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6. 빌드 업-41-
* * *
태오의 특명을 받은 나는 오늘부로 작업조에 합류했다.
헌팅을 전담하는 작업조에는 나 이외에도 윤재라는 녀석이 한 명 더 있었는데, 윤재는 본래부터 솔로 플레이를 선호한다하여 나 역시 자연스럽게 혼자 다니게 되었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더는 눈치 볼 사람이 없다는 점은 다행이었다.
'근데 대학생을 어디 가서 꼬신다?'
[역시 국성대 캠퍼스가 제일 만만하지 않겠습니까? 거긴 주인님 나와바리니까요.]
'국성대는 안 돼. 설사 일이 잘 풀려도, 결국엔 내 정체가 탄로 나고 말잖아. 재학생이 호빠 선수라는 소문이 퍼졌다간 곤란하니까.'
[흐음, 그것도 그렇군요. 마지막에 입막음을 한다고 해도, 주변에 보는 눈이 너무 많으니까요. 아니면 어제 서원처럼 헌팅 포차는 어떻습니까?]
'헌팅 포차가 보통 저녁에 열지? 지금이 오후 2시니까 그때까지 죽치고 있긴 너무 따분한데.'
어떻게든 여자가 많이 모이는 장소를 찾아야 했다. 동시에 헌팅을 쉽게 받아 줄 수 있는 오픈 마인드의 여성 비율이 높은 곳.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술집이나 클럽 이상은 떠오르지 않았다. 길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무턱대고 번호를 물어보는 것은 누가봐도 성공률이 낮은 방식이다.
[근데 주인님은 굳이 상대가 오픈마인드의 소유자가 아니더라도 상관없지 않습니까?]
'그건 왜?'
[주인님이 바로 인간 오프너잖습니까? 주인님의 유혹을 거부할 수 있는 여자는 별로 없지 않을까요?]
인간 오프너라는 신박한 표현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니 그렇네? 나한테 장소와 대상이 무슨 상관이겠어? 그냥 꼬시면 끝인데.'
마음을 바꾼 나는 시내를 돌아다니다 우연히 대형 서점을 발견했다. 최근 들어 독서인구가 급감하면서 많은 서점들이 자취를 감추었지만, 여전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서점들이 있었다. 오히려 지금까지 남은 서점들은 망한 서점들의 수요까지 흡수하면서 과거보다 더 큰 규모로 확장한 곳도 있었다.
입구에 선 도훈이 통유리창을 통해 내부를 확인했다. 빌딩 두개층을 통째로 임대할 만큼 규모가 크고 유동인구가 많은 곳이었다.
특히 젊은 여성의 비율이 유독 높았고, 심지어 혼자 다니는 여성들도 많았다.
동시에 남자인 내가 드나들어도 딱히 어색하지 않았다.
'찾았다. 최적의 헌팅 장소, 흐흐.'
난 곧바로 서점에 들어가 사냥감을 물색했다.
내가 찾는 사냥감은 평범한 대학생이 아니다. 기왕이면 닳고 닳은 여자일수록 좋았다. 하지만 그런 여자들이 굳이 휴일에 서점을 찾아올리는 만무했다. 아무래도 책을 사러 오는 여성들은 대다수가 지적인 것을 선호하는 타입이거나, 최소한 그렇게 보이고 싶은 허영심 많은 여자들이 상대적으로 많았기 때문이다.
옥석을 가리기 힘든 와중에 잠시 멈춰서서 해결방안을 고심했다.
'흐음. 대학생으로 보이는 애들은 제법 있는 것 같은데, 이중에서 발랑 까진 애들을 고르는게 쉽지 않네. 정보창으로 일일이 확인해 봐야 하려나?'
[정보창엔 횟수 제한이 있습니다. 그나마 일전에 스킬 업그레이드를 시켜놓아 동시에 두 명까진 가능하지만, 쿨타임까지 고려 시 시간당 최대 4명이 한계입니다.]
'흐음. 4명이라. 그럼 정보창 대신에 다른 기준으로 선별을 해봐야 겠군.'
나는 인벤토리에서 스리사이즈 스카우터를 꺼냈다. 스카우터는 그 형태와 색상을 원하는 대로 변경가능했는데, 이번엔 평범한 뿔테 안경 타입을 설정했다.
[그건 왜 꺼내십니까?]
'몸매로 거름망을 설치할 생각이야.'
[몸매요? 발랑까진 여자를 찾는 다지 않았습니까?]
'그래. 그러니까 몸매 좋은 여자를 찾는 거야.'
[어떤 과학적 근거가 있나요? 마치 몸매 좋은 여자는 모두 발랑 까졌다는 말처럼 들리는데요?]
'아무래도 그럴 개연성이 높지.'
[왜요? 그건 주인님의 편견 아닙니까?]
'아니야. 들어봐. 몸매 좋은 여자가 인기가 많겠어, 아니면 밋밋한 여자가 인기가 많겠어?'
[굳이 뽑으라면 전자죠.]
'그치?'
[하지만 인기가 많다는 것과 발랑 까진 것의 상관 관계는요?]
'인기가 많으니 남자들에게 고백도 많이 받았을 거고, 통념상사귄 남자 친구의 숫자와 성관계의 횟수는 비례하는 게 일반적이지?'
[흐음, 그렇겠네요.]
'그리고 성관계를 많이 해본 여성일수록 섹스에 익숙하거나 혹은 섹스 자체를 좋아할 확률도 클거고.'
[주인님의 논리는 일견 모순이 없어 보이지만, 몸매가 좋은데도 발랑 까지지 않은 여성들도 많다는 점에서 쉽게 논파가 가능합니다.]
'맞아. 이건 허술한 논리야. 하지만 적어도 비약은 아니지.'
[왜요?]
'몸매 좋은 여자들이 모두 발랑 까진 건 아니겠지만, 빈약한 애들은 절대로 까질 수가 없으니까.'
[아···.]
'어차피 도박을 걸어야 한다면 기왕이면 몸매 좋은 여자 중에서 찾는게 낫다는 거야.'
[한데 왜 발랑까진 여자 중에서 고르시는 겁니까?]
'이건 어떻게 보면 일종의 함정수사와 같아. 따라서 놈들의 표적이 된다는 것은 굉장한 위험부담을 감수해. 결국엔 진짜로 섹스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거야.'
[흐음.]
'그럴거면 차라리 섹스라도 밝히는 여자쪽이 낫지 않겠어? 처녀를 꼬셔다가 놈들의 제물로 바칠 순 없는 거니까. 아무리 범죄자를 잡겠다고 나선 거라도, 무고한 피해자를 만들 순 없잖아.'
[주인님은 벌써 거기까지 생각하셨군요.]
'어차피 발랑 까진 애들한테 호빠 선수와 섹스하는 일은 어쩌다 벌어질 수 있는 해프닝 정도일 거야. 결과적으로 나는 함정수사가 진행되더라도 최대한 타격이 적을 대상을 찾고 있는 거고.'
[이제 이해가 완전히 되었습니다.]
안경 타입으로 변한 스카우터를 착용한 나는 가판대에 올라간 서적을 손에 들고 아무 페이지나 펼친 다음, 책을 훑어보는 척 하면서 주변에 있는 여자들의 몸매를 하나씩 스캔했다.
<30-27-32>
'저 여자는 가슴은 작고 허리가 너무 통짜군. 패스.'
<32-26-29>
'이쪽은 엉덩이가 너무 납작 엉덩이네. 육안으로 봐도 볼품없군.'
<40-35-42>
'저 사람은 나보다 무거운 거 아니야? 어우, 다이어트나 좀.'
<29-25-32>
'아니, 영혼까지 끌어 모은 거야, 뽕브라 기술이 발달한 거야?
겉보기 등급은 C컵인데, 실제론 절벽이잖아? 스카우터로 안 봤으면 속을 뻔.'
<34-26-35>
'음? 이건?'
주변을 둘러보던 나는 마침내 눈에 띄는 비율의 여성을 찾을 수 있었다.
베스트셀러 가판대 앞에 서 있는 묘령의 여성이었는데, 스스로의 몸매에 자신이 있는지 짧은 체크 무늬 치마로 각선미를 훤히 드러내고 있었다.
'호오, 마스크도 그런대로 쓸만하고.'
눈에 띄는 미인까진 아니었지만, 몸매가 워낙 뛰어나 굳이 스카우터가 없어도 바로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다만 내가 굳이 스카우터라는 보험을 든 이유는, 가슴 뽕이 너무 사기적이라 뽕브라 여성을 걸러내기 위한 장치였다.
[타깃을 정하셨습니까?]
'한번 가보자.'
[정보창도 안 보시고요?]
'일단 한 번 멘트 날려서 반응부터 보려고.'
[설마 아까 점심 시간에 점원에게 번호따는 게 성공했다고 막 자신감 넘치시는 건 아니죠?]
'왜? 그러면 안 되나?'
[주인님. 솔직히 이런 말씀 드리긴 그렇지만 아까 멘트는 정말 구렸습니다. 얼굴이 9할이고, 목소리가 3할이었다는 뜻입니다.]
'어째 합계가 100프로가 넘는것 같은데?'
[당연하죠. 주인님의 구린 멘트가 마이너스 20이었으니까요.]
'뭐 인마? 막말 쩐다 지금?'
[제 말씀은 그만큼 구렸다는 뜻입니다.]
'장난해? 로시 네가 날 우습게 보는데, 다시 한 번 내 화술을 증명시켜야 믿겠어?'
[저라면 말리고 싶군요. 그냥 정보창 확인하시고 정석대로 가십시오.]
'아니. 다이렉트로 간다.'
난 책을 펼쳐 읽고 있는 묘령의 여성에게 다가갔다.
큰 키에 존재감이 넘치는 내가 가까이 붙자, 책을 읽고 있던 여성이 나를 의식하며 책을 덮었다.
"?"
"혹시 피카츄세요?"
"네?"
"제 심장이 방금 찌릿했거든요."
"미친···."
여자는 불쾌한 표정을 짓더니 갑자기 읽고 있던 책을 가판대에 내려놓고는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뻘쭘해진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구석으로 도망쳤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대체 뭐하는 짓입니까?]
'이게 어떻게 안 통할수가 있지? 피카츄를 모를 수가 없는데?'
[그게 진심으로 통할 거라고 믿으신 겁니까?]
'혹시 안경 탓인가?'
[네?]
'아니 평소랑 달라진 점은 이 뿔테 안경 밖에 없잖아. 그러고보니까 남자가 안경 쓰면 찐따처럼 보인다고 하던데.'
[무슨 소립니까? 언제는 뿔테 안경을 쓰면 지적으로 보인다면 서요?]
'아니야. 이건 분명 안경 탓이야.'
나는 곧바로 스리사이즈 스카우터는 벗어서 인벤토리에 처박았다.
'안되겠다. 일단 몸매고 뭐고 어리고 예뻐보이면 들이대본다.'
[또 시도하시려고요?]
'내 멘트가 구리다는 걸 도저히 인정할 수 없어.'
[고집이 너무 세신 거 아닙니까? 주인님도 틀릴 때까 있습니다.]
'한 번만 더 해보고.'
오기가 생긴 나는 또 다시 사냥감을 물색했다.
확실히 여자가 많은 곳이다보니, 금방 괜찮은 대상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 이번에도 심혈을 기울여 멘트를 준비한 나는 여자에게 다가갔다. 안경을 벗었으니, 내 얼굴은 잘생김이 잔뜩 묻어있을 것이다.
"저기 혹시 어디서 타는 냄새 안나요?"
"예? 어디에요?"
"우리 썸타는 냄새."
"······."
여자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더니 나에게 비수를 꽂았다.
"와, 진짜 얼굴이 아깝네요. 그럼 수고하세요."
"자, 잠시만요."
"저 남친 있거든요? 귀찮게 하지 말아줄래요?"
또 다시 헌팅에 실패한 나는 그제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로시, 혹시 호감도 버프 저번처럼 꺼둔 거 아니지?'
[아뇨. 풀로 개방한 상탭니다.]
'혹시 오늘 내 패션이 구린가?'
[아뇨. 그냥 평범한 대학생처럼 보입니다.]
'혹시 너무 평범한 거 아니야?'
[언제는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면서요? 주인님 얼굴 상태는 지극히 정상입니다.]
'그럼 대체 왜 그런 거야? 내가 여자한테 까이다니? 이게 말이 돼? 나 이도훈이라고!'
[설마 주인님을 연예인이라고 착각하시는 겁니까? 당연히 주인님도 까일 수 있죠. 세상 모든 여자들이 주인님같은 남자가 취향인 것도 아니고요.]
나는 현실을 부정하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방금은 분명 남자 친구가 있어서 그런 걸거야.'
[골키퍼 있어도 헤트트릭도 가능하다고 주장하시던 분은 주인님이셨습니다.]
'리그 득점왕도 때론 컨디션 난조일때가 있지.'
[설마 또 구린 멘트로 시도하시려는 건 아니죠?]
'이번에 안되면 진짜로 포기할게.'
[주인님의 고집은 누구도 못 말리죠. 맘대로 해보십시오.]
'남자는 삼세판이라고 하잖아. 이번엔 진짜 마지막이야.'
[뉘에, 뉘에.]
한 번 더 타깃을 찾았다.
멀지 않은 곳에 또 다른 미인이 보였다.
앞선 여자들보다 나이가 살짝 많아 보였지만, 이젠 대학생이 아니더라도 상관없었다. 내 헌팅 실력을 객관적으로 확인해보고 싶은 생각 뿐이었다.
여자 옆으로 자연스럽게 다가가더니 옆 모습을 오랫동안 응시했다.
여자가 의식했는지 고개를 돌려 나에게 물었다.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
"아뇨. 질문이 하나 있어서요."
"질문요?"
"혹시 쌍둥이 자매 있으세요?"
"예? 아뇨?"
"그럼 그쪽이 세상에서 제일 예쁘시겠네요."
"풉-!"
여자가 처음으로 웃었다.
그러더니 나를 향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저기요, 이거 몰래 카메라죠?"
"네? 아닌데?"
"에이, 다 봤어요. 여자들 작업하는 영상 몰카 찍어서 너튜브에 올리시려는 거잖아요."
"진짜로 아닌데요?"
"카메라 저기 숨어 있나? 저쪽 맞죠?"
"아니 진짜로···."
"장난 치지 마세요. 저 얼굴 팔리는 거 싫어하니까 제 영상은 올리지 말아주세요. 이거 부탁하는 거 아니에요? 초상권 침해 하면 안되는 거 아시죠?"
"그게 아니라···."
"풉-. 그래도 재미는 있었어요. 멘트가 구리니까 다른 걸로 바꿔봐요. 그럼 이만."
결국 마지막 여자도 내 구린 멘트를 비난하며 떠나갔다.
나는 머리를 감싸쥐며 좌절했다.
'흐흑! 로시 네 말이 맞았어. 난 멘트 쪽은 영 꽝인거 같아.'
[그러게 왜 쓸데없는 고집을···. 주인님은 그냥 옆에 서서 입을 다물고 있는게 훨씬 성공 확률이 높을 겁니다.]
'그러게 말이야. 멘트를 날릴 때마다 오히려 역효과가 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