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7. 빌드 업-62-
화난 척 연기하던 민수가 그제야 환하게 웃었다.
"정말입니까?"
"제가 안 받아줬다간 저분이 당장 잘리게 생겼는데, 방법이 없네요."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여러모로 쓸 만한 친굽니다. 도훈씨가 데리고 계시더라도 연봉부터 복리 후 생은 저희 그룹 차원에서 직접 챙기겠습니다. 쉽게 말해 장기 파견이랄까요? 나중에 저희 그룹에 입사하실 때까지 데리고 계셔도 되고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아직까진 그럴 마음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대학 졸업하실 때까지 시간은 충분하니까요. 그때까지 마음 바뀌길 기다리겠습니다."
"음···."
"뭐 하고 있어 김 비서? 새로 모시게 된 상사에게 정식으로 인사드려야지?"
찔끔 흘린 눈물을 닦고 있던 김 비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도훈에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거두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호칭은 어떻게···."
"이사님이라 불러. 장차 우리 그룹의 이사로 영입되실 분이니까."
"아니 그건···."
"알겠습니다. 이 이사님. 무엇이든 말씀하시면 최선을 다해 수행하겠습니다."
졸지에 민수의 비서를 떠안은 도훈은 나중에 민수와 연락하기로 하고 난처한 표정으로 헤어졌다. 지하 주차장에 주차된 차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김 비서가 캐리어를 질질 끌고 뒤늦게 지하로 내려왔다.
"죄, 죄송합니다. 급하게 개인 짐을 싸느라···."
"일단 타요."
"네, 이사님."
김 비서가 낑낑거리며 캐리어를 뒷좌석에 싣더니 운전석에 앉은 도훈에게 물었다.
"운전은 제가···."
"아뇨. 제가 직접 합니다. 옆에 앉아요."
"아···. 네."
김 비서가 긴장된 표정으로 보조석에 앉았다. 도훈이 차를 출발시키는데, 그를 마중 나왔던 떡대들이 양옆으로 기립하더니 허리 숙여 인사했다.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형님!"
경호팀까지 도훈에게 깍듯이 인사하자, 김 비서는 도훈이 조직의 숨겨진 실세라고 착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조직내 실질적 2인자인 최민수가 직접 그를 '이사'직함으로 부른 것으로 보아, 자기가 알지 못 하는 막후의 실력자 아닐까 하는 생각이든 것이다.
도훈이 지하 주차장을 나와 도로 위에 차를 올리며 물었다.
"집은 어디 방향이에요?"
"네?"
"사시는 곳이 어디냐고요. 데려다 드릴게요."
김 비서는 또다시 오해했다.
'설마 오늘은 우리 집에서? 아, 청소를 안 해서 지저분할 텐데.'
"이사님. 제가 현재 사는 곳이 너무 누추해서···. 아니면 법인 카드로 호텔을 예약할까요?"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퇴근 시켜 드린다는 뜻인데."
"저, 저를요? 직접요?"
"왜? 그럼 안 되나?"
"이 이사님. 저는 최실장님 명령으로 정식으로 이사님께 배 속된 비서입니다. 이사님이 근무 중일 땐 24시간 함께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저기요, 이름이 김희진씨라고 했던가?"
"네, 이 이사님."
"희진씨.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요. 아까는 상황이 그래서 내가 받아 준다고 했지만, 난 사실 비서가 필요한 상황이 아니에요.
대학생이 무슨 개인 비서를 둡니까?"
"그러시면 저는···."
김 비서는 또 잘리는 줄 알고 울먹거렸다. 겨우 목숨을 부지하나 싶었는데, 또다시 해고당할 위기에 처하자 눈물이 그렁그렁 쏟아진 것이다. 본래도 눈물이 많은 타입이었다.
"이사님 제발 저를 자르지 말아 주세요. 시키면 뭐든지 할게요."
"아니 뭔가 오해하나 본데, 자른다는 말은 아니니까 안심해요. 아까부터 왜 그렇게 울어요?"
"죄, 죄송합니다."
"민수씨가 제 비서로 파견 임무를 맡겼지만, 난 김 비서 도움이 필요 없어요. 그러니 날 수행하고 있다고 위에 보고하시고 앞으론 집에서 쭉 쉬시면 됩니다. 어차피 월급은 나온다면서요? 일도 안하고 월급 받으면 오히려 개꿀 아닌가? 이해했어요?"
"아···. 안 됩니다."
도훈이 답답하다는 듯 따졌다.
"아니. 왜 안 된다는 거지? 이젠 내 비서니까 내가 집에서 쉬라고 명령했다고 하면 되잖아요. 대체 뭐가 문젠데요?"
"실은 그게 아니라···."
김 비서는 짐을 싸 들고 나오기 전 최민수가 자기에게 내린 마지막 명령을 떠올렸다.
-이도훈 이사는 장차 우리 그룹을 이끌 소중한 인재야. 그러니 앞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동향 보고를 올리라고. 혹시나 무슨 일이 발생하면 그룹 차원에서 나서야 할지도 모르니까.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어?
김 비서가 내막을 설명하자 도훈은 기가 차서 이마를 짚었다.
'하, 이거 최민수 이 자식, 비서라고 붙여주고 사실상 나를 감시하라고 시킨 거구나. 어쩐지 난데없이 자기 비서를 붙여주더라니 이런 꿍꿍이를.'
[근데 김 비서가 이 사실을 발설하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게. 할 말 안 할 말 구분을 못 하네. 혼자 착각도 잘하는 편이고. 겉보기는 조신하고 예쁘장하게 생겼는데 뜻밖에 맹한 스타일 같은데. 저런 능력으로 어떻게 비서에 뽑힌 거지? 비서들은 원래 좀 똑똑하지 않나?'
[당연하죠. 비서라고 불리려면 당연히 저처럼 똑똑해야죠.]
도훈이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어쩐다, 이거. 반품할 수도 없고."
"바, 반품이라뇨? 그런 말씀 마세요."
김 비서가 다시 울먹거렸다. 도훈은 징징거리는 여자는 질색이었기 때문에 김 비서를 향해 확실히 말했다.
"아니, 김희진씨. 나이가 몇 살인데 질질 짭니까?"
"오, 올해 스물 넷입니다."
"엥? 누나였네?"
"예?"
"난 스물셋인데?"
"아···."
뜻밖에 어린 도훈의 나이에 희진이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
민수도 나름 어리긴 했지만 스물아홉이었기 때문에 그녀와 나이 차가 있는 편이었는데, 심지어 도훈은 연하의 상관인 것이다.
"아까 못 들었어요? 저 대학생이라고 했잖아요."
"드, 들었습니다. 어쨌든 이사님이시고, 저는 부하직원이니 존칭을 쓰겠습니다."
"이사 아니라니까 그러네."
"분명 실장님이 이사님이라고···."
"한다는 말도 안 했는데, 멋대로 그렇게 부른 거잖아요. 불편하니까 앞으론 이름으로 불러요."
"그, 그건 안 됩니다."
김 비서가 정색했다. 위계가 분명한 조직에서 근무했던 만큼 호칭이나 존칭에 대해서 만큼은 타협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아니 아까는 내가 상사라면서요? 근데 내 명령은 전혀 안 듣네? 김희진씬 아직도 최민수씨 비서예요?"
"아, 아닙니다. 시정하겠습니다."
"암튼 이사라고 부르는 건 그만둬요. 무슨 구구단 같잖아."
"네?"
"이도훈 이사. 줄여서 이 이사. 이이사라고 하면 구구단 외는 것 같다고요."
"아···."
김 비서는 머리가 잘 안돌아가는지 한참을 혼자 도훈의 말을 곱씹는 모습이었다. 도훈은 그 모습을 보고 기가 찼다.
'멍청한 거 맞잖아.'
[아니 그래도, 초면인데 대놓고 멍청하다고 하는 건 좀.]
'적어도 비서 일할 만한 능력은 절대 아니야. 어떻게 저렇게 큰 기업에서 비서 일을 꿰찬 거지? 저긴 면접도 안 보고 사람을 뽑나?'
[아까 인사 팀장 명령 어쩌고 하는 걸 보면, 도원 그룹에서 비서를 뽑는 방식이 남다를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비서를 뽑는 방식이라니? 호오, 그러고 보니 이건 완전···.'
살짝 맹하다는 것을 빼면 김 비서의 외모는 매우 훌륭한 편이었다.
아니 훌륭한 수준이 아니라, 외모만 놓고 보면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서 일한다고 믿어도 납득이 갈 만큼 빼어난 비주얼을 갖추고 있었다.
행동거지나 말투, 그리고 표정까지 완벽한 비서의 표본이랄까?
'맞네. 비서가 아니라 섹스 돌을 뽑은 거였네.'
[섹스돌이라뇨?]
'저 조폭 새끼들은 비서로 쓸 사람을 고용한 게 아니야. 밤 시중들 여자를 데려다 앉힌 거야. 뭐 하면 사무실에서 바로 할 수도 있는.'
[헐, 그런 짓을 해도 상관없는 건가요?]
'당연히 말도 안 되지. 아무 생각 없는 조폭들이니까 가능한 거야. 애초에 저 기업을 굴리는 실무진은 따로 있을 거거든. 최민수도 실장이라고 그럴듯한 직함을 박고 중역 의자에 앉아 있지만, 회사 업무를 전혀 안 보는 것처럼.'
[그럼 민수는 무슨 일하는 건가요?]
'아무것도 안 할걸.'
[네?]
'그냥 자리만 차지하는 거라고. 오히려 그 방식이 회사 처지에서는 더 나을지도 모르지만.'
[왜 그렇죠?]
'무식한 조폭 출신이 건설회사 경영에 대해서 뭘 알겠어? 그냥 앉아서 도장찍는 기계나 마찬가지지. 오히려 좆도 모르면서 어쭙잖게 경영에 개입하는 게 더 위험하다고. 그래서 일부러 이사진들에게 아무 일도 안 주고, 예쁘장한 어린 비서 하나 데리고 시간이나 떼우라는 거야. 그렇게 보면 보스가 그런 쪽으론 머리가 잘 돌아가네.'
[하지만 최민수는 김 비서를 건드리지도 않았다지 않았습니까?]
'그야 놈은 여자에 전혀 관심이 없으니까.'
[정말로 민수가 게이일까요? 그러면 너무 얼굴이 아까운데.]
'모르지. 내 게이더가 전혀 반응하지 않는걸 보면, 절대 게이는 아닌 것 같긴 한데. 하여간 신기할 정도로 여자에 무관심하긴 한 것 같아.'
[하긴 주인님 같은 분이 있는 걸 보면 최민수같은 사람이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죠.]
'은근히 돌려까지 마라.'
"그러면 뭐라 호칭을···."
"그냥 이름 불러요."
"조, 존함을 직접요?"
"아니 그럼 나보다 누나한테 존댓말 꼬박꼬박 받고 싶겠어요? 앞으론 요 쓰지 말고."
"···아, 알았다."
"응?"
"그럼 존댓말은 앞으로 안 쓰겠도록 하겠다."
갑자기 로봇처럼 딱딱하게 말하는 김 비서의 모습에 도훈이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저건 사람이 무식한 거야 반대로 영악한 거야?'
[그냥 주인님이 시키는 대로 생각 없이 다 하는 것 같은데요?]
'난데없이 반말 박으니까 그것도 기분 상하는데.'
[주인님이 시키셔놓고 기분 나빠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하긴. 그냥 그러려니 해야지.'
"암튼 희진씨. 석산파랑은··· 아니, 도원 그룹하곤 내가 좀 복잡하게 얽히긴 했지만, 난 지금 그쪽 관계자도 아니고 앞으로도 그럴 일 없으니까 나한테 너무 신경 안 써도 돼요."
"아, 알았다."
"아니 그렇다고 너무 단답으로만 대답하진 말고."
"그렇게 하도록 하겠다."
"······."
[여전히 말귀를 못 알아 듣는 것 같은 눈칩니다]
'아니. 민수 이 새끼, 나한테 바보 천치를 넘겨 준 거야, 뭐야?
아까 커피 타올 땐 멀쩡해 보였는데 이게 무슨···.'
갑자기 민수가 원망스러워진 도훈이, 희진에게 다시 설명했다.
"호칭은 그렇게 정리하는 걸로 하고, 일단은 집으로 데려다줄 게요. 주말인데 희진씨도 집에서 쉬어야지."
"그래."
김 비서는 대답하면서도 계속 도훈의 눈치를 보는지 무릎 위의 손가락을 도저히 가만히 있질 못했다. 지금의 말투가 뭔가 어색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반말을 강제하는 상사에게 감히 대꾸를 못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심심하면 어디 학원이라도 끊어봐요. 이 기회에 장기 휴가 받았다고 생각하고."
"그러면 일주일에 한 번 동향보고는 어떻게···?"
"그거야 희진씨가 대충 알아서···. 가만 일주일에 한 번?"
"그렇다."
"잘됐네. 그러면 일주일에 한 번만 근무하는 셈 치고, 우리 집으로 와요."
"지, 집으로··· 흐, 흠. 알았다."
도훈은 왠지 그녀가 또 오해하는 것 같아서 보다 구체적으로 지시했다.
"아니,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고, 우리 집에 와서 청소 좀 해주라고요. 내가 사정상 혼자 사는데, 집이 너무 커서 청소하기가 몹시 곤란하거든. 김 비서 처지에서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월급 받기는 민망할 테니, 그게 서로에게 좋지 않겠어요?"
"그, 그런 것 같다."
"청소는 잘하죠?"
"시키면 뭐든 잘한다."
"아이 씨 진짜, 어색해서 안 되겠네. 그냥 친구라고 생각하고 편하게 말하면 안 되나?"
"치, 친구?"
"그래. 어차피 한 살 차인데 그냥 친구 먹는 걸로 합시다. 나도 반말할 테니까 그쪽도 그냥 말 놔요. 이상한 말투 그만쓰고."
"그, 그렇지만···."
"이건 명령입니다."
"음···. 정 그렇다면···. 그렇게 할게."
희진은 말을 놓으면서도 여간 어색한 모습이었다.
"이제 좀 낫네. 그리고 나 그렇게 무서운 사람 아니니까, 그렇게 겁먹을 필요 없어."
"으, 응."
"그럼 오늘부터 매주 일요일 우리 집으로 청소하러 오면 돼. 동향보고는 그때 집에 와서 하고. 내가 옆에서 대충 정리해서 알려 줄 테니까."
"그, 그렇게 해도 괜찮을까?"
"뭔 상관이야? 내 개인 비서를 내가 그렇게 쓴다는데."
"아···."
"일단 우리 집으로 가자. 집 위치를 알려 줘야 하니까."
"응."
도훈이 집으로 다시 차를 몰았다.
보조석에 앉은 희진은 무슨 상상을 하는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