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2. 구원회-27-
도훈은 어이가 없었다.
휘겸을 찌르고 자수한 조태오가 자신까지 모두 불었다는 소리였다.
'하,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군. 나에 대해선 꼭 함구할 거라고 그렇게 호언장담을 하더니만.'
[조태오가 결국 배신을 했군요.]
'어쩌면 형량 거래에 응한 것 같기도 해. 경찰 측에선 영상을 찍은 나를 증인으로 내세워야 기소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할 테니. 조태오를 구워 삶았겠지.'
[기소요?]
'경찰에 자수했다고 다 무조건 잡아들이는 게 아니거든. 현행범도 아니고 범죄의 구성이 조금 복잡하잖아. 자백보단 증거가 더 효과적일테고, 거기에 증인까지 얹으면 이번 건 전체를 싹다 병합시켜서 윗선까지 엮을 수 있다고 판단한 거겠지.'
[그럼 어떻게 되는 건가요? 주인님은 전면에 나서지 않기위해 일부러 증거를 채증해 방송국에 건넨 거 아닙니까? 나서지 않고 놈들을 소탕하기 위해서요.]
'그러니까 말이야. 하, 조태오 그 새끼만 아니었어도.'
"그럼 전 이제 어떻게 되는 거예요? 혹시 저도 잡혀가는 건가요?"
나래가 선글라스를 슬쩍 내리더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치 누군가 자신을 쫓기라도 하는 것처럼 초조한 표정이었다.
"아니. 내가 그럴 일은 절대 없도록 만들 거야."
"만들 거라뇨?"
"기자들에게도 취재원 보호라는 게 있어. 이런 걸 지켜주지 못하면 앞으론 절대 중요한 제보를 받을 수가 없거든. 즉, 우리로선 밥 줄이 끊긴다는 얘기야."
"아하."
"근데 조금 걱정되는 게 있어."
"뭔데요?"
강피디가 계속 빠르게 걸으며 도훈을 잡아당겼다. 억지로 팔짱을 끼고 있는 도훈으로서는 그녀의 가슴을 또렷하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일부러 저러는 건가?'
[네?]
'스킨십 말이야. 대놓고 가슴에 내 팔을 문지르는데.'
[설마요. 혹시나 형사들이 추적할까봐 쫓기는 마음 때문이겠죠.]
'흐음. 의심스러운데.'
"아는 형사에게 우연히 들었는데, 조태오라는 사람이 네 신상을 정확히 알고 있다고 말했다더라고."
"제 신상이요?"
"응. 자기한테 선수들 자료가 다 있다고."
도훈이 씩 웃었다. 애초에 거짓으로 작성된 신분이었고, 지금의 도훈과 하나도 맞는게 없었다.
"그건 신경안써도 되겠네요."
"왜? 조태오가 거짓말 한 거야?"
"아뇨. 애초에 제가 낼 서류가 다 가짜였거든요."
"정말?"
"네."
"천만다행이다. 벌써 해당 주소 소재지로 경찰들이 출동했을까봐 널 이리로 불러낸 거였거든."
알고보니 나래는 경찰 쪽에 미리 정보를 입수하고 제보자 보호차원에서 도훈을 호출한 것이었다.
도훈은 그녀의 마음씀씀이에 감사를 표했다.
"고마워요."
"아니야. 당연히 해야할 일인데. 근데 이름이랑 주소는 위조를 했어도 얼굴은 고스란히 남았을 텐데···."
"제 얼굴이요?"
"응. 경찰들이 압수수색하면서 호스트 빠 CCTV까지 싹 확보했나보더라고. 거기 네 얼굴이 찍혔을 거 아니야."
"음. 그건 좀 문제네요."
[이런. CCTV의 존재를 생각 못 했군요. 주인님이 얼굴을 바꾸고 활동하셨어야 했는데.]
'찍힌 건 어쩔 수 없는데, 상관없지 않을까?'
[네? 경찰이 주인님 얼굴을 아는데도요?]
'어차피 제대로 찍힌게 몇 개 없을 거야.'
[왜요? 화질이 별로라서요?]
'그것도 있는데, 애초에 호빠 자체가 범죄 현장이었잖아. 스스로 증거를 남기는 것도 아니고, 거기 CCTV를 달아봐야 얼마나 설치했겠어?'
[아, 그렇군요.]
'게다가 난 아직 주요 피의자가 아니라 증인을 위한 참고인 신분이잖아. 영장이 떨어져야 지명수배라도 때릴 텐데, 담당 형사아니고서야 어차피 내 얼굴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야지.'
[그건 그나마 다행이군요.]
"그래서 말인데 당분간 숨어 지내는 게 좋을 것 같아."
"숨어지낸다고요? 제가 왜요?"
"경찰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고 다닐텐데, 혹시나 걸리면 안 되잖아."
"전에도 말씀 드렸지만, 전 죄 지은게 하나도 없거든요. 마약을 먹인것도 아니고 강제로 성폭행을 하지도 않았고요. 막말로 잡혀 가더라도 상관없어요."
"그래도. 알려지기 싫어서 우리 쪽에 제보한 거잖아."
"그건 그렇죠."
"그리고 우리 프로그램 입장에서도 제보자 보호를 제대로 못해내면 면이 안 서거든."
"흐음."
"길어야 기소될 때까지만이야. 어차피 증거가 차고 넘치니까 증인 없이도 기소는 충분할 거야. 정식으로 영장이 떨어지면 남은 여죄를 파악하느라 정신 없어서 신경을 못 쓸거고."
"그러니까 누나 말은 한동안만 경찰 눈에 띄지 않게 숨어있으라는 거죠?"
"응."
"어디에요?"
"호텔 잡아줄게."
"호텔은···."
"일주일이면 충분할 거야."
도훈은 왠지 강나래의 개인적인 욕심이 들어간 제안이라고 느꼈지만 굳이 내색하지 않았다.
[갑자기 호텔을···. 이거 강나래PD가 괜히 머릴 굴리는 거 아닙니까?]
'나도 약간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중이야. 제보자 보호를 명분 삼아서 나를 착취하려는 느낌적인 느낌이랄까?'
[하아-. 그때 주인님이 색계를 쓰시면 안 되는 거 였습니다. 한번 맛을 본 여자들이 주인님을 가만 놔두질 않는 군요.]
'어떻게 해 그럼. 방송국 제보를 안 할 수도 없는 입장에서 담당 PD랑 관계를 터놓는 게 당연한 거잖아.'
[아니 누가 관계를 트는데 꼭 속궁합을 맞춥니까? 주인님이나 그렇죠.]
'그거야 결과론적인 얘기고.'
[암튼 어쩌실 겁니까?]
'아니 중간고사 기간인데 진짜···.'
[그냥 무시하시죠. 어차피 방송은 나갈거고, 경찰 조사는 시작되었습니다. 주인님은 적당히 뒤에서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되는 일입니다.]
'그렇긴 한데, 어쨌든 방송 전이라서 나래에게 잘 보이는 것도 중요하단 말이지.'
[그럼 방송을 위해 주인님이 몸으로 봉사를 하시겠다고요? 이거 완전 몸신공양아닙니까?]
'쓰읍. 생각해보니까 완전 착취당하는 기분인데.'
"호텔에 가만히 있으면 돼요? 식사는요?"
"식사는 내가 필요하면 사다 줄게. 일단 밖으로 나오기 힘들테니까."
"누나가요?"
"응."
도훈의 선글라스 너머로 나래의 음흉한 눈빛을 읽었다. 뜬금 없이 연락을 한 것도 그렇고, 지금의 반응만 봐도 이럴 기회만 기다린 사람 같았다. 즉, 명분이 생기자마자 도훈을 따먹을 궁리를 짠것이었다.
'참나, 하여간 배운 여자들이 더 하다니까?'
[주인님의 잘못도 있습니다. 그러게 왜 순진한 강PD에게 맛을 보여줘서는.]
'그래. 내 책임이니 결자해지 해야지 뭐.'
[일주일간 호텔로 들어가신다고요? 시험은요?]
'내가 뭐 호텔 하나 못 빠져나오겠어? 그건 별로 상관없어.'
[굳이 무리한 요구에 응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집에서 칩거한다고 해도 별 차이는 없을테니까요.]
'그게 아니라 방금 생각해 봤는데, 이번 사이비 종교건도 한 번 제보를 해볼까하고.'
[강PD에게 재림 예수 구원회를요?]
'이런 건 원래 매스컴을 타야 판을 키우는 법이거든. 어제 봤지? 외부인들 철저하게 통제하는 거. 장만석은 자신의 왕국이 밖으로 드러나는 걸 두려워하고 있어. 당연히 그럴 수 밖에. 만약 정말로 놈이 전직 플레이어이자 현 탈주자라면 신분을 노출하는 게 최악의 위험일 테니까.'
[호오, 그렇군요.]
'물론 제보 프로그램 정도로 종교를 분쇄시키긴 무리겠지만, 장만석을 초조하게 만들 수 있겠지. 그리고 사람은 긴장하면 약점을 노출하는 법이거든.'
[그때 주인님이 장만석을 노려보겠다는 말씀이군요.]
'그렇지. 놈의 능력만 파악할 수 있다면, 끝나는 게임이니까.'
[나름 괜찮은 방법이군요. 강나래PD의 욕망을 채워줘야 한다는 것만 빼면요.]
'그러게 은근히 이 여자도 밝히네?'
"흠, 알았어요. 호텔은 언제 들어가면 돼요?"
"바로 가면 좋지. 최대한 경찰에 노출을 안 하려면."
"지금요? 집에서 아무것도 못 챙겨 나왔는데요? 속옷이고 뭐고 ···."
"필요하면 내가 사줄게."
[강PD가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요? 아무리 제보자 보호가 중요하다지만···.]
'어떻게든 지금 호텔로 같이 입성하자는 소리로 들리는군.'
[강PD가 많이 참았나 본데요?]
'뭐, 마지못한 척 따라주지. 나도 부탁할게 있으니까.'
도훈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럼 어디로···."
"이쪽으로 가면 내 차가 주차되어 있어. 그걸 타고 바로 이동하자."
"네."
도훈은 강PD의 차를 타고 도심 한 복판에 있는 비즈니스 호텔로 입성했다.
졸지에 중간고사 기간에 호텔에 감금되는 셈이었지만, 딱히 문제될 건 없었다.
그에게 연락할만한 여자들도 대부분 시험기간이거나, 또는 그가 시험 중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별도의 연락을 안할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나래는 도훈을 데리고 호텔 룸으로 함께 들어갔다.
인적 사항이 남는다는 핑계로 자기 이름으로 방을 빌렸지만, 굳이 룸 안까지 따라온 걸 보면 속셈이 훤히 보였다.
"근데···. 모텔같은 곳도 상관없는데 굳이 호텔까지···."
"걱정마. 이 정도는 제작비에서 다 지원이 되니까."
"호텔 숙박비도 제작비 지원이 된다고요?"
"말했잖아. 이건 제보자 보호 프로그램의 일종이라고. 당연히 예산에서 나가는 거지."
"아···."
"암튼, 잠깐만 쉬자. 아까 너무 오래 걸었는지 다리가 좀 아프네."
선글라스를 벗은 나래가 호텔 소파에 철퍼덕 앉았다. 엉덩이가 무거운 것으로 보아 딱히 나갈 생각은 없어 보였다.
'이건 뭐 대놓고 한 번 따달라고 하든지, 은근히 압박 주네.'
[너무 노골적이라서 민망할 지경입니다.]
'나래는 나를 바보로 보는 건가?'
도훈이 환기를 위한 창문을 열더니 담배를 입에 물었다.
"한 대 펴도 돼죠?"
"여기 금연실 아니야?"
"아니. 밖에 나가지도 못하는데 담배도 못 피우게 하는 건 좀 그런데···. 다른 건 다 참아도 담배는 못 참거든요."
"흐음. 그것도 그러네. 알았어. 나중에 룸 클리닝비 청구하면 그냥 주지 뭐."
"고마워요."
"뭘 또. 괜히 공익제보하다가 너만 피곤하게 됐는데."
강PD가 은근슬쩍 도훈의 옆으로 오더니 호텔 밖으로 보이는 전경을 함께 바라보았다.
20층 고층이라 그런지 몰라도, 생각보다 전망이 좋은 편이었다. 멀리 한강 다리가 보이고, 빽빽한 빌딩숲이 끝없이 펼쳐졌다.
"누나도 한 대 피실래요?"
"나? 주면 좋고."
도훈과 나래는 고층에서 도심을 내려다보며 담배를 서로 피웠다. 도훈이 아무말 없이 담배를 태우는데, 갑자기 나래가 도훈의 팔목을 잡더니 말했다.
"너무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우린 제보자는 꼭 보호하니까."
딱히 무섭다는 얘기도 하지 않았는데 먼저 분위기를 잡는 모습을 보고 도훈이 속으로 콧방귀를 꼈다.
'이 여자 이거 웃기는 여자였네.'
[네?]
'딱 보니까 내가 나이도 어리겠다, 경찰이 잡아간다고 하니까 겁먹을 줄 알고 괜히 한 번 찔러보는 거 같은데?'
[혹시 이것도 일종의 가스라이팅인가요?]
'뭐 완벽하게 비슷하진 않지만 심리적으로 핀치에 몰린 상대에게 호감을 얻는 방법이긴 하지. 자신에게 의탁하게 만들어서 나를 멋대로 휘두르려는.'
[좀 치졸한데요. 공중파 PD가 이러면 안되는 거 아닙니까?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나도 정의감 넘치는 열혈PD라고만 생각했는데, 역시 사람이 욕망에 휘둘리면 자기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단 말이지.'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적당히 튕겨볼까? 본색을 드러내게 말이야.'
"고마워요, 피디님."
"뭘 또. 그냥 누나라고 해. 전에는 편하게 부르더니."
과거의 이야기를 꺼내는 걸 보니, 슬슬 도훈을 유혹할 생각인 것 같았다. 하지만 도훈은 일부러 그녀의 팔을 뿌리치며 정중하게 말했다.
"아니에요. 그땐 제가 좀 실수한 것 같아요."
"···실수라니?"
"아니, 저희 처음 만났을때요. 나중에 생각해봤는데 그러면 안되는 거잖아요."
"뭘 또 그러면 안 돼?"
도훈이 밀어내는 기색을 보이자, 강PD가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다. 분명 속으로는 내심 호텔까지 마련해주면 도훈이 알아서 먼저 덮칠거라고 믿었던 모양이었다.
"아니···. 저는 어쨌든 제보자고 누난 프로그램 PD잖아요. 저희 사이에 사적인 관계가 있으면 방송의 객관성이···."
"아니야. 그런 말 마.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니까."
"네?"
"난 네가 정말로 마음에 들었었거든. 방송을 떠나서···. 남자로서."
조급해진 나래가 적극적으로 들이대기 시작했다.
도훈은 그녀의 속셈을 뻔히 알면서도 일부러 야멸차게 굴었다.
"아니에요. 누나, 저 어떤 사람인지 잘 알 잖아요. 돈 벌려고 몸까지 팔려고 했던 놈이에요."
"그게 무슨 상관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