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5. 빌드 업-50-
* * *
힘든 게임을 마무리한 주아는 기진맥진해진 상태로 카지노 펍 밖으로 나왔다.
"휴. 진짜, 오늘 더럽게 빡세네. 가드 오빠를 몇번이나 부른 거야?"
실은 참가자들이 그녀에게 시비를 걸 때마다 적절한 타이밍에 가드가 등장했던 이유는, 테이블 밑에 설치된 경보 장치 때문이었다. 비상 시 버튼을 누르면 곧바로 주변 가드들에게 해당 테이블 번호가 호출이 되는 방식으로 소란을 미연에 방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아가 건물 외벽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누군가 다가와 그녀 앞에 섰다.
"···서준 오빠?"
주아를 따라나온 사람은 방금 전 홀덤 게임을 완전히 독식한 도훈이었다.
"왜 밖에 나와 있어?"
"바텐더는 안에서 담배 못 피우거든요. 손님이 한다고 알바도 따라하면 안 되죠."
"그랬어? 나도 같이 피우자."
도훈이 주아 옆에 나란히 쪼그려 앉더니 담배를 입에 물었다.
주아가 들고 있던 라이터로 불을 붙여주며 물었다.
"근데 마지막 게임은 대체 어떻게 한 거예요?"
"뭘?"
"아포카 만든 거요. 저 실은 엄청 놀랐거든요. 제가 당황하면 다른 참가자들이 오해할까봐 티는 많이 안냈지만."
"글쎄. 담당 딜러 분께서 패를 너무 환상적으로 뿌려주셔서가 아닐까?"
"농담하지 말고요. 진짜로 조작한 거 아니죠?"
"내가? 무슨 수로?"
"오빤, 마술사잖아요."
"마술사는 맞지만, 타짜는 아니지."
"후-. 저 사실 엄청 떨렸단 말이에요. 그 사람이 진짜 카메라 보자고 할까봐."
"하하하. 걱정안해도 돼. 절대 사기 친 거 아니니까. 너도 옆에서 쭉 지켜 봤잖아. 내가 정말로 사기쳤다고 생각해?"
"보기야 봤죠. 근데 실력있는 타짜들은 딜러조차 속인다더라고요."
도훈이 장난기가 동했는지 손가락 사이에서 카드를 뽑아냈다.
마술사라고 미리 밑밥을 깔아놔서 인지, 인벤토리에서 바로 꺼내는데도 주아는 전혀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 말이야?"
"헐! 어떻게 한 거예요?"
도훈이 손에 든 것은 마지막에 포커 조합에 나왔던 스페이드 A카드였다.
도훈은 카드를 주아에게 건넸다.
"한 번 만져 봐."
"네?"
"카드 재질을 살펴보라고."
"재질요? 어? 이거 종이카드네?"
"맞아. 마술용 카드는 대부분 바이시클 카드라는 종이로 만든 카드야. 게임할 때 쓰는 플라스틱 카드랑은 촉감부터 다르지. 아까 내가 포커 메이드 할 때 낸 카드가 종이는 아니었잖아."
"절대 아니었죠. 다른 카드가 섞였다면 바로 알아챘을 걸요?"
"그냥 운이 좋았던 거야. 속임수 같은 게 아니라."
"하아-. 괜히 쫄았네요 그럼."
"왜? 내가 정말 사기라도 쳤을까봐서?"
"만에 하나라도 문제가 생겼음 저도 커버를 못 하거든요. 매니저님도 그렇지만, 여기서 일하는 가드들 진짜로 무서운 사람들이에요."
"무서운 사람들이라니?"
"···조폭들이라고요."
주아가 소리를 줄여 속삭였다.
"조폭이 카지노 펍도 운영해?"
"네. 저도 자세히는 모르는데, 암튼 그렇다고 해요."
도훈은 주아가 카지노 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사기 행각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 만약 그렇다면 그녀도 공범이라는 소리니까.
"혹시 나중에 문제 생기는 거 아니지?"
"무슨 문제요?"
"사장이 조폭이라니까···."
"에이, 그건 아니에요. 딜러들도 대부분 알바생들이고, 게임을 조작하거나 현금 게임 같은 불법적인 요소는 전혀 없거든요. 어쨌든 합법적으로 운영되는 가게니까."
"전혀 없다고?"
"네."
'주아는 역시 아무 것도 모르는구나.'
[그런것 같군요. 아까 그 룰렛 딜러처럼 핵심 관계자는 아닌 모양입니다.]
'그러게.'
"아무튼 네 덕분에 많이 땄어. 고마워, 너무 무거워서 실버 칩으로 싹 바꿨는데 계산해보니까 거의 100만원 넘는 것 같아."
"축하해요. 오빠가 오늘 운이 좋네요."
"일은 언제 끝나?"
"저요? 왜요?"
주아가 긴장된 표정으로 도훈에게 물었다.
그가 본격적으로 작업을 건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끝나면 같이 밥이나 먹자고."
"밥을요? 그 시간에?"
"야식은 괜찮지 않아? 네 덕에 돈도 많이 땄으니, 나도 뭔가 보답 해주고 싶어서."
"저, 근데 새벽 4시 넘어야 끝날 걸요? 마감하면 거의 5신데."
"5시라···. 아직 많이 남았네."
"그니까요. 혹시 오늘 아니라도 괜찮으심 그냥 저 쉬는 날 볼래요?"
주아도 도훈과의 데이트가 싫지 않은지 다른 날짜를 제안했다.
"언제 쉬는 날인데?"
"다음 주 월요일이요."
"내일 모레?"
"12시 방금 지났으니 이제 내일이죠. 점심 어때요? 맞다, 오빠 대학생이라고 했었죠? 그럼 저녁."
"월요일 저녁 식사 말이지?"
"네. 괜찮아요?"
"흐음, 나야 뭘 상관없지."
[일이 쉽게 풀리는 군요.]
'그러니까. 그때 꼬셔서 호빠 데려가면 되겠다.'
도훈과 주아가 건물 밖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여직원 한 명이 빈 맥주 궤짝을 내놓으러 나왔다가 두 사람을 보더니 흠칫 놀랐다.
그녀는 주아가 오기 전, 도훈이 작업을 걸었던 성희였다. 성희는 두 사람이 가까이 붙어 있는 걸 보고 일부러 못 본척 궤짝을 날랐다. 눈빛이 마주쳤지만, 애써 외면하는 눈치였다.
"오빠. 저 먼저 들어가야 할 것 같아요. 근무 시간에 너무 오래 나와 있으면 곤란하거든요."
"어, 그래. 난 그럼 한 대만 더 피우고 들어갈게."
"네."
주아가 다시 카지노 펍으로 들어가자, 멀리 떨어져 맥주 궤짝을 쌓고 있던 성희가 도훈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방금 뭐예요? 그새 다른 바텐더 꼬시는 건가?"
약간은 뿔이 난 목소리였다. 자신이 퇴근할 때까지 기다린다던 도훈이 주아와 밖에서 노닥거리는 꼴을 봤으니 당연히 화날만도 했다.
"꼬시다니? 누가요?"
도훈이 뻔뻔한 태도로 대답했다.
"방금 전까지 주아랑 같이 얘기하고 있었잖아요. 주아 민망할까봐 아는 체도 안했구먼, 발뺌하는 거예요?"
물론 도훈은 성희가 일부러 외면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아, 그거? 주아씨가 저 때문에 곤욕을 치뤄서 사과한 거예요."
"곤욕이라뇨?"
도훈이 적당히 내용을 요약해 정리했다. 사정을 듣고 난 성희는 그제야 도훈을 바라보는 시선이 부드러워졌다.
"주아씨만 괜히 저 때문에 대신 욕 먹은 꼴이잖아요."
"아···그런 사정이."
"뭐지? 진짜로 날 바람둥이로 봤나보네?"
"바, 바람둥이라뇨? 서준씨랑 저랑 무슨 사이도 아닌데 제가 왜요?"
성희가 바로 반박했다. 자신이 질투하는 게 아니라는 걸 확실히 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도훈은 이미 그녀가 자신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 증거로 빈 궤짝 정리를 마치고도 가게로 바로 들어가지 않고 계속 그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으니까.
"하긴 아직은 아무 사이도 아니긴 하죠."
"아직은?"
"나중엔 찐한 사이가 될지도 모르니까."
"참나-. 웃겨. 본인이 그렇게 매력있다고 생각해요?"
[주인님. 저는 굳이 주인님이 성희양을 상대해 주시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왜?'
[호빠 일과 무관할 뿐더러, 미션이나 업적이 걸린 대상도 아니잖습니까?]
'물론 그렇긴 한데, 쟤 은근 귀엽지 않냐?'
[성희양이요?]
'아까 테이블에 앉아있던 미씨보단 훨씬 매력적인 것 같은데?'
[그야 나이 차가 있으니···.]
실은 도훈이 성희에게 찍쩝 거린건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이틀 전 호빠에서 수경과 라희와 스리섬을 한 뒤 긴 시간 섹스를 못 했던 것이다.
특히 간만에 잠까지 푹잔 터라, 그의 컨디션은 극강으로 올라온 상태였다. 쌓인 양기를 해소하지 못했다간 딸딸이라도 쳐야 할 판이었다.
"음, 별론가?"
"글쎄요? 전 딱히 모르겠는데?"
"모른다고요?"
"네. 제가 알아야 해요?"
도훈은 자신을 도발하는 성희에게 점점 흥미가 생겼다. 특히 주아와 단 둘이 있던 모습을 목격한 뒤, 툴툴 거리며 질투하는 모습이 제법 깜찍하게 느껴졌다.
'확, 진짜로 자빠뜨려 버릴까?'
[진심입니까?]
'꼭 목적이 있어야 섹스하는 건 아니지 않나? 섹스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도 있지.'
[주인님 혹시 지금 몰리셨나요?]
'어, 약간.'
[휴-. 마음대로 하십시오. 적어도 포인트 벌이는 될테니.]
마음을 굳힌 도훈이 불쑥 성희에게 다가갔다.
"안 궁금해요?"
"전혀요."
도훈이 한발 더 다가갔다.
한 팔 거리에서 한 걸음 더 들이대자 몸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이래도?"
"웃겨. 이렇게 무작정 들이대면 다른 여자들이 다 넘어갔나봐?"
성희는 말과는 달리 심장이 자꾸 두근거렸지만 끝까지 부정했다.
오기가 생긴 도훈이 한 팔을 내밀어 그녀의 허리를 확 껴 안았다.
"읍!"
성희가 계단 위에 있었기에 배와 배가 맞닿고, 가슴이 서로 부딪혔다.
특히 도훈이 몸을 끌어 당기면서 허리가 살짝 젖혀졌는데, 묘하게 야한 자세가 만들어졌다.
"정말 하나도 안 떨린다고요?"
"···이건 좀 반칙인데."
"반칙 조금만 더 해도 되나?"
도훈이 코앞에서 달콤하게 속삭였다.
당장이라도 입술이 맞부딪힐 거리였기 때문에 성희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 저는 사귀는 남자가 아니면 키스 안 해요."
"아까 볼에 먼저 해준 사람이 누구였더라?"
"그건 볼이잖아요. 입술 말이에요."
"오케이. 그럼 입술에만 안 하면 된다는 거죠?"
"뭐하려고요?"
"나한테 안기고도 아무렇지 않다고 하니까, 갑자기 오기가 생기네?"
"전 다른 여자들하곤 다르거든요?"
"정말로 그런지 한번 해 볼까요?"
"···키스는 절대 안 할거예요."
성희는 사실 당장이라도 입술을 내줄 수 있었다. 이미 바에서부터 그에게 호감을 느꼈고, 퇴근 후에 보기로 약속까지 했다. 새벽 3시 넘어 만나는 남녀가, 대미를 무엇으로 장식할지는 불보듯 뻔했다.
다만 주아와 몰래 노닥거리는 그를 보자 괜히 질투심이 생겨, 싫은 척 하는 것 뿐이었다. 또 남자들은 여자가 너무 쉽게 허락하면 빨리 흥미를 잃는다고 생각했다.
"오케이. 키스는 안하는 조건으로."
"대체 뭘 하려고요?"
"키스 안하고 다리 힘 풀리게 만들어 볼게요."
"웃기지 마요. 제가 그렇게 쉬워 보여요?"
"진심인데?"
"제가 아무렇지 않으면 그땐 어떻게 할 건데요?"
"그럴리는 없어요."
도훈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성희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성희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마치 키스를 허락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도훈은 입술을 아슬아슬 지나치더니 성희의 귓불을 깨물기 시작했다.
'아아, 뭐, 뭐지?'
성희는 난데없는 귀불 애무에 심장이 쿵- 내려 앉았다. 숨소리가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로 귀 가까이 입을 댄 도훈이, 혀를 길게 내밀어 목덜미를 핥으며 목선을 타고 내려왔다.
"아아···."
성희가 자기도 모르게 두 손을 꽉 쥐었다.
말한 것처럼 키스를 하는 것도 아닌데, 등 줄기에 소름이 쫙- 돋는 애무였다. 목덜미를 혀로 핥던 도훈은, 성희의 쇄골 쪽으로 내려왔다. 쇄골 뼈의 움푹 들어간 곳에 입술을 부딪히자 성희가 끝끝내 참고 있던 신음을 터뜨렸다.
"흐으으···!"
동시에 몸에 힘이 쭉 빠지더니 성희가 휘청 거렸다. 도훈이 장담한 것처럼 다리가 풀리고 만 것이다.
균형을 잃고 무너지는 성희를, 도훈이 등허리를 감싸며 바짝 잡아당겼다. 두 사람의 몸이 더욱 밀착되었다. 성희의 가슴이 도훈의 탄탄한 가슴에 완전히 짓눌렸다. 그녀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게 달아 올랐다. 짧은 순간 완전히 흥분해 버린 것이었다. 감정을 숨기기 힘들었다.
도훈이 달콤하게 속삭였다.
"어때요? 제 말 맞죠?"
"······."
"더 해줄까요?"
"그, 그만."
가까스로 이성을 차린 성희가 도훈을 애써 밀어냈다. 도훈이 순순히 포옹을 풀고 물러났다. 하지만 득의만면한 미소를 감추지 않았다.
만약 근무시간이 아니었고, 길거리만 아니었다면 성희가 바로 빤스를 내렸을 거라고 확신했다. 이미 팬티는 축축하게 젖었을 것이다.
"다리 풀렸죠?"
"···치."
성희가 입술을 쭉- 내밀며 투덜거렸다.
"남 근무 시간에 뭐하는 거예요?"
"그니까 얼른 퇴근 하라고요. 기다리고 있으니까."
"···퇴근하면 어디 갈건데요? 3시 넘으면 문연 곳도 없을텐데."
"그래요? 어딜가야 하나 그럼?"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지만, 서로 대답을 미루는 두 사람이었다.
성희가 핸드폰 시계를 보더니 화들짝 놀라 말했다.
"앗, 저 들어가 봐야 해요. 너무 늦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