히 사범대 체육교육과에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국성대 심리학과 조교 최정운이라고 합니다."
-네, 안녕하세요. 체육과 조교 강민줍니다.
"다름이 아니고 그쪽 학부 학생 한 명만 확인할 수 있을까 해서요."
-저희과 학생요? 말씀하세요.
"혹시 거기 이도훈이라는 학생이 재학 중인가요?"
-이도훈이요? 네. 저희과 학생입니다만···. 그런데 무슨 일이시죠?
차분하게 전화를 받던 민주의 목소리가 다소 방어적으로 바뀌었다. 타과에서, 그것도 단과대도 다른 곳에서 도훈을 찾는 것을 보고 혹시나 안 좋은 일로 전화를 한 것은 아닌지 걱정을 한 것이었다.
"이도훈 학생 연락처 좀 알 수 있을까요? 제가 급해서 그런데."
-죄송하지만, 유선상으로 저희 학생의 개인정보를 알려드리진 않습니다. 그리고 그쪽이 요구한다고 저희가 알려드릴 필요도 없고요.
"예?"
-무슨 용무인지 모르겠지만, 이도훈 학생은 매우 우수한 학생으로 저희과 학생 회장을 맡고 있습니다. 혹시 뭔가 오해가 있는 거라면···.
"아니에요. 제가 너무 급한 나머지 결례를 범했습니다. 지금 바로 찾아뵙겠습니다."
-네? 이쪽으로 오신다고요?
정말로 최정운은 체육교육과 학과 사무실을 방문했다.
사무를 보고 있던 민주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정운을 맞았다.
남자에 군대도 다녀온 박사급이라 그런지, 같은 조교임에도 민주와는 꽤 나이 차이가 났다.
'이 정도면 조교가 아니라 전임강사급 아냐?'
"방금 통화했던 심리학과 최정운입니다. 아깐 실례가 많았습니다."
"아니에요. 그런데 도훈학생은 무슨 연유로 찾으시는 지."
"다름이 아니라 제가 교수님 대신 시험 감독을 들어갔는데 ···."
정운이 흥분한 목소리로 민주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설명을 다 듣고난 민주는 나쁜일이 아니라 다행이라고 안도하면서도 정운과 마찬가지로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이 학생이 전과를 했거나 편입생인가요?"
"네···. 그렇지 않습니다."
"아니면 부모님께서 저명한 학자라던가···."
"그건 아닐 겁니다."
"선생님. 그게 아니면 이 학생은 천재가 틀림없습니다. 스스로 독학해서 그 정도 지식을 쌓을 정도면···. 도훈 학생이 전공을 잘 못 선택한 것 같습니다."
"네? 뭐라고요?"
"체육교사가 되기엔 너무 아까운 인재라는 뜻이었습니다. 혹시나 도훈 학생의 연락처를 주시면···."
쉽게 말해 일종의 전과 제의였다.
교수도 아닌 조교가 타과의 학생을 빼가겠다는 소리에 민주가 어이가 없다는 듯 정운을 쳐다보았다.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네?"
"아니, 난데없이 저희과에 쳐들어 오셔서 학생의 개인 정보를 달라지 않나, 저희 과에 있기엔 아깝다지 않나···. 너무 무례하신 거 아닌가요?"
"아, 아 그, 그게."
"이만 나가주세요. 저는 학생의 의사 확인도 없이 개인 정보를 넘겨드릴 생각은 없으니까요. 아니면 대학 본부를 통해 인문대에 정식으로 항의 공문을 보내겠습니다."
"아···. 제가 너무 흥분해서 거듭 실수를 범한 것 같네요. 정말로 죄송합니다."
심리학과 조교가 머쓱한 표정으로 물러나자 민주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휴-.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람?"
민주가 팔짱을 끼고 한숨을 쉬고 있자, 보조인 한솔이 연유를 물었다.
"무슨 일이래요? 듣기론 도훈 학생 어쩌고 하는 것 같은데."
"아니야. 한솔샘은 너무 신경 안써도 돼. 내가 처리할 게."
민주는 핸드폰을 들고 학과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도훈의 폰으로 전화를 걸었으나, 받지 않았다.
'혹시 다른 시험 보는 중인가?'
민주가 초조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쳐다보았다.
* * *
부르르르
민주의 예상대로 도훈은 이어지는 다음 시험을 보는 중이었다.
한창 빠르게 정답을 휘갈기고 있는데 폰이 울리자 도훈이 몹시 당황했다.
'시험 보는데 대체 누구야?'
괜히 시험 중에 핸드폰을 꺼냈다가 오해를 살까 두려웠던 도훈은 얼른 시험을 끝내고 2번째로 빨리 답지를 제출하고 밖으로 나갔다.
부재중으로 남은 번호를 확인해 보니 조교인 강민주였다.
"민주가 대체 무슨 일이지?"
다른 사람도 아닌 조교의 전화였기 때문에 도훈이 곧바로 연락했다.
"여보세요? 조교 선생님 전화 하셨어요?"
도훈은 혹시나 공적인 일일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최대한 공손하게 말했다.
-도훈아. 나 밖에서 통화하는 거야. 혹시 지금 시험 보는 중이야?"
"아뇨. 방금 끝내고 나왔어요. 무슨 일이세요?"
-너 혹시 오전에 심리학과 관련 시험 봤어?
"심리학과요? 아, 네. 교양과목 하나 봤어요. 아침에."
-내가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솔직하게 대답해줄 수 있어?
"뭘요?"
-혹시 커닝같은 거 한 건 아니지?
도훈은 뜨끔했지만 절대 발각될리 없다고 확신하고 뻔뻔하게 대답했다.
"제가 커닝을요? 조교 선생님. 저 도훈이에요. 1학기 단대 수석이요."
-하아···. 그치? 미안해 나도 너무 놀라서.
"네? 놀라다뇨?"
-방금 시험 감독한 조교가 우리과 학과 사무실까지 찾아왔었어. 네가 너무 답을 완벽하게 써서 놀랐다고. 네 번호를 알고 싶다고.
"네? 시험을 너무 잘봐서 감독보던 조교가 제 번호를 물어봤다고요? 그게 무슨···."
-아, 내가 너무 두서없이 얘기했구나. 그러니까 어떻게 된 거냐면.
민주는 해당 조교가 도훈의 재능을 높이사 자기과로 전과시키고 싶다는 말을 보충했다. 듣고 있던 도훈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올 뻔했다.
'뭔 소리야 이게 대체? 전과 제의? 스카우트라도 하겠다는 건가?'
[주인님이 너무 시험을 잘봐서 조교가 놀랐나 본데요?]
'아이씨, 이럴 것 같아서 일부러 문장을 고쳐쓰기까지 했는데 그래도 티가 났나보네,'
[이러면 곤란한 거 아닙니까? 주인님이 본 시험마다 너무 답안이 완벽하게 씌여있을 텐데요.]
'그러니까. 그래도 이럴 줄은 몰랐는데. 근데 교수도 아니고 조교나부랭이가 무슨 스카우트 제의를···.'
도훈은 영문을 몰랐지만 괜히 피곤한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 민주에게 부탁했다.
"그쪽에서 너무 오버하는 거 같아요. 그냥 교재 달달 외워서 쓴 것 밖에 없는데···."
-그래? 네가 쓴 정답이 너무 완벽하다던데? 그분이 나랑 같은 조교긴 한데 박사 후 과정 밟고 있는 분이래. 지도 교수님 부탁으로 잠깐 조교를 맡고 있는 거라고.
"암튼 저도 무슨 일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저 귀찮아 지는 거 질색이니까 연락처 같은 건 알려주지 마세요."
-응, 당연하지. 내 선에서 끊을 게.
"고맙습니다, 조교 선생님."
-시험은 잘 보고 있어? 내일 끝나지?
도훈은 살짝 소름이 돋았다.
'설마 내 시험 스케줄까지 알고 있는 건가?'
[네?]
'시험은 이번주까지거든. 수강하는 과목에 따라서 목요일에 끝나는 사람도 있고, 금요일까지 보는 사람도 있단 말이야. 근데 민주는 내가 내일 끝난다는 걸 정확히 알고 있잖아.'
[헐. 주인님이 수강하는 과목 중 시험보는 과목들을 모두 확인 했나 보군요.]
'그러게 말이야. 가끔 이럴 때마다 깜짝깜짝 놀란단 말이지. 너무 집요한 거 같아서.'
-네, 뭐.
"그렇구나. 아니 요새 얼굴도 자주 못 보는 거 같고 그래서···.
시험 끝나면 내가 맛있는 저녁이나 사줄까하고."
국성대의 중간시험 기간은 1주일.
운좋게 수강하는 과목중에 시험을 많이 안보거나, 혹은 남들보다 일찍 끝나는 학생의 경우는 그때부터 연휴나 다름 없었다.
조교인 민주는 도훈의 시험 스케줄을 확인하고는 뒤로 쭉 쉰다는 걸 알고 미리 선약을 잡으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