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0. 빌드 업-65-
도훈을 처음 맞닥뜨린 윤재는 그의 장대한 체구에 몹시 당황한 눈치였다. 키도 자기보다 5cm 이상은 커보였고, 등 빨은 더더욱 차이 났다. 껄렁거리만 할 뿐, 실제로 운동은 전혀 안 해 본 윤재의 몸과 근육질의 도훈의 몸은 비교 자체가 실례였다.
도훈의 거대한 피지컬에 위압감을 느꼈는지 윤재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새, 새끼. 다행히 약속 시각은 늦지 않았네."
"늦을까 봐 미리 와 있었습니다."
"씨벌, 근데 넌 무슨 키가 그렇게 크냐? 정확히 몇이야?"
"185입니다."
"나도 180 가까이 되는데 왜 이렇게 차이나 보이지? 아, 그리고 너 운동 했냐?"
"네. 헬스를 좀."
"헬스? 그거 다 뻥근육이잖아!"
꼬박꼬박 존댓말을 하는 도훈을 보고 금세 자신감을 회복한 윤재가 다시 깝치기 시작했다.
"암튼, 난 이윤재라고 한다. 스물셋이라지? 내가 3살 형이네."
"네."
"새끼, 존나 삭아 보이네. 누가 보면 니가 형인 줄 알겠다 인마."
"······."
도훈은 별다른 대답 없이 쓱 한번 쳐다보기만 했다.
무언의 압박에 윤재가 급히 시선을 회피하며 꼬리를 내렸다. 가까이서 직접 마주하니 자기가 함부로 대할 레벨이 아님을 직감한 것이었다. 나이 어리다고 줘팰 수 있는 건 초등학교 시절이 마지막이라는 걸 그도 알고 있었다.
'미친, 뭐가 아쉽다고 이런 괴물 피지컬 새끼가 호빠 선수를 자원했담? 창민이 형보다 더 덩치 좋은 놈은 처음 보네.'
"흠흠. 암튼, 태오 형님이 부탁한 것도 있으니 내가 오늘 너 제대로 교육시켜 주마."
"네. 형님."
"헌팅은 해봤냐?"
"어제 몇 번 시도해 봤습니다."
"그래서 결과는?"
"한 명은 번호를 받았는데, 오늘 연락이 끊겼습니다. 갑자기 답장이 없더라고요."
"덩치값도 못 하긴."
도훈이 다시 말없이 쳐다보자 바짝 쫀 윤재가 황급히 말을 돌렸다.
"원래 헌팅 이란 건 말이야, 번호만 받았다고 끝이 아니야. 번호 정도야 마음먹으면 하루 100명도 딸 수 있지."
"그렇군요."
"제대로 된 헌팅이라면 번호를 따는 것으로 만족할 게 아니라, 어떻게든 당일에 쇼부를 봐야 해."
"쇼부를 보다뇨?"
"같이 차라도 한 잔 마셔야 한다는 소리야. 사실 맥주가 더 좋은데, 처음 보는 남자가 느닷없이 술먹자고 하면 대부분 의도가 불순하다고 의심해 버리거든. 그러니 커피 정도가 딱 좋아."
"아···, 네."
"입 아프게 말로 떠들 필욘 없고, 내가 직접 시범으로 보여 줄게.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게 낫지."
"네."
뜻밖에 고분고분한 도훈한 모습에 윤재는 업계 선배로서의 위상을 보여주겠다고 결심했다.
'통화할 땐 찐따 새낀 줄 알았는데, 뭐 저런 괴물 같은 놈이 다 있담? 하지만 도내 최고의 픽업 아티스트라는 명성은, 고스톱치면서 딴 게 아니걸랑. 선수가 어떻게 여자를 헌팅하는지 제대로 보여 줘야겠어. 한 방에 기를 팍 눌러놔야 앞으로 나한테 못 개길 테니까.'
로미오 공원은 번화가 주변이라 유동 인구가 상당한 편이었다. 특히 근방에 화장품과 옷 가게가 많았기 때문에 젊은 여성들이 유독 눈에 띄었다.
윤재가 잔뜩 허세를 부리며 도훈에게 말했다.
"야. 지나가는 애들 중에서 아무나 한 명 찍어. 내가 5분 안에 꼬셔준다."
"정말 아무나요?"
"당연하지. 만만한 여자만 꼬시면 그게 어떻게 헌팅이야? 양학은 원래 개나 소나 다 하는 거고. 선출 가오가 있지."
윤재를 만난 순간부터 미리 준비하고 있던 도훈은, 약속한 사인을 김 비서에게 보냈다. 주머니 속에서 통화버튼을 눌러 준비 신호를 주는 것이었다.
"잠시만요 그럼···."
도훈은 헌팅 대상을 물색하는 척 일부러 시간을 끌더니 김 비서가 지정된 위치에 도착하자, 그녀를 콕 짚어 가리켰다.
"쟤는 어떻습니까?"
"누구? 빨간 치마?"
"아뇨. 그쪽 말고 벤치 옆에 서 있는 여자요. 롱 가디건 걸친."
"대체 누굴 말하는 거야? 잠깐, 롱 가디건? 저기 청바지 입은 애?"
멀리서 보아도 돋보이는 김 비서의 미모에 윤재가 살짝 주춤했다. 길거리에서 보기 드문 미모였다.
"저 여잔 직장인 아니냐? 너 태오 형님한테 못 들었어? 대학생 꼬셔 오라고 했잖아."
"학생 같아 보이는 데요? 잘 보시면 손에 전공 서적 같은 게 들려 있습니다."
그것은 물론 도훈의 책이었다. 대학생임을 강조하기 위해 일부러 사범대 전공 서적 한 권을 가져와 소품으로 들고 있게 한 것이다. 내뱉은 말이 있었던 윤재는, 여기서 물러서면 창피를 당할 것이라는 생각에 쓸대 없이 자존심을 부렸다.
"그래. 까짓거. 목표물 정했으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들이대는 게 중요하니까. 내가 어떻게 하는지 똑똑히 보라고."
윤재가 호기좋게 고개를 좌우로 꺾으며 김 비서 쪽으로 다가 갔다.
도훈은 살짝 떨어진 거리에서 이번엔 민수에게 문자를 보냈다.
-이도훈 : 김 비서 쪽으로 접근하는 놈. 스냅백 모자.
모든 세팅을 마친 도훈이 뒤에서 씩 웃으며 김 비서와 윤재의 대화를 엿들었다.
"저기요?"
"네? 저요?"
"저 원래 이런 사람 아니거든요? 근데 그쪽이 첫눈에 마음에 들어서. 혹시 시간 좀 있어요?"
"지금요?"
'오, 김 비서가 뜻밖에 연기는 좀 되는데?'
[다행이군요. 연기력이 기대 이상이네요.]
"네, 딱히 할 일없으면···."
"저, 친구 기다리는 중인데요?"
김 비서는 짜놓은 각본대로 친구를 기다린다며 튕겼다.
도도한 척 톡톡 쏘는 말투가, 놀라운 미모와 너무나 잘 어울렸다.
'김 비서에게 저런 재능이 있었다니.'
[그거 보십시오. 사람은 누구나 잘하는 게 하나쯤 있는 법이라니까요? 김 비서를 너무 괄시하시 마시죠.]
단박에 거절을 당한 윤재는 뻘쭘한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하지만 바로 뒤에 도훈이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온갖 잘난 척은 다 했는데, 한 방에 꼬리를 내리면 너무 구차해 보일 것 같았다. 선배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선 실력으로 증명해야 했다. 심기일전한 윤재가 다시 김 비서를 향해 돌아섰다.
"에이, 그러지 말고. 친구도 같이 놀면 되잖아요. 저희도 마침 두 명이거든요."
윤재가 뒤에 서 있는 도훈을 가리켰다. 김 비서는 도훈을 바라보더니 살짝 감정의 동요를 드러냈다. 그의 얼굴을 보는데 갑자기 심장이 쿵- 하고 흔들린 것이었다.
'내, 내가 왜 이러지?'
김 비서는 애써 도훈을 외면하며 윤재에게 말했다.
"저기요, 저 남자 친구 있으니까 그만 가주시겠어요?"
윤재는 노련한 픽업 아티스트답게 김 비서가 흔들린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이것 봐라? 방금 신참 볼 때 분명 동요했는데? 설마 취향이 근육질 마초남이었나? 어쨌든 잘 됐군, 굳이 내가 아니어도, 신참 보고 혹해도 상관없는 거잖아? 과정이야 어쨌든 결과가 중요한 거니까.'
다시 자신감이 생긴 윤재가 도훈을 믿고 허세를 부리기 시작했다.
"에이,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게 남자 친구죠. 내가 뭐 사귀쟀나? 그냥 같이 커피나 한잔 하자는 건데. 어때요? 어차피 남자 친구는 몰라요."
"······."
김 비서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입을 꾹 다물었다.
차라리 일관되게 튕기는 태도를 보였다면 윤재도 들이대기를 포기했을 테지만, 오히려 말을 멈추자 고심하는 듯한 인상을 주고 말았다. 이에 착각한 윤재가 속으로 생각했다.
'어, 어? 잘하면 될지도 모르겠는데? 좋아, 이 기세로 조금만 더 밀어붙이자. 업계 선배가 어떤 식으로 헌팅을 성사시키는 지 똑똑히 배워두라고.'
"우리랑 같이 가요. 친구랑 같이 2:2로 놀면 좋잖아요."
윤재가 억지로 김 비서의 손을 잡아끄는 순간. 갑자기 그의 등 뒤에서 싸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굉장한 존재감에 윤재가 자기도 모르게 시선을 돌렸다.
"···그 손 안 치워?"
"네?"
도훈은 갑자기 끼어든 사내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김 비서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니, 민수가 여기서 왜 나와?'
[설마 본인이 직접 온 겁니까? 석산파의 행동대장이요?]
'하아-. 내 부탁 들어줬다고 생색 내려고 처음부터 작정했었구나.'
피부가 허여멀건한 미남자를 보고 윤재가 움찔 놀랐다.
"어떤 새끼가 겁도 없이 내 여자 친구를 건드려?"
"!?"
윤재는 그 말에 눈앞이 새까매졌다. 헌팅에서 가장 금기시되는, 남자 친구 앞에서 남의 여자를 꼬시는 실수를 저지르고 만 것이다. 당장 싸움박질이 벌어져도 할 말이 없었다.
'마, 망했다. 설마 기다린다던 친구가 남자 친구였나? 그럼 처음부터 남친 기다리고 있다고 말을 했어야지!'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에 윤재가 급히 김 비서의 손을 놓고 사과했다.
"아이고. 제가 큰 결례를···. 여자 친구 분이 너무 미인이셔서, 헤헤."
윤재가 웃음으로 무마하려고 했지만, 민수는 특유의 카리스마를 드러내며 윤재를 압박했다.
"···웃어? 너 지금, 이 상황이 웃기냐?"
심상치 않은 민수의 반응에 눈치 빠른 윤재가 웃음기를 싹 거두었다. 잘생기기만 한 것 아니라, 몸 전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가 보통이 아니었다.
"아, 아닙니다."
"말로 해선 안 될 놈이네? 희진아, 너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봐."
민수는 김 비서의 본명을 언급하더니 윤재의 멱살을 틀어쥐고 다른 곳으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광장 한복판에서 갑자기 멱살잡이하는 민수를 보며 지나가는 행인들이 놀라서 쳐다보았다.
그러나 곧 정장을 입을 덩치들이 우르르 몰려들며 시민들을 통제했다.
"뭐야? 구경났어?"
"남의 일 참견하지 말고 제 갈길 가쇼."
"얼른 안 끄지나?"
우락부락한 덩치들은 딱 봐도 힘깨나 쓰는 조폭처럼 생겼기 때문에 시민들은 감히 끼어들 엄두도 못내고 자리를 피했다. 멱살을 잡혀 끌려가던 윤재 역시 몰려드는 조폭들을 보고 나서야 일이 심각하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조, 좆됐다. 내가 설마 조폭 애인을 건드린 건가? 어떻게 이런 일이!'
윤재는 도훈이 원망스러워졌다.
그가 김 비서를 지목하지만 않았어도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었다.
괜히 놈이 시키는 데로 했다가 화를 입은 것 같았다.
'저 새끼. 설마 의리 없이 혼자 도망가진 않겠지?'
매도 나눠 맞아야 덜 맞을 거라는 생각에 멱살 잡혀 끌려가던 윤재가 갑자기 도훈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쟤도 한 패예요!"
"뭐?"
"저랑 같이 온 친구라고요. 혼자 말 건게 아니라 같이 했습니다."
민수는 물귀신 작전을 쓰는 호빠 선수를 보며 오히려 경멸 어린 눈빛을 쏘아 붙였다.
"양아치 새끼. 의리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구만? 혼자 쳐 맞긴 무서운 가 보지?"
도훈에게 미리 언질을 받은 민수는 일부러 도훈을 모르는 것처럼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야, 저 새끼도 같이 끌고 와. 한 패란다."
"네, 형님."
윤재의 고자질에 도훈도 꼼짝없이 조폭들에게 붙들렸다. 중앙 광장에서 벗어나 골목으로 두 사람을 끌고 간 민수가, 윤재를 벽에 붙여 세웠다. 도훈은 살짝 떨어진 채 서 있었다.
"너 뭐 하는 새끼냐?"
"예?"
"뭐 하는 새낀데 겁도 없이 석산파 행동대장 여자를 건드릴 생각을 했어? 너 뭐 돼?"
윤재는 석산파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눈앞이 깜깜해졌다.
지역 내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전국구 조폭 단체의 이름을 모르는 아무도 사람은 없었다. 특히 뒷배를 봐주는 조폭과 연관된 유흥업계 종사자라면, 석산파라는 이름이 가진 무게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진짜로 몰라뵙고···."
가만히 있다간 오늘 제 발로 걸어가기 힘들 거라는 생각에 윤재가 맨바닥에 무릎을 꿇고 빌기 시작했다.
"형님.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민수가 싸늘한 표정으로 윤재를 내려보았다.
"어이, 내가 물은 것에 대답부터 해야지. 너 뭐 하는 새끼냐니까?"
"전 아무것도 아닙니다!"
"말로만 하니까 내가 장난하는 것 같지?"
민수가 무릎 꿇고 있는 윤재의 허벅지를 구둣발로 꾹- 짓밟았다.
"으, 으윽!"
"입 다물어 새끼야. 대퇴골 부러지기 싫으면."
"사, 살려···. 으으읍!"
민수가 잔인하게 윤재의 허벅지를 짓이겼다. 윤재가 비명을 다 못 지른 이유는, 민수의 부하 중 한 명이 손수건으로 입을 틀어막았기 때문이었다. 골목으로 위치를 옮기긴 했지만, 여전히 밖은 대로변이라 지나가는 행인이 비명을 듣고 신고할 수 있었다.
"끄으으으으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