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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733화 (1,713/2,000)

1733. 빌드 업-68-

"도훈아 라고 하면 반말이라고 또 어색해할 거잖아."

"네."

"그러니까 호칭은 도훈씨라고 불러 줘. 그게 내가 듣기 좋을 것 같아."

"네, 도훈씨."

농담 따먹기를 하는 사이 어느새 우리 집에 도착했다.

"차에서 기다리고 있어. 네 옷 챙겨 나올 테니까."

"네? 제가 직접 다녀 오겠습니다."

"아냐, 내가 더 빨라."

차에서 내린 뒤 훌쩍 담을 뛰어 넘어 방에 있는 김 비서의 옷을 챙겨나왔다. 김 비서가 옷을 받기 위해 차에서 내리려고 하자 내가 말렸다.

"아니. 그냥 타고 있어. 너희 집까지 바래다 줄게."

"괜찮습니다, 도훈씨."

"택시 타고 가려고?"

"아뇨, 아직 지하철 다니는 시간입니다."

"뭐 하러 다리 아프게 지하철을 타? 그냥 내가 태워 줄게. 부담 안 가져도 돼."

"정말 안 그러셔됩니다."

"출근 첫날부터 야근시켰으니, 그 보답이라고 생각해."

"아···, 네."

[차라리 용돈을 쥐어 주시지 그러십니까? 아버지 병원비 때문에 일부러 대중교통 이용한다는 거 같은데요.]

'물론 그런 방법도 있는데, 굳이 동정을 바라는 타입은 아닌 것 같아서.'

[왜 그런 생각을···.]

'김 비서 와꾸를 보라고. 더 쉽게 돈 벌 방법도 얼마든지 있었는데, 그래도 나름 중견 기업 비서 일을 선택했잖아.'

[비서실 근무도 결국 몸과 마음을 다 바치는 것은 똑같은데요? 돈에 팔려 간 거 아닙니까?]

'에이, 그래도 다르긴 다르지. 물론 아주 순수하다고 볼 순 없겠지만, 최소한 자존심은 지키려는 선택이었을 거야. 어디 가서 말 못 할 직장은 아니잖아. 그리고 저렇게 자존심 강한 타입은 이유 없는 동정에 고마워하기보다 오히려 부담을 느낄 거야. 진짜로 도와주고 싶으면 더 친해지고 나서 해도 돼.'

[주인님 뜻이 그렇다면야.]

"집이 어느 방향이야?"

"···고양시입니다."

"경기도?"

"네. 서울은 주거비용이 감당이 안돼서···. 죄송합니다. 그냥 지금이라도 가까운 지하철역 앞에 내려주시면···."

"아니야, 아니야. 나 오늘 시간 되게 많아. 드라이브 가는 셈 치고 데려다줄게."

"그건 제가 너무 죄송해서···."

"내가 괜찮다니까 그러네."

[와 그럼 김 비서는 이제까지 출퇴근을 쭉 경기도에서 해온 겁니까?]

'그랬나 본데? 하긴 아버지 병원비 대기도 빠듯했을 텐데, 자기 생활비까지 아껴야 하는 상황이었나 보네.'

[안타깝군요. 대체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알아볼 방법은 많지만, 당장 내가 움직일 수 없으니.'

[정의의 여신께서 직접 하달한 미션입니다. 분명 쉽지 않을 겁니다.]

'알고 있어. 5만 포인트 짜리 미션이면, 절대 쉬울리가 없지. 하지만 김 비서를 위해서라도 이번 미션은 꼭 성공 시키고 말겠어.'

[몸이 두 개라도 모자라겠군요. 호빠 건도 처리하랴, 사이비 종교도 해결하려면]

'어쩌겠어. 이게 플레이어의 숙명인 것을.'

고양으로 가는 길에 김 비서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픔이 될 수 있는 집안 사정에 대해선 일부러 언급을 피하고, 최대한 다른 주제로 떠들었다.

대화하면 할 수록 김 비서, 아니 희진이는 매력적인 여성이었다. 외모에 귀티가 나고 기품있는 태도 또한 어린 시절 부유하게 살던 시절의 흔적으로 보였다. 아마도 무난히 자랐으면 남부럽지 않게 행복한 삶을 살았을 여자였다.

"근데··· 도훈씨는 나중에 선생님 되실 거예요?"

"응?"

"아니, 아까 저한테 주신 책에 보니까. 사범대 체육교육과라고 적혀 있길래."

소품으로 건넸던 책을 보고 내 전공을 알게 된 모양이었다.

"아, 그거?"

"아니면 실장님 말씀대로 졸업 후 도원 그룹으로 입사를···."

"아직은 안 정했어."

"안 정 하셨어요?"

"김 비서가 볼 땐 내가 학교 선생하면 어울릴 것 같아?"

"그건···."

"왜? 별로야?"

"아, 아닙니다. 실은 학교 다닐 때 도훈씨처럼 잘생긴 선생님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엥? 그게 이유라고?"

"죄송합니다."

"아니 뭐 죄송할 건 아니고. 그럼 조폭은? 내가 조폭같아?"

"음···."

"괜찮아. 솔직히 말해 봐."

"아까 화내셨을 땐 사실 좀 무서웠습니다."

"그래?"

"네. 그런데 평소에는 또···. 이렇게 자상하시니.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구나. 나도 아직 잘 모르겠어. 그래도 확실한 건 대학 졸업한 뒤에 결정하고 싶다는 거야."

"네."

대학 이야기가 나오자 문득 그녀가 집안 사정 때문에 중퇴했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김 비서."

"네?"

"앞으로는 일요일에만 출근할 텐데, 평일엔 뭐 할 거야?"

"그게···. 아직 못 정했습니다. 일단은 간병인 대신에 제가 직접 병원으로···."

"간병인이라니?"

"아버지가 지금 병원에 계셔서요."

"그랬어?"

일부러 더 깊이 묻지는 않았다.

본인이 먼저 알려주지 않는 이상 굳이 남의 약점을 들출 필요는 없었다.

"그래도 젊은 사람이 계속 병원에만 붙어 있으면 너무 심심하지 않겠어?"

"괜찮습니다. 간병인을 안 쓰게 되면 병원비도 줄일 수 있고···."

"아니면 이건 어때?"

"네?"

"중퇴했다는 대학 말이야. 지금이라도 다시 시작해 보는 건."

"대학을요?"

"평생 고졸로 남아 있으면 나중에 후회되지 않겠어?"

"그렇지만···."

"학비는 내가 대줄 수 있어."

"네? 이사님, 아니 도훈씨가 왜 제 학비를···."

"그냥, 그러고 싶어서."

갑작스러운 제안에 김 비서는 몹시 혼란스러운 것 같았다. 하긴 내가 스폰서도 아니고, 이렇게까지 해 줄 필요는 없긴 했다. 다만, 그녀의 딱한 사정을 알게 되자 도저히 그대로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간병인을 둬야 할 정도로 아버지의 병환이 심각하다면, 젊디 젊은 그녀가 온종일 병원에만 붙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아무리 멘탈이 강한 그녀라도, 장기간의 간병 생활은 못 버틸 것이다.

[아니, 아까는 쓸데없는 동정은 안 하시겠다면서요?]

'동정이라기 보단 투자지.'

[투자요?]

'이유 없이 돈을 쥐여 주는 건 적선이고 동정이지만, 못 다닌 대학을 다녀보라고 후원해주는 건 상대에 대한 투자라는 거야. 그리고 내 호의를 받아들인다면 김 비서를 완전히 내 사람으로 만들 수 있겠지. 5만 포인트짜리 신들의 미션이 걸린 주요 인물을 말이야.'

[그런 의미였군요.]

'힘든 상황임에도 김 비서가 여태껏 버틸 수 있었던 건, 아이러니하게도 도원 그룹에서 비서 직을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해. 자신을 희생하면서 아버지를 살리고 있다는 사명감이 그녀를 필사적으로 만들어 주었을 테니까.'

[그런데요?]

'갑자기 일이 사라지면 어떻게 되겠어? 병든 아버지와 계속 병원에 있는 게 그녀에겐 더 큰 고통이 될지도 몰라. 무력감에 빠지거나 우울증에 걸리기 딱 좋겠지. 난 정서적으로 불안한 비서를 부리고 싶은 생각은 없거든.'

[그거 아십니까?]

'뭐?'

[주인님은 갖은 핑계를 대며 자신을 합리화하지만 결국 여자 앞에선 한없이 자상한 사람이라는걸요.]

'내가? 전혀 아닌데?'

[주인님이 마냥 난봉꾼만은 아닌 게 매력 있는 점이긴 합니다.]

'쓸데없는 소릴.'

"도훈씨 그래도 저는···."

"그냥 시키는 대로 해."

도저히 들을 기미가 안 보였기 때문에 그녀의 성격에 맞게 명령조로 말했다.

"아···."

"난 솔직히 무식한 비서는 별로거든. 그러니 공부해서 다시 대학을 다니라고. 왜 말귀를 못 알아 듣지?"

"죄, 죄송합니다."

"자퇴한 대학을 복학하는 절차를 밟을 수도 있겠지만, 어차피 점수 맞춰 간 대학이면 차라리 다른 전공을 알아보는 방법도 있을 것 같아. 그러니까 일단 재수부터 시작해."

"재, 재수라니···."

"왜? 과외 선생도 하나 붙여 줘?"

"아, 아닙니다."

"잠깐만."

나는 운전석과 보조석 사이에 있는 콘솔박스를 뒤지는 척하면서, 빈 공간에서 인벤토리로 연결해 지폐 뭉치를 꺼내기 시작했다. 일 전에 지하철 로커 안에서 2억을 꺼낼 때와 비슷한 수법이었다.

잠시 후 현금 뭉치를 김 비서에게 전달했다.

"이, 이게···."

"5만원권 100장씩 2묶음이니까 천만원쯤 될 거야. 일단 이걸로 내일부터 재수학원부터 끊어. 수강증 끊으면 나한테 사진 보내고."

"아, 아니 이렇게 많은 돈을···. 저는 받을 수가···."

"명령이야. 받아."

"아···."

김 비서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나의 호의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그녀를 납득시키기 위해선 결국, 내가 악역을 맡기로 했다.

"김 비서."

"네, 네?"

"그거 공짜 아니야."

"아···."

"갚으라는 뜻은 아니야. 대신."

나는 일부러 손을 뻗어 청바지를 입고 있는 그녀의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김 비서는 움찔 놀라는가 싶더니 눈을 질끈 감고 가만히 숨죽였다.

"···무슨 뜻인지 알지?"

"네, 도훈씨."

"학원비 떨어지면 또 줄게. 나중에 대학갈 때도 등록금 다 대줄 거고. 그러니 앞으로 돈 걱정은 안 해도 돼."

"너, 너무 큰 금액입니다."

"지금 날 모욕하는 거야?"

"네?"

"그깟 푼 돈 좀 너에게 줬다고, 무리라고 생각하는 건 나를 모욕하는 거나 다름없다고."

"아···."

"하긴 차만 봐선 내가 부자라는 걸 전혀 못 믿겠지. 하지만 이건 학교 다니면서 귀찮은 일에 휘말리지 않기 위한 위장일 뿐이야. 내 나이에 비싼 수입차를 타고 통학할 순 없으니까."

"네."

"그게 아니면 이 차를 살 수 있는 현금을 차 안에 넣고 다닐 리 없잖아."

"네, 믿고 있습니다."

"물론 이건 민수에게 보고 하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내가 부자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거든."

"네, 명심하겠습니다."

나는 김 비서의 허벅지에서 손을 뗀 후 그녀에게 말했다.

"그렇다고 너무 긴장할 필욘 없어. 난 가방끈 짧은 여자는 구미가 안 당기거든."

"아···."

"그러니 나한테 신세 진 걸 갚고 싶으면 빨리 대학에 다시 들어가란 말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지?"

"네, 명심하겠습니다."

"좋아. 그 돈은 얼른 가방에 집어넣으라고."

"네."

[안 그래도 높았던 호감도가 주인님의 호의로 더 상승했겠군요.]

'호감도 높이려고 한 것도 있지. 나중에 정의의 여신이 낸 퀘스트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김 비서를 철저히 내 여자로 만들어 놓을 필요가 있으니까.'

[그냥 주인님이 제일 잘하는걸 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정보창 설명 봤잖아. 지금 김 비서 따먹는 건 케이크 꺼내 먹는 것보다 쉽다고. 섹스로 호감도를 아무리 높여 봐야, 한계가 명확한 여자야. 차라리 감동을 주는 게 더 중요해.'

[역시 주인님은 다 계획이 있으시단 말이죠.]

대화하면서 가다 보니 어느새 고양시에 도착했다. 김 비서의 집 앞에 그녀를 내려주자 김 비서가 차 밖에서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

"오늘 정말 고마웠습니다."

"별말씀을. 내가 말한 거 까먹지 말고, 다음 주 일요일에 보자고."

"···네."

"그럼 들어가."

"저···."

"응?"

"바로 운전하시면 피곤하실 텐데, 저희 집에서 쉬었다가 가시겠어요? 누추하지만···. 그래도···."

김 비서의 표정을 보니 차에서 내리기 전부터 뭔가 단단히 각오를 한 표정이었다. 마음의 소리를 들을 필요도 없이 아까 건넨 현금 천만원에 대한 대가를 치르기로 결심한 것 같았다.

'거참, 못 말릴 여자로구먼.'

"누추한 건 별로야."

"네?"

"우리 집 봤지? 난 좁은 집을 싫어하거든."

"아···. 죄, 죄송합니다."

"죄송하다고 말하지 마."

"죄송하다고 말해서 죄송합니다."

"자꾸 죄송하다고 하면 확 새아파트 사줘 버린다? 더 누추하지 못하게."

"아, 아닙니다. 절대 안 그러셔도 됩니다."

"알았어. 들어가. 난 바로 돌아갈 테니까. 안 막히는 시간이라 1시간도 안 걸려."

"네···. 도훈씨."

"간다."

나는 다시 꾸벅 인사하는 김 비서를 뒤로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새로운 신들의 퀘스트를 받은 것도 좋았지만, 간만에 좋은 일을 한 것 같아 기분이 뿌듯했다.

물론 가는 길 내내 보조석에 앉아 있던 김 비서의 꼴릿한 몸매가 떠올라서 약간은 후회되긴 했다. 원하면 언제든 눕힐 수 있는 여자를 그냥 돌려보내다니. 내가 요새 배가 부르긴 불렀나보다.

집으로 돌아와서 다시 차를 주차하는데 문 앞에 누군가 쪼그려 앉아 있었다.

고개를 무릎에 파묻고 있긴 했지만, 확실한 건 여자였다.

'어? 대체 누가···.'

우리 집을 찾아온 여자라면, 분명 내가 아는 여자일 것이다.

그런데 왜 나한테 전화를 안 했을까?

"아니 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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