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9. 빌드 업-114-
"어. 얼마든지."
도훈이 라이터가 없다는 걸 알고 있는 나래가 그에게 라이터를 건넸다. 그 순간, 그가 갑자기 간접 키스 장면이 떠오르며 다시 얼굴이 빨개졌다.
'근데, 쟤는 아까 왜 그런 행동을 한 거지? 설마 나한테 관심있는 건가?'
싱숭생숭한 마음에 나래의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그녀의 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것처럼 도훈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한테 여동생이 하나 있는데 희귀병 환자예요."
"아···."
"병원비가 꽤 나가는데, 하필 아버지가 얼마 전 직장에서 사고를 당하시는 바람에 몇 달 일을 쉬시게 되셨거든요."
"저런!"
"여동생이 먹는 약은 비보험이라 약 값이 많이 들어요. 처방 한번에 어지간한 직장인 월급이 나갈만큼."
"그랬구나."
"아버지 다치시고 갑자기 집에 수입이 끊기니까, 너무 막막하더라고요. 엄마도 식당에서 일을 하긴 하는데, 그것 가지곤 저희 가족들 생활비 대기도 빠듯하고."
도훈이 입에 문 담배는 바로 메소드 담배였다.
덤덤한 말투와 표정으로 내뱉은 그의 대사가, 명배우의 연기처럼 절절하게 들리는 이유였다.
"고민을 정말 많이 했어요. 지금 내가 한가하게 대학이나 다닐 때인가 싶기도 하고. 그렇다고 학교를 때려치우고 막노동을 한다고 한들 어차피 병원비 대기도 벅찰 것 같고. 그렇다고 학업을 그만두면 다음에 미래가 없는 거잖아요. 요즘 같은 세상에 고졸 학력으로 어딜 취직하겠어요?"
"그런 그래."
"어려서부터 친하게 지내던 친구 한 놈이 있는데 술먹으면서 제 사정을 얘기하니까 그러더라고요. 자기가 실은 호빠에서 일하고 있는데, 마침 선수 자리가 한 자리가 비었다고. 일해 볼 생각 없냐면서."
"그랬구나."
"일당으로 최소 20만원은 벌 수 있다더라고요. 꼭 2차 안 나가도 그 정도는 무조건 벌리니까 한 번만 해보라고요. 20만원이면 한 달에 600만 원이잖아요. 솔직히 대학생이 어디가서 그런 큰 돈을 벌어 보겠어요? 2차 안 나가면 불법도 아니고."
"그건 맞지. 성매매만 안 하면."
"그것 때문에 제보하는 것도 엄청 고민했어요. 호빠 사장님이 조폭들하고 친하기도 하고, 제가 몰래 찍어 제보했다는 걸 들키면 후환이 너무 두려워서."
"걱정 마. 절대로 널 못 알아보게 편집해 줄게."
"메일 보니까 소정의 사례비도 있던데, 그건 얼마나 나오는 거예요?"
"아··· 그게."
계속 가난을 강조하던 도훈이 갑자기 물었다. 앞서 배경을 충분히 깔아 두었기 때문에, 돈을 밝히는 그의 태도가 구차하다기 보단 필사적으로 느껴졌다.
나래는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사례비는 말 그대로 취재원에게 인터뷰 응답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제공되는 거야. 만약 돈을 주고 정보를 사면, 그 자체로 불법이기도 하거니와 공정성에 시비가 붙을 수 있기 때문에···."
"아···."
"큰돈은 절대 아니고."
도훈이 낙담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메소드 담배가 끌어 올린 그의 연기력은 너무나 리얼한 나머지 그 누구도 의심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했다. 도훈의 거짓말에 껌뻑 속은 나래가 죄책감이 들정도였다.
"그 부분을 자세하게 설명했어야 했는데, 미안. 하지만 속이려는 의도는 아니었어."
나래가 진심으로 미안해했다.
도훈의 사정이 너무나 딱하기도 하거니와, 범죄 현장을 보고 바로 제보를 할 만큼 투철한 시민의식을 가진 올바른 청년에게 큰 실망을 준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나래는 절대 순진하거나 바보는 아니었지만, 도훈의 명품 연기에 혹한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제안을 했다.
"혹시 부족하면 내가 사비로 보태 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괜찮아요. 저 때문에 괜히 부담 가지실 필요 없어요. 어찌됐건 나쁜 놈들 고발하려고 한 거니까요. 꼭 돈을 바라고 한 것은 아니었어요. 돈만 생각했으면 눈 딱 감고 모른 척 했겠죠."
"그럼 아직 일은 계속 하고 있는 거야?"
"그만뒀어요. 제보까지 한 마당에 계속 거기 붙어있다간 무슨 일이 날 것 같더라고요. 아까도 말했지만, 저희 사장님이 조폭이랑 엮여 있어서."
"잘했어. 그런 곳에 오래 있어 봐야 괜히 안 좋은 것만 보고 배울 거야. 정말로 잘한 일이야."
나래의 격려에도 불구하도 도훈은 다시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상황은 아무것도 변한 게 없어요. 제보까지 한 이상 이제 호빠 알바는 두 번 다신 못 구할 테고, 다른 일이라도 얼른 구해야 여동생 약값이라도 보탤 텐데···."
도훈이 계속 불쌍한 척하자 평소에도 동정심이 많은 나래는 너무도 안타까워했다. 어떻게 해서든 그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다.
"혹시···.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 뭐 없을까?"
"누나가요? 저한테 왜요?"
"제보하는 것 때문에 다니던 일까지 짤리게 된 상황인데 너무 안타까워서···."
"그럼 뭐 제 스폰이라도 해주시게요?"
"스, 스폰이라니?"
뜬금없는 제안에 나래가 당황해서 말을 더듬거렸다.
"하하. 농담이예요. 원래 호빠 선수들은 여자 하나 잘 물어서 팔자 피려고 하잖아요. 영업도 뛰지만, 결국엔 돈 많은 누님 하나 물어서 기둥서방 되는 게 목표거든요."
"아···."
농담이라곤 했지만, 나래는 불쑥 대학생인 도훈과 스폰하는 장면을 상상하고 말았다.
'내가 남자 대학생이랑 스폰을···. 헐.'
평소엔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가정이었지만, 막상 도훈처럼 잘생긴 미남을 직접 마주하자 혹할 수밖에 없었다.
평생 가도 저런 미남과 사귀는건 불가능 할 것이다. 도훈과 같이 어리고 잘생긴 청년과 밤을 보내면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다.
"···혹시 해봤니? 넌?"
"스폰요? 왜요? 제가 해 봤을 것 같아요?"
"아, 아니. 그냥 물어 보는 거야. 영상에서 보니까 많이 놀아본 느낌이라···."
도훈은 그녀의 질문에서 호기심을 감지했다. 조금만 더 꼬드기면 코 꿸 수 있을 것 같았다.
"별로 놀진 않았어요."
"근데 그렇게···. 잘한다고?"
"제가 뭘요?"
도훈이 룸에서 주아를 따먹는 영상을 확인한 나래는 갑자기 해당 장면이 떠오르며 얼굴이 빨개졌다. 자기도 모르게 말실수를 한 것 같아, 급히 교정했다.
"아, 아니. 영상에서 보니까 능숙하게 잘하더라고. 마, 말을."
"아···. 제 입으로 얘기하기는 좀 쑥스러운데."
"뭔데? 괜찮아. 편하게 말해봐."
"솔직히 어렸을 때부터 여자들이 저한테 먼저 대시하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가만히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있어도 음료수에 쪽지 같은 거 붙여서 놓고 가고. 길 가다 번호 따인 적도 셀 수 없이 많고요."
나래가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 같아도 도훈같은 사내를 봤으면, 그런 마음이 들 것 같았다.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실제로 실행에 옮기진 못했겠지만.
"그랬구나."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여자도 많이 만났죠."
"많이?"
"네. 호빠 일을 하게 된 것도 그것 때문이었어요. 친구가 되게 진지하게 절 설득했거든요. 호빠에서 저 정도면 에이스라고, 돈많이 벌 수 있을 거라면서."
"에이스?"
"호빠 안에서 제일 잘나가는 선수를 말해요. 손님들한테 인기 많은···. 그러니까, 텐프로 같은 거라고 해야 하나?"
"아아, 알겠어."
"영상에서 보셨겠지만. 그것도 잘하기도 하고요. 여잔 질릴 만큼 만나 봤으니까."
그것이 지칭하는 것을 떠올린 나래가 다시 민망한 듯 얼굴을 붉혔다. 아무리 나이가 어리다고 하지만, 다 큰 성인들 간의 대화였다.
도훈이 점점 남자로 보이게 된 나래는 자신이 인터뷰를 하는 건지, 인터뷰를 빙자한 썸남의 사생활을 캐고 있는 것인지 헛갈리기 시작했다.
'내가 왜 이러지? 취재하러 왔다가, 홀린 기분이네···. 이런 적은 정말 처음인데···.'
나래는 점점 도훈에게 마음이 기울기 시작했다. 그것은 본능에 가까운 것이었으므로 도저히 의지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도훈은 매력적인 사내였고, 심지어 정의로운 모습도 있었다. 특히 여동생의 병원비 마련을 위해 험한 일에 뛰어들 만큼 가족애가 투철한 청년이었다.
'선수명이 서준이라고 했던가? 얘가 나이답지 않게 되게 성숙한 느낌이야.'
나래는 도훈에게 섹시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얼굴에 집중하느라 잘 몰랐는데, 몸도 엄청 크고 멋있었다. 셔츠 밑에 숨겨진 탄탄한 근육이 겉으로 볼 때도 체감이 될 정도였다.
도훈이 자신을 보고 다 가졌다고 부러워했지만, 나래가 보기엔 도훈이야말로 모든 것을 다 가진 완벽한 수컷이었다.
혹자들은 남녀의 서열을 정할 때 다음과 같이 정의하기도 한다.
피라미드의 맨 밑바닥에 깔린 못생긴 남자.
그 바로 위에 평범한 남자.
그런 남자들에게 선택받는 못생긴 여자.
그리고 중간쯤 애매하게 잘생긴 남자와 흔녀가 혼재되어 있다.
최상층부에는 모두가 인정하는 미녀들.
그리고 첨단에는 그런 미인들까지 멋대로 휘어잡는 초절정의미남이 자리한 것이다.
수컷 중의 수컷.
이른바 알파 메일.
도훈은 바로 최상위 포식자인 알파 메일이었다.
'이래서 여자들이 호빠를 가는 거였구나. 이런 미남이랑 언제 이렇게 가까이서 편하게 대화를 나눠보겠어? 돈을 싸들고 가는 것도 무리는 아니야.'
"그래서, 누님도 혹시 생각 있어요?"
"뭐, 뭘?"
"스폰이요."
"아, 아니 난 그런 건···."
"하하, 얼굴 진짜로 빨개졌다. 농담이라니까요, 농담. 제가 서울대 나온 피디님이랑 무슨···."
"아, 아니야. 꼭 그런 건 아니고···."
"네? 뭐가 아니에요?"
도훈이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자, 나래가 우물쭈물 거렸다.
"어, 그러니까···. 직업이랑 학력은 아무 상관 없는 ···. 아니 내가 지금 뭐래니?"
횡설수설하는 나래를 지그시 쳐다보던 도훈이 불쑥 정보창의 공략 멘트를 꺼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나래 누나···."
그러면서 점점 얼굴을 들이밀던 도훈이 그녀의 볼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눈이 참 예쁘네요."
"아!?"
순진한 나래는 그 순간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마치 유체이탈을 한 것처럼 현기증이 밀려옴과 동시에 심장이 미친 듯이 벌렁거리는 것이었다.
"왜, 왜···. 나한테···."
도훈의 얼굴이 점점 나래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누나···. 이런 말 하면 못 믿을 줄 아는데, 그래도 꼭 해야겠어요."
"뭐, 뭐?"
"첫눈에 반했어요, 누나한테."
"아!"
도훈이 느리게 입술을 부딪쳐왔다.
원하지 않는다면 충분히 피할 수 있는 속도로.
하지만 나래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더니 무릎 위에 올린 두 손을 꽉 말아 쥐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멈춰야 하는데, 몸이 마비라도 온 것처럼 움직이질 않아···. 도저히 멈출 수가 없겠어.'
도훈의 입술이 닿는 순간 나래는 정신을 잃은 것처럼 혼미해졌다. 여기가 어딘지, 자신이 왜 차에 앉아있는지 천진분간이 되질 않았다.
그저 부드러운 입술이 사탕처럼 달콤하다는 생각뿐이었다.
이윽고 도훈이 입술을 벌리더니 혀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흡!"
혀가 들어오자 본능적으로 앞니를 꽉 부딪치며 막아보았지만, 어떻게 된 일이지 그 틈을 집요하게 파고들며 끝내 나래의 입술과 얽히기 시작했다.
혀까지 밀고들어오자 나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도훈의 머리를 끌어안고 스스로 덤벼들었다.
"웁웁!"
남자와 키스를 한 지가 몇 년 전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저 본능에 몸을 맡길 뿐이었다.
"흐읍, 흐읍!"
'아아, 내가 왜 이러지. 미쳤나 봐. 어떻게 처음 본 남자랑 차안에서 키스를···. 근데 멈추고 싶지 않아. 이런 기분 처음이야 ···.' 도훈의 노련한 프렌치 키스에 나래가 완전히 정신 줄을 놓기 시작했다. 그것은 일종의 마약이고, 환각제였다. 마음이 붕 뜨게 만들고, 걱정과 근심이 씻은 듯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 순간, 도훈의 나쁜 손이 그녀의 가슴 위로 슬쩍 올라왔다.
'억!'
키스를 하면서 가슴까지 더듬을 줄 몰랐던 나래는 당황해서 도훈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실은 이미 극도로 흥분한 상태라, 가슴을 내주어도 별 상관없을 것 같았다.
'아아아, 어, 어떻게 하지? 가슴은 내 성감대인데···. 이, 이러면 도저히 못 참을 것 같은데···.'
[이게 말이 됩니까? 아무리 정보창 추천 멘트라고 하지만 너무한 거 아닌가요?]
'인공지능이 시스템을 불신하다니, 그게 더 말이 안 되는 거 아니냐?'
[아니, 아무리 그래도 방송국 PD라는 사람이 취재하러 나왔다 취재원에게 반해서 본분을 망각하다니요.]
'PD는 뭐 천룡인이라도 돼? 여잔 다 똑같아. 자기가 반한 남자 앞에선 한없이 약해지는 게 여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