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4. 빌드 업-39-
서원은 여자가 옆에 있어서 그런지 쓸데없이 허세를 부렸다. 바로 사과를 한 것을 보고 나를 얕잡아 본 것이 분명했다. 하여간 이게 문제다. 사람이 사과하면 받아줄줄 모르고 오히려 큰소릴 친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받아쳤다.
"···그럼 뭐? 엎드려 절이라도 할까?"
"뭐 새끼야?"
"죄송하다고 했잖아. 근데 더 어쩌라고?"
일부러 언성을 높이며 시비를 걸자 서원도 발끈했는지 갑자기 주먹을 쥐었다. 막 헌팅한 여자가 옆에서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흥분한 것 같았다. 강한 남자인척 하고 싶은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애석하게도 상대를 잘못 골랐다.
"이 새끼가 진짜!"
"왜? 한 대 치시려고?"
"내가 못 칠 줄 알고?"
서원이 갑자기 주먹을 휘둘렀다. 이 순간만 기다렸던 나는 놈의 면상에 스트레이트를 꽂아 버렸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카운터펀치였다.
퍼억-!
얼굴이 짓뭉개진 서원이 저만치 날아가더니 한방에 기절했다.
나는 떨고 있는 여학생을 향해 말했다.
"그쪽 남자친구가 먼저 나 치려는 거 봤지? 이거 정당방위다?"
"···예, 예?"
나는 그 말을 마치고 재빨리 몰려드는 인파들 사이를 빠져나왔다. 아마 얼굴을 다친 서원은 한동안 작업조 일을 접어야 할 것이다. 분명 코뼈가 부러졌을 테니까. 더 심하면 안와골절의 가능성도 있었다. 어찌됐건 좆된 것이다.
'후후, 시우에 이어서 서원이까지 쓰러졌으니 이제 작업조가 더 필요하겠지?'
난 휘파람을 불며 집으로 돌아갔다.
* * *
"뭐가 어떻게 됐다고? 이런 씨발, 진짜!"
태오가 화를 못 참고 핸드폰을 집어 던졌다.
콰직-!
벽에 부딪힌 핸드폰 액정이 박살났다. 태오가 분을 못 참고 씩씩거리자, 그의 옆에 앉아 있던 휘겸이 물었다.
"무슨 일인데 그러세요?"
"서원이 이 새끼 병원에 실려갔단다. 아오, 진짜."
"네? 왜요?"
"몰라. 길가다 시비가 붙었는데, 흠씬 두들겨 맞은 모양이야.
응급실에서 조치 받고 잠깐 통화하는데 얼마나 처맞았는지 말도 제대로 못 하더라고."
"진짜요? 서원이 나름 일진 출신 이라지 않았나?"
"일진은 무슨. 양아치 새끼지. 자기 말로는 세 놈이 갑자기 둘러쌌다는데?"
"세 놈이나요?"
휘겸이 잘생긴 얼굴을 찌푸렸다.
미간을 찡그렸음에도 잘생김은 여전했다.
"하-. 엊그제 시우도 난데없이 교통사고를 당하지 않나, 이번엔 서원이가 엄하게 두들겨 맞질 않나, 요새 마가 끼었나 진짜."
"누군가 저희 조직을 노리고 의도적으로 시비를 거는 건 아닐까요?"
"서원이 말로는 그런 건 아닌 것 같대."
"아니라고요?"
"나도 혹시나 싶어 물어봤는데, 그건 절대 아니라더라고."
"세 놈이라면서요?"
"몰라. 세 놈이랑 동시에 싸웠는지, 그 중 한놈한테만 얻어 맞은 건지. 내가 볼 땐 그냥 헌팅하다가 임자 있는 여자를 잘못 건드린게 아닌가도 싶고. 그러니까 눈치 보고 들이대라니까."
"지금 상태는 어떤데요?"
"코뼈가 완전히 내려 앉았단다. 앞니도 흔들거리고."
"헐. 그럼 수술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해야지. 코 수술이면 붓기 빠지는데만 한달은 족히 걸려. 코가 그 정도면 눈탱이도 밤탱이 됐을 걸."
실제로 미용 성형을 해 본 태오는 당분간 서원이 작업조에서 이탈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면상으로 여자를 꼬실 순 없는 노릇이다.
휘겸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태오 형. 시우도 없는 마당에 서원이까지 빠지면 저희도 힘들어요."
"알지. 이걸 어떻게 한다. 누구 하나 더 뽑아서 올려야 할 것 같은데. 휘겸이 네가 볼때 준후는 어때?"
"준후요? 솔직히 저도 걔랑 친구긴 한데, 준후는 이런 일 할 위인이 못 돼요. 담도 작고, 막말로 그 정도 와꾸가지고 헌팅이나 가능하겠어요?"
"왜? 서원이도 막 잘생긴 편은 아니지 않나?"
"서원이는 키라도 180 넘죠. 준후는 170 겨우 넘고요. 여자들이 남자 키를 얼마나 많이 보는데요? 더구나 헌팅이면."
"그럼 한결이는? 한결이는 적당히 크잖아."
"그 형은 이제 은퇴할 나이죠. 게다가 맨날 도박에 찌들어 있는 데, 일이나 제대로 하겠어요? 형도 알다시피 한결이형은 사람은 좋은데 워크 에식이 영 아니잖아요. 믿고 못 맡겨요."
태오가 계속 고민하자 휘겸이 제안했다.
"맞다. 신참 있잖아요. 시우가 추천한. 걔 시키면 되겠네."
"신참?"
"시우가 자기 대타로 보낸 거라면서요? 이미 다 알고 온 거 아니에요?"
"알고 있지. 나도 대충 귀뜸은 했으니."
"근데 왜 안 써요? 딱 적임자 같은데."
"고작 이틀 밖에 안 된 애를 바로 투입 하자고? 걔를 얼마나 봤다고?"
휘겸이 태오를 설득했다.
"형. 저도 어제 만나봤는데, 와꾸도 와꾸지만 애가 눈치도 빨라 보이더라고요. 일 잘할 것 같던데."
"그래도 이런 일에 못 믿을 사람 쓰는 건 좀 아니지. 아무리 시우가 추천했다고 해도 한달은 조용히 지켜봐야지 않겠냐?"
"보통은 그렇지만 지금은 돌발 상황이잖아요. 저랑 창민이 형이랑 안에서 어떻게든 작업한다고 해도, 밖에서 물어올 사람이 한 명밖에 없는데. 헌팅에 성공한다고 호빠로 유인하는 게 맨날 성공하는 것도 아니고요."
"물론 그렇긴 한데···."
태오는 계속 고민하는 눈치였다.
지금 일하는 작업조들은 최소 자기와 함께 1~2년 이상 함께했던 동료였다.
이제껏 쌓아온 신뢰가 있었고, 이 일의 위험성 역시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불쑥 들어온 이틀 된 신참을 바로 투입시키기에는 리스크가 너무 크다고 판단했다.
"혹시 신참 신상은 확인했어요?"
"어. 오늘 서류 받아 놨어. 소속 대학 재학증명서랑, 가족관계 부까지."
"별 이상 없죠?"
"어. 나한테 말했던 그대로야."
"에이, 그러면 뭘 망설여요. 수틀리면 확···. 지도 눈치가 있는데 배신이라도 하려고요."
"물론 그렇긴 한데···."
"일단 정 불안하시면 밖에서 낚시조부터 맡겨 보세요. 헌팅만 해오라고."
"헌팅만?"
"그쵸. 어차피 위험한 작업은 저랑 창민이 형이 다 하잖아요.
술에 약타고, 영상 찍고, 한 바퀴 돌리는 건 저희가 안에서 다 할 테니까 밖에서 여자애들 낚아오라고만 시켜요. 만약 문제 생겨도 호객행위한 정도니까 상관없잖아요. 그게 불법도 아니고."
"흐음. 듣고보니 그것도 나쁘진 않겠는데."
"신참 지금 어딨어요? 제가 직접 만나서 슬쩍 귀뜸해 볼게요.
영 아니다 싶으면 다른 애들 중에서 찾아보고요."
"지금 여기 없어."
"오늘 출근 안 했어요? 불금인데?"
"그게 아니라, 제일 먼저 출근했는데 갑자기 설사를···. 아무튼 배탈나서 집에 갔어."
"배탈이요?"
"혹시 화장실에서 냄새 안나던?"
"아··· 설마 그게."
"여튼 오늘은 집에 돌아 갔으니 안 될것 같고, 내일 출근할 때 내가 물어볼게."
"출근하고선 너무 늦죠. 어차피 내일 토요일이니까 점심 쯤 부르세요. 여자애들 물어 오라고."
"인마. 넌 오늘 작업이나 신경 써. 애들 곧 가게 온다더라."
휘겸이 웃으며 대답했다.
"형. 저 못 믿어요? 저 휘겸이예요. 제가 실패하는 거 봤어요?"
"알지. 구씨형님이 안 그래도 너 따로 챙기라고 하더라."
태오가 씩 웃으며 책상 서랍을 열더니 두툼한 봉투를 꺼내들었다.
"옛다."
"아이고, 뭘 이런걸 다."
"저번 주 작업했던 거, 인센티브다. 결국 버티다가 오피 출근하기로 했대."
휘겸은 봉투를 열어보더니 오만원 짜리가 두둑히 들어있는 걸 보고 입을 헤벌쭉 벌렸다.
"감사합니다. 번번이 이렇게 챙겨주시고."
"나 말고 구씨 형님한테 감사해. 형님이 또 돈계산 깔끔하잖아.
성과만 내면 인센티브는 확실히 챙겨준다."
"제가 이 맛에 애들 작업한다니까요?"
"언제는 순진한 여대생 따먹는 재미로 한다며?"
"흐흐. 처음엔 그랬죠. 근데, 재미도 보고 돈도 버니까 더 좋더라고요."
태오가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하여간 이 새낀 생긴거랑 다르게 존나게 나쁜 새끼라니까? 니가 창민이 보다 더 독한 새낀 거 알지?"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그래. 아무튼 신참한테는 내가 내일 따로 만나서 얘기해 볼게. 말이 좀 통했으면 좋겠는데···."
"잘 될거예요. 느낌 있던데 저는."
"그랬냐? 나도 사실 애가 괜찮은 것 같더라고. 맞다, 신참 어제 개시하자마자 2차 나간건 들었지?"
"풉-. 2차는 그냥 마음만 먹으면 나가는 거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나중에 애들한테 들으니까 여자 손님 2명을 동시에 데리고 나갔다던데?"
"스리섬을 했다고요?"
"그렇다니까? 그것도 너 콩순이 알지? 걔 친구 두 명 데리고."
"콩순이면 쩜오 뛰는 애들 아니에요? 그 진상이라는?"
"어. 듣고도 믿기지 않더라."
태오가 계속 도훈을 칭찬하자 휘겸의 표정이 살짝 구겨졌다.
에이스를 자처하는 그로서는 도훈의 활약상을 듣는 것이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하늘 아래 태양이 두개 일 순 없었다.
"암튼, 오늘 약이나 잘 쳐봐."
태오가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액상형 감기약처럼 생긴 플라스틱 통 안에는 푸른 액체가 들어있었다. 여자를 작업할 때 쓰는 마약류 물뽕이었다. 휘겸이 재빠르게 물약을 챙겼다.
"걱정 붙들어 매세요. 오늘도 작품하나 제대로 만들어 볼게요."
"그래, 휘겸아. 너만 믿는다, 우리 에이스."
휘겸은 태오와 대화를 나누면서도 계속 도훈을 의식했다.
'···첫날부터 스리섬을 성공해? 이 새끼 같이 한 번 룸에 들어가 보고 싶네. 갑자기 실력이 궁금해지는데?'
* * *
조기 퇴근한 도훈은 모처럼 한가한 금요일 저녁을 보냈다.
매일 쉬지 않고 달려온 그에게는 꿀맛 같은 휴식이었다.
12시가 되기도 전부터 잠이 든 그는 다음날 10시까지 늘어지게 늦잠을 잤다.
평소라면 새벽내내 여자를 껴안다가 아침에 번쩍 눈을 떴을 테지만, 간만에 푹 잠을 자서 그런지 컨디션이 풀로 회복되었다.
"흐아아암~!"
늘어지게 기지개를 편 도훈이 침대에서 일어났다가 시간을 확인하고 놀랐다.
'어랍쇼? 내리 10시간을 잔 거야?'
[네. 간만에 길게 주무시더라고요.]
'이상하네? 무공을 익힌 이후로 잠을 4시간 이상 자본 적 없는 것 같은데?'
[평소엔 늘 긴장 상태라서 그렇습니다. 최소한의 피로만 회복하고 곧바로 잠을 깰 만큼요.]
'내가 그렇게 긴장하고 살았다고? 정말?'
[심적인 긴장도 있지만, 할 일이 많으시니 시간을 쪼개 쓸 수밖에 없으셨죠. 그러다 보니 계속 각성상태가 유지된 거고요. 내 공 순환으로 육체적 피로는 풀리지만, 정신적인 긴장이 계속 해소되지 않는 것이죠.]
'그렇군. 암튼 푹 잤더니 오늘 컨디션 엄청 좋은데?'
도훈이 발딱 꼴려 있는 대물을 보며 생각했다. 모닝 발기가 건강한 남성의 대표적인 현상이라지만, 그의 물건은 추리닝 바지를 뚫고 나올 것처럼 풀발기된 상태였다.
[그간 쌓인 양기가 배출되지 못해 고인 것 같습니다.]
'휴, 이걸 또 언제 푼다.' 도훈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마침 문자가 도착했다.
인벤토리에 넣어두었던 대포폰이었다.
'누구지? 최번개 한테 뭘 지시한 기억은 없는것 같은데?'
도훈이 폰을 꺼내 내용을 확인하는데, 새끼 마담 태오의 연락이었다. 신분을 감추기 위해 대포폰 번호를 알려줬더니 그쪽으로 연락이 온 것이다.
-조태오 : 배탈 난 건 좀 어때? 오늘 시간되면 점심이나 같이 먹을래?
도훈이 문자를 확인하자마자 씩 웃었다.
출근시간도 아닌데, 조태오가 연락했다는 것은 그의 계획이 통하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드디어 나를 찾는군.'
[주인님을 포섭하려고 부르는 것이겠죠?]
'그렇겠지. 정확한 건 가봐야 알겠지만.'
도훈이 답장을 보내자 태오가 약속 시간과 장소를 알려왔다.
스마트 폰으로 위치를 확인해 보니, 굉장히 값비싼 한정식 집이었다.
'비싼 음식으로 나를 꼬셔 보겠다는 건가? 유치하긴.'
도훈이 채비를 갖추고 태오와 약속한 식당으로 향했다. 일부러 출근 복장이 아니라, 평범한 대학생처럼 옷을 입었다.
고급 한정식집이라 그런지 가게 입구부터 전통 한옥 대문이었다. 내부도 개량 한옥과 같은 구조였는데, 테이블 없이 모두 룸으로 나뉘어진 게 인상적이었다. 식당에 들어가 태오의 이름을 말하자,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직원 아가씨가 수줍게 웃으며 방으로 안내했다.
[점원분이 주인님한테 반한 거 같은데요? 계속 힐끔거립니다.]
'하여간 이놈의 인기란.'
"이쪽 방입니다. 그럼 즐거운 시간 되세요."
"네, 감사합니다."
도훈이 가볍게 목례하고 방문을 열자 정장을 차려입은 태오가 음식을 차려놓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 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