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4. 빌드 업-89-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래, 꼭 연락해? 안 그럼 용돈 없다?"
"나도 잊지마."
"네, 누님."
두 사람이 택시를 타고 떠날 때까지 배웅하던 도훈이 크게 한숨을 내쉬더니 담배를 꺼내 들었다. 원하는 결과는 얻었지만, 뒤처리 과정이 너무 피곤했다.
[정말로 두 사람이 주인님께 돈을 줄까요?]
'주겠냐? 얼굴에 욕심이 그득그득하구먼.'
[하지만 분명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합의금을 받아서 주인님께 모두 주겠다고요.]
'뭐, 찔끔찔끔 주겠지. 한 번 만날 때마다 얼마씩 말이야. 그래야 내가 자기들한테 못 벗어날 테니.'
[그게 무슨···.]
'원래 돈으로 사람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절대로 큰 돈을 한 번에 쥐어주지 않는 법이야.'
[지독하군요. 두 번 다시 상종하기 싫어지는 유형입니다.]
'어차피 저 돈은 받아도 그만, 안 받아도 그만이야. 내가 돈이 없냐, 가오가 없냐? 1억 가지고 누구 코에 붙여?'
[그럼 주인님께 필요도 없는 돈을 뜯어내려고 그 생쇼를 하셨단 말입니까?]
'당연하지. 설마 내가 1억이 필요해서 그랬겠어? 태오가 그간 모은 범죄 수익을 털리게 만들 목적이었지.'
[주인님은 정말이지 악독할 정도로 상대를 괴롭히는군요. 상대하는 입장에선 죽을 맛일 것 같습니다.]
'아직 멀었어. 결국엔 감옥 들어가야 끝나는 엔딩이거든. 법으로 부족한 응징을 내가 거들어 주는 것 뿐.'
[이크, 저기 태오가 오고 있습니다.]
'양반은 못 될 놈이군. 하긴, 근본이 웨이터 출신이라니까 원래 상놈이구나?' 뒤늦게 밖으로 나온 태오가 담배를 피우고 있는 도훈을 향해 물었다.
"뭐야? 그년들 벌써 갔어?"
"네. 택시 잡더니 바로 가버리던데요?"
"하-. 씨발. 진짜 되는 일이 없으니까 이런 좆같은 경우가. 처음부터 진상 손님을 받아선 안 되는 거였는데."
"형님 괜찮으세요?"
"괜찮겠냐? 속이 말이 아니다. 진짜 개같이 털렸어."
"죄송합니다."
"네가 뭘 또 죄송해? 너 아니었으면 더 큰 일 치를 뻔했는데. 그나마 이렇게라도 수습이 됐길 망정이지."
"그래도 제가 창민이 형을 더 일찍 말렸으면···."
[주인님은 정말 가증스럽게 연기를 잘하시는 군요.]
'당연하지. 명품 메소드 연기거든.'
"됐어. 다 자업자득이야. 그 새낀 언젠가 사고 칠 줄 알았어. 싹수없이 굴 때 일찍 버릇을 고쳐놨어야 했는데···. 결국 이 사달을 내고 말다니."
"근데 창민이 형 상태는 어때요? 괜찮대요?"
"방금 찬호랑 통화하느라 늦게 나온 거야. 창민이 부상이 너무 심각해서 바로 수술 들어간다고 연락왔더라."
"수술이요?"
"그 새끼 진짜로 좆 됐어. 농담이 아니라 까딱하면 평생 소변주머니 차야 할수도 있다더라. 성기가 완전히 뭉해졌다던가?"
"제가 너무 흥분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까지 할 건 아니었는데."
"아니야.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사정을 봐주겠어? 얘기 들어보니까, 까딱했으면 서준이 네가 크게 다쳤을 수도 있었다면서?"
"전 솔직히 창민이 형이 왜 그렇게까지 흥분했는지 모르겠어요. 특히 손님한테 협박할 때는 완전히 이성을 잃은것 같더라고요."
태오가 씁쓸한 표정으로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말했다.
"이해가 안 되는 게 정상이야. 그 새낀 옛날부터 분조장이었거든."
"분조장이요?"
"분노 조절 장애 말이야."
"아···."
"사고 쳐서 평생 해오던 야구부까지 잘렸으면 사람이 좀 자중할 줄 알아야 하는데, 제 버릇 개 못 준다더니···. 쯧쯧."
"근데 창민이 형이 혹시 절 폭행으로 고소하면 어떻게 하죠?"
도훈이 일부러 겁먹은 연기를 하자 태오가 괜찮다는 듯 어깨를 두들겼다.
"신경 쓰지 마. 지도 한 짓이 있는데, 설마 널 신고하겠냐? 대가리에 총 맞지 않고선."
"그래도···. 수술까지 한다는 걸 보면, 생각보다 심하게 다친것 같아서요."
"그건 내가 알아서 수습할게. 뭣하면 지 때문에 합의해준 1억토해내라고 하지, 뭐."
"아···."
"잊어버려. 이미 다 끝난 일이니까."
"네. 형님."
"근데 아깐 대체 어떻게 한 거야?"
"네?"
"합의금을 어떻게 깎은 거냐고? 그 아줌마들 찔러도 피 한 방울안 날 것처럼 독하게 굴더니. 갑자기 1억이나 깎아 준대서 놀랐거든."
도훈이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실은 나머진 제가 몸으로 때우기로 했어요."
"몸으로 때운다니?"
"제가 무상으로 봉사한다고 했거든요."
"아, 아니. 뭘 굳이 또 그렇게까지···."
태오는 도훈이 합의금을 깎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했다는 말에 감동할 수 밖에 없었다. 알고 보니 도훈에게 큰 빚을 진 셈이었다.
"서준이 너 이 새끼···."
도훈이 가증스럽게 연기했다.
"어쨌든 저한테도 책임은 있으니까요. 제가 창민이형 성격을 미리 알았다면 일이 커지기 전에 막았을 텐데···."
"서준아. 너 앞으로 나만 믿고 따라와라. 형이 너 무조건 밀어줄게."
"아닙니다, 형님."
"아니야. 실은 아까 찍은 영상도 봤어. 휘겸이가 실수한 거 네가 혼자서 수습했더라?"
"벌써 보셨어요?"
"어. 휘겸이 그 새낀 또 어쩌다 그런 실수를···. 암튼, 오늘 정말 고생 많았다. 니가 진짜 우리 가게 에이스다."
[태오는 단순한 건가요, 멍청한 건가요? 영상을 봤다면서 어떻게 저렇게 상황 파악이 안 될 수 있죠?]
'제 3자 입장에선 모를 수도 있지. 무엇보다, 지금 놈은 나를 엄청 신뢰하고 있으니까.'
[나중에 주인님께 배신당한 걸 알면 제 손등을 찍고 싶겠군요.]
'무슨 상관이야? 그런다고 내가 겁낼 사람도 아니고.'
[하긴. 주인님이 두려워 할 상대는 아니긴 하죠.]
"맞다, 형님. 혹시 제가 찍힌 영상 좀 볼 수 있을까요?"
"영상은 왜?"
"그 여자애한테 협박하려면 영상이 어떻게 찍혔는지 확인해야 할 것 같아서요."
"그래. 노트북에 저장해 놨어. 지금 볼래?"
태오와 함께 사무실로 들어간 도훈은, 곧바로 몰래 카메라를 켜영상을 녹화하기 시작했다.
"근데 작업하던 여자애는 어떻게 됐어? 아까 방에 갔을 때 아무도 없던데?"
"형님이 방으로 호출하셨을 때 막 촬영이 끝나서 일단 집으로 돌려보냈어요. 휘겸이 형이 정상이 아니었거든요. 갑자기 픽 쓰러지더니 못 일어나더라고요. 그렇게 많이 마신것 같진 않았는데 ···."
"그 새끼 여자애 잔에 물뽕 타다가 실수한 것 같아."
"실수요?"
"자기 잔에 물뽕을 타서 마셔버렸다고."
"아···. 그럼 위험한 거 아니에요? 저는 자는 줄 알고 안 깨웠는데."
"자는 거 맞아. 자고 나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도 잘 안날걸? 원래 그런 약이거든."
"아, 그랬구나. 그럼 휘겸이 형은 아직도 거기서 자고 있는 거예요?"
"그럴걸. 지 알아서 깨겠지. 영상은 여기."
태오가 덮어 두었던 노트북을 열자, 협박용으로 촬영된 영상이 그대로 화면 위에 떠올랐다.
"이게 제 영상이에요?"
"어. 아까 확인하느라 미리 켜놨거든."
"근데 어떻게 찍으신 거예요? 전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는지도 몰랐는데."
"당연히 사전에 작업해 놓은 거지. 너 오기 전에 휘겸이랑 같이 VIP룸에 가서. 거긴 작업할 때만 쓰는 곳이거든. 말이 VIP 룸이지 사실상 촬영전용 룸이라고 봐야지."
"그렇군요. 혹시 영상 처음부터 볼 수 있을까요?"
"맘 대로해. 난 아까 봤으니까 너 혼자 돌려봐. 난 금고 정리 좀 해야겠다."
"네."
태오는 같은 영상을 두번 보기 귀찮았는지, 구석에 설치된 금고를 열더니 내부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까 합의금을 내준다고 급하게 돈을 꺼내느라, 가지런하게 쌓아 두었던 현금 뭉치가 엉망으로 흐트러진 것이었다.
[조태오가 주인님을 엄청 신뢰하는 모양이군요. 의심도 없이 영상을 보여주는 것도 모자라 주인님 앞에서 태연하게 금고까지 열어 보이다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내가 그만큼 신뢰를 보여줬잖아. 그리고 금고는 어차피 비번을 모르면 못 여니까 신경 안 쓰는 것이겠지.'
"에이씨, 거의 절반은 날아간 것 같네. 개같이 벌어놓고 개 같은 년들에게 다 꼬라박다니. 창민이 이 개같은 새끼."
금고에 머리를 처박은 채 개같은을 연발하는 태오를 뒤로하고, 도훈이 몰래 노트북을 뒤지기 시작했다. 영상을 백그라운드로 재생시켜 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태오는 도훈이 노트북으로 무슨 짓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바탕화면을 살피던 도훈에게 '직박구리'라는 이름의 폴더가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폴더를 클릭하자, 수십 개의 영상이 날짜별로 주르륵 나타났다.
'찾았다!'
[직박구리라니. 조태오는 혹시 새를 좋아하는 걸까요?]
'뭔 소리야? 새 이름으로 폴더 만들기 하면 랜덤으로 붙여주는 거잖아.'
[새 이름이 그 새 이름이었습니까?]
'미국식 조크지. 그나저나 파일을 이렇게 허술하게 관리했다니 충격적이군.'
[해킹이라도 당했으면 죄다 유출될 뻔 했겠는데요?]
'인터넷이 안 돼.'
[네?]
'와이파이를 안 잡아놨어.'
[나름의 보완책을 마련해놓았군요. 외부로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파일이 유출될 일도 없을 테니까요.]
'그게 아니라 단순히 컴맹 아닐까?'
[네?]
'저 새끼 왠지 노트북으로 와이파이 잡는 법도 모르는 것 같은데?'
[설마 그렇게 바보일 리가.]
"아아, 씨발. 남은 돈이 오천도 안되는 거 아니야?"
태오는 여전히 금고의 현금을 정리하면서 투덜거렸다. 혼잣말한다고 생각했겠지만, 귀가 밝은 도훈에게는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또렷하게 들리는 푸념이었다.
도훈은 파일 목록이 떠 있는 노트북 화면을 빠짐없이 녹화하면서, 금고에서 돈을 확인하는 태오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그나저나 저 새끼도 진짜 쓰레기 중의 쓰레기구나. 여기 찍힌 여자애들을 모두 사창가에 팔아넘긴 건가?'
[너무 많은데요? 이렇게 많은 여자를 작업했다니···.]
'아, 아니네. 원래는 단순한 몰카 영상이었나 봐.'
[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냥 룸떡치는 걸 촬영해 놓은 게 아닐까 싶어. 썸네일로 보면 본인이 직접 출연한 영상도 꽤 되거든.'
미리보기처럼 영상의 특정 장면을 띄워주는 썸네일에는 호빠선수였던 시절의 태오의 얼굴이 드문드문 보였다.
[그렇군요. 조태오는 마담이라 직접 출전을 거의 안 한다고 했으니까요.]
'성관계 영상을 찍어 소장용으로 보관하다가, 이걸로 협박하겠다는 범죄 계획을 세운 것 같아.'
[개인적인 악취미가 범죄로 발전한 셈이군요.]
'영상을 보니까 처음엔 무작위로 찍어 놓은 것들이 많아. 여자 나이가 많아 보이는 것도 있고. 아마도 처음엔 한 두명씩 협박을 해보다가 나중에 대학생 위주로 표적을 정했을 거야. 나이가 어릴수록 사창가에서 비싸게 쳐주는 것도 한몫했겠지. 그런 곳은 스물다섯만 넘어도 노땅 취급하니까.'
[그래서 어린 여학생들을···. 정말이지 구제가 불가능한 인간이군요.]
'그나저나 이 파일을 밖으로 뽑아낼 수 있을까? 썸네일만 촬영해서는 증거로 쓰기 부족할 것 같은데.'
[천상계 마켓에서 구형 USB 스토리지를 팔기도 합니다. 그걸 구매해 드릴까요?]
'구형이라니? 기왕이면 신형이 좋지 않아?'
[구형이라는 것이 지구에선 최신식 기술입니다. 최신 USB는 무선으로 전송이 가능하고, 용량 또한 페타바이트 급이고요.]
'페타바이트가 뭐야?'
[1024 테라바이트를 1 페타바이트라고 부릅니다.]
'헐. 그렇게나 많다고?'
[심지어 크기도 손톱보다 작습니다.]
'미치겠구먼. 아무튼 구형으로 부탁해.'
[넵.]
도훈이 USB를 전달 받은 뒤 노트북 포트에 꽂았다. C타입 단자라 전송속도가 빠른 편이었지만, 파일이 워낙 많고 용량 또한 컸기 때문에 복사가 완료되는데 5분이란 예상 시간이 떴다.
'아무래도 시간을 끌어야겠는데···.'
마침 금고 정리를 끝낸 태오도 다시 자리로 돌아오고 있었다.
조태오가 아무리 컴맹이라도, 노트북에 못 보던 USB가 꽂혀 있는 걸 본다면 도훈이 의심받을 수 있었다.
도훈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맞다. 형님. 혹시 저도 그거 구할 수 있을까요?"
"뭐?"
도훈은 일부러 노트북 화면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등 뒤에 가린채 계속 태오에게 말을 걸었다.
"물뽕요. 휘겸이 형이 가지고 있던 거."
"그건 갑자기 왜?"
태오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되물었다. 일전부터 계속 물뽕을 직접 보고 싶다고 밝히는 의도가 수상했기 때문이었다. 도훈이 뒤통수를 긁으며 뻔뻔하게 말했다.
"효과를 직접 보고 나니까, 써먹을 때가 있을 것 같아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