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6. 빌드 업-61-
"네?"
"저희 태수 형님 고향이 경상도인건 아십니까?"
"네. 저번에 뵀을 때보니 억양을 들으니 그런 것 같았습니다."
"석산파는 처음부터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하던 조직이 아닙니다. 10년 전 태수 형님이 고향에서 식구들을 데리고 올라오셨고, 당시 경쟁하던 조직들을 하나 둘 흡수하면서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참고로 오성파 보스 박팔로는 큰 형님 계실때만 해도 지나가면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던 3류 양아치 새끼였고요. 물론 모르시고 하신 말씀이겠지만, 그런 족보도 없는 놈들하고 저희 석산파를 비교하는 건 좀···."
도훈이 얼른 사과했다. 그의 자존심을 자극하는 데는 세심한 주의가 필요했다.
"제가 모르고 말실수를 한 것 같습니다. 사과드립니다."
"아무튼, 그런 문제라면 전혀 염려 안 하셔도 됩니다. 저희가 지금은 건설업에 집중하고 있지만, 저희 구역에서 지저분한 짓거리를 벌리는 놈들을 그냥 두고 보지는 않습니다. 더군다나 마약이라니···. 큰 형님이 제일 싫어하는 게 약장사 하는 애들입니다.
아마 이 사실을 아시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그렇군요. 아무튼 제가 민수씨에게 부탁하는 것은, 단지 호빠선수 한 명만 대신 조져달라는 겁니다. 제가 직접 나서도 되지만, 지금은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요."
"알겠습니다. 신상만 알려주십시오. 죽지 않을 만큼 밟아드리겠습니다."
도훈이 계속 작전을 설명했다.
"실은 저도 아직 얼굴을 모릅니다."
"얼굴도 모르신다고요?"
"네."
"그럼 어떻게···."
"제가 몰래 접근에 성공해서 오늘 한 놈을 만나기로 했습니다.
그러니 오늘 밤 제가 만나는 상대를 찾으시면 됩니다."
"도훈씨랑 함께 있는 상대란 말씀이시군요."
"네. 제가 신호를 직접 보내겠습니다. 그때 덮쳐 주십시오. 저는 자연스럽게 빠지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일 얘기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민수가 불쑥 도훈의 근황을 물었다.
"요새도 운동 꾸준히 하십니까? 어째 전보다 몸이 더 커진 것 같습니다만?"
"겸사겸사 하고 있습니다."
"전 정말 도훈씨가 저희 조직에 들어왔으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예전에나 그랬지, 지금은 합법적으로 일하는 기업으로 완전히 탈바꿈 했습니다. 여기 도원 건설만 하더라도 전국 도급 순위 100위 안에 들 정도로 성장했고요."
"잘된 일이군요. 축하드립니다."
"오늘이라도 저희 그룹에 입사 지원서만 내시면 당장 이사진에 합류시켜 드릴 생각입니다."
"좋은 제안 감사합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제가 아직은 학생신분이라···."
"하면 대학 졸업할 때까지 학비랑 생활비를 제공해 드릴 의향이 있습니다. 그룹 특별 장학생 자격으로요,"
"정말 고마운 말씀입니다만, 돈이 그리 급한 상황은 아닙니다."
민수는 이런저런 당근책을 제시하며 도훈을 회유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그만큼 도훈의 값어치를 높이 산다는 뜻이었다. 싸움에서 한 번도 져 본적이 없던 자신이, 무명의 대학생에게 패배했다는 사실이 그만큼 충격이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아, 여전히 고집이 보통이 아니군. 이쪽 세계에 뛰어든다면 전국을 평정할 수 있는 자질인데.'
도통 설득이 통하지 않자, 민수는 갑자기 도훈이 김 비서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장면을 떠올렸다.
'그렇지? 명색이 사내라면 돈에 관심이 없어도, 여자는 또 밝힐수 있으니까.'
"정 그러시면···."
"네?"
"이봐, 김 비서."
비서실에서 대기하고 있던 김 비서가 다시 사무실로 들어왔다.
비서실은 민수의 사무실과 쪽문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보통 방문객들은 비서실을 거쳐서 들어와야 하지만 도훈은 아까 민수의 전용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이었다.
도훈은 벌써 3번이나 마주하는 김 비서를 향해 가볍게 목례했다.
"김 비서, 여기 잠깐 앉아봐."
"네?"
"내 옆에 앉아보라고."
민수의 뜬금없는 명령에 김 비서가 민수 옆 소파에 앉았다.
사실 김 비서는 도원 그룹 비서실에 뽑힐 재원까진 아니었다.
학력도 달렸고, 전산능력이나 외국어도 빼어나지도 않았다.
그저 얼굴과 몸매가 번듯한 것만 보고 인사 팀의 하부장이 선발한 것이었다.
하부장은 그룹 내 비서진을 그룹 공채와 별도로 선발했는데, 말이 비서지 사실상 기쁨조를 뽑아 임원진에게 제공하는 일종의 채 홍사 역할이었다.
제아무리 평범한 기업으로 탈바꿈을 했어도, 근본이 조폭인 그룹 이사진들은 여비서를 비공식 애인 쯤으로 생각했고, 당연히 특별 채용된 비서들도 사전에 그러한 사실을 숙지한 상태로 영입된 상황이었다. 동 나이의 대 젊은 여자들이 쉽게 벌 수 없는 고액의 연봉을 제공받는 대가였다.
다만 업무 능력이 부족해도 상관없었지만, 화류계 출신이면 얼굴이 아무리 예뻐도 받아 주지 않았다. 그것은 채홍사인 하부장의 독특한 인사철학이었는데, 천박한 여자들은 근본부터 썩었기 때문에 나중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소신 때문이었다.
그런 복잡한 과정을 거쳐 선발된 김 비서는 처음 최민수 실장에게 배치 되었을 때 무척 긴장했다. 그가 20대 후반이라는 나이때문에 공식 서열은 낮지만, 조직내 위상 만큼은 회장의 오른팔로 불리는 실세라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전국구로 이름난 싸움 실력으로 조직내에서도 명성이 자자했기 때문에, 얼굴에 칼자국이 몇 개 씩 그인 흉폭하고 사나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마주한 최민수는 전혀 그런 타입과는 거리가 멀었다.
민수는 우락부락한 조폭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선이 굵은 서구형 미남이었다. 쌍꺼풀진 커다란 눈과 짙은 눈썹은 어지간한 연예인 뺨치게 잘생겼다. 게다가 몸집도 비교적 호리호리해 정장을 입고 사무실에 앉아 있으면, 화보를 찍는 것처럼 폼이 났다. 아마 입으로 무식을 드러내지 않으면, 잘나가는 IT기업의 오너를 연상시킬 정도였다.
다만 의외인 것은 민수가 여자에게 일절 관심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싸움 실력과 성욕을 등가교환이라도 한 것처럼, 여자 보기를 돌같이 하는바람에 김 비서는 상당히 실망(?)스러운 비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가끔 다른 간부에게 배치된 비서들이 외지에 출장가서 밤새 시달린 이야기를 전해 들을 때면, 김 비서는 자신이 모시는 상사의 성 정체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직 내에서도 민수가 여자와 만나는 걸 본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공공연하게 그가 게이가 아닌가 하는 루머가 돌았고 김 비서도 반쯤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게 아니면, 민수가 자신을 거들 떠도 안 보는 이유가 너무 비참하기 때문이었다.
김 비서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소파에 앉자, 민수가 도훈을 향해 말했다.
"이쪽은 제 밑에서 일하는 직원입니다. 정식으로 인사 드려, 김비서."
김 비서는 갑자기 자신을 소개시키는 민수의 의중을 알 수 없었지만, 일단 도훈을 향해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 타고난 기품과 발성 때문인지, 무척이나 참한 인상을 주는 목소리였다.
"안녕하세요. 김희진이라고 합니다. 김 비서라고 불러 주시면 됩니다."
"네, 안녕하세요. 이도훈입니다."
도훈은 약간 뜬금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 민수의 의도를 몰라 소개를 했다.
"제가 남자로서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는데, 김비선 제 손을 탄 친구가 아닙니다. 내 말 맞지 김 비서?"
"···예, 예? 네. 실장님."
"제 성의라고 생각하고 김 비서를 받아 주십시오."
"아, 아니 실장님 그게 무슨···."
"김 비서. 앞으로 내 밑에서 일할 필요 없으니, 이도훈씨를 물심양면으로 보조 하도록."
"네?"
김 비서가 기가 막혀 하는데, 민수가 도훈을 향해 계속 말했다.
"눈치 빠르고 예의 바른 친구입니다. 도훈씨 개인 비서라고 생각하시고 편하게 부리십시오. 어차피 월급은 회사에서 제공되니 부담은 안 가지셔도 됩니다."
도훈은 그제야 민수의 의도를 이해했다.
'뭐야 이건? 지금 민수가 자기 비서를 나한테 조공한 건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은데요?]
'아니 내가 무슨 비서가 필요해?'
[당연하죠. 주인님 비서는 저 하나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그걸 떠나서 무슨 몸종 주고받는 것도 아니고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경우가 너무 없는데?'
"최민수씨. 이건 좀 과한 것 같습니다."
"네?"
"대학생에게 굳이 개인 비서가 필요하진 않는데요."
"아, 여기선 비서 역을 맡았지만, 도훈씨께서 부리실 때는 필요한 역할을 직접 부여해주시면 됩니다. 시키는 것은 뭐든 따를 테니까요."
"아니 그래도···."
도훈이 당황한 것과 마찬가지로 김 비서 얼굴도 사색으로 변했다.
자신은 도원 그룹 비서실에 입사한 것이지, 조금 전까지 이름도 몰랐던 젊은 청년에게 고용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말이 개인 비서지, 막말로 몸시중이나 들라고 자신을 넘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실장님, 그게 저는···."
김 비서가 인사 명령의 불합리성을 따지려고 하는데, 민수가 차갑게 목소리를 깔았다. 눈빛이 달라지자, 사무실의 분위기가 급변하기 시작했다.
"지금 상사 명령을 거부하는 건가?"
"아니 그게 아니라···."
"나한테 발령나기 전에 인사팀 하부장에게 들었을 텐데? 하부장이 제대로 설명 안 했어?"
평소 화를 내지 않던 민수가 눈을 부라리자 특유의 짐승 같은 폭력성이 분출되었다. 설마 여자를 패지는 않겠지만, 뿜어내는 살기만으로 주변을 압도하는 느낌이었다. 도훈은 물론 아무렇지 않았지만, 그 포악함에 겁을 집어먹은 김 비서가 덜덜 떨면서 대답했다.
"···해, 했습니다."
"하부장이 뭐라고 했는데?"
"모시는 분들이 무엇을 시키든 거부하면 안 된다고···."
"제대로 교육했네. 그럼 김 비서는 지금 뭐 하는 거지?"
"그, 그게···."
보다 못한 도훈이 민수를 말렸다. 여자를 윽박지르는 모습이 어지간히 보기 불편했다.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하지만 민수 특유의 고집이 발동한 느낌이었다.
다른 것보다, 초대한 손님이 보는 앞에서 부하직원이 자기 명령을 대놓고 거부했다는 데서 빡친 것 같았다. 그는 누구보다 자존심이 강했고, 아무리 합법적으로 일하고 있더라도, 뼛속부터 조폭으로 태어난 사내였다. 조폭은 가오가 무너지면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감히 손님 앞에서 내 체면을 이런 식으로 깎아? 김 비서. 넌 오늘부로 해고야."
"···예, 예?"
난데없는 해고 통보에 김 비서가 놀라서 딸꾹질까지 했다.
다른 사람 시중을 거부했다고, 설마 그 자리에서 해고를 해 버릴 지는 상상도 못 한눈치였다. 하지만 상대는 조폭. 근로기준법이고, 부당해고고 신경 쓰지 않는 무데뽀였다. 법적으로 문제가 있는 해고 통보라도 전혀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방금 못 들었어? 도훈씨도 너 필요 없다고 하고, 나도 내 말안 듣는 비서 필요 없으니까 당장 짐 싸서 나가라고!"
"시, 실장님···."
김 비서가 당황했는지 눈물을 글썽이기 시작했다.
학력도 부족하고 별다른 특기도 없는 그녀는, 이곳에서 쫓겨났다간 두 번 다시 이만한 직장을 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밤 시중을 들 것도 각오하고 시작했던 일이, 너무나 허무하게 잘릴 위기에 처하자 김 비서가 애원하며 매달렸다.
"죄, 죄송합니다, 저는 싫다는 게 아니라···."
"이제 상관없어. 도훈씨가 너 필요 없다잖아!"
민수가 막무가내로 나오자 도훈이 곧바로 그의 속셈을 알아챘다.
'쳇. 민수가 이런 얄팍한 수를 쓸 줄은.'
[얄팍한 수라뇨?]
'내가 거부할 수 없도록 김 비서를 몰아붙이고 있잖아.'
[근데 최민수는 왜 뜬금없이 김 비서를 주인님에게 바치는 걸까요?]
'뭔가 단단히 오해를 한 것 같아. 아까 내가 김 비서를 뚫어지게 쳐다봤잖아.'
[그거야 김 비서가 주인님과 민수를 동성애자라고 착각해서 그런 거잖습니까?]
'그러니까. 근데 민수는 내가 김 비서를 여자로서 눈독 들인다고 오해한 모양이야. 돈으로 매수가 안 되니까 성 상납으로 전략을 바꾼 거지.'
[그렇다고 자기 비서를 주인님에게 빌려 준다고요? 이건 좀 심한데요.]
'그래서 처음부터 자기 손을 탄 애가 아니라는 걸 강조했잖아. 민수는 실제로 여자한테 전혀 관심이 없으니까.'
[와 민수도 보통내기가 아니군요.]
'이것참 난감하네. 내가 계속 거부하면 저 비서 오늘 진짜로 잘릴 것 같은데. 민수가 보통 고집이 아니거든.'
결국 도훈은 일단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민수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김 비서는 제가 거두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