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6. 구원회-1-
도훈은 딜레마 상황에 답답해졌다.
통상 중간고사 기간은 일주일 가량.
1학기 때 도훈은, 시험 전주부터 빡공에 들어가 시험 기간 내내 밤을 샐 정도로 집중했다. 그 결과 단대 수석이라는 영광을 안았지만,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기울인 것도 사실이었다.
[주인님. 두 가지를 동시에 해낼 순 없습니다. 시험을 포기하시든지, 아니면 구원회 조사를 미루시든지 양자택일하셔야 합니다.
어쨌든 일주일 정도 늦춘다고 사이비 단체가 어디 도망가는 것은 아니니까요.]
'흠. 방금 김비서 사연까지 들었는데, 가만히 손 놓고 있는 것도 성격에 안 맞는데.'
[아니면 이번만이라도 아이템의 힘을 빌리시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겁니다.]
'이거 난감하게 됐군.'
도훈이 고민에 빠졌다.
시험을 잘 보는 것도 중요하긴 했지만, 그로 인해서 중요한 미션을 미루는 것이 과연 온당한 것인지 판단해야 했다.
고민 끝에 도훈은 결국 미션을 선택했다.
'결심했어. 이번 시험은 컨닝으로 간다.'
[오오, 드디어 마음을 먹으셨군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 같아. 내 알량한 자존심 하나 지키고자, 플레이어의 사명까지 늦출 순 없지. 막말로 시험 점수 그 딴 게 뭐라고? 그거 못 본다고 임용에 떨어지는 것도 아닌데.'
[잘 생각하셨습니다. 이제야 좀 주인님답습니다.]
'나다운 건 뭔데?'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태도 말입니다. 유독 시험에 있어서만 타협하지 않는 모습이 답답했거든요.]
'그런가?'
[과거에도 임자 있는 여자는 안 건드린다는 원칙에 있어 굉장히 완고하셨죠. 하지만 지금은 전혀 신경 쓰지 않잖습니까? 그렇다고 주인님이 딱히 변한 건 아니니까요.]
'그거야 뭐···.'
[괜찮습니다. 전 지금 주인님이 줏대 없다고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때론 전향적 태도가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때가 있다는 뜻입니다. 저는 주인님의 결정에 전적으로 찬성합니다.]
'말이라도 고맙다.'
[별 말씀을.]
결심을 마친 도훈이 김비서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며 다 짐했다.
'김 비서는 아무 걱정 말고 있어. 돌아가신 어머님 복수는 내가 대신해 줄게.'
* * *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응. 조심히 가. 집에 도착하면 저녁이겠다."
"괜찮습니다. 도훈씨 저녁식사라도 지어드리고 싶었는데···."
"아니야. 우리 집은 요리하기엔 적절치 않거든. 보다시피 식재료도 없고 말이야."
김비서가 쭈뼛거리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혹시 다음에 올 땐 제가 식재료를 사와서 식사를 차려드려도 될까요?"
"응?"
"허락해 주세요. 도훈씨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거든요."
간절하게 말하는 김비서를 차마 거절할 수 없었던 도훈이 마지못해 허락했다.
"그래. 뭐, 다음에는."
"감사합니다."
"뭘 또 감사해. 내가 더 고맙지. 청소도 싹 다 해주고 식사까지 차려준다는데."
"아닙니다. 정말···. 저는 도훈씨에게···. 이것저것 감사한 게 너무 많습니다."
"하하. 말이라도 고마워."
그때였다. 머뭇거리던 김비서가 갑자기 도훈의 입술에 입을 맞추는 것이었다.
쪽-
"아···."
"죄,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 그럼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기습 키스를 한 김비서가 도망치듯 사라졌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도훈이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거참.'
[피할 수 있으면서 왜 안 피하셨는지?]
'내가 뭘? 그리고 어떻게 피해? 느닷없이 달려드는데?'
[거짓말 마시죠. 주인님 반사신경이라면 얼마든지 피하실 수 있었을 겁니다.]
'민망하게 굳이 그걸 또 피하냐? 김비서가 나 좋다고 굿바이 키스해주는 건데.'
[하여간 주인님은···. 배려심이 많은 건지, 호색한인 건지 모르겠군요.]
'둘 다야. 오늘은 좆이 아파서 끝까지 못 했지만, 다음엔 꼭 ···.'
[역시 그 생각뿐이군요.]
'아니지. 이럴 때가 아니라 얼른 최번개한테 바로 연락 해봐야겠다.'
오후 내내 청소를 마친 김비서가 떠나자 도훈은 곧바로 그의 정보원인 최번개에게 연락했다.
24시간 대기하겠다던 최번개가 약속대로 전화를 받았다.
-행님, 전화 하셨습니까?
"어. 난데. 너 급하게 뭐 좀 알아봐야겠다."
-말씀만 하십쇼 행님. 이번에 또 어떤 조직입니까?
"어떤 조직이냐니?"
-왜, 일전에 마약···.
"니가 그걸 어떻게 아는데?"
도훈이 싸늘한 목소리로 되묻자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최번개가 납짝 엎드렸다.
-아, 아닙니다 행님. 제가 주제 넘었습니다요.
"번개야. 난 네가 입이 무거워서 좋다. 내가 너 계속 좋아해도 되는 거지?"
-네, 행님. 저는 눈도 멀고, 귀도 먹은 벙어립니다 행님.
"그래, 그래. 한 번 더 말하지만 내 의뢰에 대해선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마. 누구에게든 입도 뻥긋 말고. 알았지?"
-네, 행님. 절대 발설 않겠습니다. 방금은 제가 너무 경솔했습니다.
"알면 됐고. 너 서초동에 있는 교회 하나 견적 내봐라."
-교회요? 무슨 교회 말씀이신지.
"이름이···. 재림예수···."
-구원회 말씀이십니까?
"어? 알고 있었어?"
-네. 이름은 많이 들어봤습니다. 굉장히 유명한 교회니까요. 최근 공격적으로 신도를 늘린다고 뉴스에도 나오더라고요. 제가 뭘 알아봐 드릴까요?
"뉴스에 나온 건 나도 찾아보면 되니까, 뉴스에 안 나올만한 것으로. 교주는 어떤 놈인지, 포교 방식은 어떻게 되는지, 또 헌금은 어떤 방식으로 걷고 있는지 등등."
-맡겨만 주십시오. 제가 최대한 빠르게···.
"지금부터 정확히 3시간 준다."
-예, 예?
"왜? 최대한 빠르게라며? 우리 최번개씨 능력이 그것밖에 안되나?"
-아, 아닙니다. 행님. 다만 무슨 일이든 빨리 처리하려면 비용이 많이 들기···.
"설마 내 쩐 딸릴까봐 걱정해 주는 거야? 오늘따라 우리 번개씨상태 많이 안 좋아 보이네?"
-그, 그럴리가요? 미리 말씀 드리는 겁니다. 혹시나 제가 비용을 바가지 씌운다고 오해하시면 곤란하니까요.
"비용 같은 건 전혀 신경 쓰지 마. 사람 최대한 풀어서 시간 안에 알아오기만 해. 알았지?"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준비되는 대로 연락줘."
-바로 착수하겠습니다요.
도훈은 전화를 끊고 다시 서재로 들어갔다.
아까 공부를 하다가 흐름이 끊긴 상태로 교재가 펼쳐져 있었다.
'구원회 조사는 일단 번개한테 맡겨놓긴 했는데···. 시험은 어떻게 준비하지?'
[이제 책은 모두 버리셔도 됩니다.]
'뭐? 버리라고?'
[네. 아이템 하나면 주인님 중간고사 만점 받는 데에는 아무 문제 없으니까요.]
'호오. 컨닝 아이템이 그렇게 효과가 좋아?'
[충분하죠. 주인님은 단지 사용법만 익히시면 끝납니다.]
'어떤 아이템인데? 설명이나 한 번 들어보자.'
[일단 객관식의 경우는···.]
'이번엔 객관식 문제가 하나도 없을 거래.'
[알겠습니다. 그럼 주관식 문항만 대비하면 되겠군요. 바로 '답이 보여 안경'입니다.]
'답이 보여 안경?'
[네. 이름 그대로 안경을 쓰면 답안이 오버레이 되어 시험지에 떠오릅니다. 주인님은 그저 답안을 필기구로 옮기시면 끝입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원리를 설명해 드립니까?]
'굳이···. 아니. 대충이라도 해 봐. 어떤 원리인지 궁금하긴 하네.'
[일단 해당 안경은 최첨단 인공지능 시스템이 내장된 일종의 컴퓨터입니다.]
'안경이 컴퓨터라고?'
[네.]
'그것도 최첨단?'
[네.]
'아니 고사양 컴퓨터가 얼마나 큰데, 그걸 조그만 안경에 집어넣었다는 거야?'
[주인님. 저 같은 최첨단 인공지능 시스템도 스마트 워치에 내장할 수 있는 게 천상계의 초특급 나노 기술입니다. 나노 단위 세계에서 물질의 크기는 그리 중요한 요소가 아닙니다.]
'오케이. 그건 그렇다 치고.'
[해당 안경 렌즈부엔 고성능 카메라가 내장되어 있습니다. 카메라는 OCR 기능을 이용해 시험지에 적힌 문자를 판독하고, 판독한 문자를 인공지능을 통해 분석합니다.
이후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데이터베이스 시스템에 실시간 연결해 문제에 가장 적합한 정답을 찾아내 비교 분석 합니다. 마지막으로 안경테에 숨겨진 빔프로젝트에서 빛을 쏘아 종이에 투영시키는 방식입니다.]
'잠깐.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인터넷으로 문제에 대한 정답을 짜깁기한다는 소리네? 내가 제대로 이해한 게 맞지?'
[짜깁기라고 하기엔 훨씬 고차원 기술입니다만 얼추 비슷합니다. 어지간한 박사급 전공자보다 더 뛰어난 분석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 알고 계시면 됩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인공지능이 가진 정보분석 기술에 대해서도 설명해 드릴까요?]
'아니야. 됐어. 말해봐야 어차피 알아듣지도 못할 것 같으니.
어쨌든 시험지에 투사된 정답을 내 손으로 옮겨 적으면 끝이라는 소리잖아. 맞지?'
[네.]
'하-. 뭐가 그렇게 쉬워?'
[네?]
'아니. 그런 시스템이 진작에 개발됐으면 공부할 필요도 없는 거였잖아? 인공지능이 알아서 정답을 알려주는데 뭐하러 사람들은 쓸데없는 지식을 굳이 힘들게 머릿속에 집어넣고 있는 거냐고.'
[그러니까요. 그런데 주인님이 하도 고집을 피우시길래···.]
'하-. 이것 참. 어이가 없네.'
설명을 듣고 난 도훈은 허탈한 기분까지 들었다.
1학기 단대 수석을 하겠다고 매일같이 도서관에 들러 예습 복습하고, 시험 기간 밤을 샜던 것이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였는지 스스로에게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젠장. 인공지능 최고네!'
[이제라도 아셨으니 다행입니다. 지식의 저장과 인출에 관해서만큼은 기계가 인간보다 월등히 앞서 있는 게 사실이지요.]
'설마 창의성도 더 뛰어난 건 아니지?'
[음, 그건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뭔 소리야?'
[인공지능의 창의성이란 결국 인간이 쌓아놓은 지식의 기반 위에 재창조하는 방식이지 세상에 전혀 없던 걸 내놓진 못합니다.
다만 그 결과물이 워낙에 뛰어나기 때문에 때론 창의성이 있다고 착각할 순 있겠지만요.]
'일단 알았어. 가격은 얼만데? 답이 보여 안경이라는 거.'
[5,000포인트입니다.]
'성능에 비하면 개 헐값아니냐? 그것만 있으면 어떤 시험이든 만점 받을수도 있는데.'
[네. 때문에 상당수의 플레이어들은 학창 시절 최우등생에 꼽히곤 했습니다. 시험에 대해서 만큼은 고민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컨닝이 최고네.'
[물론 플레이어들이 편법을 활용하는 것은, 더 큰 대의를 수행하기 위한 방편일 뿐입니다. 이번의 주인님 처럼요.]
'그래. 그렇다고 쳐. 기왕 하기로 했으니 바로 구매해.'
[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잠시 후 로시가 인벤토리로 아이템이 도착 했음을 알려왔다. 아이템을 수령한 도훈은 테스트를 위해 안경을 착용했다. 금속으로 이루어진 평범한 안경이었고, 도수 같은 건 없었다.
'겉보기엔 아무 차이도 없···. 어라?'
그 순간 안경이 디스플레이가 된 것처럼 설정 화면이 떠올랐다.
사용자의 국가와 언어, 날짜 등을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마치 스마트 폰을 처음 샀을 때 등록하는 것과 비슷했다.
=동기화를 시작합니다.
메시지가 떠오르고 바가 끝까지 채워지더니 스카우터처럼 화면에 초점 렌즈가 떠올랐다.
'이제 어떻게 하면 돼?'
[문제를 초점에 맞추시면 자동으로 문제를 분석합니다.]
'문제에 초점을 맞추라고?'
도훈이 연습삼아 교재에 나온 예제 문제를 쳐다보았다. 과연 스마트폰의 접사 렌즈처럼 초점이 자동으로 맞춰지더니 '분석중'이라는 문구가 디스플레이에 떠올랐다.
'근데 이거 밖에서 보면 티 나는 거 아니냐? 글씨가 형광색이라 너무 눈에 띄는데?'
[밖에서는 절대 알 수 없습니다. 궁금하면 거울로 확인해 보시든지요.]
'진짜?'
도훈은 서재 벽면에 걸려있는 원형 거울을 쳐다보았다. 디스플레이 내부에는 글자가 보이는데, 밖으로 보이는 자신의 안경알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스마트 워치의 디스플레이 화면처럼 사용자에게만 보이도록 필터가 적용되어 있습니다. 절대 다른 사람에게 들킬 염려는 없습니다.]
'오케이 좋아.' 그때 안경알에 떠오른 '분석중'이라는 문구가 바뀌었다.
=정답을 투사하시겠습니까?
'어떻게 선택하는 거야?'
[눈을 한 번 깜빡이면 yes, 두 번 깜빡이면 no입니다.]
도훈이 눈을 한 번 깜빡이자 안경에서 희미한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백지 위에 프린트 하듯 문단을 투영했다.
도훈이 시험 삼아 머리를 앞뒤로 움직이자, 거리에 맞춰 자동으로 글씨의 크기와 위치가 조절되며 일정한 크기를 유지했다.
'오오, 이거 신기하구나. 각도를 맞출 필요도 없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