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8. 빌드 업-103-
웨이터가 환전해 올때까지 잠시 소강상태가 지속되었다.
게임에 참여 중인 또 다른 한 명은 40대로 보이는 아줌마였는데, 얼굴이 못 생겨서 딱히 말걸고 싶지 않은 인물이었다.
"근데 저 총각은 되게 어려보이네? 올해 몇살이야?"
나이 먹은 아줌마가 괜히 말을 거는 게 귀찮은 나는 한 마디 쏘아붙였다.
"그 쪽이 저희 어머니뻘은 될 거 같네요."
"뭐, 뭐라고? 어린 녀석이 말하는 싸가지 좀 봐?"
"하하, 김여사가 한 방 먹었네. 그러니까 뭐하러 도박판에서 나이를 물어. 알만한 사람이."
"맞아. 도박판에선 원래 쩐 많은 놈이 형님고, 누님이지. 안 그런가 젊은이?"
"···노인장, 얼른 패나 돌리죠? 인터벌 너무 늘어지는데."
"······."
짝눈은 내 말에 대답도 없이 화투패를 돌리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손놀림이 예사롭지 않았다. 귀를 쫑긋 세워 집중하는데 화투패를 빼는 소리가 살짝 달랐다.
'밑장 빼기?'
[네?]
'나한테 나눠줄 때 들으니까 소리가 다르네. 장난질을 하고 있군.'
[짝눈이 설마 기술을 쓴 겁니까?]
'응. 한 번 봐볼까?'
8번 연속 죽기만 했던 나에게 마침내 2땡이 떴다.
보통이라면 처음으로 뜬 높은 패를 보고 흥분해서 큰 금액을 베팅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받자마자 그냥 죽었다.
"죽습니다."
"아이고, 나이도 어린 총각이 죽기만 해서 어쩐데? 자꾸 죽으면 있는 석도 죽는다?"
못생긴 아줌마가 기회다 싶었는지 득달같이 물어 뜯었다. 아까 공격 당한 것에 대한 복수였다.
"그래,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자꾸 죽기만 하면 집에 갈 차비도 못 건 질 텐데?"
"남이사 죽든 말든, 게임이나 하시죠?"
"껄껄. 까칠한 친구구먼, 아주."
나는 다른 사람과 대화를 주고받으면서도 노인네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노인네의 한쪽 입꼬리가 미묘하게 올라갔다.
'맞네. 내가 싸가지 없게 패나 돌리라고 말하니까 한방 먹인 거였어.'
[네?]
'나한테 2땡을 주고 한 끗차이로 날 이기려고 했던 것 같아.'
[그게 정말입니까?]
'두고 봐. 패 까보면 알겠지.'
적당히 레이스가 진행되더니 이번 판도 노인의 승리로 게임이 끝이났다. 예상대로 노인네는 4땡이었다. 2땡이 나왔다고 덤볐다간 분명 더 큰 돈을 잃었을 것이다.
[오호, 확실히 타짜는 타짜군요. 어떻게 그 사이에 기술을 부렸을까요?]
'밑장 빼기 정도는 어지간한 타짜라면 다 하는 기술이야. 문제는 여기 있는 사람들은 그 정도 속임수도 파악 못 할 만큼 초보라는 거야. 카메라를 너무 믿고 있는 걸까? 손아귀에서 빼는 건 어차피 안 보일 텐데.'
[근데 짝눈 노인네가 무슨 생각으로 이 게임에 참여했을까요? 그때 주인님께 말하기로는 이곳에 타짜들이 심어져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그러니까 그게 나도 궁금해. 눈먼 돈을 먹으러 온 건지, 아니면 다른 타짜를 잡으러 온 건지.'
[다른 타짜라뇨?]
나는 처음에 나를 왼쪽 자리에 앉히려고 했던, 40대 사내를 쳐다보았다. 정수리가 휑하게 벗겨진 대머리 중년이었다.
'왠지 저 사람 분위기도 심상치 않거든.'
[설마 저 사람도 타짜입니까?]
'아까 짝눈이 밑장 빼기를 할 때 참가자 중 유일하게 그의 손을 쳐다보더라고.'
[짝눈이 밑장 빼기를 한다는 사실을 눈치챘다는 뜻입니까?]
'어쩌면. 기술자라면 충분히 소리를 구분할 수 있으니까.'
[두 타짜 사이에 주인님이 낀 꼴이군요.]
'걱정마. 나 몰라? 타짜 잡아먹는 사기 도박꾼이 바로 나잖아.'
다시 패가 돌았다. 화투패가 노인네의 손에 착착 붙었다. 도박을 잘 모르는 사람이 보더라도 여간내기가 아니었다.
"아니, 이 영감탱이가 밥 먹고 화투만 쳤나. 손놀림이 장난이 아니네."
"그러게. 혹시 타짜 아니여?"
"···그럴지도?"
짝눈이 대놓고 타짜임을 밝혔지만, 다들 헛소리라고 믿는 모양인지 비웃을 뿐이었다.
"그 나이까지 손목 멀쩡한 거 보니까 타짜는 절대 아니겠네."
"맞아. 여기서 기술 쓰다 걸리면 손목 날아갈걸?"
"흉한 소리 하지 말고 얼른 베팅이나 하쇼."
패를 다 돌린 노인네가 자기 패는 보지도 않 100만원이 넘는 칩을 한 번에 올렸다.
"큰돈 먹었으니 한번 달려 봅시다."
"방금 패 확인 안 하신 거 아니에요?"
"보지도 않고 베팅을 했다고?"
다들 짝눈의 과감한 베팅에 당황한 모습이었다.
나 역시 그가 뭘 믿고 그러는지 헛갈렸다.
'저게 뭐하는 거지? 설마 또 기술을 쓴 건가?'
[대놓고 저래도 되는 겁니까?]
하지만 다들 패가 안 좋았던지 베팅에 밀려 줄줄이 죽고 말았다.
결국 짝눈이 이번 판도 먹었는데, 자기 패를 확인하려는 듯 승부가 끝나고 패를 뒤집었다.
"얼레? 망통이었네?"
"뭐야? 지금 망통으로 100을 태운 거야?"
"아씨, 7끝 인데 괜히 죽었네. 따라갔으면 내가 이기는 게임인데."
"영감, 돈으로 죽이기 있어?"
망통은 다른 말로는 '0'끝이라 불렸는데, 섯다에선 가장 낮은 패였다. 이길 확률은 제로, 최대치가 비기는 것인데 짝눈이 돈으로 눌러 상대를 모두 죽여버린 것이었다.
짝눈이 껄껄 웃더니 다시 패를 돌렸다. 그의 동작은 너무 자연스러웠기 때문에 모두가 그의 손놀림에 집중했는데도, 어떤 이상한 점도 발견할 수 없었다.
"자, 또 한 번 돈으로 죽여볼까 그럼?"
짝눈이 또 한 번 패를 확인도 않고 골드칩 4개를 밀어 넣었다.
현금으로 120만원.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사람들도 바로 죽지 않았다. 직전 판에서 그가 망통으로 먹는 것을 봤기 때문에 쉽게 포기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씨, 진짜 게임 더럽게 하네."
"아오, 내 패만 좋으면 한 판 붙어보는 건데. 이건 도저히 안 되겠네."
"저도 죽어요."
나 역시 상황을 더 지켜보자는 심정이었다.
그러나 타짜로 의심되는 대머리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나란히 돈을 밀어 넣는 것이었다.
"이런 패를 들고 죽을 순 없지. 심지어 노인장은 패를 아직 확인도 안 했는데. 받겠습니다."
대머리가 120을 넣자, 짝눈이 또 한 번 베팅을 받았다.
"그래? 그럼 한번 더 올려볼까?"
노인이 또 다시 120만원을 올렸다.
이제 둘만의 승부였기 때문에 대머리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허어, 거참 배짱인지 만용인지 모르겠네. 노인장, 진짜로 패 확인 안 한 거 맞소?"
"죽을 거야 말 거야? 그것만 말해. 쉰 소리 말고."
짝눈이 꼬장꼬장한 태도로 결정을 종용했다.
대머리는 자신의 패를 몇번을 확인하면서 장고에 들어갔다.
"이걸 들고 그냥 죽을 수도 없는데···. 까짓거 한 번 태워 봅시다. 콜."
사내가 칩을 밀어 넣더니 자신의 패를 공개했다.
"갑오!"
"오, 저건 절대 못 죽지."
"해볼만 한데? 이기는 거 아니야?"
끝중에 가장 높은 9끝이 나왔음에도 짝눈은 미동도 없었다.
자신이 무조건 이긴다고 믿는 모양이었다.
"어디 그래, 노인네 패 한번 구경 좀 합시다."
짝눈이 마침내 자신의 패를 뒤집었다.
"어? 3끝?"
"아니야. 1,2 알리잖아."
"와, 저기서 어떻게 족보가 나오냐?"
"어이없네. 분명 안 보고 쳤는데."
짝눈이 만족스럽게 웃더니 사내를 놀렸다.
"내 팻 값은 좀 비싸다네. 잘 먹겠네."
"이야, 거 참."
돈을 잃은 대머리는 돈을 잃었다는 사실보다 노인의 기술에 놀란 눈치였다. 그것은 나역시 마찬가지였다.
[대체 짝눈이 무슨 조화를 부린 거죠? 분명 방금은 기술을 안 쓰지 않았습니까?]
'이건 나도 전혀 예측을 못하겠는데? 진짜로 전설적인 타짠가?'
[속마음을 한 번 읽어 보시면 어떻습니까?]
'그래야겠어.'
나는 마음의 소리로 노인네의 속마음을 읽었다.
무슨 묘수를 부린 것인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마음의 소리로 들리는 생각은 충격적일 만큼 허탈했다.
{휴, 운이 좋았네.}
'엥? 운이라니?'
[저게 무슨 뜻입니까?]
'황당할 정도군. 저건 기술이 아니야. 그냥 심리전으로 도박을 걸었는데 운 좋게 통한 것일 뿐이지.'
[정말요?]
'어. 첫판은 훼이크를 쓴 게 맞는 거 같아. 일부러 자기 패가 망통인 걸 보여주면서 죽은 사람들을 광역 도발했잖아.'
[네. 그건 주인놈도 가끔 쓰던 기술 아닙니까?]
'근데 방금 족보가 뜬 판은 진짜로 운에 맡겼던 것 같아.'
[본인이 질 수도 있는데도요?]
'그러니까 말이야.'
참으로 어이없는 결과였다.
노인네는 진심으로 도박을 즐기고 있었다.
블러핑과 운에 맡기는 전략을 통해, 상대가 자신의 패를 전혀 예측할 수 없게 만들었다.
짝눈은 또다시 패를 돌렸고, 보지도 않고 120을 다시 밀어 넣었다.
다들 앞선 경기의 결과에 충격을 받았는지, 따라가지도 못하고 죽기만 했다. 나 역시 패가 안 좋았기 때문에 계속 죽을 수밖에 없었다.
'이건 완전히 말린 것 같은데. 구라도 아니고 실화로 치는 타짜라니.'
[큰일이군요. 주인님이 운이 너무 안 좋은데요.]
'그러니까 말이야.'
[혹시 자리를 잘못 배정 받은 게 아닙니까?]
'그것도 있는데, 그냥 운이 없다고 봐야지.'
[아무리 운이 없어도 10게임 연속 망하기도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확률로 따져도 너무 최악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건 아니야.'
[네?]
'잘 봐. 지금 내가 10게임 연속해서 지기만 했잖아. 근데 평균으로 치면 충분히 가능한 수치야.'
[무슨 말씀이신지 잘 이해가 안 됩니다.]
'사람들이 흔히 착각하는게 10게임 동안 연속해서 잃으면 자기 운이 엄청 나쁜 줄 알거든. 하지만 5명이서 10게임을 하는 동안 한 사람이 승리할 확률은 통계적으로 2번 밖에 안 돼.'
[아, 그렇군요.]
'그럼 실제로 나는 10게임 중 2번을 이겼어야 했는데, 그걸 못 한 것 뿐이야.'
[흐음. 2번의 승리를 놓쳤다고 생각하니까 또 그렇게 이상하진 않군요.]
'그렇지. 도박을 이기는 데는 여러 가지 요소가 있겠지만, 결국 게임이 계속되면 모든 플레이어의 승률은 평균에 수렴할 수밖에 없어. 내가 아무리 잘해도 결국 매 승부에서 이길 확률을 20%밖에 안 된다는 거지. 게임이 길어질수록.'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더 중요한 건 승률이 아니라, 큰 게임에서 얼마나 상대의 패가 얼마나 잘 떠주느냐야.'
[상대의 패가 잘 뜨다뇨? 오히려 주인님이 잘 떠야 하는 게 아니고요?]
'당연히 나도 잘 떠야지. 문제는 나만 잘 떠선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거야. 내가 설사 무적이라는 38광땡을 들어도 상대가 개패라서 죽어버리면 베팅이 전혀 안 되잖아.'
[아, 그 말씀이 셨군요.]
'오히려 그런식으로 광땡이 뜨는 것보다 내가 5땡이 뜰 때 남들이 다 4땡 , 3땡, 족보, 이렇게 나오는 게 훨씬 큰 판이 벌어지는 거지.'
[결국엔 섯다는 운이군요. 포커처럼 바닥 패를 읽고 카드 카운팅을 할 수도 없으니까요.]
'맞아. 운은 맞는데 실력있는 타짜라면 상대 패까지도 조작할 수 있거든. 분명 짝눈 노인네나 대머리 타짜도 그 기회를 노리고 있을 거야.'
[괜히 남의 싸움에 끼어 들어 주인님만 손해 보게 생겼네요.]
'흐음, 이걸 어떻게 극복한다.'
짝눈은 자신의 패는 보지도 않는 심리전을 이용하고 있었다.
심지어 딜러조차 없는 게임이다 보니, 선을 잡지 않고선 패를 조작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선이 너무 유리한 게임이란 뜻이었다.
결국 환전한 500만원 중에서 거진 200만원을 날리게 되었을 때 나는 일시 중단을 선언했다.
"이 판 끝나고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뭐야? 총각 벌써 쩐떨어 진 건 아니지?"
"에이, 30분도 안 돼서 자리에서 일어서는 게 어딨어?"
"잠깐 똥 싸러 가는 거에요. 못 믿겠으면, 여기 제 칩 다 두고 갈게요."
나는 모든 칩을 올려 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제야 다른 참가자들도 만족스럽게 웃어 보였다.
"그래 다녀와. 칩까지 놓고 간다니 믿어야지."
"금방 안 돌아오면 나중에 우리끼리 나눠 먹는다?"
나는 다른 참가자들의 말을 무시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현 상태로는 앉아서 찔끔찔끔 돈만 잃을 수밖에 없었다. 밖으로 나가는 길에 웨이터를 불러 칩 하나를 꽂아주며 말했다.
"초희씨 좀 불러 주실 수 있나요?"
팁을 받은 웨이터가 재빨리 움직였다.
"마사지 받으시게요? 절 따라 오십시오."
웨이터의 안내에 복도를 따라 건물 안쪽 구석으로 들어갔다. 독특하게 생긴 문을 열고 들어가자, 밑 가슴이 훤히 뚫린 크롭티를 입은 젊은 여자가 환하게 나를 반겼다.
"어서오세요! 혹시 찾으시는 아가씨라도?"
"이쪽 손님이 초희씨 찾는답니다."
"초희? 금방 불러드릴게요. 저쪽 방에서 기다리세요."
웨이터가 깍듯하게 인사했다.
"그럼 손님, 즐거운 시간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