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7. 빌드 업-72-
도훈은 주아의 깨톡을 보자마자 인상을 찌푸리며 폰을 내려놓았다.
'혼자 북치고 장구치는 스타일이네. 이런 스타일이 제일 피곤한데.'
[그래도 답장은 해주셔야죠.]
'그냥 AI한테 맡기면 안 되나? 도저히 피곤해서 문자 못 하겠는데. 교수님이 시험 문제 찍어 주고 있는데, 하필 이 타이밍에···.'
[망부석이 되지마오 아이템은 관계를 유지하는 수준이지, 발전 시키긴 어렵습니다. 주인님이 직접 상대하는 게 훨씬 결과가 좋을 겁니다.]
'어휴, 그때 만났을 땐 이렇게까지 피곤한 성격인 줄은 몰랐는데.'
-도훈 : 미안. 실은 다음 주부터 중간고사 기간이라 공부하느라···.
-주아 : 시험 공부를 무슨 일주일 전부터 해요?
-도훈 : 원래 대학 시험은 일주일 전부터···.
도훈은 해당 내용을 적다가 다시 지웠다. 전문대를 다니는 주아가, 자격지심을 느낄 법한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도훈 : 내가 공부를 못 해서 그래.
-주아 : 쳇. 알았어요, 시험 공부 했다니까 이번 한 번은 봐줄게요. 저 근데 말없이 연락 없는 거 엄청 싫어한 단 말이에요.
도훈이 푹- 한숨을 내쉬었다.
'문자 주고받는 게 고통스럽긴 처음이네.'
[참으셔야 합니다. 목적을 달성하시기 전까지는요.]
'어휴. 그나저나 교수님 강의 녹음이라도 떠놔야겠다. 이러다 진짜 시험 다 망칠 것 같은데.'
[걱정 하지마십쇼. 방법은 다 있으니까요.]
'컨닝 얘기하는 거라면 넣어 둬. 아직까진 고려하고 있지 않으니까.'
[너무 우직하실 필욘 없습니다. 주인님이 똑똑하다는 것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니까요.]
'거참. 말세로군. 불법을 조장하는 인공 지능이라.'
[모두 주인님을 위해서죠.]
주아의 톡은 그 뒤로도 쉬지 않고 이어졌다. 도훈이 화장실을 갈 때도, 혼자 밥을 먹을 때도 계속되었다.
만나기 전부터 지쳐 버린 도훈은, 마지막엔 그냥 그녀를 포기하고 호빠로 데려갈 상대를 교체할까 고민하는지경에 이르렀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성희로 바꿀까?'
[성희양은 벌써 공략이 끝난 상대 아닙니까? 호빠로 데려갈 명분이 부족할 텐데요. 본인도 쌩뚱맞아 할 테고요.]
'주아가 이렇게 성가시게 굴지는 몰랐지. 받아주니까 적당히를 모르네.'
[만나면 또 다를 겁니다. 조금만 참으십시오. 곧 수업도 끝나니까요.]
어느새 마지막 교시였다. 전공 수업을 듣던 도훈은 계속 깨톡을 주고받느라 이번에도 제대로 강의를 들을 수 없었다.
잠시 쉬는 시간, 건물 밖으로 담배를 피우러 나온 도훈에게 전공 수업을 같이 듣던 동생 하나가 도훈에게 다가왔다.
"형, 아까부터 누구랑 그렇게 톡을 주고받으시는 거예요?"
"어. 너는···."
말을 건 상대는 영환이었다.
도훈은 등줄기에 소름이 쫙 돋았다.
'저 게이 새끼가!'
[너무 그러지 마십시오. 상대의 성적 취향을 존중해 주셔야죠.]
'존중은 하는데 나한테 관심은 제발 꺼줬으면 좋겠는데.'
"형, 혹시 여자 친구 사귀세요?"
영환이 스스럼이 없이 다가오자 도훈은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영환은 이전부터 대화할 때 자꾸 상대의 몸을 만지는 버릇이 있었는데, 팔꿈치를 쓰다듬는 다거나 어깨를 툭툭 건드리는 식이었다. 신경을 안 쓰면 모를 수 있지만, 한 번 의식하기 시작하자 모든 행동이 고의로 느껴졌다.
'조금만 더 접근해 봐, 죽인다! 죽일 거다!'
[너무 오버 하시는 거 아닙니까? 스킨십 좀 한다고 사람을 죽이다뇨?]
'게이 새끼는 원천 차단이야. 1M이상 접근 금지 시켜야 해.'
영환과 엮이는 게 싫었던 도훈은 거짓말해서라도 그를 쫓아내야겠다고 결심했다.
"어? 어떻게 알았어? 나 여자 친구 있는지?"
"진짜요?"
"응."
무엇보다 도훈은 영환이 수업 시간 중 자신을 몰래 훔쳐보고 있었다는 사실에 소름 끼쳤다. 어떻게 해서든 그가 자신에게 관심을 꺼줬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
"형, 여자 별로 안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뭔 소리야 그게?"
"형 좋아하는 여자 후배도 많은데, 아무도 안 만나시길래요···."
도훈은 그제야 영환이 자기 근처에 맴돌았던 이유를 깨달았다.
도훈이 바람둥이라는 소문만 무성할 뿐, 누구와도 사귀지 않고 솔로 생활이 길어지자 혹시나 남자를 좋아하는 취향이 아닌지 오해했다.
'헐. 설마 저런 이유였나?'
[이런, 주인님도 민수와 똑같은 오해를 받고 있었군요.]
'아무리 여자를 안 사귀고 있다고 해도, 남자를 좋아하는 취향이라고 단정하는 건 너무 극단적인 편견 아니냐?'
[원래 게이 눈에는 게이만 보이고···.]
'어휴. 이번에 확실하게 태도를 정해 줘야겠어. 난 국성대 난봉왕이지, 게이킹이 아니라고.'
"아냐. 나 여자 좋아해. 그것도 엄청. 굳이 학교에서는 안 만날 뿐이지."
"···그러셨구나."
영환이 충격받은 표정으로 물러났다. 아마도 다시는 도훈에게 접근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도훈은 자기도 모르게 엉덩이를 어루만지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게이로 오해 받느니, 여친 있다고 하는 게 낫지.'
[근데 괜한 소문 퍼지는 거 아닙니까? 주인님이 학교 밖에서 여자 친구를 사귄다는···.]
'설마. 내가 여자 안 사귀는 건 다른 여자들이 더 잘 알 텐데, 뭘. 게이인 영환이 어디 가서 소문 낼 애도 아니고.'
도훈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 * *
수업이 끝난 도훈은 차를 몰고 주아를 만나러 갔다.
주아는 만나기 직전까지 계속 깨톡을 보내 왔는데, 나중엔 답장이 힘들어 통화하면서 목적 장소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웬 통화예요?
"어, 운전 중이라 톡하기 힘들어."
-우아, 오빠 차도 있었어요?
"왜? 나 차 없게 생겼나?"
-대학생이라고 하셨으니까요. 그때도 택시 타고 저 데려다 주셨고.
"그땐 차를 안 가져왔거든. 술 마실지도 몰라서."
-아···. 오빠 엄청 잘나가시는 구나!
"잘나가디니? 그렇게 좋은 차도 아니야. 그냥 중고차야."
-그래도요. 차를 모는 대학생은 처음 봐요.
주아는 차를 몬다는 소리에 몹시 흥분한 것 같았다.
[차가 있다는 게 저렇게 신기한 일인가요?]
'주아가 어려서 그런 것 같은데? 올해 스물 한 살이랬나?'
[네. 대학을 1년만 다니고 돈을 벌기 위해 휴학 중이라고 했습니다.]
'그럼 그럴 수 있지. 또래 동기나 선배 중에 차를 모는 사람은 거의 못 봤을 테니까.'
[그래도 바텐더 하면서 만난 남자들은 차가 있지 않았을 까요?]
'주아가 상대적으로 나이 어린 남자들만 만난 것 같아. 원체 섹스를 밝히는 편이라 본인이 끌리는 사람하고 섹스할 뿐, 용돈을 벌기 위해 나이 많은 아저씨들을 만난 건 아닌가 보지.'
[호오. 그렇군요.]
통화를 하는 사이 어느새 도훈이 주아의 집 앞에 도착했다. 미리 밖으로 나와 있던 주아가 차에 타면서 말했다.
"이야, 진짜네요? 혹시 아빠 차 몰래 끌고 온 거 아니죠?"
"뭐래. 내 차 맞거든?"
"신기하다. 오빠 나이에 차 모는 사람 처음 만나 봐요."
"남자를 별로 안 만나 본 거 아니야?"
도훈이 넌지시 남성 편력을 떠보자, 주아가 배시시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뜻밖에도 능글맞은 구석이 있었다.
"맞다, 근데 우리 뭐 먹으러 가요?"
"뭐 먹고 싶은데?"
"비싼 것 돼요? 그때 저 때문에 돈 많이 따셨잖아요."
"얼마든지."
"음, 저 그럼 해산물 먹고 싶어요."
"해산물이면 회?"
"회 말고 킹 크랩이요."
"킹 크랩?"
"음, 역시 비싸겠죠? 사실 새우도 괜찮아요.""
킹크랩이 싼 음식은 아니었지만, 도훈에게는 딱히 비싼 음식도 아니었다.
"아냐. 사줄게. 킹크랩."
"어, 정말요? 그냥 한번 말해 본 건데."
"먹고 싶다는 데 사줘야지."
도훈은 차량 내비게이션을 통해 가까운 킹크랩 음식점을 찾았다.
"저 때문에 괜히 무리하는 건 아니죠?"
"괜찮아. 그 정도는."
같이 저녁을 먹는 동안에도 주아는 신이 나서 혼자서 계속 떠들었다. 딜러를 할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에 도훈이 속으로 생각했다.
'뜻밖에 수다쟁이구나. 나이가 어리다고 다 저렇게 말이 많진 않던데.'
[그러니까 말입니다. 그땐 처음이라 내숭을 떨었던 걸까요?]
'아니. 생각해 보면 처음 봤을 때도 나한테 먼저 장난 쳤잖아. 기억나지? 손에 얼음 쥐어가지고. 깜짝 놀래킨 거.'
[아, 기억납니다.]
'텍사스 홀덤 진행하던 모습이 계속 잔상에 남아가지고 몰랐는데, 일할 때 말고 사석에선 원래 말도 많고 장난기도 많은 타입 같아.'
[남자도 엄청 밝히고 말이죠?]
'응. 이런 분위기면 식사 끝나고 자기가 먼저 모텔 가자고 할지도 모르겠는데?'
[그렇게 빨리요?]
'주아는 남자한테 얻어 먹는 걸 별로 좋아하는 타입은 아닌 것 같아. 아마 비싼 식사를 대접받았으니 자기도 뭔가 보답해야 한다고 생각하겠지.'
[밥 좀 얻어먹었다고 몸으로 보답하는 여성이라니니요.]
'꼭 그건 아닐 거야. 아마 나랑 저녁 약속을 잡은 순간부터, 내가 뭘 사주든 오늘 잘 생각을 했을걸? 집까지 바래다준 날에도 슬쩍 나를 떠봤었잖아. 라면 먹을 생각 아니었냐고.'
[지나치게 밝히는 타입인건 확실해 보입니다.]
'오히려 좋지. 너무 순진한 애 였으면 호빠로 데려가기도 미안했을 테니. 식사도 얼추 마친 것 같은데 슬슬 운을 띄워 볼까?'
"식사는 괜찮았어?"
"네. 여기 엄청 맛있네요."
"그럼 우리 이제 어디 갈까?"
주아가 생글거리며 물었다.
"오빤, 가고 싶은 곳 있어요?"
"내가 정해?"
"음···. 쉬는 날이니까 저 오늘 늦게까지 놀아도 상관없거든요."
"저녁 늦게까지 뭐 하고 놀까?"
"글쎄요? 오빠가 한 번 정해 봐요."
[역시나 주인님 예상대로군요. 모텔 가자고 하면 바로 수락할 기세네요.]
'그건 안 될 말이지. 오늘 일정에 모텔은 없어. 내가 하루 종일 얼마나 고통을 받으면서 깨톡에 시달렸는데.'
"그럼 술 마실까?"
"술요? 오빠 술 마시고 싶어요?"
"그냥, 마시면 기분 좋잖아."
주아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중얼거렸다.
"전 딱히 술 안 마셔도 상관없긴 한데···."
"응?"
"아, 아니에요. 오빠가 어색할 것 같으면 그렇게 해요."
'술에 안 취해도 줄 수 있다는 뜻인가?'
[그런 의미로 해석되는군요.]
'거참, 저렇게나 발랑까진 애라니. 쉬워도 너무 쉬운 거 아니냐?'
[다 주인님이 잘생긴 덕이죠. 요즘 젊은 아가씨들이 성관계를 가볍게 여기는 경향도 한몫 할 테고.]
'나때는 말이야, 진짜 결혼할 거 아니면 같이 자지도 않았다고.'
[에이, 그건 아니다.]
"실은 아는 형이 할일없으면 오늘 자기 가게 놀러오라고 하더라고."
"아는 형요? 누군데요?"
"예전에 같이 알바하면서 친하게 지냈던 형인데, 요 근처 술집에서 일하나 보더라."
"아항. 서빙이요?"
"아니."
"어? 혹시 사장님이세요?"
"그것도 아닌데."
"뭔데요? 설마 주방은 아닐 거고."
"선수야."
"네?!"
도훈이 다시 또박또박 말했다.
"그 형, 호스트 바에서 일하는 선수라고."
"자, 잠깐만요. 그러니까 거기가 그 남자 접대부···."
"굳이 따지면? 암튼 자기 가게 놀러오면 술 싸게 준다더라."
주아가 갑자기 팔짱을 끼더니 게슴츠레한 눈으로 도훈을 쳐다보았다.
"혹시 오빠도 그래요?"
"나? 뭐?"
"오빠도 호빠 선수냐고요."
"내가?"
도훈이 갑자기 공중에서 카드를 끄집어냈다.
"난 마술사 라니까."
"엇, 방금 그거 어떻게 했어요? 분명 손에 아무것도 없었는데?"
"나한테 마술 배우고 싶어?"
"알려 줘요! 저번에 분명 가르쳐 주신다면서요."
"식당에선 좀 그래. 어때? 한 가게 한 번 가볼래?"
"흠···. 저 호빠는 한 번도 안 가 봤는데···. 거기 막 이상한데 아니예요?"
"여자들끼리 가는 거면 몰라도 남자랑 같이 가면 그냥 술집이지."
"그래요?"
"설마 나랑 같이 가서 다른 남자를 초이스 할 거야?"
"무슨 소리예요. 제가 무슨···."
"그리고 오늘 월요일이잖아. 호빠도 평일에는 손님이 없어서 룸이 많이 빈대. 그래서 그 형이 그냥 놀러 와서 술이나 팔아 달라더라. 그냥 양주 나오는 고급 룸소방이라고 생각하면 될 거야."
"아하. 룸소방?"
주아는 룸 소주방이라는 말에 솔깃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호스트를 안 부르고 논다면 호빠나 룸소방이나 별 차이는 없었다.
'모텔 안 가고 룸으로 가자는 뜻인가? 취한 김에 은근슬쩍 덮치려고? 하긴 뭐 예전에도 노래방에서 한 적 있었는데.'
"알았어요. 어차피 오빠랑 같이 가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