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4. 구원회-39-
"분명 서울에서 물건을 대줬다는 놈도 상선이 아니라 똘마니일게 뻔해"
"그건 왜 그렇죠?"
"우리나라 마약은 대부분이 항구를 통해 들어오는 편이야. 비행기로 가져오면 운반비도 비쌀 뿐더러, 공항 검색대에 걸려 적발되는 경우가 허다하거든. 하지만 컨테이너는 워낙에 크고 넓으니 잘만 숨기면 얼마든지 밀반입이 가능하지."
"그렇구나. 그런 말씀 하니까 진짜 형사님처럼 보여요."
"뭘, 마약반 들어간지 얼마나 됐다고."
[항구라면 혹시 부산 쪽을 말하는 거 아닙니까? 부산쪽에 조직이라던.]
'응. 내 생각도 그래. 근데 너무 깊이 아는 척 할 순 없으니 일부러 모르는 척 하는 거야.'
"아이고, 이러다 늦겠다. 그럼 먼저 가볼게. 잘 쉬고 있어 도훈아."
"어, 잠시만요."
도훈이 갑자기 바닥에 떨어진 뭔가를 집어 들더니 빛나에게 던졌다. 묵직한 물체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자 빛나가 빠르게 공중에서 낚아챘다.
"수갑 놓고 가실 뻔 했네요."
"앗, 실수."
빛나가 뻘쭘하게 웃더니 도훈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그녀가 떠나자 호텔 룸에는 광란의 섹스파티 흔적만 남았다.
'헐, 생각해보니까 치우지도 않고 먹튀하고 갔네?'
[먹튀라뇨?]
'나 먹고 튀었으니 먹튀지.'
[주인님이 먹은 게 아니라요?]
'상황을 봐. 누님 둘이 와서 나만 신나게 따먹고 간 꼴이잖아.
나래가 3번, 빛나가 2번. 도합 5번. 이번엔 진짜 내가 착취 당한 거라니까?'
[흐음, 그건 제법 흥미롭군요.]
'젠장. 클린 룸서비스 요청해놓고 밖에서 저녁이나 먹고 와야겠다.'
* * *
호텔 밖으로 나온 도훈은 혼자 저녁을 해결할 식당을 찾다 편의 점으로 들어갔다. 시간도 제법 늦었고 괜히 식당에 혼자 앉아봐야 처량해 보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어휴. 내 신세가 이게 뭐람? 멀쩡한 집 놔두고 난데없이 호텔생활에 끼니는 편의점에서 때워야 하다니. 심지어 이번주는 중간 고사 기간인데.'
[어차피 시험 공부는 할 필요 없지 않습니까? 커닝 아이템이 있으시니까요.]
'그렇긴 한데, 뭔가 집 밖에 나와 있으니까 괜히 처량해지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네. 내가 집도 절도 없는 사람도 아니고 말이야.'
[마음 편히 여행 왔다고 생각 하시죠. 지방 사람들은 서울 구경한다고 몇박 몇일로 호텔에 묵으면서 관광을 다닌다고 하니까요.]
'날 때부터 서울 토박이한테 무슨 서울 관광?'
도훈이 혼자 컵라면에 삼각김밥을 먹으며 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나저나 아까 했던 말 이어서 해보자면, 이 일을 PK단에 흘리는 건 어떨까?'
[PK단이요? 늑대를 잡고자 호랑이를 끌어들이겠다는 겁니까?]
'맞아. 유식한 말로는 구호탄랑지계라고 하지. 호랑이를 몰아 늑대를 잡는 병법이야. 또다른 표현으로는 이이제이라고도 부르고. 오랑캐는 오랑캐로 잡는 방법이랄까?'
[그치만 너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PK단에 정보를 잘못 흘렸다간 주인님이 오히려 역추적을 당할 겁니다.]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스파이인 미호를 이용하면 되니까.'
[그 다중인격 구미호 말씀이시죠?]
'응. 미호는 나를 배신하진 못할 거 아니야. 금제가 걸려 있으니.'
[이건 쉽게 결정하실 문제가 아닙니다. PK단은 팀 단위로 움직이고, 자칫 미호가 아닌 다른 멤버에게 발각될 수도 있습니다. 그 땐 미호도 주인님을 보호해 주지 못할 거고요.]
'음, 그런가?'
[게다가 PK단 입장에서보면 장만석은 현재 플레이어도 아닐 뿐더러, 어찌보면 공통의 적을 가진 동반자라고 여길 여지도 있습니다.]
'동반자라니?'
[장만석이 제일 두려워 하는 것은 헌터 플레이어가 자신을 잡으러 오는 것일텐데, PK단은 플레이어를 증오하니까요.]
'적의 적은 동지란 뜻이야?'
[네.]
'하지만 말이 안 되지 않아?'
[어떤 점이 말씀입니까?]
'PK단은 플레이어를 나쁜 놈들이라고 규정하고 처단하는 거라면서? 근데 객관적으로 봐도 플레이어보다 더 악독한 짓을 벌이고 있는게 장만석이잖아. 가정이기만 하지만 정액으로 신도들을 세뇌시켜서, 성착취 부터 금전 갈취까지 온갖 악독한 짓은 다하고 다니는데.'
[음. 주인님이 뭔가 착각하시는 거 같습니다.]
'내가 착각한다고?'
[PK단이 평범한 인간을 뛰어넘는 능력자 무리임은 맞습니다만, 그들의 힘은 오직 플레이어와 싸우는데만 이용된다는 점입니다.]
'엥? 그게 무슨 소린데?'
[힘이 있다고 하여, 그것으로 정의를 구현하는 단체가 아니란 뜻입니다. 그게 아니면 PK단은 진작부터 범죄 단체를 소탕하고 다녔겠죠.]
'아···. 듣고보니 그렇네?'
[그런 면에선 플레이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강력한 힘을 가진 플레이어들도 많지만, 자신의 소명이 아닌 이상 히어로를 자처하진 않습니다.]
'강한 힘에는 강한 책임이 따르는 거 아니야?'
[글쎄요. 누군가는 그것을 보고 오지랖이 넓다고 표현할 수도 있겠죠.]
'참나. 어이가 없군.'
[주인님. 플레이어나 PK단들은 결코 자경단이 아닙니다. 범죄자를 잡는 것은 빛나양 같은 경찰들이 하는 일이죠.]
'흐음···.'
도훈은 기발한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던 일이 로시의 반박으로 막히자 다시 시무룩해졌다. 잘만하면 손 안대고 코를 풀 수 있을 줄 알았지만, 사정을 듣고 보니 여러모로 걸리는 부분이 많았다.
자칫 스스로의 정체만 노출시키는 자충수가 될 수도 있는 전략이었다.
'알았어. 굳이 도박을 걸 필욘 없겠지. 그 아이디어는 더 진행안하는 것으로 할게.'
저녁을 컵라면과 삼각김밥으로 때운 도훈은 기왕 온 김에 편의 점에서 간식과 음료 등등을 잔뜩 구입한 뒤 다시 호텔로 돌아갔다.
'오. 다시 깔끔해졌군.'
프론트에 클리닝을 말하고 나와서 그런지, 그새 방이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처음 들어왔을 때 상태 그대로였다.
'호텔은 이런 게 좋단 말이야? 멋대로 어지럽혀도 외출하고 돌아오면 원래대로 치워 놓는 거. 아예 호텔에서 1년 내내 살아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아.'
[호텔에서 사신다고요?]
'비싸서 그렇지 돈만 있으면 못할 것도 없지. 식사야 어차피 집에서도 해먹지도 않으니 맨날 사먹으면 그만이고. 날마다 청소도 해주니 치울 필요도 없고. 심지어 위험하면 몸만 내뺄 수 있으니 PK단에 추적당할 일도 없겠군.'
도훈이 호텔 생활의 장점에 대해서 떠올리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가 걸려왔다. 아까 전 귀가한 나래에게 걸려온 전화였다.
"네, PD님. 집에 잘 들어가셨어요?"
-너 방금 외출했었어?
"네?"
도훈은 살짝 소름이 돋았다. 나래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래도 방송국 관계자다 보니 몰래카메라라도 설치했는지 방안을 뒤지던 도훈은, 그녀가 만약 정말로 몰카로 확인했으면 빛나가 들어왔을 때 이미 전화를 걸었을 거라는데 생각이 미쳤다.
-방금 프론트에서 연락왔었어. 도훈이 네가 방을 나갔었다고.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연락달라고 부탁해 놨거든.
나래의 해명을 들은 도훈은 곧 내막을 깨달았다.
'빛나가 자기 이름으로 방을 잡고 프론트에다 외출 여부를 체크해 달라고 부탁했나 보구나!'
[제보자 보호 프래그램의 일환이니 그럴 수도 있겠네요, 방송국 입장에선 말이죠.]
'젠장. 방 청소를 맡기지 말고 몰래 나갔다 올 걸 그랬네.'
"어···. 네, 배고파서 요 앞 편의점에 들러서 간식 좀 사왔어요."
-외출했다가 혹시나 경찰한테 들키면 어쩌려고 그래? 앞으로 그냥 배달 시켜. 요샌 편의점도 다 배달 돼.
방금 전까지 현직 형사인 빛나와 몸을 섞은 도훈에게는 어이가 없는 조언이었다. 하지만 나래가 자신을 걱정해서 하는 말이었으므로 그런가 보다 하고 대충 넘겼다.
"제 생각이 짧았네요. 호텔 주변 편의점 정도는 괜찮을 줄 알았어요."
-아니야. 난 지금 도훈이 너한테 뭐라고 하는 게 아니라, 네가 묵고 있는 방의 출입 기록이 나중에 방송국으로 넘어가도록 되어 있어서 그런 거야.
"네? 방송국으로 넘어간다고요?"
-제보자 보호 프로그램으로 예산을 받았으니 입증자료로 제출해야 하거든. 미안해. 이걸 미리 말해 줄 걸 그랬네.
"전혀 몰랐어요. 아무튼 조심할게요."
-응. 저녁은 먹었어?
"네."
-그래. 조금 답답해도 일주일만 참아. 시간 되는데로 자주 방문할게.
"그래요 누나."
나래와 통화를 마친 도훈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젠장. 무슨 독 안에 든 쥐 신세도 아니고.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받을 줄이야.'
[이러면 내일 중간 시험도 못 치러 가시는 거 아닙니까?]
'아니야. 그렇게 빡세게 감시하는 건 아닌거 같아.'
[네?]
'그게 아니라면 아까 빛나가 여길 들렀던 것도 낱낱히 보고 되었을 거거든. 하지만 나래의 반응을 보니 그건 전혀 모르는 눈치였어.'
[그렇군요. 하긴 주인님이 몰래 다른 여자를 룸에 불러들였다는 걸 알면 당장 달려왔을테죠. 그런데 어떻게 주인님이 편의점에 다녀온 사실을 알았을 까요?]
'클린 룸 서비스를 부탁해서인 거 같아. 외출하면서 방을 청소해 달라고 했으니 당연히 출입기록이 남았겠지.'
[아아.]
'문 밖에 방해 금지 팻말 하나 걸어놓고 나갔다오면 안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를 거야. 어차피 CCTV달아놓고 감시하는 것은 아니니까.'
[거참, 그나저나 여러모로 귀찮게 됐군요.]
'그러게. 호텔 생활 좋다는 말은 취소다, 취소.'
도훈은 답답함을 뒤로하고 내일의 일정을 위해 잠을 청했다.
호텔에 혼자 누워 있으니 기분이 조금 이상했지만, 5연속 섹스의 후유증 때문인지 딱히 여자 생각이 나진 않았다.
* * *
다음날 아침이 되자 도훈은 서둘러 짐을 챙겨 호텔을 빠져 나왔다.
혹시나 외출 기록이 잡힐까봐 정체불명의 모자까지 눌러썼기 때문에 그의 얼굴을 알아본 사람은 없었다.
'오늘도 후다닥 시험 치르고 금메달이나 따야겠어.'
[몇관왕 예상 중이십니까?]
'오전 오후 모두 3과목이니 3관왕이겠지.'
[너무 일찍 나가시면 괜히 의심 받지 않을까요?]
'응?'
[정답도 모범 답안인데, 심지어 시험도 1등으로 끝내면요.]
'그러려나? 근데 원래 공부를 많이한 사람일수록 빠르게 시험을 치르는 게 정상이지. 늦게까지 시험장에 남아있다고 점수를 더 받는 건 아니거든.'
도훈은 과거 대학을 다녔을 때도 시험을 치르는 속도는 매우 빨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적은 늘 최상위권을 달렸다.
[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괜히 오해받지 않으려면요.]
'그런가. 알겠어. 금메달은 너무 티나니까 앞에 몇명 나가고 나면 따라 나가야 겠다.'
1교시부터 시작된 시험은 난이도가 꽤 높은 편이었다.
물론 커닝 안경을 쓴 도훈은 난이도가 어렵든 쉽든 정답이 보였기 때문에 후다닥 끝낼 수 있었다.
먼저 시험을 다 끝내고도 눈치를 보느라 남아있게 된 도훈은 괜히 하릴없이 시험을 보고 있는 학생들을 힐끔거리기 시작했다.
교양수업이었기 때문에 8선녀 중 한 명인 서현이 함께 시험을 치르고 있었는데, 1학년 수석이라는 서현조차도 끙끙대며 시험을 치르고 있을 정도로 난이도가 높은 편이었다.
'시험이 어렵긴 어려웠나 보구나. 서현이도 맥을 못출 정도면.'
[주인님만 너무 독보적으로 성적을 잘 받으시겠군요.]
'그래봐야 커닝으로 한 건데 뭘.'
도훈이 주변을 둘러보며 시간을 때우고 있는데, 갑자기 감독을 보던 남자조교가 도훈을 조용히 불렀다.
"거기 학생. 두리번 거리지 마요. 자꾸 뒤돌아보면 부정행위로 간주합니다."
처음 도훈은 자신을 부르는지도 모르고 멍하니 있다가 뒤늦게 지적받은 사실을 깨닫고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 이후로 남자 조교는 계속 도훈을 주시했다.
한 번 찍히고 나니까 괜히 눈에 밟힌 것이다. 그는 시험 감독을 보던 중 도훈의 옆으로 가까이 오더니 조용히 속삭였다.
"안 풀고 뭐해요?"
"네?"
"아직 시간 많이 남았으니까 포기하지 말고 풀어봐요. 학생만 어려운 게 아니고 변별력이 높은 시험이니까."
도훈이 시험지를 뒤집어 놓은 것을 보고 감독을 보는 조교가 오해를 한 것이었다.
"다 풀었는데요."
"뭐라고요?"
"다 풀고 엎어 놓은 건데···."
조교는 도훈이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함께 시험을 치르고 있는 40여명의 학생이 쉴새 없이 팬을 놀리고 있는 것에 비교하면 지나치게 빨랐기 때문이었다.
"다 풀었으면 왜 제출 안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