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807화 (1,787/2,000)

1807. 구원회-12-

"아니, 어떻게 제 이름을···."

승아는 도훈이 갑자기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몹시 놀란 눈치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름을 알려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양 권사는 늘 이름도 모르는 것처럼 조양이라고만 불렀으니까.

"아까 들고 계시던 서류에 적혀 있더라고요. 우연히 봤어요."

도훈이 눈짓으로 테이블 위에 올려둔 서류철을 가리켰다. 기록자란에 갈겨 쓴 글씨를 도훈이 멀리서 읽은 모양이었다.

'눈도 좋긴.'

"근데 무슨 착각을 말씀하시는 건지?"

"아니, 제가 아까···."

승아는 발기 사이즈를 재기 위해 도훈의 잦이를 빨았던 이야기를 꺼내려다, 그 말을 하는 것이 더 이상해 보일까 봐 말을 거두었다.

"···됐어요. 그만하죠. 손가락에 끼운 건 직접 빼세요."

승아는 더 말을 섞었다간 괜히 말려들 것 같은 기분에 해체한 측정 장비를 007 가방에 정리하기 시작했다.

도훈이 피식 웃더니 계속 말을 걸어왔다.

"근데 승아씬 몇 살이에요?"

"제 나이가 왜 궁금한데요?"

도훈의 이죽거리는 태도가 거슬렸는지 승아가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저랑 비슷한 또래로 보여서요. 혹시 스물셋인가?"

"······."

"대답 못 하는 거 보니까 맞나보네. 저도 스물 셋이에요. 우리 동갑인데 말 편하게 할까?"

"······."

도훈이 계속 수작을 걸자 승아는 점점 짜증을 참기 힘들었다.

양 권사의 명령에 절대복종했기 때문에 아무렇지 않게 처음 보는 남자의 잦이를 입에 물긴 했지만, 그로 인해 도훈이 자신을 쉽게 본다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양아치 같은 자식 같으니. 아직 성기사단 입단도 못 한 평신도 주제에 감히 나를 희롱해?'

승아는 구원회 내에서 산전수전 다 치른 수호천사였다. 지금 위치까지 올라오면서 겪었던 수많은 우여곡절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야."

결국 참다 못한 승아가 거짓말 탐지기 가방을 쾅- 소리 나게 덮으며 한마디 했다.

"응?"

"너 내가 우스워?"

"무슨 소리야 그게?"

"누구 앞에서 함부로 말을 놓겠다 말겠다야? 아직 주제 파악이 안 돼?"

의외로 격한 반응에 도훈도 살짝 흥미를 보였다.

'왜 저렇게 발끈하지?'

[주인님이 너무 과했던 게 아닐까요? 승아양 입장에선 오늘 막 들어온 새내기가 자신과 맞먹으려 든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참나. 여기 오래 있는 게 무슨 벼슬인 줄 아나. 예뻐서 좋게 대해주려고 했더니 안 되겠군.'

"왜? 동갑끼리 편하게 말 놓으면 안 돼?"

"하-. 이것 봐라?"

승아가 허리에 손을 얹더니 삐딱한 자세로 경고했다.

"아무리 천둥벌거숭같은 놈이라도 분위기 파악 너무 못하는 거 아니니? 똑똑히 들어. 여긴 철저한 계급 사회야. 난 오늘 들어온 너 같은 게 함부로 대할 레벨이 아니란 말이야! 이게 어디서!

"웃기고 있네."

"···뭐?"

도훈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근육을 줄이긴 했으나 185에 달하는 키는 여전했다. 승아를 위에서 내려다보며 도훈이 말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여자 앞에서 설설 기기라도 할까? 콱, 조그만 게."

"이, 이!"

명백한 위협을 느낀 승아가 급히 내선 전화를 집어 들었다. 그 순간 도훈이 빠르게 손을 뻗더니 맨손으로 전화기 줄을 잘라버렸다.

슥삭손날을 칼날처럼 응용한 한 수.

까무러치게 놀란 승아가 겁을 집어먹고 뒷걸음질 쳤다.

"가, 가까이 오지마! 소, 소리 지를 거야!"

"어이, 조승아씨. 안 때릴 테니까 말로 합시다."

"저, 저리 가라고!"

승아가 선이 잘린 수화부를 무기처럼 앞으로 내밀었다. 도훈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의자를 당기더니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난 여기 앉을 테니까, 계속 서 계시든가."

"······."

"아니, 말로 하자니까? 어쨌든 오해는 풀어야 할 거 아니야?"

"······."

겨우 침착을 되찾은 승아가 수화기를 다시 내려놓더니 맞은 편에 앉았다.

"계급 사회니 뭐니, 그딴 건 잘 모르겠고. 동갑끼리 말 놓겠다는 게 그렇게 못 할 말인가?"

"그, 그래도···. 너는···."

"왜? 나도 성기사단 입단하면 어차피 같은 등급 아니야?"

"아직은 아니야."

"어차피 오늘 내로 입단할 거야. 그보다는 너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

"대답하기 싫어도 어차피 나한테 다 말하게 될 거야. 그러니까 서로 쉽게 쉽게 가자고."

"누가 대답해 준대?"

"말 안 해도 다 안다니까?"

"······."

"나는 이곳 교회에 궁금한 게 아주 많아. 내가 볼 땐 다들 나사가 하나씩 풀려 있는 것 같거든."

"뭐, 뭐라고?"

"그래서 첫 번째 질문이야. 너는 양 권사의 첩인가? 아니면 섹파?"

"미친! 당장 소리 질러서 사람 부를 거야!"

"거, 진짜 사람 피곤하게 만드네."

도훈이 갑자기 팔을 휘두르더니 건물 벽을 주먹으로 쾅- 찍었다. 내공을 실어 휘두른 주먹에 콘트리트 벽이 쩍- 하고 갈라지더니 실금이 벌어졌다.

"허, 헉!"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괴력에 승아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사람이 아니라 숫제 괴물이었다.

"말로 하자니까 말로. 힘쓰게 만들지 말고."

"······."

승아는 벽에 금을 가게 한 괴력의 주먹에 맞으면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소리를 질러 다른 사람들을 불러도 결국, 목격하는 건 자신의 시체가 될지도 몰랐다.

"이제 좀 진정이 돼?"

"······."

"괜찮아 대답하지 않아도. 나는 다 알 수가 있어."

도훈은 마음의 소리를 켜 승아의 속마음을 읽었다.

<뭐, 뭐하는 새끼지? 대체 정체가 뭐야?>

하지만 승아는 도훈의 질문에 대한 답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괴력에 압도당한 상태였다.

도훈이 다시 물었다.

"뭐 어쨌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너희들은 왜 이렇게까지 구원회를 맹신하는 거지? 딱 봐도 정상이 아니지 않아?"

"······."

<역시 소시오패스였어. 테스터기 반응부터가 정상이 아니었는 데···. 아아, 권사님은 어쩌다 저런 놈을···.>

"하아-. 전혀 질문에 대답을 안 하고 있군."

"······."

마음의 소리를 통해 정보를 파악하려고 했던 도훈은 낭패감에 휩싸였다.

'협박해서 될 게 아닌데?'

[마음의 소리로 심문하는 전략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차라리 회유가 빠르지 않을까요?]

'그러게. 나도 이럴 줄 알았나.'

협박 전략에 실패한 도훈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안 되겠다. 처음부터 다시 가자."

"···뭐라고?"

도훈이 주머니에서 금장 라이터를 꺼내 들었다.

"담배 펴도 되지? 아까 양 권사 보니까 실내에서 시가도 피우던데."

"······."

일부러 금장라이터에 시선을 집중시킨 도훈이 라이터 불을 당기며 소리쳤다.

"레드 썬!"

불꽃을 본 순간 승아의 기억이 삭제되었다. 필름이 끊긴 것처럼 싹둑 잘려나간 기억 속에는 도훈이 위협을 했던 순간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심지어 자신이 도훈의 몸에서 부착물을 떼어낸 뒤 007가방을 덮었던 것까지 모두 소실되고 말았다.

승아의 기억이 10분 전으로 돌아오는 순간, 도훈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승아의 허리를 잡고 부축했다.

"어, 어···. 지금 뭐하는 거예요?"

"괜찮아요? 정신이 좀 들어요?"

"네? 갑자기 무슨···."

"휴-. 다행이네. 아니 갑자기 기계 정리하다가 픽 쓰러지셨거든요."

"제, 제가요?"

기억이 잘려 나간 승아는 갑자기 의자에 앉아있는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

'부, 분명 기계를 정리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네. 갑자기 휘청대서 제가 놀라서 뛰어와서 의자에 앉혀 드린 거거든요. 혹시 기립성 저혈압 뭐 이런 거 있어요?"

"아, 아뇨?"

승아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지난 10분간의 기억이 송두리째 사라진 승아로서는 도훈의 말을 곧이 곧대로 믿을 수밖에 없었다.

'내, 내가 의식을 잃었다고? 진짜?'

"일단 심호흡을 해보세요. 쓰러지기 전에 부축해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바닥에 머릴 찧으실 뻔했어요."

"아···."

도훈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더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사람 쓰러지는 거 처음 봐서 깜짝 놀랐네."

"···제가 진짜로 의식을 잃었다고요? 얼마나요?"

"잠깐이에요. 방금 전에 휘청하시는 걸 보고 제가 바로 잡아서 의자에 앉혀드렸거든요. 그리고 방금 정신을 차리셨고요. 혹시 현기증이라도 온 거예요?"

"아, 아니···. 그럴 리가···."

승아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고등학교 운동장 조회 시간에 햇볕을 내리 쬐다가 픽픽 쓰러진 여학생들을 본 적은 있지만, 정작 자신이 그런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심지어 이곳은 실내였고, 생리로 인한 빈혈이나 그런 것도 전혀 아니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도훈이 그녀의 의문을 해소시키려는 듯 덧붙였다.

"음, 혹시 시간되면 나중에 병원 한 번 가보세요. 제가 군대 있을 때 동기 하나도 어느 날 갑자기 픽 쓰러졌는데, 병원 가니까 기립성 저혈압 증세라고 하더라고요. 본인도 그때 알았대요."

"···아, 네. 감사합니다."

"아무튼 다행이에요. 맞다. 이제부터 뭘 준비하면 되나요, 선배님."

"서, 선배님요?"

"네. 당연히 선배님이죠. 수호천사 아니세요?"

"아···. 아니 뭘 또 굳이. 어차피 민용씨도 입단하고 나면 저랑 같은 등급인데요."

'캬. 반응 확 다른 거 보소?'

[어떻게 된 겁니까? 아까와는 전혀 상반된 태돈데요?]

'먼저 높여주니까 기분이 좋아졌나 보지. 내가 다치지 않게 도와줬다는 사실도 있고 말이야.'

[역시 주인님은 임기응변이 능하시군요.]

'대접 받고 싶어하는 거 같으니 바짝 엎드려 드려야지.'

"에이, 그래도 아직은 입단도 못 했잖아요. 저 꼭 성기사단 되고 싶거든요. 잘 좀 부탁드릴게요."

"흐음. 뭐, 그거야 민용씨 하기 나름이죠. 근데 혹시 운동을 오래 하셨어요?"

"네? 저요?"

"아까 상의 탈의했을 때 보니까 몸이 되게 단단하시더라고요."

"아···. 네. 원래 암벽 등반을 좀 배웠습니다."

"암벽 등반이요? 클라이밍?"

"네. 맞아요. 어려서부터 부모님이 시켰는데, 고등학교 때까지 대회도 나가다 영 재능이 없는 것 같아서 중도 포기했어요."

"아···. 그래서 몸이 그렇게···."

"티가 좀 나던가요?"

"네. 놀랐어요. 몸이 너무 단단하길래."

"그러셨구나. 옷 입고 있으면 사람들이 잘 모르더라고요. 하하, 쑥스럽네요. 실력이 안 돼서 그만 뒀는데."

"아니에요. 그래서 그렇게 침착하신 거예요?"

"네?"

"조금 의아했거든요. 그래프가 너무 안정되게 나오길래."

도훈은 승아의 의문을 해소시키지 않으면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자신의 정체를 의심하고 있었고, 이에 대한 명쾌한 해답이 나오지 않는 이상 앞으로도 꾸준히 경계할 것 같았다.

"네, 맞아요. 실내 암벽을 타다가 나중엔 진짜로 산을 탔거든요. 아무리 보호장비 차고 있어도 한순간 실수하면 죽을 수도 있어요."

"아···."

"그래서 절벽에 오르는 사람들은 대체로 성격이 침착한 편이에요. 실수하면 목숨을 잃을 수 있으니, 늘 평상심을 유지하는 연습을 하거든요."

"신기하네요. 주변에 암벽 등반하는 사람을 한번도 본 적이 없어서."

"어, 근데 한번은 좀 놀랐었는데."

"네?"

"아까 거짓말 탐지기할 때 살짝 튀지 않았어요?"

"네. 맞아요. 그때 긴장한 거예요?"

"아뇨. 선배님이 너무 예쁘셔서···."

"네, 네?"

"아닙니다. 제가 좀 미인 앞에선 긴장하는 편이라."

자꾸 듣기 좋은 말만 하는 도훈의 태도에 승아는 자기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처음엔 이상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말도 잘하고 성격도 싹싹한 편이었다.

'역시 양 권사님이 안목이 있으시구나. 입단하면 우리 교회에 큰 보탬이 되겠어.'

"별말씀을···. 암튼 준비는 간단해요. 일단 교회 안에 별도의 방이 있어요. 보통은 참회방이라고 부르죠."

"참회방요?"

"네. 나중에 따로 성경 공부해보시면 알겠지만, 저흰 섹스를 통해 몸에 든 삿된 기운들을 밖으로 배출시키거든요. 정기가 쌓이면 정념이 되고, 욕구 해소가 안 되면 나중엔 마구니가 끼어 온갖 문제를 일으키죠."

"아···."

"그래서 몸 안에 삿된 기운들을 모두 배출하면서 지은 죄를 말끔히 씻어낸다는 의미에서 참회방이라고 불러요."

'정말이지 신박한 개소리가 아닐 수 없군.'

[정녕 미쳤습니다, 이들은.]

"···그렇군요."

"참회방에 들어가시기 전엔 목욕재계를 꼭 하셔야 해요. 몸신 공양을 할 때 늘 깨끗한 육신을 유지하셔야 하거든요."

"목욕재계요? 샤워가 아니라?"

"네. 역시 교회 내에 별도의 사우나 시설이 있어요."

"우아, 여긴 없는 게 없네요?"

"그쵸. 아, 맞다. 참고로 사우나는 남녀 혼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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