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7. 빌드 업-52-
도훈은 구경꾼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끼어들며 판돈을 확인했다.
1층에선 가장 비싼 칩이었던 검은 색 칩이 이곳에선 마치 동전처럼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 충격이었다. 그리고 검은 칩 5개를 모아야 교환 가능한 은색 칩과, 1층 환전소에선 모습도 볼 수 없던 황금색 칩도 보였다.
'내 계산이 맞는다면 검은 칩 하나가 3만원 이니까, 5배인 실버는 하나에 15만원, 골드 칩은 30만원이겠군.'
[헐, 그렇게 따지면 1층에서 딴 100만원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군요.]
'확실히 그런 듯해. 지금 저 사람 앞에 쌓인 골드 칩만 5개가 넘잖아. 여기서 대체 얼마나 큰 판을 벌이고 있는 거지?'
도훈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주머니에 넣어둔 실버 칩을 만지작거렸다.
아래에 있을 땐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는데, 이곳에 오니 불현듯 벼락거지가 되고 말았다. 물론, 그의 실제 재산이면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의 재산을 합친 것보다 더 많겠지만.
'옥상옥이라더니, 그 말이 딱이네. 하늘 위에 또 다른 하늘이 있구나.'
[주인님 예상보다 규모가 너무 큰 것 아닙니까? 이런 곳은 대체 어떤 조직이 관리하는 걸까요?]
'그야 모르지. 나중에 번개한테 알아보라고 해볼까?'
판돈의 규모는 10배로 커졌지만, 도박 자체는 딱히 특별할 게 없었다. 다만 초보로 느껴지는 사람이 거의 안 보이는 것과, 미녀 딜러에는 관심도 보이지 않고 도박에만 몰두해 있다는 점이 확실히 달랐다.
'여긴 진정한 도박장이구나. 사람들 눈 좀 봐. 완전히 찌들어 있어.'
[그렇네요. 분위기가 영···.]
'나야 어차피 시간이나 때우러 온 거니까 적당히 구경이나 하다 가야겠다.'
도훈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게임을 기웃거리는데, 허리가 구부정한 노인 한 명이 그에게 다가왔다. 환갑을 조금 넘은 나이로 보였다.
"쯧쯧, 어린놈이 벌써부터 도박에 빠져서 쓰나?"
아무리 봐도 자신을 향해 말을 하는 것이었으므로 도훈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손가락을 구부려 스스로를 가리켰다.
"지금 저보고 말씀 하시는 거예요?"
"그럼, 여기에 어린 놈이 너 말고 더 있느냐?"
"허-. 나 참."
도훈은 다짜고짜 시비를 거는 노인네가 마음에 안 들었지만, 그렇다고 늙은 사람과 대거리를 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그냥 무시했다. 그러나 노인은 계속 시비를 걸어왔다.
"어여, 그만 둬. 노름에 빠져봐야 니놈 인생만 망치지."
"······."
"젊은 놈이, 일해서 돈 벌 생각은 하지 않고선."
"······."
"너네 부모님은 이러고 다니는 거 아시···."
"아, 진짜. 왜 자꾸 저한테 시빈데요?"
"이제야 대꾸를 하는구나, 난 귀머거린 줄 알았다. 이런 고얀 놈 같으니."
도훈은 끝까지 무시하려 했으나, 가만히 뒀다간 하루종일 옆에서 잔소리할 기세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
"아니, 할아버지. 어차피 비슷한 처지에 저한테 조언할 입장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 하는 소리가 아니냐? 경험자로서 말이다. 도박은 늪이야. 인생을 좀 먹는."
"제 앞가림은 알아서 할 테니 괜히 시비 걸지 마쇼."
자꾸 딴지 거는 노인네가 못마땅해진 도훈이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실제 나이가 불혹이 넘은 도훈에겐 환갑의 노인이라고 해봐야 엄청난 나이차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남자 나이로 중년쯤 되면 아무리 노인이라도 쉽게 충고를 못 하는게 정상이었다.
"쯧쯧. 아무리 말을 해도 못 알아들으니, 쇠귀에 경 읽기로구나."
"······."
"손 한 번 줘봐라."
"예?"
"네 놈 손 줘보라고."
"제가 왜요?"
"아, 글쎄 줘보라니까?"
노인네가 하도 성가시게 구는 바람에 도훈은 순간 욱하는 마음에 손 대신 수도가 나갈 뻔했다. 그러나 그랬다간 초상을 치를 게 뻔했기 때문에 화를 꾹 참고 손을 내밀었다.
노인은 거친 손으로 도훈의 손바닥을 어루만지더니, 잠시 후 휙- 치우며 중얼거렸다.
"쯧쯧. 절대로 도박해선 안 될 손이야. 얼른 집어치워."
"제가요?"
"그래. 너 같은 막 손은, 도박하곤 거리가 멀어. 기술을 전혀 못 배울 손이거든."
기술이라는 소리에 도훈이 살짝 흥미가 돋았다.
'대체 뭐 하는 양반이지?'
[주인님. 꼰댑니다. 무시하시죠.]
'그게 아니라 뭔가 사연이 있어 보이는데?'
[사연이라뇨?]
'그게 아니면, 저런 노인네가 왜 이런 사설 도박판을 기웃거리겠어? 이상하지 않아?'
[또 괜한 오지랖을 부리시는군요.]
'일단 한 번 물어나 보자.'
"노인장, 혹시 타짜요?"
"동태 눈깔인 줄 알았더니 이제야 나를 알아보는구나."
노인이 갑자기 자기 왼쪽 눈을 가리켰다. 도훈은 무슨 뜻인지 몰라 한참 노인의 눈을 쳐다보다가, 눈알이 전혀 반응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두 눈의 초점이 전혀 맞지 않았다.
'설마 의안인가?'
[네?]
'저 양반 눈알이 가짜라고.'
"눈은 어쩌다···."
"맞다, 내가 그 충청도 짝눈이다."
"아니, 뭐라는···."
"설마 노름 한다는 놈이 내 이름 한 번 못 들어봤다는 것이냐?"
"짝눈이고 외눈박이고 전 일도 관심 없고요. 그래서 타짜시냐고요."
"고얀 놈 같으니. 네놈은 말하는 뽄새가 영 글러 먹었구나. 쯧쯧."
"도박판에 위아래가 있습니까? 돈 딴 놈이 상전이지."
"쯧쯧. 인성부터 글러 먹은 녀석이로고. 아직 어린놈이 불쌍해 보여서 도와주려고 했더니만···."
"대체 뭘 도와주시겠다는 건데요? 누가 도와 달래요?"
"됐다. 고얀 놈하고는 말 안 섞는다."
노인은 노한 표정을 짓더니 그대로 휑 몸을 돌려 다른 테이블로 가버렸다. 물론 도훈은 직접 노인의 조언을 들을 필요가 없었다.
'로시, 마음의 소리.'
[지금요?]
'어. 저 노인네가 대체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궁금해서.'
[그냥 정신 나간 양반 아닙니까? 충청도 짝눈이라니···. 무슨 원 아이드 잭도 아니고.]
'살짝 허풍이 섞인 것 같긴 하지만, 진짜 타짜는 맞는 것 같아. 아까 손을 잡을 때 고수의 기운이 느껴졌거든.'
[그런 기운도 느끼십니다?]
'손바닥의 느낌이 독특했어. 뭔가를 오랫동안 다룬 장인의 손 같은? 굳은 살 박이도록 카드를 만졌다면 타짜라는 말은 허언이 아니겠지.'
[알겠습니다. 주인님 뜻대로 하십시오.]
도훈이 스킬을 사용해 노인의 속마음을 읽었다.
<쯧쯧. 내 손주 놈 생각나 말리려고 했건만, 싸가지 밥 말아 먹은 자식이로고. 땍끼, 고얀놈 같으니.>
노인은 아직도 도훈에게 속으로 욕을 하고 있었다. 도훈이 버릇없이 행동한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에 신경 쓰지 않고 계속 속마음을 읽었다.
<여긴 아주 타짜들 판인데···. 하긴, 저런 호구 놈은 된통 당해봐야 그제야 정신 차리겠지. 내 말만 듣고 멈출 도박이었으면, 어린 놈이 이런 곳까지 흘러들어 왔겠어?>
'응? 이건 또 뭔 소리야?'
뜻밖의 정보를 입수한 도훈이 속으로 깜짝 놀랐다.
'여기가 타짜 판이라고?'
도훈은 예사롭게 훑어보던 게임에 갑자기 집중했다. 저 정신 나간 노인네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곳 VIP 룸에서 사기 도박이 횡행한다는 의미였다.
카드를 치고 있는 참가자들을 유심히 살피던 도훈은 그중 가장 의심스러워 보이는 한 명의 속마음을 읽었다. 본인의 패에 집중하지 않고 자꾸 다른 플레이어의 눈치를 살피는 게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 같았다.
<···슬슬 무리하고 있구먼. 적당히 약을 올렸으니, 다음 판에 크게 한 번 쓸어 담아야겠는데? 딜러한테 사인을 보내야겠어.>
도훈이 흠칫 놀라 카드 패를 나누는 딜러를 쳐다보자, 방금 전 참가자와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사인을 보내고 있었다.
'헐, 말도 안 돼. 선수가 딜러와 서로 짜고 사기도박을 하고 있잖아?'
[그게 정말입니까?]
'내가 봤어. 저놈이 갑자기 라이터를 만지작거리니까, 딜러가 갑자기 콧등을 문지르는 걸. 이건 분명 사전에 약속된 사인을 주고받은 거야. 이거 순 사기꾼들이었잖아?'
도훈은 조폭과 연계된 이들이 단순히 수수료 장사만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테이블 곳곳에 소속 타짜를 심어두고, 딜러와 합을 맞춰 손님 돈을 갈취하고 있던 것이다.
"어이, 웨이터."
그때 옆 테이블에서 누군가가 직원을 불렀다. 젊은 남자 직원이 급히 뛰어가자, 칩이 모두 오링난 참가자 한 명이 소리쳤다.
"여기 꽁지 이백만."
"자금을 융통하시려면 신분증을 맡겨주셔야 합니다, 손님."
"신분증? 운전면허증이라도 상관없지?"
"네, 가능합니다."
"다들 잠깐만 홀딩하라고. 나 이 판 절대 죽을 생각 없으니까."
마음이 급해진 손님이 지갑을 꺼내더니 직원에게 곧바로 신분증을 건넸다. 신분증과 얼굴을 대조한 직원은 곧바로 황금색 칩 6개를 건네며 말했다.
"선이자 10% 미리 제했습니다. 대금은 나중에 게임 끝나고 정산해 주시면 됩니다."
"알았다고. 끗발 떨어지니까 얼른 물러가."
"넵."
직원이 정중하게 허리 숙여 인사하더니 신분증을 들고 룸을 나갔다. 일련의 과정을 모두 지켜본 도훈이 더더욱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와, 이것들 진짜 가지가지하네? 환전 수수료로 10% 떼먹지 않나, 몰래 타짜들을 고용해서 딜러와 짜고 치질 않나, 선이자 떼고 꽁지 빌려주는 고리대금 업까지?'
[게다가 성매매 알선까지 하고 있죠.]
'이것들 진짜 나쁜 새끼들이네? 범죄가 아닌 행위가 없잖아?'
2층 VIP룸의 진실을 알게 된 도훈은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어떤 조직의 소행인지는 몰라도, 지독할 정도로 손님들 돈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말이 딱 적절했다.
'범죄 도시라는 말이 딱 맞는구나. 호빠 새끼들은 어린 여대생들 공사 쳐서 사창가에 팔아 넘길 궁리나 하고, 조폭 새끼들은 불법 도박장을 차려놓고 그 안에서 각종 범죄를 저지르고 있으니.'
[본래 악은 물들기 쉽고, 선은 행하기 어렵다고 하니까요.]
'그래도 이건 해도 너무한데? 왜 이렇게 세상엔 나쁜 놈들이 많은 걸까?'
[주인님도 그닥 착한 분은 아니지만, 이곳 범죄자들에 비하면 선녀처럼 보이는군요.]
'제주도에 있는 보미가 왜 경찰 플레이어가 되었는지 알 것도 같아. 이것들 하는 짓거리 보니까 그냥 다 쓸어버렸음 좋겠네.'
[참으십시오.]
'왜 참아? 힘이 있는데? 내가 진짜 플레이어만 아니었어도···.'
[플레이어시니 참으라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모순적이군. 이런 막강한 힘을 주고 아무런 책임도 따르지 않는다니.'
[플레이어가 정의의 사도는 아니니까요.]
'거참···.'
이전에도 생각했지만, 이것은 지나치게 모순적이었다.
아마도 신은 인간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은 전혀 관여치 않거나, 혹은 인간이 생각하는 선과 그들이 추구하는 선이 다르다는 뜻밖에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들을 어떻게 우리의 신이라 부를 수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차마 그런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보나 마나 로시가 신성모독 어쩌고하며 전기충격을 줄 게 뻔했다.
'···알았어. 딱히 업적이 걸린 것도 아니니 이 정도에서 관심은 끄도록 하지.'
[어째 반항적으로 들리는 말투군요.]
'내가? 전혀 아닌데? 신의 뜻이 그렇다면, 그런거겠지.'
[물론 당장은 이해가 안 되겠지만, 나중에 랭커까지 오르고 나면 주인님도 그분의 뜻을 이해하실 겁니다.]
'난 아무 말도 안 했다고. 오버하지마.'
[제가 주인님과 지낸 시간이 얼만데, 말하지 않는다고 심정을 모를까요?]
'쓰읍. 가끔 보면 로시 넌 사람처럼 말을 한 단 말이야? 전혀 인공지능 하고 있지 않아.'
[고도로 발전된 과학은 가끔 마법처럼 보이는 법입니다.]
'맨날 똑같은 핑계도 여전하고.'
그때였다.
갑자기 룸 안으로 누군가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중지, 다들 게임 중지! 현 시간부로 매장 폐쇄합니다. 손님들께서는 직원의 안내에 따라 비상구로 대피하시기 바랍니다."
난데없는 폐장 선언에 룸에 있던 손님들이 극렬히 반발했다. 구경꾼들은 그렇다 치고, 한참 게임중이던 참가자들의 반발은 당연한 것이었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이 타이밍에 폐장이라나? 설마 단속이라도 뜬 거야?"
"아이씨 한참 끗발 오르는 중이었는데!"
하지만 검은 정장을 입은 직원은, 손님들 의견을 묵살하며 다시 단호하게 소리쳤다.
"본인 칩은 알아서 챙기시길 바랍니다. 분실되면 저희 업장에서는 책임지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