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2. 빌드 업-67-
* * *
병원까지 동행하겠다고 했으나, 윤재는 혼자 가겠다며 한사코 거절했다. 내가 볼 땐 쪽팔림과 억울함 때문인 것 같지만, 딱히 신경쓰지 않았다. 놈이 당한 건 지금껏 저지른 악행에 비하면 약과일 뿐이다.
[주인님. 김 비서가 계속 기다리고 있습니다.]
'엥? 어디? 안 보이는데?'
[맨 처음 대기한 장소에서요.]
'왜 안 갔지? 일 끝났으면 알아서 퇴근해야지?'
[그 정도로 눈치가 있는 타입은 아니잖습니까. 주인님이 퇴근하라고 명령을 안 해서 계속 대기했던 것 같습니다.]
'나 참. 이건 뭐 벽창호도 아니고. 그런것까지 하나씩 알려 줘야 하나.' 전화로 퇴근을 지시하려다, 기다린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직접 김 비서에게 다가갔다.
오가는 사람들을 쳐다 보면서 멀뚱히 서 있는 김 비서를 보자 답답함보다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아마도 별도의 지시가 없으면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저렇게 멍하니 서 있을 게 뻔했다. 어쩜 저렇게 융통성이라곤 없을까?
"왜 여태 기다리고 있어?"
"다 끝났어?"
"진작에 끝났지. 난 아까 간 줄."
"혹시 몰라서···."
김 비서가 쭈뼛거리며 대답했다. 시켜서 말을 놓긴 하는데, 여전히 어색해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고 있는 느낌이다.
"암튼 오늘 야근하느라 고생했어. 기대보다 훨씬 잘하더라."
"저, 정말?"
"대사를 외우는 건 약한데, 뜻밖에 연기는 좀 되네. 앞으로 종종 부탁할 게."
"응."
"그럼 이제 퇴근해도 돼."
"아···."
"왜? 집까지 데려다줘?"
"아니 지하철 타면 되는데, 옷을 집에 놔두고 와 버렸는데."
"네 옷?"
김 비서는 새 옷으로 갈아입느라, 입고 있던 옷을 챙겨 오지 못한 것이었다.
"그럼 다시 집에 들러야겠네. 가자. 내가 태워줄게."
"으, 응."
다시 김 비서와 차를 타고 집으로 되돌아왔다. 김 비서는 맨 처음 차에 탔을 때보다 훨씬 어색해하며 나와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그래도 올 때는 대사를 외우느라 대화를 나누며 쉴 새 없이 떠들었는데, 돌아갈 때는 딱히 할 말이 없는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갑자기 빈 오디오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쟤는 또 왜 저래? 입 꾹 닫고 있네.'
[뭔가 이상합니다. 혹시 주인님에 대한 감정이 변한 것은 아닐지?]
'대체 왜?'
[저야 모르죠. 주인님에게 걸려 있는 매력 버프가 한 두 개도 아니고···. 뭔가에 꽂혔을지도.]
'거참, 공략 대상도 아닌 게 되게 거슬리네.'
[정보창이라도 열어 드릴까요?]
'굳이?'
[혹시 또 압니까? 미션이 뜰지도.]
그러고 보니 내 개인 비서가 생긴 건 처음이다. 특히 외모에선 흠잡을 것 없는 묘령의 여비서. 색다른 미션이 발생하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한번 열어 봐.'
[네. 김 비서의 정보창을 띄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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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 김희진(비처녀, 일시 22세 5개월)
나이 : 24 #비서#백치미#순종적 성향
호감도 : 70/100
개방성 : C
성감대 : 성관계 경험이 부족하여 정보가 부족합니다.
*애무 포인트 : 키스만으로도 정신을 못 차립니다.
성욕지수 : 보통
공략팁
*위 대상은 당신에게 호감이 있습니다.
-도원 그룹에서 특별 선발한 비서 출신입니다.
-본래 최민수의 비서였으나, 그의 양도(?)로 인해 이도훈의 개인 비서격으로 파견 근무 중입니다.
-타고난 외모에 비해, 백치미가 과하게 넘치는 타입입니다.
-본래 부잣집 외동딸로 귀하게 자랐으나, 집 안이 망하면서 급격히 형편이 어려워졌습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오래전 사이비 종교에 빠졌습니다. 전 재산을 교주에게 빼앗긴 어머니가 억울함에 자살하자, 건실한 중소 기업을 이끌어가던 아버지 마저 충격으로 쓰러진 상태입니다.
-소녀 가장이 된 그녀는 학업을 포기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배운 기술도 학력도 부족했던 그녀는, 변변찮은 돈 벌이로 아버지의 병원비를 댈 수 없게 되었습니다.
-곤란한 지경에 이르렀을 때 우연히 알고 지낸 대학 시절 동아리 선배의 권유로 도원 그룹 비서실에 입사할 수 있었습니다.
-고액 연봉을 받는 조건으로 무조건적 충성을 강요하는 회사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어떻게든 조직에서 살아남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자신이 모시는 상사에게 언제든 몸과 마음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추천행동 : 그녀의 몸을 취하기는 케이크를 꺼내 먹기보다 쉽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선, 진정으로 그녀의 마음을 달래주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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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창 설명을 보게 된 도훈은 구구절절한 그녀의 사연에 씁쓸한 기분을 느꼈다.
'허참, 아무리 사연 없는 사람은 없다지만, 김 비서에게 저런 비극적인 일이 있었을 줄이야.'
[도원 그룹 비서실에 입사한 것은, 결국 아버지의 병원비 때문이었군요.]
'그런 것 같아. 어머니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으니, 하나 남은 아버지마저 잃고 싶진 않았겠지.'
[그런데 집안을 망친 게 돌아가신 어머님이 믿었던 사이비 종교라니.'
'종교는 무슨, 사기나 다름없지. 상대의 정신적 취약점을 파고들어 피땀 흘려 모은 재산을 합법적으로 강탈해가는.'
[신의 이름을 빙자해 혹세무민 하다니 참으로 극악 무도한 자들입니다.]
'그러니까. 나도 티비에서만 들었지, 실제 그런 피해자가 있는 줄은 몰랐어. 그것도 이렇게 가까운 곳에.'
띠링-!
[주인님!]
'나도 들었어. 역시 로시 네 말이 맞구나.'
[미션을 띄워드릴까요?]
'응.' 그러나 잠시 후 로시가 곤란한목소리로 알려왔다.
[어엇? 방금 알림음은 미션이 아니었습니다.]
'뭐라고? 그럼 대체 뭔데?'
[일단 보십시오.]
★천상의 메시지★
-이단 심판관-
"신의 이름을 함부로 참칭하는 자들에게 정의의 심판을 내리십시오. 정의의 여신은 타락한 자들을 정화시키는데, 최대 5만 포인 트의 현상금을 걸었습니다."
'갑자기 천상의 메시지?'
[김 비서의 불행한 사연이 정의의 여신을 분노케한 모양입니다. 엄청난 현상금을 걸었군요!]
'이건 진짜 역대급 아니냐? 5000포인트까진 본 것 같은데, 느닷없이 5만 포인트?'
[주인님! 이건 무슨 일이 있어도 해결하셔야 합니다! 5만 포인트면 지금 있는 포인트와 합쳐서 천상계 경매장에서 내공 심법 입찰을 넣을 수 있을 정도로 거금입니다!]
물론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지난번 백보신권을 낙찰 받을 때 그동안 모은 포인트를 몽땅 털어놓을 정도였는데, 무공 비급 종류는 가장 저렴한 것도 최초 입찰가가 3만 포인트 이상부터 시작하기 때문이었다.
'역시 정의의 여신은 화통 하시네! 한 방에 5만이면 무조건 받아야지. 근데 지금 진행 중인 업적이랑 겹치는 거 아닌가?'
[상관없습니다. 신들이 내주는 미션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별도의 시간제한이 없으니까요. 일단 급한 일부터 해결하고 나중에 착수하셔도 문제없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이번 일 끝나는 대로 한 번 알아봐야겠다.'
간만에 받게 된 천상의 메시지에 나는 몹시 들떴다. 일반적인 미션이나 돌발 미션과 다른 점은, 천상의 메시지에서 주어지는 보상이 엄청나다는 점이었다. 물론 그만큼 난이도는 높겠지만, 5만 포인트를 한 방에 획득할 수 있다면 이보다 힘든 일도 도전할 수 있었다.
'후후, 이쯤 되면 민수에게 고마워해야하나. 이런 복덩이를 나에게 보내주다니.'
[갑자기요? 아까까진 욕하시지 않았습니까?]
'사실 처음엔 짐 덩이를 넘겨받은 기분이었거든. 막말로 놈이 나에게 호의를 보이지 않았다면, 당장 내치고 싶을 정도로. 그래도 놈의 입장을 생각해서 거두어줬는데, 덕분에 천상의 메시지까지 받게 됐잖아.'
[다 주인님의 은공입니다.]
'그나저나 정보창 설명을 보고 나니까 김 비서가 왜 그렇게 필사적이었는지 알 것 같아. 직장에서 잘리지 않기 위해선 뭐든 하겠다는 각오였구나.'
[월급이 아버지 병원비였으니 어쩔 수 없었겠죠. 알게 되었으니 지금부터라도 잘해주십시오. 계속 주인님 눈치 보느라 전전긍긍하던데요.]
'그래야겠어. 저렇게 불쌍한 앤 줄 몰랐지.'
"김 비서."
"네? 아, 아니 응."
"나한테 반말하기 불편해?"
"그냥 좀···."
"나보다 누나라서 반말이 더 편할 줄 알았는데, 김 비서 처지에선 그게 어색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
"아···."
"실은 예정에 없던 비서가 생겨서 나도 당황했거든. 물론 민수가 호의로 김 비서를 붙여 준 건 알겠는데, 내 처지에선 아직 조직에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특혜를 받는 느낌이라서."
"그랬구나."
"근데 앞으로 자주 보게 될 텐데, 별것도 아닌 호칭 문제로 계속 어색할 수 없잖아. 안 그래?"
"으, 응,"
"지금부턴 김 비서가 편한 대로 해도 된다는 뜻이야. 안 어울리는 옷을 입힌 느낌이라 내가 더 불편한 것 같아."
"이 옷이 별로 안 울려?"
"엉?"
역시나 동문서답이었다.
비유를 들어 말하면, 행간을 읽지 못하고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김 비서의 특징이었다. 결국 다시 풀어 설명해야 했다. 명령은 단순하고 직선적으로 해야겠다.
"그냥 존댓말 써, 앞으로. 나이는 어려도 내가 상관이니까, 오케이?"
"네, 알겠습니다."
김 비서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안도하는 표정만 보아도, 그녀가 나에게 말을 놓기가 얼마나 불편했을지 알 것 같다.
"대신 내가 반말한다고, 기분 나빠하지 말고."
"걱정하지 마세요. 그럴 일은 없습니다."
"근데 김 비서는 원래 전공이 뭐야?"
"네?"
"아니 대학 전공. 설마 비서학과 이런 건 아닐 거 아니야."
"아, 제가 중간에 자퇴를 해서···."
[주인님. 정보창에 보시면 김 비서는 갑자기 기운 가정 형편으로 다니던 대학을 그만두었다고 나옵니다.]
'알지. 그래도 원래 지망했던 전공은 있을 거 아니야?'
"그럼 자퇴하기 전에 다녔던 학과는?"
"동양사학과입니다."
"오잉? 역사학도라고?"
"네."
전혀 의외의 대답이었다.
"난 연극영화학과 출신인 줄?"
"네?"
"아까 연기를 너무 잘하길래."
"아···. 실은 대학 다닐 때 잠깐 동아리 활동을 했었습니다."
"응?"
"인서울 하려고 점수 맞춰 대학을 지원했거든요. 전공도 최대한 비인기학과로 골랐고요. 그러다 보니 학교생활이 너무 힘들어서 어려서부터 관심이 있던 연극을 배고 싶은 마음에···."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그녀에게 연기는 커피를 타는 것이나, 집안 청소만큼 익숙한 일이었다. 대사를 잘 못 외우는 게 흠이긴 하지만 어차피 명배우라고 해서 대사를 대본대로 줄줄 읊는 것도 아니니까.
"아, 그래서 아까 연기력이···. 어쩐지 실감나더라니."
"칭찬 감사합니다."
"너무 실감나서 질투가 날 뻔했지 뭐야?"
"네? 질투라니···."
"민수가 네 이름 부를 때 말이야. 희진이라고."
"아···."
"진짜 남자 친구인 줄."
일부러 오해하는 모습을 보이자 김 비서가 극구 부인했다.
"아, 아닙니다. 최 실장님이 제 상관이긴 했지만, 개인적인 감정은 조금도 없습니다."
"왜?"
"네?"
"민수 솔직히 잘생겼잖아. 여자라면 누구나 반할 만한 얼굴 아닌가?"
내 질문에 김 비서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물론 최 실장님은 회사 여직원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은 편이었습니다만, 그 분이 워낙 여자에 관심이 없는 편이라···."
"아하, 그래서 날 게이라고 생각했군?"
"네? 제, 제가요?"
[주인님. 김 비서는 머릿속으로만 생각했지 입으로 발설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맞네.'
"분명 처음 봤을 때 그렇게 오해하지 않았어? 내가 그렇게 느꼈거든."
"그건···."
"그냥 솔직히 말해도 돼."
"약간은···."
"지금은 어때? 내가 정말로 게이 같아 보여?"
"아, 아뇨. 전혀···."
"아니면 게이가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거야?"
"······."
일부러 짓궂은 질문을 던지자 김 비서가 얼굴이 빨개지며 입을 다물었다.
[순진한 김 비서 너무 놀리지 마시죠.]
'알았어.'
"농담이야 농담. 아무튼 오늘 야근 너무 잘해 줬어."
"···감사합니다."
"그래서 결심했지."
"네?"
"내가 김 비서를 끝까지 책임지겠다고."
"아···."
"그러니까 앞으로 절대로 쫄 필요 없어. 난 널 절대 안 자를 테니까."
"감사합니다, 이사님."
"이사 호칭은 빼고. 나 이사 아니라고."
"그럼 뭐라고 부를까요?"
"글쎄, 도훈씨는 어때?"
"도, 도훈씨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