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3. 빌드 업-78-
"이건 손기술이 많이 필요한데 내가 손등 쪽을 직접 보여줄게."
도훈은 인벤토리를 이용한 마술 뿐 아니라, 실제 마술도 자유자재로 쓸 수 있었기 때문에 주아에게 마술을 가르쳐 줄 수 있었다.
물론 그는 몇분만에 쉽게 터득한 기술이었지만, 주아는 비법을 알고도 흉내내기 어려워했다.
"너무 어렵네요. 방법은 알겠는데 도저히 따라하겠어요."
"원래 단기간에 되는 건 없어. 나도 몇년 연습했거든."
[거짓말 마시죠. 까페에 앉아서 한두시간 연습한게 전부잖습니까?]
'그렇게 말하면 잘도 믿어주겠다.'
그때였다.
도훈이 주아에게 마술을 가르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누군가 똑똑- 문을 노크했다.
"누구세요?"
"저, 태오 형님이 보내서 왔는데 잠깐 들어가도 될까요?"
목소리를 듣자마자 도훈은 그가 가게의 에이스인 휘겸임을 깨달았다.
'왔구나. 이 새끼'
도훈이 문을 노려보며 이를 부득 갈았다. 평소보다 훨씬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도훈을 로시가 자제 시켰다.
[주인님. 살기를 방출하시면 곤란합니다. 그러다 들키겠습니다.]
'···알았어.'
로시의 조언으로 가까스로 평정심을 되찾은 도훈의 앞으로 휘겸이 빼곰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도훈은 일부러 처음 보는 사람인 척 휘겸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세요?"
"아, 태오 형이 가서 재롱 좀 떨고 오라고 해서요."
"재롱요?"
"하하-. 여자분 오늘 호빠 처음 오셨다면서요? 선수들 구경이라도 하시라고."
"네?"
"야, 들어가자."
휘겸이 문을 열자, 뒤이어 우르르 선수들이 몰려왔다. 모두 4명이었는데, 도훈이 잘 모르는 친구들이었다.
"이게 다 뭐예요?"
갑작스러운 선수들의 단체 입장에 주아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휘겸은 함께 들어온 선수들을 일렬로 세우더니, 주아에게 설명했다.
"안녕하세요, 저희 박스 선수들입니다, 그래도 호빠 오셨는데 초이스라도 한 번 구경 하시라고."
"초이스요? 전 그런 거 안 할 건데요."
"아뇨, 진짜로 초이스 하시라는 게 아니라, 호빠 오시면 이렇게 논다는 걸 보여드리려고요. 태오 형님이 아까 말씀하셨다던데?"
휘겸이 갑자기 공을 도훈에게 던졌다. 둘이 합의해놓고 왜 여자한테 말을 안했냐고 따지는 모양새였다.
"오빠, 진짜야?"
"아···. 어, 아까 잠깐 그런 얘기를 하긴 했는데."
"난 초이스 같은 건 진짜로 관심없어."
"에이, 그래도 기왕 여기까지 들어왔으니까 구경이나 한 번 해보시죠. 혹시 또 압니까? 나중에 친구들이랑 놀러 올 때 약간이나마 도움이 되실지도,"
"흠."
주아는 잠시 고민하는 듯 했으나, 도훈이 이미 허락했다고 하니 선수들을 물릴 수 없었다. 자칫하면 도훈의 체면이 깎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알았어요. 그럼 진짜로 구경만 할게요."
"네. 자기 소개부터 올리겠습니다. 자, 1번 타자."
휘겸의 신호에 맨 왼쪽에 선 선수가 과장된 몸짓으로 주아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신바람 이박삽니다, 요르르르르히!"
얼굴은 좀 떨어졌지만, 유머로 승부하는 타입같았다.
"장기는 트로트고, 아무곡이나 말씀만 하시면 임영운 뺨치게 불러 드립니다. 숨 쉬는 주크박스라고 할까요?"
"죄송하지만 저 트로트 별로 안 좋아하는데요."
"아하! 실례가 많았습니다!"
1번이 물러나자 이번엔 턱수염을 기른 마초남이 한 발 앞에 나왔다. 그는 특이하게도 셔츠에 멜빵을 차고 있었는데, 두 손으로 멜빵을 잡아당기며 짝- 소리나게 튕겼다. 근육질의 가슴에서 채찍질을 한 것 마냥 찰진 소리가 났다.
"PT 트레이너 출신입니다. 다른 건 몰라도 몸으로 하는 건 다 자신있습니다. 저랑 달밤에 체조 한 번 해보시겠습니까?"
그러더니 갑자기 셔츠 윗 단추를 과감하게 풀어헤치는 것이었다. 대흉근을 뽐내려는 속셈이었지만, 가슴에 난 수북한 털을 본 주아가 기겁하며 도리질 쳤다.
"으, 극혐. 죄송한데 단추 다시 잠가주시면 안돼요?"
"아···."
3번째로 나선 이는 키가 훤칠한 미남이었다. 긴 머리 한 쪽이 눈을 가릴만큼 흘러내려있고 특이하게 실내인데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안녕, 귀여운 꼬마 아가씨?"
느끼한 목소리로 멋진척 하는 모습을 본 주아가 이름을 소개하기도 전에 뺀찌를 놨다.
"토할 것 같은데 그만 하시면 안돼요?"
"······."
3명의 선수 소개가 끝나고 마지막으로 에이스 휘겸이 출격했다. 그는 나머지 셋과 차별화된 외모와 화술로 한눈에 주아의 눈길을 사로 잡았다.
도훈은 그의 절묘한 등장 방식에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완전 몰아 주기 하는군.'
[몰아주기라뇨?]
'사람이 언제 가장 돋보이는 줄 알아?'
[남보다 빼어난 모습을 보일 때 아닙니까?]
'그렇지. 더구나 비교 대상이 있으면 더 선명하거든. 휘겸은 일부러 쩌리 선수들을 데려다 놓고 들러리로 만든다음, 자신의 수려한 외모를 확실히 각인시킨 거야. 내내 실망하다가 마지막에 딱 하고 등장하면 주인공처럼 보이는 심리를 이용한 거지. 에이스가 되가지고 얄팍한 수작이나 부리다니.'
[흐음, 확실히 주아양의 반응이 앞선 세 사람하고 다르군요.]
'안 그래도 잘생긴 새끼가, 몰아주기까지 받았으니 오죽할까, 저런 뻔한 수법에 당한단 말이야?'
멋들어지게 자기 소개를 끝낸 휘겸이 주아에게 말했다.
"이렇게 소개가 끝나면, 손님께서 원하는 선수를 초이스를 하는 방식입니다."
"아하. 이해했어요."
"혹시 저희 넷 중 마음에 드는 상대가 있으셨는지?"
"꼭 골라야 해요?"
"아뇨. 만약 없으면 바로 다른 선수들을 추가 투입합니다. 규모가 큰 곳에 놀러가시면 못해도 5바퀴는 돌리실 수 있을 거예요. 뭘 좋아할지 몰라서 싹 다 준비한 꼴이랄까?"
"그렇구나."
"그래도 기왕 소개 끝났으니 아무나 한 명 골라 보세요. 어차피 재미삼아 하는 건데요."
"음···."
주아가 슬쩍 도훈의 눈치를 살폈다. 아무리 재미로 고르는 거라고 하지만, 파트너인 도훈이 기분 나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도훈은 상관없다는 듯 주아에게 말했다.
"한 번 골라봐."
"진짜로요?"
"뭐 어때? 태오 형이 심심할 까봐 초이스 시켜준 건데."
"그럼 별 뜻은 없지만, 굳이 뽑자면···."
주아는 네명의 남자를 번갈아 보다가 마지막에 소개 한 휘겸을 찍었다. 놈이 의도한 결과 그대로였다.
"그래도 저 오빠가 제일 멀쩡해 보이네. 그 쪽으로 할게요."
"초이스, 감사합니다."
휘겸이 꾸벅 인사를 하더니, 나머지 세 사람을 내 쫓았다.
"자자, 여긴 장사 끝났으니 싸게싸게 돌아들 가시고."
다른 선수들이 나가는데도 휘겸이 계속 룸에 남아있자, 주아가 의아해 하며 물었다.
"그쪽은 같이 안 나가세요?"
"어? 방금 저 초이스 하신 거 아니에요?
"네? 아니 장난으로 한 번 골라보라면서요?"
휘겸이 히죽히죽 웃으며 자연스럽게 테이블 쪽으로 다가왔다. 뱀처럼 능글맞은 놈이었다.
"하하, 농담입니다. 불편해 하시는 것 같으니 저도 곧 나갈게요. 그래도 초이스 해주셨으니 양주 한 잔 따라주시면 영광이겠습니다."
"뭐, 그 정도야."
휘겸이 빈 잔을 내밀자, 주아가 양주를 직접 따라주었다. 휘겸은 스트레이트 잔을 한번에 꺾어 마시더니, 갑자기 이마를 짚고 소파에 쓰러졌다.
"아이고, 두야. 너무 빨리 마셨네요. 머리가 어질어질하네."
"괜찮으세요?"
"저 잠시 여기서 쉬었다 가도 될까요? 지금 일어서면 토할 것 같은데···."
"네?"
주아는 휘겸이 눌러 앉을 기세를 보이자 난감한 표정으로 도훈을 빤히 쳐다보았다.
'괜히 초이스 했나봐, 서준 오빠가 불편해 할 것 같은데.'
물론 주아도 휘겸이 잘 생긴건 인정했다.
나머지 셋이 일반인보다 조금 빼어난 훈남 정도였다면, 휘겸은 누가봐도 호빠 선수라고 할 만큼 군계 일학의 외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만약 자신이 도훈과 함께 있지만 않았다면, 첫 눈에 혹할 법한 외모였지만, 그와 술 마시러 온 이상 당연히 관심을 보이면 안될 것 같았다. 마치 남자친구를 앞에 두고 대놓고 바람을 피우는 기분이었다.
도훈 역시 예상은 했지만, 막상 휘겸이 둘 사이에 뻔뻔하게 자릴 잡자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저 좆같은 새끼가 나를 완전 병풍 취급하는군.'
[주인님 외모가 조금만 꿀렸으면 제법 위험할 뻔 했겠는데요?]
'개새끼. 내가 거부할 수 없다는 걸 알고 대놓고 들이대는 거야. 여기서 반발하면, 공들인 작업을 망치는 내가 꼴이니까.'
[그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일단 받아 주는 수밖에.'
"서준 오빠, 어떻게···."
"잠시 쉬었다가 가세요. 재밌는 구경도 시켜주셨는데."
"정말요? 감사합니다. 전 남자친구 분이 싫어할까봐 걱정했거든요."
"남자친구는 아니에요."
"네? 두 분 사귀는 사이 아니였어요?"
"네."
주아의 대답에 도훈은 배신감마저 느꼈다. 물론 조태오 앞에서도 똑같이 대답 했지만, 어째서 인지 주아가 휘겸의 눈부신 외모에 흔들리는 것 같다는 의심이 든 것이다.
'아아, 이게 실시간 NTR인가 그런 건가?'
[너무 속상해 할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주아양은 있는 그대로를 말한 것 뿐이니까요.]
'그나저나 존나 거슬리네. 저 휘겸이라는 새끼.'
뻔뻔하게 룸에 눌러앉은 휘겸이 이번에는 자신이 주아에게 술을 따랐다.
"먼저 받았으니 저도 한 잔 올리겠습니다."
"네? 저한테요?"
"하하, 너무 부담 갖지 않으셔도 돼요. 어차피 손님 없어서 잠깐 놀러 온 거니까요. TC 같은 건 신경 안쓰셔도 됩니다."
"TC가 뭔데요?"
주아가 호기심을 드러냈다. 도훈은 주아가 자꾸 휘겸과 눈을 마주치며 생글거리는 게 몹시 거슬렸다.
"호빠 처음 오셨다했죠? TC는 테이블 차지라는 건데, 원래 선수를 초이스하면 시간당 비용으로 청구되거든요. 노래방 같다고 하면 되려나?"
"그렇구나. 신기하다."
"하하-. 근데 같이 오신 분 얼굴 보니까, 호빠 같은 덴 전혀 안 다니셔도 되겠네요. 원체 잘생기셔서."
"그쵸? 서준이 오빠가 좀 잘 생기긴 했어요."
"조금이 아닌데요? 솔직히 저처럼 얼굴로 먹고 사는 직업은, 저런 분들 보면 괜히 긴장된다니까요? 자리 뺏길까봐서요."
"에이, 그 쪽도 잘생겼는데 뭘."
'하- 저 지조 없는 년. 나랑 아까 차에서 그 짓까지 해놓고선 휘겸이한테 바로 끼부리는 거 봐.'
[주인님의 존재감이 밀리는 경우는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확실히 휘겸이 에이스는 에이스네요.]
'에이스 같은 소리 하네. 확 뚝배기를 부셔버릴라.'
[워워. 폭력은 안 됩니다. 흥분 마시고 얼른 주아양의 관심을 주인님께 돌릴 궁리나 하십시오. 이러다 진짜 주아양이 흔들리겠습니다.]
'아까 드라이브할 때 어떻게든 따 먹어 버렸어야 했어. 정액 중독이라도 시켜놨으면, 다른 남자는 쳐다 볼 생각도 안 했을텐데.'
[그러게 왜 여유를 부리셨습니까? 주아양이 헤픈데다 지독한 얼빠라는 걸 아셨으면서요.]
'그래도 내 앞에서 대놓고 휘겸이랑 시시덕 거릴줄은 몰랐지.'
주아는 원래도 남자를 밝히는 편이었다.
그 중 잘생긴 남자에겐 유독 사심을 드러냈다.
휘겸은 그 조건에 매우 부합하는 인물이었고, 따라서 주아도 휘겸에게 어느 정도 호감을 보였다. 다만 아직까진 도훈에 대한 감정이 더 컷기 때문에 그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었다.
"그럼, 남사친 분도 제가 한 잔 따라드리겠습니다."
"남사친이요?"
"여자분께서 남친은 아니라고 하니, 남사친으로 불러야 하지 않을지."
계속된 휘겸의 도발에 도훈도 슬슬 열이 받기 시작했다.
"혹시 여기 남자 손님도 와요?"
"네? 하하. 아뇨. 저희 가게는 여성 전용인데요."
휘겸이 술을 따르며 생글거리자 도훈이 따지듯 물었다.
"그래요? 돈 만주면 상대가 누구든 접대하는 게 맞지 않나? 상대가 설사 게이라도."
갑작스러운 도훈의 공격에 휘겸이 살짝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원래라면 적당히 분위기 맞춰주다 몰래 물뽕을 탈 때 시선을 끌어주는 게 도훈이 맡은 역할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도훈은 마치 한판 붙어 보자는 듯 대놓고 시비를 걸고 있었다. 이건 전혀 약속이 안된 행동이었다.
'멘트가 왜 저래? 저 새끼 뭘 잘못 처먹었나?'
휘겸은 어이가 없었지만, 이런 일로 감정을 드러낼 만큼 바보가 아니었다. 숙련된 호빠 선수는 어지간한 모욕으론 가면이 쉽게 벗겨지지 않는 법이니까.
"하긴, 생각해 보니 손님 말이 맞네요. 저희 같은 일 하는 사람들이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긴 하죠. 조언 감사합니다."
휘겸이 적당히 무마하려고 했지만, 도훈은 전혀 그칠 생각이 없었다.
"그럼 남자랑 2차도 나갈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