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8. 빌드 업-43-
서점으로 되돌아간 도훈은 카드 마술 관련 책을 샀다. 책을 구매하자 부록으로 바이시클 카드라는 마술용 종이 카드가 딸려왔다. 이후 커피숍에 간 도훈은 대충 책을 훑어보더니 쓸만한 카드 마술 몇 가지를 익히기 시작했다.
몇몇 기술은 세밀한 컨트롤이 필요했음에도, 도훈은 빠른 속도로 마술을 배웠다. 무공으로 인해 손 끝의 감각이 예민해지고 손가락의 신경도 극도로 발달한 상태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밖에 글에 적힌 설명만으로는 따라 하기 어려운 기술들은 인터넷으로 일일이 찾아 영상으로 확인했다. 동체 시력이 뛰어난 도훈은 영상을 보는 순간 곧바로 마술에 사용되는 트릭과 핵심 포인트를 짚어냈고, 한두 번 영상을 보고 난 뒤로는 거의 복제하듯 흉내 낼 수 있었다.
그 결과 불과 3시간도 지나지 않아 도훈은 카드를 제 몸처럼 다루게 되었다. 평생 카드를 다뤄온 사람보다 더 빠른 속도로 카드 마술을 습득해 버린 것이었다.
한 손에 있는 카드를 반대 손으로 촤르륵 넘기는 기술을 선보이던 도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몸으로 하는 건 이제 눈대중으로 대충 봐도 복제 가능하구나. 상상은 했지만 이렇게 쉽게 될 줄 몰랐는데.'
[참으로 놀라운 경지입니다. 저도 주인님이 이렇게 빠르게 숙달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나도 당황스러울 정도야. 나한테 이런 재능이 있을 줄 몰랐거든. 내가 마술사라니, 거참.'
재능이란 두 글자로 치부하기엔 너무도 사기적인 능력이었다.
이는 약간의 연습 시간만 주어진다면, 눈으로 본 모든 동작을 똑같이 복제 가능하다는 의미였다. 그것이 어떤 종류의 기술이건, 마술이건, 하물며 무공이라도 상관없었다. 물론 무공의 경우 관련 내공이 뒷받침되지 않은 이상 동작만 베낀 수준이겠지만.
도훈은 3시간 내내 만지작거리느라 걸레짝이 되어버린 카드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새롭게 한 세트 더 구매하기 위해 다시 서점에 들렀다.
그 무렵 조태오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어, 서준아. 지금 뭐 하고 있어?
"네, 시내 돌아다니면서 헌팅 대상 물색 중입니다."
아무래도 신참인 도훈이 헌팅을 제대로 하는지 확인차 연락을 한 모양이었다.
-혼자서 힘들면 윤재한테 도와달라고 해도 돼.
"윤재형이요?"
-물론, 네가 알아서 잘할 거라고 믿는데, 헌팅도 나름의 기술이 필요한 거거든. 시행착오 겪으면서 익힐 바에야,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보는 건 어떤가 해서.
도훈은 이미 거지 같은 멘트로 충분한 시행착오를 겪었기 때문에 태오가 어떤 우려를 말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와선 별 필요 없는 조언이었다.
"오늘까진 혼자 해볼게요. 지금 잘하면 한 명 낚을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오, 벌써? 역시 빠르군.
"네. 혹시 잘 안되면 내일부턴 윤재형 따라다니면서 배워보겠습니다."
-그래. 잘 생각했어. 헌팅은 번호만 받는다고 끝이 아니야. 번호를 받는 것부터가 시작이지. 번호 딴 애들을 가게 테이블 앞에 앉혀 놓아야 그때부터 본격적인 작업을 들어갈 수 있거든. 넌 똑똑하니까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지?
"네,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믿고 맡겨볼 테니, 능력 한 번 보여줘라.
카드를 다시 재구매한 도훈이 통화를 끊으며 속으로 욕했다.
'개새끼. 귀찮게, 확인 전화는.'
[주인님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 걸까요?]
'그게 아니라 이게 태오가 하는 일이야.'
[하는 일이라뇨?]
'밖에다 헌팅조를 풀어놓고 이따금 연락하는 거. 주급 받는 값을 하라는 거지. 방치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줘야 밑에 애들이 계속 긴장할 테니까.'
[혹시 주인님을 진짜로 감시하는 건 아니겠죠?]
'내가 일을 하는지 안 하는지 말이야?'
[네. 조태오라면 충분히 그럴만한 위인으로 보이는데요.]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누군가 나를 미행했다면 내가 지금껏 눈치 못 챘을 리 없어. 아마 계속 성과가 없으면 나중에 진짜로 감시를 붙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야.'
[조태오는 겉으론 주인님을 믿는 척하면서, 속으론 계속 의심하는 느낌입니다.]
'그런 것 같아. 기본적으로 의심이 많은 인간이야. 그러니 구씨에게 발탁돼서 새끼 마담 자리를 꿰찰 수 있었겠지만.'
태오는 도훈을 의심하는 정도였지만, 도훈은 아예 태오를 불신하고 있었다. 다만 겉으로는 전혀 티 내지 않고 순진한 대학생의 모습을 철저히 연기할 뿐이었다.
'하여간 조태오 그 새끼도 똑같은 공범이야. 나중에 제대로 죗값을 치르게 해줘야겠어.'
[이런 말씀 드리긴 송구스럽지만 한 마디만 올려도 되겠습니까?]
'뭔데?'
[주인님이 정의로운 척하는 모습이 저는 조금 어색합니다.]
'따지고 보면 내가 그렇게 나쁜 놈은 아니지 않냐?'
[적어도 주아양을 호빠로 유인하기 위해 헌팅 하러 가시는 분이 할 말은 아니란 뜻입니다.]
'대의를 위해선 약간의 희생은 불가피한 법이야. 그리고 주아가 실제로 피해를 보진 않게 할 거야. 어디까지나 함정수사에 동원되는 휴민트라고 봐야지.'
새로 산 마술 카드를 인벤토리에 정리한 도훈은 미리 위치를 파악해 둔 카지노 펍으로 향했다. 아까와 달리 카지노 펍은 휘황찬란한 네온사인을 반쩍이며 영업 중이었다.
유흥가가 대체로 그렇지만 조명이 없는 낮의 모습과, 화려한 밤의 풍경이 극단적인 대비를 이루었다. 죽어있던 도시가 생기를 띄고 되살아난 느낌이랄까? 그 불온한 불빛을 따라, 불나방 같은 청년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주인님. 근데 이건 도박 아닌가요?]
'뭐? 카지노 펍?'
[네. 대한민국 법에선 사설 도박은 금지하는 것으로 압니다만.]
'아니야. 뭔가 오해하는 것 같은데, 공식적으로 카지노 펍에서 딴 칩은 현금환전이 불가능 해. 현금 대신 경품을 주는 성인 오락실하고 운영 방식이 비슷하다고 보면 돼. 게임은 실제 도박 룰과 똑같지만 현금이 오가는 게 아니니 사설 도박은 아닌 셈이지.'
[그런가요?]
'응. 내가 알기론 카지노 펍에서 딴 칩은, 거기서 술이나 안주를 주문하거나 혹은 토너먼트 대회를 열어서 각종 경품을 타는 용도로 알고 있어. 물론 누군가 나쁜 마음을 먹고 진짜로 사설 도박장을 열어 버릴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러다 단속에 적발되는 날엔 영업 정지는 물론이거니와 업주가 구속될 사안일걸? 누가 그렇게 간 큰 짓을 하겠어?'
[이해했습니다. 그러면 주아 양은 자신의 장기를 살려 알바를 선택한 것이었군요. 단순한 바텐더가 아니라요.]
'그런 것 같아. 카지노 펍에선 딜러가 필요한 게임의 경우엔 보통 바텐더들이 딜러 역을 대신하거든. 쉬운 게임이면 무경력자를 교육해 쓰겠지만, 룰이 복잡한 게임의 경우엔 전공자가 훨씬 잘할 테니.'
도훈이 카지노 펍에 입장하자, 카운터에 앉아있던 여직원이 인사를 하며 그를 반겼다.
"안녕하세요. 혹시 저희 가게는 처음이신가요?"
"네."
"그러면 제가 간단히 설명해 드릴게요. 일단 입장료와 기본 음료 포함한 비용은 이만원입니다. 기본 칩으로 2개가 제공되고요."
"네."
"또한 칩은 추가로 더 구매하실 수도 있습니다."
"추가 칩은 얼만데요?"
"만원에 3개요."
"그럼 일단 5만원 어치만 결제할게요."
"네. 계산해 드릴게요."
카운터 직원이 돈을 받더니 흰색 카지노 칩을 건넸다. 기본 입장료에 포함된 2개에, 추가 구매한 3만원에 해당하는 칩 9개로 모두 11개였다. 칩은 실제 카지노에서 쓰는 것과 거의 흡사했다. 이어 손목에 착용할 수 있는 종이 팔찌도 주었다.
"팔찌를 바텐더에게 보여주시면, 기본 음료를 제공해 드릴 거예요. 추가 음료는 보유하신 칩으로 별도 결제 가능하세요. 만약 게임 룰을 모르시면 각각 테이블에 배치된 딜러분에게 물어보시면 친절히 설명해 드릴 겁니다."
"감사합니다."
"혹시 더 궁금하신 점 있나요?"
"게임은 아무거나 다 참여할 수 있나요?"
"네. 최소 인원이 차야 시작하는 게임을 제외하면 원하시는 데로 참여하셔도 됩니다. 단 모든 게임에는 최소 참가비로 칩1 개가 필요하니 참고하세요."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칩을 수령 후 팔찌를 착용한 도훈이 가게 안으로 입장했다. 펍 내부는 일종의 소형 카지노처럼 가게 전체에 다양한 종류의 게임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바카라는 기본이고, 블랙잭과 텍사스 홀덤은 물론 정 중앙에는 카지노 하면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룰렛까지 구비되어있었다. 조잡한 사설 게임장 정도로 생각했던 도훈은, 실제 카지노에서 쓰이는 것과 똑같은 크기의 룰렛을 보고는 혀를 내둘렀다.
'와, 여긴 진짜 그냥 카지노 축소판이네? 이렇게 갖추고도 장사가 될 정도면 대체 운영을 어떤 방식으로 하고 있는 거지?'
바텐더들 역시 정장 바지에, 흰 셔츠, 그리고 조끼까지 갖춰 입어 실제 딜러처럼 보였다. 물론 대부분 정식 라이센스를 가진 딜러는 아니겠지만.
도훈은 바텐더의 얼굴을 살피며 주아를 찾았으나, 아무리 찾아도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왜 주아가 안 보이지?'
[혹시 아직 출근을 안 했을까요?]
도훈이 시각을 확인했다.
7시 반이 넘어가고 있었다.
'어쩌면 오픈과 동시에 출근은 아닐 수도 있겠군. 새벽 늦게까지 영업한다면 더 늦게 출근하는 마감조가 있다는 뜻이니까.'
[규모를 봐선 충분히 그럴법 합니다.]
도훈은 게임 테이블을 하나씩 지나쳐 구석의 바에 앉았다. 도훈이 자리에 앉자, 딜러 복장을 갖춘 바텐더가 메뉴판을 들고 맞은편에 섰다.
"안녕하세요, 음료 주문하시겠어요?"
"기본 음료는 뭐가 있어요?"
"양주나 칵테일류는 안되고요, 병맥주나 에이드 종류는 가능합니다."
"병 맥으로 하나 주세요."
"네, 팔찌 한 번 내밀어 보시겠어요?"
도훈이 팔찌를 찬 왼 손목을 내밀자, 직원이 조그만 스탬프를 들어 종이 팔찌 끝에 도장을 찍었다.
"이건 왜 하는 거예요?"
"기본 음료는 최초 한 잔만 무료라서 표시를 해 드리는 거예요."
"아하, 네."
결국 추가로 술을 시키거나 음료를 마시기 위해선 도박에 이겨서 칩을 벌거나, 추가 칩을 구매하는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바텐더가 냉장고에서 병맥주를 하나 꺼내더니 직접 병따개로 뚜껑을 따주었다.
"컵 필요하신가요?"
"아뇨. 그냥 병째 마실게요."
바에 앉은 도훈은 맥주가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병나발을 불었다. 취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단지 목이 말랐기 때문이었다.
꿀꺽-꿀꺽-
"캬하-. 이제 좀 살 것 같네."
도훈이 맥주병을 바 테이블에 내려놓는데, 주문을 받았던 여직원이 다른 곳으로 이동하지 않고 도훈 앞에 계속 서 있었다. 의아한 마음에 도훈이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치는데, 여직원이 수줍게 웃으며 물었다.
"혹시 혼자 오셨어요?"
"네. 혼자 오면 안 되나요?"
"아뇨. 혼자서도 많이 오세요. 어차피 게임할 땐 서로 매칭을 시켜 인원을 맞추니까요."
"그렇군요."
도훈이 직원을 가슴께를 쳐다보았다.
금속판으로 된 명찰엔 '신성희'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신성희씨?"
"네?"
"혹시 바에서 할 수 있는 게임도 있나요?"
"네, 물론입니다. 혹시 어떤 게임을 원하시나요?"
성희라는 이름의 직원이 생글거리며 물었다. 상업적인 미소인지, 아니면 도훈에게 대한 호감 표시인지 모르지만 시종일관 웃는 얼굴이었다.
"딜러랑 일대일로 할 수 있는 카드 게임이요."
"음···. 아쉽게도 카드 게임 중에선 일대일은 없어요. 아니면 다이스 게임은 어떠세요?"
"다이스 게임이요? 주사위?"
"네. 잠시만요."
성희가 허리를 숙이더니 밑에서 바닥 매트와 주사위 두 개, 그리고 불투명 컵을 하나 꺼냈다.
"룰은 아주 단순해요. 일종의 홀짝 게임인데, 주사위 두 개를 굴려서 그 합이 홀수 인지 짝수 인지 맞추시면 베팅한 칩만큼 제가 드리는 거예요. 배팅 상한은 최대 5개고요."
"흐음, 그럼 50% 승률 아니에요?"
도훈이 의문을 제기했다. 통상 카지노는 공평한 게임을 하지 않는다. 정교한 설계를 통해 단 1%라도 딜러 측이 유리한 확률을 미리 만들어 놓는 것이다. 그리고 그 미세한 차이로 카지노는 연간 수백만 달러의 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그렇죠. 대신 한가지 규칙이 있어요."
"뭔데요?"
"제일 높은 숫자 조합인 6,6이 나올 경우 무조건 바텐더에게 술을 한잔 씩 사는 규칙이에요."
"흐음."
[주인님, 방금 계산해 봤는데 이건 사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