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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795화 (1,775/2,000)

1795. 빌드 업-130-

"암튼 난 잠깐 담배 좀 피우고 올게."

"담배요?"

"왜? 김비서도 혹시 담배 피워?"

"아, 아뇨."

"걱정 마. 실내에선 안 피우니까. 2층 테라스에 가서 피울 거야."

"저도 따라 갈게요."

"응? 담배 피우는데 따라 온다고?"

"네. 드릴 말씀도 있고···."

"그 복장으론 좀 그러니까 위에 뭐라도 걸쳐. 밖에서 다 보일라."

김비서는 샤워를 하고 나왔는데도 여전히 알몸 에이프런 상태였다. 도훈이 집 안에서 계속 입고 있으라고 했던 명령을 충실히 따르는 것이었다.

"아···. 네."

김비서는 도훈의 남방을 위에 걸친 뒤 그를 따라 2층 테라스에 올랐다. 도훈의 옷은 그녀가 입기에는 꽤나 컸기에 엉덩이 뒤까지 모두 가려졌다.

담배를 피우며 도훈이 물었다.

"근데 나한테 할 말이라는 게 뭐야?"

"저, 그게···."

김비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한테 왜 이렇게 잘해주시는 지···."

"내가? 뭘?"

"대학 다시 다니라고 학원비도 내주시고···, 또 오늘은···."

"아, 그거? 김비서는 이제 내 비서잖아. 민수의 비서가 아니라.

당연히 내 사람이니 내가 챙겨야지."

"아···."

"왜? 너무 부담스러워?"

"부담까지는 아닌데, 너무 잘해주시니까 겁이 나서요."

"겁이 나다니?"

"저는 도훈씨한테 드릴 게 아무것도 없거든요. 근데 도훈씨가 나중에라도 저한테 뭔가를 바라시면··· 제가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도훈이 피식 웃었다.

"난 또 뭐라고. 그게 그렇게 걱정할 일이야?"

"네?"

"나한테 보답을 못 할까봐 걱정할 필요 없어. 난 김비서한테 딱히 바라는 게 없으니까."

"저한테 바라는 게 없으시다고요?"

김비서는 선뜻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녀가 기억하는 한, 세상은 늘 주고 받는 관계였다.

늘 꽃밭에서만 살 줄 알았던 그녀는, 잘나가던 아버지의 사업이 부도로 쓰러지면서 그 자명한 이치를 깨달았다.

빚쟁이들이 집에 쳐들어 오고, 집 안 구석구석에 빨간 차압 딱 지가 붙고, 등록금 낼 돈이 없어서 다니던 대학을 그만둘 때에도 세상 누구 하나 도움을 주지 않았다.

명절때만 되면 잘 보이기 위해 얼굴을 비추던 친척들은 하나같이 나몰라라 했으며, 심지어 아버지가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는데도 냉정하게 모른 척 했다. 더 이상 아버지에게 뜯어낼 것이 없었던 것이다.

나중에 도원그룹 비서실에 입사했을 때도, 인사팀장은 새로 선발된 비서들에게 다음과 같이 정신교육을 시켰다.

-너희들은 뭐든 다 줄 각오로 일해야 할 거야.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너희에게 고액 연봉을 줄 필요가 없으니까.

세상은 이처럼 늘 기브 앤 테이크였다.

목적 없는 호의란 존재할 수 없고, 언제간 반드시 그 빚을 받아갔다.

희진은 당연히 도훈 역시 나중에 뭔가를 요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무엇이건 받았으니 당연히 갚아야 할 테지만, 희진은 점점 자신이 없어졌다.

너무나도 잘난 도훈에 비해, 자신은 가진 것이라곤 몸뚱이 하나 뿐이었다. 그걸 다 줘도 부족할 것 같다는 생각에 덜컥 겁이 났던 것이다.

"왜? 뭔가를 꼭 바래서 잘해주는 건 아니잖아."

"그, 그게···."

"걱정마. 난 김비서에게 딱히 바라는 것 없어. 지금처럼 일주일에 한 번씩 우리집 청소만 해줘도 충분하니까."

"어떻게···."

도훈이 다시 웃더니 아직 물기가 젖은 김비서의 머리를 흐트러뜨렸다.

"왜? 속고만 살았어? 사람 말을 전혀 못 믿네?"

"······."

"뭐야. 진짜로 사기라도 당했던 얼굴이잖아?"

"전 아니고, 저희 어머니가."

"어머니?"

도훈은 정보창을 통해 대충 사건을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모르는 척 물었다. 오히려 자연스럽게 김비서의 집안에 있었던 일을 듣게 되어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실은 몇년 전 큰 일이 있었거든요."

"무슨 일인데? 혹시 말해 줄 수 있어?"

"···어디가서 말하기에도 창피한 일이라."

"부담되면 말 안해도 괜찮아. 내가 괜한 걸 물어봤나 보네."

"아닙니다. 그냥, 옛날 생각을 꺼내기만 해도 힘들어서."

"힘들면 안 해도 돼. 억지로 아픈 기억을 들출 필욘 없으니까."

김비서가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이젠 다 지난 일이니까요. 도훈씨에겐 아무것도 숨기고 싶지 않습니다."

도훈이 2층 테라스에 설치한 나무 벤치를 가리켰다.

"얘기가 길어 질 것 같으면 앉아서 할까?"

"네."

벤치에 앉은 김비서가 차분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디서부터 얘기를 해야 할 지···."

"응. 편하게 말해. 굳이 말하기 껄끄러운 건 안 알려줘도 돼."

김비서는 한동안 입을 열지 못하더니 한참이 지난 후에야 결심을 굳힌 듯 이야기를 꺼냈다.

"저희 어머니께서 2년 전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어요."

희진은 과거를 떠올리는 게 고통스러운 지 잠시 눈을 감았다.

도훈은 최대한 그녀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아무 말 없이 듣기만 했다.

"당시 어머니는 사이비 종교에 빠지셨어요. 거기에서 큰 돈을 요구하는 바람에 무턱대고 가산을 팔아 넘기셨죠. 나중에 문제가 생기자 뒤늦게 돌려 달라고 했는데···."

"안 돌려 줬구나?"

"네."

"순 사기꾼들 아니야? 그래서?"

"그로 인해 아버지께서 운영하시던 사업체가 자금 난에 빠져 운영이 어려워졌죠. 결국 사업이 부도나자 그 죄책감으로 저희 어머니가 목을 매셨구요."

"······."

대강의 사정은 알고 있던 도훈이었지만, 막상 당사자의 입에서 그 내용을 듣게 되자 무척이나 충격적이었다. 자연스럽게 해당 사이비종교 단체에 대한 적개심이 끌어 올랐다.

"나중에 알고보니 어머니께선 정말로 철저하게 이용당하셨던 것 같아요. 그곳 교주란 사람에게."

"경찰에 신고는 했고?"

"네, 해 봤는데 소용 없더라고요. 다 한통속인 것처럼. 헌금으로 기부한 돈은 반납할 의무가 없다면서···. 법원으로 가기도 전에 기각되었어요."

"이 개새끼들 같으니."

"아무튼 그렇게 집이 망해버리고, 아버지마저 충격으로 쓰러지셨어요. 지금은 계속 병원에 계시고요."

"아···. 그래서 김비서가 계속 병수발을···."

"대학까지 중퇴한 마당에 고졸인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알바밖에 없더라고요. 그래서 계속 알바를 하면서 버텨봤지만, 나중엔 입원비가 모자라서 병원에서 쫓겨날 신세가 됐어요."

"그럼 도원그룹 비서로 들어간 것도···."

"다행히 운이 좋았는지, 대학 때 연극 동아리에서 친하게 지내던 언니가 소개해 줬어요. 그 언니도 연예계 데뷔를 준비하다 잘 안됐는지 화류계로···. 암튼,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 저도 동의하고 들어간 거예요. 자존심 챙길 상황도 아니었거든요."

"이해해. 많이 힘들었겠다."

"네. 그래도 도원 그룹에 취직하면서부터는 월급이 많이 올라서 버틸 수 있었어요."

"잘된 일이네."

"솔직히 저도 제가 일하는 회사가 질 나쁜 사람들이 많다는 건 대충 알고 있어요. 합법적으로 운영한다고 하지만, 솔직히 조폭출신이 많으니까. 임원들에게 개인 비서를 붙여준 이유도 그렇고."

"음···."

"죄송해요. 도훈씨한테 하는 말은 아닌데···."

"아니야. 난 신경 쓰지마. 난 그쪽이랑 별로 연관 없으니까. 그리고 설사 그렇다하더라도 김비서가 딱히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지."

"아무튼 그렇게 민수 실장님 밑으로 갔다가 도훈씨에게 다시 배치 받은 거예요. 이런 처지인데 제가 도훈씨한테 받은 호의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도훈이 괜찮다는 듯 고개를 가로 저었다.

"다시 한 번 확실히 말하지만, 내가 김비서를 도와준다면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야. 그냥 내 사람이기 때문에 챙기는 거지."

"정말 고마워서 제가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아니야. 김비서는 아버님 병환 잘 챙기고, 재수 공부만 열심히 하면 돼. 그걸로 충분해."

"흑흑."

도훈의 말에 감동 받은 김비서가 끝내 참고 있던 울음을 터뜨렸다. 냉혹한 세상에 내동댕이쳐졌던 그녀에겐, 처음으로 받은 대가 없는 호의였다.

도훈이 이쯤에서 조심스럽게 김비서에게 물었다.

"근데, 어머님이 당했다는 그 사이비 단체가 어디야? 혹시 알아?"

"아···. 재림 예수 구원회라는 종교 단체예요."

"재림 예수 구원회?"

'이름만 들어도 사기 냄새가 풀풀 나는데?'

[어떻게 저런 사이비 종교에 빠질 수가 있죠? 단체 명부터가 말도 안되는 헛소린데요.]

'원래 사람이 뭔가를 맹신하면 제대로 된 판단을 못하는 법이거든. 그리고 저런 종교는 특유의 가스라이팅 방식으로 멀쩡한 사람마저 병신 만들어 버리는 데 아주 특화되어있다고 봐야 해.'

"생각보다 규모가 큰 곳이에요. 어머니가 저한테도 함께 믿자고 했지만, 제가 종교에 딱히 관심이 없어서 싫다고 했었거든요.

차라리 그때 같이 다니면서 어머니를 말렸으면···."

'아니야. 만약 그랬다면 희진이마저 포섭되었을 거야. 저런 단체가 특히 예쁘고 어린 여자라면 환장하거든.'

[왜죠?]

'여러 이유지. 교주가 색마일수도 있고 아니면 김비서처럼 젊고 예쁜 여자면 미인계로 젊은 남자 신자들에게 포교하는데 쓰기 좋으니까. 일종의 미끼상품이랄까?'

[헐. 아주 위험할 뻔 했군요.]

'게다가 김비서는 겉으로는 똘똘해보여도 살짝 맹하잖아. 감언이설과 갖은 회유에 속아 넘어갔을 가능성이 높아. 오히려 김비서 만이라도 그 종교를 믿지 않은 게 천만 다행이라고 봐야지.'

"근데 어머님께서 거기에 얼마를 뜯기신 거야? 아버지 사업이 위험할 정도였다고 한다면 규모가 상당히 컸을 것 같은데."

"정확히는 모르지만 거의 20억 상당이었을 거예요. 저희 아버지 공장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헌금하셨으니까."

"20억?"

'와, 이 개새끼들이 진짜.'

[가정 하나를 풍비박산 냈군요. 물론 사기를 당한 사람도 문제긴 하지만···.]

'사기 친 새끼가 나쁜놈이지 뭐가 문제야? 자기 욕심 때문에 한 것도 아니고, 견적을 짜놓고 사기친 것 같은데. 하, 이 새끼들을 어떻게 조진다?'

"혹시 그 종교 단체가 어디 있는지 알아?"

"왜, 왜요?"

김비서가 살짝 두려운 눈빛으로 물었다.

"아니. 대체 어떤 놈들이길래 대놓고 한 집안을 몰락시켜놓고 뻔뻔하게 돌아다니는지 궁금해서."

"도훈씨한테 괜히 말했나봐요. 저는 그냥···."

"뭘 그렇게 무서워해? 그냥 어딘지만 말해주면 되는데."

"그게 아니라···. 그 사람들 정말 제정신이 아니에요."

"응?"

"제가 경찰에 신고하니까, 저희 집까지 찾아와서 협박했거든요. 당장 신고 취하하라고."

"뭐? 협박? 지들이 무슨 조폭이야?"

"그···. 광신도들이 있어요. 교주 말에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 그때 아버지는 병원에 쓰러져 있고 집에 저밖에 없어서 너무 무서웠거든요."

"김비서. 그런 건 전혀 걱정 안해도 되니까, 그냥 어딘지만 알려줘."

"······."

"괜찮다니까. 내가 어디 가서 당하고 살 사람처럼 보이는 건 아니지?"

"괜히 제 일 때문에 도훈씨한테 폐끼치기 싫어요."

"전혀 그런 거 아니니까 안심해도 괜찮아."

"그래도···."

나는 차분하게 김비서를 설득했다.

"다시 말하지만, 나에 대해서라면 조금도 걱정할 것 없어. 민수가 나를 어떻게 대하는 지 봤지?"

"···네."

"현역 조폭도 감히 나를 함부로 못 해. 그런데 한낱 사아비 종교 나부랭이들이 나를 협박한다고? 뒤지고 싶으면 그러라고 하지 뭐."

"······."

"그러니까 어딘지만 알려줘 봐. 그냥 개인적인 호기심 차원이니까."

"서초동에···."

"서초동?"

"네. 교세가 많이 불어서 작년에 교회를 그쪽으로 옮겼다고 들었어요. 저도 거기까지 밖엔···."

"알았어. 그 정도면 충분해. 서초동 소재의 재림 예수 구원회라는 거지?"

"호, 혹시 저 대신 돈을 돌려 받으시려는 거라면···."

"걱정마. 전혀 그런 거 아니니까."

'내가 돈만 돌려 받고 끝낼 생각이었으면 정의의 여신이 내준 미션을 받지도 않았지. 그냥 싹 다 부셔버려야 직성이 풀리겠어.'

[대체 어쩌시려고요?]

'일단 상황은 파악했으니 바로 조사해 봐야지. 교주가 누구고 단체 규모는 어느 정도이며, 어떤 식으로 신도들에게 돈을 뜯어내는지 말이야.'

[그럼 시험 공부는 어떻게 하시고요?]

'아차.'

[다음 주부터 당장 중간고사 시작인 건 알고 계시죠?]

'앗. 깜빡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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