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4. 빌드 업-49-
도훈이 살살 감정을 긁자 선글라스 청년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무, 무슨. 나도 같은 원페어라 죽었구먼."
[이야, 어떻게 원페어 들고 올인하실 생각을. 저는 주인님이 꼼짝없이 지는 줄 알았습니다.]
'저놈이 플러쉬를 노리다 실패했으니까, 바로 꼬리 내릴 줄 알았지. 수학적 확률만 가지고 게임 하는 놈들이 왜 돈을 못 따는 줄 알아?'
[왜요?]
'겁이 존나 많아서. 생각했던 것보단 훨씬 호구였네. 배짱도 없는 새끼 같으니.'
다시 게임이 재개되었다.
이미 다른 참가자들의 성향을 파악한 도훈은 게임을 완전히 휘둘렀다. 상대가 조금이라도 좋은 패가 붙은 것 같으면 바로 죽어 버리고, 자신이 이길만한 승부에선 과감한 베팅으로 계속 돈을 불렸갔다.
그 결과 게임을 시작한지 채 1시간도 되지 않아, 대부분의 참가자가 보유한 칩의 절반 가까이를 잃고 말았다. 도훈의 테이블 앞에는 칩으로 만든 원기둥이 산처럼 수북이 쌓였다.
"혹시 음료 필요하신 분 계신가요?"
"쉬는 시간이야? 난 젝콕 하나만."
"술은 무슨? 담배나 피우고 싶으니까 재떨이나 가져다 줘."
"그냥 계속 패나 돌리죠, 딜러님?"
"아, 음료는 다른 바텐더가 가져다드릴 거에요."
여유가 생긴 도훈은 환하게 웃더니 딜러인 주아에게 검은 색 칩 하나를 밀었다.
"딜러님, 여기요."
"아, 홀덤 참가자분들에게 제공되는 음료는 무료입니다. 테이블 피에서 계산되거든요."
"그건 아는데, 이건 그냥 팁이에요. 나한테 카드를 너무 잘 주셔서."
"앗, 감사합니다."
주아가 검은 칩을 챙기며 방긋 웃었다. 그 모습을 보던 대머리가 담배 연기를 푹푹- 내뱉으며 한탄했다.
"아니, 딜러 아가씨. 나도 좋은 카드 좀 줘 보라고. 사람 차별하는 것도 아니고."
그러자 중년의 미씨가 그의 말을 받았다.
"이봐요 아저씨. 딜러 아가씨도 눈이 있는데, 늙다리한테 좋은 카드를 주겠어요? 나 같아도 총각한테 몰아 주겠네."
"뭐야? 아니 듣자 듣자 하니까 이 아줌마가!"
"아줌마라니? 저 애도 없거든요?"
"손님들 언쟁은 삼가 주세요."
주아가 정중하게 요청했지만, 돈을 잃고 흥분한 대머리에겐 말이 통하질 않았다.
"아니,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니들 이거 서로 짜고 치는 거 아니야?"
그때였다. 흥분한 대머리 뒤로 검은 정장을 입은 떡대들이 순식간에 다가왔다. 그중 날카롭게 생긴 사내가 대머리를 향해 물었다.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손님?"
"뭐, 뭐야···."
대머리는 난데없이 등장한 정장을 입은 떡대들에 움찔 놀라서는 목을 움츠렸다.
"혹시 저희 딜러의 형평성에 문제를 제기하신 건가요?"
"아, 아니 나는, 그냥···. 그냥 별 의미 없이 한 소립니다."
"불만 사항이 있으시면 언제든 저한테 말씀하시길 바랍니다. 제가 여기 매니저거든요."
"아, 알겠소."
도훈은 갑자기 등장한 매니저의 모습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저 새낀 딱 봐도 조폭 같아 보이는데?'
[그래 보이는군요. 부하들 덩치도 상당한데요?]
'사기 도박장이 맞구나. 기도를 현역 조폭들로 쓸 정도면. 멀쩡한 카지노 펍이 아니라 조폭들 돈 줄이었군.'
대머리는 십년감수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주아에게 사과했다.
"미, 미안하게 됐소, 아가씨. 돈을 잃어서 내가 좀 흥분한 것 같아."
"괜찮습니다. 다만 한가지 자신있게 말씀드릴 수 있는건, 저는 누구에게나 공정하게 카드를 드린다는 사실 뿐입니다."
"알지. 내가 아까부터 쭉 봤는데 승률은 거의 비슷하더라고. 다만 큰 판에서 계속 저 잘생긴 총각이 이겨서 그렇지."
중년 미씨도 돈을 잃긴 매한가지였음에도 혼자 칩을 독식한 도훈에게 큰 불만이 없는 눈치였다. 그녀는 계속 가슴골을 드러내며 도훈에게 섹스어필 하는데 몰두하고 있었다.
"어휴, 그나저나 오늘 밤도 혼자서 외롭겠네. 돈만 썩어지게 넘치면 뭐한 담? 늙은 남편 먼저 가고 나니 같이 쓸 사람도 없는데."
TMI를 남발하는 중년 미씨를 보고 도훈이 속으로 피식 웃었다.
'이젠 대놓고 유혹이군. 돈 많은 과부라고 이마에 써 붙이고 다니지?'
[차라리 호빠를 가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러게. 근데 또 도박이 섹스보다 좋다는 사람도 많거든. 실제로 쾌락 강도를 비교하면 도박이 더 높게 나올걸?'
[어떤 게 제일 강한가요?]
'1위는 당연히 마약이지. 그 다음이 도박일 거야.'
[역시.]
'암튼 저 미망인은 도박이랑 섹스 둘 다 좋아하는 타입같아. 도박도 즐기고, 돈 잃고 방황하는 청년들 꼬셔다 원나잇도 즐기는? 원래 도박에서 돈 잃은 놈들은, 돈 준다면 쉽게 꼬실 수 있거든.'
[그럼 저 과부 입장에선 주인님이 돈을 따서 아쉽겠군요.]
'내가 설사 돈을 잃었어도 저런 아줌마한테 좆대가리 들이밀 일은 없을걸.'
[주인님 은근 30대 여성 좋아하지 않습니까?]
'골드 미스 쯤 돼야 구미가 당기는 거지. 내가 뭐가 아쉬워서 저런 아줌마를? 동네방네 다 대주고 다녀서 성병이나 안 걸렸음 다행이겠구먼.'
[그건 너무 악담 아닙니까?]
'기왕이면 어린 여자가 좋다는 거야. 주아도 그렇고, 아니면 아까 잠깐 놀았던 성희도 괜찮고.'
[하긴 주인님 입장에선 아쉬울 게 전혀 없죠.]
"적당히 쉬었으면 바로 카드 돌리죠?"
역시나 도훈에게 돈을 잃은 선글라스 청년이 씩씩거리며 말했다. 그는 오로지 도훈을 이기는데, 혈안이 된 것 같았다. 돈을 잃었다는 것보다, 자기보다 어린 도훈에게 한끝 차이 승부로 계속 발린 것이 분한 모양이었다.
'쯧쯧. 저 새낀 대성하긴 글렀네.'
[선글라스 쓴 청년 말이죠?]
'저런 멘탈로는 운 좋게 VIP룸 가봐야 탈탈 털릴걸?'
[처음엔 셋 중 가장 낫다지 않았습니까?]
'그래봐야 동네 고수 수준이지. 그리고 웬만큼 도박 한다는 사람들도 이길 때랑 질 때가 전혀 달라.'
[그게 무슨 뜻입니까?]
'계속 이기며 돈 딸 때는 누구보다 냉철하지. 하지만 운 나쁘게 말릴 적에는 평정심을 잃고 무리를 한다는 소리야. 사실, 진짜 고수들은 지고 있을 때 멘탈을 잡을 수 있거든. 저런 멘탈가지곤 계속 도박해 봐야 언젠가 고수 만나서 기둥뿌리 마저 털리고 말 거야. 반쪽짜리의 최후랄까?'
[주인님의 평가는 참으로 냉정하시군요.]
'그나저나 이 정도면 주아한테 충분히 점수를 딴것 같으니 슬슬 마무리 지어야겠다.'
[이제 끝장을 보시는 겁니까?]
'언제까지 잔챙이들하고 놀아줄 순 없잖아. 시시해져 버렸어.'
도훈은 이제 참가자들의 성향을 모두 파악한 상태였다.
심지어 딜러인 주아의 버릇도 파악했다.
'주아는 30분마다 새로운 카드로 바꾸지. 혹시 모를 카드 분실이나 표시 목을 방지하기 위해.'
[그렇다면···.]
'맞아. 막 새 카드를 꺼냈으니까, 앞으로 한동안 카드 교체는 없다는 뜻이야.'
다시 게임이 재개되자 도훈은 평범하게 게임을 하는 척하면서 조작을 시도했다.
게임이 끝나고 카드를 다시 거둘 때 필요한 카드를 몰래 수집한 것이다. 마술을 익히면서 습득한 자연스러운 손놀림으로 카드를 손바닥에 감춘 뒤, 인벤토리를 활용해 아공간으로 보내는 방식이었다.
A카드 두 장을 몰래 빼돌린 도훈은 차분히 때를 기다렸다. 아무리 감 좋은 딜러라도 카드 두 장이 사라진 것은 쉽게 알아내진 못 할 것이다.
도훈의 예상대로 주아는 카드 두 장이 사라진 것을 깨닫지 못한 채 계속 게임을 진행했다. 그러다 마침내 기회가 찾아왔다.
대머리가 흥분해서 판돈을 계속 올리는데, 다들 적극적으로 배팅을 따라간 것이었다. 하프를 거듭하던 베팅은 마지막 히든에 이르러 올인 직전까지 갔다. 도훈은 마음의 소리 스킬을 통해 각자의 패를 읽었다.
'아줌마는 J플러쉬, 대머리는 백 스트레이트. 오, 선글라스 풀하우스 잡았네? 이런 판이 벌어지기도 하는구나.'
[주인님은 완전 개패 아닙니까?]
'맞아. 나는 바닥에 깔린 A 원페어 말곤 메이드가 안 됐지. 액면이 전부랄까?'
[그럼···.]
'하지만 A카드 두 장을 가지고 있잖아. 미리 빼돌린.'
"오우, 칩 쌓인 것 좀 봐. 이게 오늘 마지막 게임이 될 것 같은데?"
"다들 좋은 패 들었나 보네"
"이렇게 된 거 남은 칩 싹 다 올인 하는 게 어때요?"
"콜."
"나도 콜. 가장 적은 사람이 누구지? 거기에 맞춰 밀어 넣자고."
도훈도 다른 사람의 금액에 맞춰 칩을 밀어 넣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바닥에 내려놓은 자신의 카드를 마술과 인벤토리를 활용한 기술로 남몰래 바꿔치기 한것이었다. 너무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아무도 알아채지 못햇다.
"자, 그럼 까봅시다. 난 텐 스트레이트!"
"잠깐, 그 손 치우시고. 난 간만에 플러쉬 떴거든? 이게 마지막에 뜨네!"
중년 미씨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승리를 확신하는데 선글라스가 건방지게 손가락을 좌우로 까딱거렸다.
"아이고, 이를 어쩌죠. 제가 하필 K 봉이 나와버렸는데?"
"보, 봉이라고?"
"그럼 K 풀하우스야? 아아, 하필 여기서 봉이 나오다니!"
"이야, 내내 지다 제대로 큰 판 먹었구먼, 쩝."
"K 풀하우스는 못 이기지. 심지어 뒷패까지 A페어면."
"총각, 총각은 뭐야? 왜 말이 없어?"
도훈이 아무렇지 않게 히든 두개를 하나씩 내렸다.
"저는 이겁니다."
"아, 아니!"
"잠깐만 이게 지금···."
"A 포카!!!"
다들 눈이 튀어나올 만큼 놀라고 말았다.
게임 중 거의 보기 힘든 패가 마지막에 우수수 쏟아져 나온 것도 모자라, 스티플 말고는 적수가 없다는 최강 패가 등장한 것이었다. 포커의 꽃이라는 A포커가.
"아무래도 마지막 승부는 제가 이긴 것 같네요."
도훈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테이블 중앙에 잔뜩 쌓인 칩을 쓸어 담았다. 올 인에 가까운 판이었기 때문에 눈으로 대충 보아도, 도훈 앞에 쌓인 칩은 흰색 칩 기준으로 400개가 훌쩍 넘었다.
"와, 한 시간 만에 다 털리다니."
"어떻게 여기서 그게 나오지? 총각, 진짜 포커 잘친다."
다들 패배를 인정하는데, 풀하우스를 잡고도 승부에서 진 선글라스 청년만은 포기할 줄 몰랐다.
"이, 이건 사기야!"
"네? 뭐라고요?"
"말이 안 되잖아! 어떻게 거기서 포커가 뜨냐고?"
"그쪽도 풀하우스 뜨셨잖아요. 그건 말이 되고?"
"아, 아니 그건···."
"바닥 패에 A 원페어가 깔렸을 때부터 예상 하셨어야죠. 이 판은 다들 좋은 패가 나올 수밖에 없다는 걸."
"······."
도훈의 말은 틀린 구석이 없었기 때문에 선글라스 청년도 반박할 수 없었다. 분을 못 참던 그가 갑자기 지갑을 꺼내더니 테이블 위에 올렸다.
"자, 여기 50만원 현금 있어. 이걸로 다시 붙자."
그러자 딜러인 주아가 즉각 제지했다.
"손님. 저희 업장에선 현금 도박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닥쳐! 너도 한패잖아? 이 새끼가 아까 보너스 챙겨주니까 좋은 패 몰아줬지?"
"제가요?"
"···슬슬 선 넘네."
도훈이 담배를 꺼내 물더니 심드렁 표정으로 선글라스 청년을 쳐다보았다. 한마디만 더 하면 실력 발휘를 할까 고민하는데, 어떻게 알고 정장을 입을 떡대들이 다시 테이블로 몰려왔다.
"무슨 일입니까?"
"저 손님이 저보고 사기 쳤다고 우기잖아요."
"손님. 정말입니까?"
"내, 내가 다 봤다고! 저 아저씨한테는 스트레이트를 주고, 저 아줌마한테는 플러쉬를 주고, 나한테는 풀하우스를 준 다음에 저 새끼한테 포커몰아 준 거 내가 모를 줄 알고? 시나리오를 뭐 이렇게 티나게 써?"
정장을 입은 직원이 심각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손님. 저기 CCTV 보이시죠?"
"어디요?"
직원이 벽면에 설치된 카메라를 가리켰다.
"불상사를 대비해 저희 업장에서는 게임 장면을 모두 카메라로 녹화하고 있습니다. 만약 저희랑 함께 카메라를 확인했는데, 만약 딜러가 공평하게 카드를 배분했고 아무 문제가 없었다는 게 밝혀지만 방금 그 발언 책임지실 수 있습니까?"
책임이라는 단어에 선글라스의 낯빛이 사색이 되었다.
그도 도박을 오래 즐겨온 만큼, 방금 판에서 어떤 속임수도 없었다는 걸 알고 있던 탓이었다. 지금의 결과처럼 카드를 배분하려면 신의 손이라 불리는 타짜가 공들여 설계해야 가능했다.
"그, 그게···."
"확실히 말씀해 주세요. 책임지실 수 있으십니까? 저희 딜러가 속임수를 썼다면 잃은 돈의 10배로 보상해 드리죠. 대신 아니면···."
정장이 고개를 좌우로 까딱였다. 누가 봐도 조폭으로 보이는 그의 협박성 발언에 선글라스가 결국 꼬리를 내렸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흥분해서 실언한 것 같습니다."
"저한테 사과할 일이 아닙니다. 딜러한테 정중하게 다시 사과하세요."
청년은 선글라스를 벗더니 자리에서 일어서서 주아에게 정중하게 고개 숙여 사과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사과는 받겠습니다. 그리고 게임은 여기서 정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