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4. 빌드 업-59-
"라면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도훈은 의미를 이해하고도 일부러 모르는 척했다. 도훈이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는 식으로 되묻자, 오히려 먼저 라면 드립을 꺼낸 주아가 뻘쭘하게 말을 돌렸다.
"아, 아니에요. 혹시 출출하신가 해서."
"아니야. 괜찮아. 야식은 잘 안 먹는 편이라. 그럼 조심히 들어가. 난 이만 가 볼게."
"···아,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주아는 창피를 당한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이더니 도망치듯 원룸으로 들어갔다.
집에 들어가서도 얼굴이 화끈거린 주아는 자기 머리를 쿵- 하고 때렸다.
"어휴, 미쳤어.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한 거야?"
스스로가 너무 한심했다.
마치 자신이 흑심을 품고 유혹한 꼴이 되었다.
'오늘 처음 만난 남자한테 이런 적은 처음인데···.'
주아는 일찍부터 남자를 알긴 했지만, 그렇다고 만난 당일 원나잇을 즐긴 적은 거의 없었다.
추파를 던진 손님과 엮일 때도 늘, 다음 약속을 잡고 나서 관계를 갖곤 했다. 어두운 조명 아래 바에서 만난 남자가, 밝은 날 보면 마음에 안 드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신중하게 파트너를 고르기 위함이었다.
'날 싼티 난다고 생각하면 어쩌지?'
괜한 말을 꺼냈다는 생각에 주아가 후회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데,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 팝업창에 떠오른 이름을 보자 서준이었다.
-하서준 : 잘 자. 오늘 만나서 즐거웠어.
도훈의 문자를 확인하고 나서야 주아가 긴장이 풀렸는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후아-. 다행이다. 내 말뜻을 제대로 이해 못 했나 봐. 완전 망한 줄 알았네."
주아도 바로 답장을 보냈다.
-이주아 : 집까지 바래다주셔서 고마워요. 오빠도 조심히 들어가세요.
답장을 보낸 주아는 한참 동안 답장이 오길 기다렸다. 하지만 숫자 '1'이 사라진 후로도 도훈에게서는 다시 연락이 없었다. 주아는 아쉬운 마음에 다시 연락해볼까 했지만, 답장도 안 오는데 계속 연락하면 자신이 너무 밑지고 들어가는 기분이라 이내 핸드폰을 침대로 내던졌다.
"에휴, 됐다. 너무 보채면 싫어할 거야."
그녀는 밤늦게 샤워를 하며 계속 도훈에 대해 생각했다.
'근데 진짜 이상해. 생긴 건 엄청 바람둥이처럼 생겼는데,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순진하지?'
라면 드립을 이해 못한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도훈은 뜻밖에 매너가 좋고 점잖은 청년이었다. 잘생기고 도박도 잘하는데다 마술이 취미인 남자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순진했다.
'혹시, 그건가? 잘생긴 찐따?'
주아는 요새 인터넷 밈으로 유행하는 단어를 떠올렸다.
잘생긴 찐따란, 본인이 잘생긴 줄 모르고 찐따 같이 행동하는 남자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여기서 포인트는 스스로가 잘생긴 걸 전혀 모르고 평범남처럼 행동한다는 것으로 어떻게 보면 도훈이 보이는 특징과 비슷했다.
'진짜로 자기 매력이 얼마나 대단한 지 모르는 거 아니야?'
이해되지 않았던 행동들도 그렇게 끼워 맞추니 대충 말이 되었다.
얼굴도 잘생기고 매력이 넘치는데, 여자에 딱히 관심이 없고 오타쿠처럼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만 몰두하는 사람인 것이다.
마술이라든지, 카드 게임이라든지.
대부분 오랜 시간 혼자 시간을 보내며 연습해야 잘할 수 있는 분야들이었다.
'헐, 그럼 진짜로 바람둥이가 아닌 거야?'
주아는 저평가 우량주를 발견한 것처럼 두근거렸다.
마침내 근사한 남자 친구를 사귈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껏 남자를 하룻밤 잠자리 상대 정도로 생각하던 그녀에게는 크나큰 심경의 변화였다.
'그렇게 잘난 남자 친구가 생기면 내가 뭐하러 아무나 만나고 다니겠냐고. 사귈 만한 사람은 없고 섹스는 하고 싶으니까 엔조이만 했던 건데.'
도훈의 성향을 단단히 착각한 주아는 어떻게 하면 그를 꼬셔 자기 남자 친구로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본인이 잘난 줄 모르는 도훈이라면,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 * *
반면 매너 좋게 물러난 도훈은 바로 택시를 타지 않고 담배를 피우며 밤거리를 혼자 걸었다.
'너무 멀리 와 버렸네. 우리 집은 완전히 반대 방향인데.'
[그러게 왜 안 하던 짓을 하셨습니까? 주인님이 여자의 유혹을 거절한 것은 처음 봅니다.]
'아까 물 안 뺐음 나도 못 참았을 거야. 성희한테 시원하게 싸지른 후라 자제가 되더라고.'
[그나저나 조금 전 행동이 효과가 있을까요?]
'당연하지. 아마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을 걸?'
[이상하다뇨?]
'프리섹스 주의자인 주아는 문턱이 매우 낮은 편이야. 그냥 적당히 잘 생기고, 성격만 무난하면 누구한테라도 쉽게 주는 여자란 말이지. 일종의 잡식 같은?'
[그래도 나름 베이글녀인데, 왜 그렇게 몸을 쉽게 굴리는 걸까요?]
'그냥 모르지. 하지만 남자를 가려 만나는 여자가 프리섹스 주의자를 주창하긴 쉽지 않지. 남자들도 어느 정도 인기가 있으면 여자를 가려 만나거든. 솔직히 주아 얼굴이 엄청 예쁜 건 아니잖아. 오히려 자기 말대로 흔녀에 가깝지.'
[그래도 가슴은 제법 크지 않습니까?]
'가슴이 매력이긴 한데, 살집이 살짝 있는 편이라···. 젖살 뺀답시고 본격적으로 다이어트 하면 C컵으로 쪼그라 들걸?'
[그런가요?]
'암튼, 가볍게 남자를 만나던 주아에겐 내가 무척 특이해 보였을 거야. 자기가 한 번 대준다는 사인을 보냈는데도 깔끔하게 물러났으니까.'
[그렇겠죠.]
'평소 만나던 남자들과 전혀 다른 타입을 만나면 흥미가 생기기 마련이지. 주아는 이미 내 미끼를 문 거나 마찬가지야.'
[그나저나 하루에 두 탕을 뛰시려니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군요.]
'주아는 그렇다 치고, 성희는 난데없이 얻어걸렸다고 보면 돼. 그 나이에 사실혼 관계인 유부녀라니, 상상도 못 했잖아.'
[그래도 덕분에 업적에 도전하실수 있게 됐죠.]
'그러니까 말이야.'
담배를 다 태운 도훈은 집으로 가는 택시를 탔다. 늦은 시간이라 길이 뻥 뚫려 생각보다 일찍 도착할 수 있었다.
'후아-. 하루가 너무 길었다. 일단 자고 나서 생각해 봐야겠다.'
[오늘도 고생하셨습니다.]
이튿날 도훈은 태오의 전화를 받고 깨어났다.
-어떻게 됐어?
"네?"
-뭐야, 아직 자고 있어? 해가 중천인데.
"죄송합니다. 어제 늦게 잠이 들어서..."
-서준아. 혼자서 힘들 것 같으면, 그냥 오늘이라도 윤재랑 같이 다니면서 배워볼래?"
"윤재···형이요?"
-헌팅에 대해선 윤재가 또 빠삭하거든. 하루 만 같이 다녀도 배우는 게 많을 거야.
도훈은 어제 헌팅을 성공했다고 말할까 하다가 갑자기 생각을 바꿨다.
"네, 그럼 오늘 윤재형 한번 만나볼게요."
-잘 생각했다. 내가 연락처 보내 놓을 테니 연락해 봐. 윤재한테도 미리 귀띔해 놓을게.
"네, 감사합니다. 형님."
-열심히 해라. 요새 헌팅하다 다친 애들 많으니까 특히 몸조심하고.
"넵."
도훈이 통화를 끊자마자 버럭 짜증을 냈다.
"씨발, 꿀잠 자는데 깨우고 지랄이야. 개새끼가."
[일어나셨군요. 별다른 일정이 없으셔서 일부러 깨우진 않았습니다.]
'지금 몇 시지 로시?'
[네. 오전 11시 조금 넘었습니다.]
'딱 6시간 잤네.'
[피로는 다 풀리셨습니까?]
'컨디션 최상이야. 오늘 딱히 할 일이 없어서 일부러 늦잠자려고 했는데, 조태오 개새끼 때문에 깨버렸잖아.'
[근데 왜 윤재라는 분을 만난다고 하셨습니까? 헌팅은 어제 성공하시지 않았던가요?]
'그거랑 별개지.'
[네? 별개라뇨?]
'생각해 보니까. 이 새끼들 죄다 범죄자 새끼들이잖아. 물론 안에서 작업하는 놈들이 제일 나쁜 놈들은 맞는데, 밖에서 순진한 여대생 꼬셔다 물어 오는 놈들도 똑같은 놈들이지. 말 나온 김에 이 새끼도 잡아 족쳐야겠어.'
[설마 윤재라는 분을 직접 처리하시려고요?]
'어.'
[그건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요?]
'위험하다니?'
[시우나 서원에 이어 윤재까지 당한다면 놈들도 뭔가 수상하다고 여기지 않을까요? 한두 번 일어난 것은 사고로 생각하겠지만, 연속해서 세 사람이 당하면 그와 함께 다닌 주인님을 의심할지도 모릅니다.]
도훈도 곰곰이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이었다.
도훈과 연관되었다는 증거는 없지만, 시우와 서원이 당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윤재까지 폭행을 당한다면 분명 놈들이 배후를 의심할 것이다.
놈들의 의심이 깊어지면, 서원의 교통사고부터 파헤치려 할 것이고, 자칫하면 자기 계획이 틀어질 위험이 있었다. 번개가 잘 입막음 하겠지만, 굳이 잘 진행되는 일에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듣고 보니 그러네. 아무래도 내 손으로 직접 처리하는 건 위험하겠어.'
[네? 그게 무슨 뜻입니까?]
'말 그대로야. 내 손에 피 안 묻히고 놈을 담가야 한다는 거지. 내가 절대 의심받지 않을 인물을 이용해서.'
[누구요? 보미양 도움이라도 받으시게요?]
'제주도에 있는 보미를 어떻게 이런 일로 부르겠어? 자기 업적 쌓기도 바쁠 텐데.'
[보미양을 제외하면 주인님에겐 별다른 동료가 없지 않습니까? 혹시나 민간인의 도움을 받으려고 해도 체육교육과 선후배 인맥이 전부고요.]
'아니, 체육과를 제해도 한 명 더 있긴 하지.'
[누구요?]
'가만있자. 나한테 아직 번호가 남아 있던가?'
도훈이 스마트폰 연락처를 검색했다.
'다행히 지우진 않았네.'
[설마 최민수에게 부탁하시려고요? 석산파의 행동대장이요?]
'조폭한테 깨지면 놈들도 다른 의심 못 하지 않겠어? 심지어 자신들은 부산 쪽에 기반을 둔 방계 조직인데, 서울에 상경해서 몰래 마약 팔고, 여자 장사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면 어떻게 되겠어? 잘만하면 두 조직 간의 전면전으로 번질 수도 있지 않을까?'
[설마···.]
'맞아. 일종의 차도 살인 계략이야. 남의 칼을 빌려 놈들을 쑤시는 거지.'
[동시에 주인님은 놈들의 의심도 피할 수 있고요.]
'그렇지. 조폭들 간 세력 싸움으로 번지면 PK단에서도 날 의심하지 못할 거야. 나쁜 놈도 잡고, 놈들의 감시도 피하는 최선의 방법이지. 설사 놈들의 조직을 박살 내더라도 상대 조직에서 해결사를 보낸 줄 알 테니까, 운신의 폭도 커지고.'
[주인님의 생각대로 된다면 그보다 좋은 묘수는 없겠군요. 하지만 석산파가 주인님을 순순히 도와줄까요?]
'도움을 청하려는 게 아니야.'
[그럼요?]
'민수가 예전에 나한테 약속한 게 있거든. 다음에 내가 부탁하면 뭐든 들어 주겠다고.'
[아, 기억납니다. 과거 주인님이랑 최민수랑 한 판 붙었을 때 주인님이 목숨을 살려주신 적이 있었죠? 그때 그런 말을 했던 것 같습니다.]
'맞아. 이제야 그 빚을 받을 때가 됐네.'
도훈이 간만에 최민수의 연락처에 전화를 걸었다.
-전화 받았습니다. 동원건설 최민수 실장입니다.
"이런 실망이네. 설마 내 이름도 저장 안 했을 줄이야."
-뭐? 당신이 누군데?
"진짜로 날 모른다고?"
-···혹시 저를 아시는 분입니까?
"국성대 이도훈이라고 하면 알려나?"
-아아! 이도훈씨! 정말로 오랜만입니다!
"뭐야. 번호도 저장 안하깁니까? 섭섭한데."
-그게 아니라 최근에 폰을 잃어버려서 겨우 알고 있던 연락처만 살렸습니다. 제가 이도훈씨를 잊어버릴 수 있겠습니까? 무슨 일로 연락을 다 주시고.
민수는 도훈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그의 싸움 실력을 경외하는 의미로 도훈에게 존대를 쓰고 있었다.
"안 바쁘심 간만에 얼굴 좀 보자고요."
-도훈씨 부탁이면 없는 시간도 내야죠. 지금 어디십니까? 애들 시켜서 모시겠습니다.
"그럴 필요까진 없고요. 제가 그쪽으로 갈게요. 주소만 알려주세요."
-아, 지금 사무실이라···.
"상관없어요. 주소만 남겨 주세요."
-네.
최민수에게 연락을 받은 도훈은 차를 타고 곧바로 이동했다.
[도원 그룹 빌딩이라니···. 진짜로 기업을 운영하는 걸까요?]
'지난번에 듣기론 석산파는 불법적인 일은 대부분 손 털고 완전히 양지로 올라왔다고 들었어. 주소를 보니까 진짜로 회사 빌딩 같은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이른 바 기업형 조폭이지. 그럴듯하게 회사의 외관을 갖춰 놓고 조직원들을 합법적인 부하직원으로 고용하는 거야. 조폭을 빵에 집어넣을 수 있는 근거가 범죄 단체 조직죄인데 그걸 교묘하게 피해 가는 거지.'
[하지만 조폭이 무슨 수로 건설사를 운영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