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9. 빌드 업-64-
야근이라는 말에 김 비서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집에 청소하러 왔는데, 밤늦게까지 붙잡고 있겠다는 것은 별다른 이유가 있을 리 없었다.
'대체 나한테 뭘 시키려고···.'
"너 오늘 헌팅 한 번 당해볼래?"
"허, 헌팅? 그러니까···."
"응. 길거리에서 남자가 꼬시는 거 말이야."
"그럼 내가 다른 남자랑···."
김 비서는 이번에도 오해하고 말았다.
도훈이 자기 입으로 직접 건드리지 않겠다고 했으니, 분명 다른 남자와 섹스를 시키려는 것이라고 말이다.
자기 마누라를 외간 남자한테 대주는 모습을 관전하면서 쾌감을 느끼는 변태들이 있다고들 하던데, 어쩌면 도훈이 그런 종류의 변태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여, 역시나 변태였어.'
김 비서가 또 말귀를 못 알아듣고 착각하는 모습에 도훈이 한숨을 푹- 내쉬더니 다시 설명했다.
"아니. 그냥 헌팅 당해주는 척만 하라고. 그게 전부야."
"당해주는 모습?"
"응. 좀 이따 나랑 같이 어딜 나갈 거야. 그때···."
도훈이 차분하게 작전을 설명했다.
생긴 것과 달리 말귀를 전혀 못 알아듣는 바람에 같은 얘기를 여러 번 반복한 탓에 도훈은 속으로 짜증이 울컥 올라왔다.
'어휴, 저 똥멍청이 같은 게!'
[주인님, 고정을···.]
'저건 백치미가 아니라, 그냥 백치 아니냐?'
[제가 봐도 좀 심각하긴 하군요. 정음양도 가끔 이해력이 부족한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김 비서 쪽이 훨씬 정도가 심한데요?]
'분명 민수가 눈치도 빠르고 동작도 빠릿빠릿하다고 하지 않았나?'
[커피 타는 것과 청소를 열심히 하는 걸 보면 몸 쓰는 쪽으로 특화된 타입이 아닐까 싶네요. 민수도 아마 그 점을 말한 것 같고요.]
"···알아 들었어?"
"거의."
"아니, 2번이나 설명했는데 거의는 또 뭔데? 나한테 다시 백브리핑해 봐."
"백브리···. 그게 뭔데?"
"내가 말한 거 나한테 다시 설명해 보라고."
"어, 그러니까···."
김 비서가 더듬거리면서 설명을 시작했다.
"일단 같이 마로니에 공원으로 가."
"로미오 공원! 마로니에 아니고."
"으, 응. 로미오 공원. 그리고 거기 가서 헌팅을 해."
"헌팅을 하는 게 아니고, 네가 당하는 거겠지."
"내가?"
"그래. 넌 내가 정해 준 위치에 그냥 서 있기만 하면 돼."
"알겠어."
"그리고?"
"누가 날 헌팅하러 오면···. 싫다고 말하면서···. 아니 그게 아니라···."
"시간 끌어. 남자 친구 있다면서."
"나 남자 친구 없는데?"
"아니, 없어도 있는 척 하라니까?"
도훈은 점점 인내심이 바닥났다.
이쯤 되면 지능이 의심스러운 수준이었다.
대학은 어떻게 졸업했는지 궁금했다.
'겉은 엄청 말짱하게 생겼는데 어쩜 저렇게 기억력이 딸리지?'
[외모와 지능이 꼭 비례하는 건 아니죠. 주인님도 아이큐 97 시절이 있지 않았습니까? 지금과 똑같은 얼굴일 때요.]
'난 그래도 저 정도 빠가는 아니었지. 계산이 느렸을 뿐.'
[어쨌든 두뇌 회전이 느리다고 해서 지나친 비하는 보기 좋지 않습니다. 너무 갈구지 마시죠.]
'분명 신께서 김 비서를 만들 때, 얼굴 두 스푼, 몸매 한 스푼 넣은 다음 지능을 깜빡하신 게 틀림없어.'
[음···.]
"···없어도 있는 척. 알았어."
"이해했지?"
"응. 이제 완벽히 이해했어."
도훈은 여전히 미심쩍었지만, 도저히 같은 말을 반복할 자신이 없었다. 말귀 못 알아듣는 사람을 가르치는 건 그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갑자기 교사라는 직업이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래, 이해했다고 쳐."
"근데 옷은 어떻게 해?"
"뭐?"
"나보고 대학생인 척 하라며. 오늘 입고 있는 옷은 너무 직장인 같지 않아? 그렇다고 네 옷을 입고 나갈 수도 없는데."
이건 도훈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이럴 때 보면 완전히 바보는 아닌 것 같은데.'
"네 말이 맞네. 의상을 생각 못 했어. 잠깐만 기다려 봐."
도훈은 혼자 옷 방에 들어갔다.
그의 계획은 김 비서를 이번 헌팅의 미끼로 이용하는 것이었는데, 헌팅조가 대학생을 대상으로 헌팅한다는 점을 역이용하는 작전이었으므로, 그녀를 여대생으로 분장시키는 것이 작전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 김 비서가 입고 온 옷은 완벽한 오피스룩 차림이라 누가 봐도 대학생처럼 보이지 않았다. 학생들은 아무리 어른스럽게 차려입어도, 특유의 풋풋함이 남아 있었다. 반면, 김 비서의 오피스룩은 너무 직장인스러웠다.
'로시, 내가 가진 만능 분장 세트로 여자 옷도 가능하지?'
[물론입니다. 지난번 축제 때 육정음양에게도 사용하셨으니까요. 다만, 회수하지 못하면 다음에 또 아이템 비용을 지급해야 합니다.]
'그거 뭐, 얼마나 한다고. 일단 쓰자.'
[넵.]
'우선 김 비서에게 어울리도록 요즘 유행하는 여대생 스타일로 한 벌 부탁해.'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잠시 후 분장 세트가 도착하자 도훈이 인벤토리를 통해 의상을 전달받았다. 가을 옷이라 그런지 바지와 티에 이어 외투까지 딸려 나왔다.
'이게 추천 의상이야?'
[네. 최신 트렌드를 반영한 뒤, 김 비서에게 가장 어울리는 스타일로 세팅되었습니다. 천상계 인공 지능의 분석 결과이므로 믿으셔도 됩니다]
'너도 같은 인공 지능 아니야?'
[좀 다릅니다, 저는.]
드레스 룸에서 나온 도훈이 김 비서에게 의상을 내밀었다.
"마침 옷 방구석에 이런 게 있더라고."
"앗, 이건···."
집에서 여자 옷 한 벌이 나오자 김 비서가 살짝 당황하는 눈치 였다. 도훈은 공연한 오해를 피하고자 핑계를 댔다.
"실은 내 여동생이 미국에 유학가 있거든. 지난번 귀국했 을 때 사 두었던 옷인데 깜빡 잊고 놔두고 가 버렸지 뭐야?"
"아···. 여동생이 있었구나."
"응. 이제 스무 살. 얼른 갈아입어봐. 체형이 비슷하니까 사이즈는 문제없을 거야."
도훈에게 옷을 받은 김 비서가 그 자리에서 상의를 끌어 올리기 시작했다. 곧바로 팬티가 드러나는 바람에 도훈이 황급히 김 비서를 뜯어 말렸다.
"뭐, 뭐 하는 거야? 옷방에 가서 갈아입으라고."
"아···. 난 여기서 바로 입으라는 줄."
김 비서는 도훈이 시키는 대로 아무 생각 없이 행동했기 때문에 보다 정확한 지시가 필요했다.
"옷 방에 들어가서 갈아입고와. 오케이?"
"응."
드레스 룸에 들어간 김 비서가 잠시 후 옷을 갈아입고 다시 나왔다. 사뭇 달라진 김 비서의 모습에 도훈이 속으로 적잖이 놀랐다.
'오, 저렇게 입혀 놓으니까 진짜로 학생 같잖아?'
김 비서는 물 빠진 청바지에, 과하지 않게 프린팅된 하얀 티, 그리고 위에는 차콜 색상의 롱 숄 카디건을 걸친 차림이었다. 얼굴도 예쁘고 몸매가 좋다 보니 뭘 입어도 잘 어울렸겠지만, 만능 변장 세트가 추천한 의상은 전문 피팅 모델에게 착샷을 입힌 것처럼 무척 잘 어울렸다.
"어때? 이상하지 않아?"
김 비서가 부끄러워하며 물었다.
"아니. 딱 좋아. 역시 옷걸이가 다르니까, 인물이 사네."
계속 구박하던 도훈이 모처럼 칭찬하자 김 비서가 수줍게 얼굴을 붉혔다.
"사이즈가 딱 맞길래···. 근데 이거 진짜로 새 옷 같은데, 내가 마음대로 입어도 돼?"
"어차피 동생은 자기가 샀다는 사실도 까먹었을 거야. 입은 김에 그냥 너 가져."
"고, 고마워."
준비를 마친 도훈이 시간을 확인했다. 공원에 미리 가서 자릴 잡고 있으려면 지금쯤 출발하는 게 맞을 것 같았다.
"준비 됐으면 바로 출발하자."
"으, 응."
김 비서가 묘한 눈길로 도훈의 뒤를 졸졸 따랐다.
'···이상한 사람이야. 민수 실장님이랑 있을 땐 아무렇지 않았는데, 왜 이 남자 앞에선 이렇게 심장이 두근거리지?'
***
약속 장소에 30분 전 도착한 도훈은, 주변 장소를 쭉 둘러보고는 김 비서에게 물었다.
"자기소개 다시 해 봐."
"김희진, 스물넷, 1년 어학연수 다녀와서 현재 4학년 재학 중."
"좋았어. 여기서 뭐 하고 있느냐고 물을 땐?"
"친구 기다리는 중."
"같이 차나 한잔 하자고 꼬시면?"
"남자 친구 있어서, 죄송하다고 거절하기."
"오케이. 이제야 완벽히 외웠군."
"응. 진짜로 다 외웠어."
"저기 구석에 숨어 있다가 내가 신호하면 바로 나와서 이쪽 공원 벤치 옆에 서 있으면 돼."
"신호는 어떻게···."
"전화 걸면 바로 움직여."
"전화?"
"맞다. 아직 내 번호를 모르는 구나."
"응."
도훈은 자기 개인 폰번호를 알려주었다. 동시에 김 비서의 전화번호를 받아 저장했다.
"그럼 준비하고 있어. 난 최민수 실장한테 연락할 테니."
"응."
김 비서를 대기 시킨 도훈은 민수에게 연락했다. 장소와 시간에 대해 미리 언질을 받았던 민수는 이미 근방에 도착해 기다리는 중이라고 했다.
비로서 모든 준비를 끝낸 도훈이 공원 광장에서 윤재를 찾았다.
그를 떠올리자 아까 그 예의 없던 통화 내용이 기억나면서 자기도 모르게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그 개새끼, 그냥 내 손으로 패죽여 버리면 안 되나?'
[감정에 휩쓸려 일을 망치지 마십시오. 그나저나 민수 쪽에서 준비시킨 사람이 연기를 잘할지 모르겠군요. 보나 마나 조폭일 텐데, 괜히 어색하게 행동했다간, 주인님의 작당모의가 들통나 버릴 텐데요.]
'연기랄 것도 없지. 김 비서에게 접근하는 놈, 다짜고짜 패버리면 그만이야. 민수는 일 처리 잘하니까 알아서 똘똘한 놈으로 보냈을 거야. 그보다는 난 김 비서가 더 신경 쓰이는데.'
[대사를 까먹을 까 봐서요?]
'어. 살면서 저렇게 무식한 여자는 처음 봤다니까? 차에서 몇 번을 반복시켜서 겨우 외웠잖아.'
[그래도 비주얼이나 발성 톤이 안정적 이잖습니까? 알아서 잘할 겁니다. 오히려 제가 우려되는 부분은 윤재라는 분이 과연 김 비서에게 접근할까 하는 점입니다.]
'왜? 그렇게 꾸며놓으니까 진짜로 대학생 같지 않아? 뜻밖에 잘 어울려서 놀랐는데, 난.'
[의상이 문제가 아니라 너무 눈에 띄게 예쁘니까요.]
'예쁜 게 문제가 된다고?'
[차라리 어제 만난 성희양이나 주아양처럼 평범하면서 살짝 예쁜 타입이면 모를까, 김 비서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예쁘지 않습니까? 어지간한 남자는 말도 못 붙일 수준이던데요.]
'그건 내가 윤재를 잘 꼬드겨 볼게.'
[싸우지나 마십시오. 주인님 욱하는 마음에 주먹부터 나갈까 걱정입니다.]
'윤재랑 내가? 그건 전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네?]
'윤재는 나를 대학생으로 알고 있잖아. 자기보다 어린. 그래서 통화할 때 센 척하긴 했는데, 감히 날 면전에 두고도 깝칠 수 있나 한번 보자고.'
[하긴, 나이가 어리다고 주인님을 대놓고 무시할 사내는 거의 없을 겁니다.]
체급이 깡패라는 말처럼 도훈은 보기 드문 거구였다.
185의 신장에 온몸이 근육으로 둘러싸여, 면티 한 장만 걸쳐도 그 피지컬을 실감할 수 있었다.
비록 얼굴은 훈훈한 편이긴 하지만 눈매가 워낙 살아 있었기 때문에,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대화하는 사람도 거의 없을 정도였다. 기세에 밀려 본능적으로 시선을 피하게 된다고 해야 하나?
민수처럼 대가 센 사람을 제외하고는, 어지간한 남자는 도훈이 옆에만 서도 움츠러들기 일 수 였다.
그때 윤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약속 시간 5분전이었다.
-얼른얼른 안 튀어 오지? 정확히 5분 남았다.
"저 도착했습니다."
-뭐? 도착했다고? 너 어딘데?
"로미오 공원 광장 중앙입니다."
-지금 뭐 입었는데?
"청바지에 야구잠바 차림입니다."
-야구 잠바? 하-. 이 새끼 복장부터 불량이네? 너 거기서 딱 기다려라. 나도 지금 거의 도착했거든?
도훈은 통화하면서도 시선을 좌우로 돌리며 윤재의 위치를 찾았다. 30미터 밖에서 통화를 하며 걸어오는, 껄렁한 양아치 한 놈이 유독 눈에 띄었다.
반 팔 라인 밑으로 진한 문신이 보였고, 어울리지 않게 스냅백 모자에, 과한 금목걸이를 찬 전형적인 힙찔이였다. 도훈을 향해 야구잠바를 입고 왔다고 꾸짖은 것에 비하면, 본인도 딱히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
통화 내용과 입 모양을 동시에 비교한 도훈은, 멀리서 걸어오는 힙찔이가 윤재라고 확신했다.
'저 새끼구나.'
도훈이 살벌한 표정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 너 잠바가 어떻게 생겼는데? 무슨 색이야?
이미 윤재에게 다가간 도훈이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혹시 윤재 형님?"
"누구···. 이도훈?"
"네. 제가 이도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