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1. 빌드 업-36-
"돈? 좋지. 막말로 어떤 알바가 이렇게 쉽게 돈을 버냐? 여자랑 떡도 실컷 치고 돈도 많이 벌고. 서준이 넌 솔직해서 마음에 드네."
"감사합니다."
"떡볶이도 좀 먹어. 난 이 집 떡볶이가 그렇게 맛있더라."
"네."
휘겸은 대화 내내 계속 생글거렸다. 어찌 보면 수다쟁이 같기도 하고, 또 달리 보면 신참이 도훈을 배려하려고 일부러 계속 말을 거는 것 같기도 했다.
[휘겸도 소위 작업조에 속하는 인물일까요? 이렇게 봐서는 상당한 호인처럼 보이는데요.]
'사람을 겉모습만 보고 판단할 순 없지. 오히려 저런 놈들이 나중에 꼭 뒤통수를 치더라고.'
그때 누군가 선수 대기실을 노크하고 들어왔다. 또 다른 웨이터였다.
"휘겸이 형님. 지금 2번 룸으로 들어오시랍니다."
떡볶이를 먹다 말고 휘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이고, 벌써 예약 손님 왔나 보네. 나 그만 일하러 가야겠다."
"다 먹고 가지. 저녁도 못 먹었다며?"
"나 보러 온 손님을 기다리게 할 순 없지. 아무튼, 다들 고생해. 아, 그리고 신참."
"네?"
"다음에 기회 되면 같이 호흡 한 번 맞춰보자. 왠지 너랑 일하면 재밌을 것 같다."
"제가 더 영광입니다."
"푸핫-. 그래."
휘겸이 나간 후 도훈도 준후에게 인사하며 가게를 나섰다.
"형, 저도 오늘 이만 퇴근할게요."
"먼저 들어가게? 하긴 두 명을 동시에 상대했으니 많이 피곤하겠네. 푹 쉬고 내일 보자."
"내일은 몇 시까지 출근하면 돼요?"
"8시 오픈인데 적당히 9-10시 사이로 오면 될 거야. 초이스는 그때가 제일 많이 들어오니까. 참고로 내일은 금요일이라 사람 좀 바글바글할 걸. 원래 오늘 같은 평일이 제일 손님 없는 날이거든."
"네. 그럼 수고하세요."
"엉."
첫날 일정을 무사히 마친 도훈은 차에 올라 집으로 향했다.
[음주 운전 아닙니까? 단속에 걸리면 어쩌시려고요.]
'아까 양주 먹은 건 다 흘려보냈어. 몸 안에 한 방울도 알코올 기운 없을걸?'
[맞다. 주인님은 술에 면역이시죠?]
'그나저나 태오가 날 작업조에 언제 투입 시켜 줄까?'
[신원을 확인하고 나서부터 아닐까요?]
'그러고 보니 가족관계부까지 요구하는 건 좀 악질적이네.'
[왜요?]
'거기에 집 주소랑 가족관계 싹 다 나오잖아. 배신하면 집으로 찾아가서 가족한테 해코지해 버리겠다는 무언의 협박이나 마찬가 진데.'
[그래서 시우가 그렇게 겁을 냈군요. 괜히 범죄 행위를 불었다가 자기 가족까지 위험해질 수 있으니까요.]
'어차피 나는 조작할 거니까 상관없지. 이럴 때 번개의 도움이 필요하겠군.'
도훈은 새벽 3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임에도 무턱대고 번개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포폰으로 전화를 걸자 몇 번의 신호음이 울리더니 번개가 전화를 받았다.
-행님?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십니까?
"넌 잠도 없냐?"
본인이 깨워놓고 뻔뻔한 도훈이었다.
-아닙니다. 막 선잠 들었다가 깼습니다.
"미안. 급한 일이라. 공문서 위조 좀 부탁하려고. 내일까지 꼭 필요해."
-공문서라뇨? 혹시 여권입니까? 그건 시간이 좀···.
"아니. 가족관계부랑 대학 재학증명서. 아, 그리고 보건증 같은 것도."
-잠시만요. 내용이 많아서 메모를 좀 하겠습니다.
도훈은 이정우라는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냈다. 나이가 몇 살이며, 가짜 주소와 가짜 가족들 이름, 그리고 지방대의 전공까지.
"보건증은 성병 검사지까지 포함해서 하나 끊어줘."
-알겠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 것 같아?"
-정교하게 위조하려면 내일 오후쯤 가능합니다. 동사무소 직원이 봐도 감쪽같이 속을 겁니다.
"그래. 준비되면 연락해. 사람 하나 보낼게."
-행님 밑에서 일하시는 분인가요?
"아니. 그냥 퀵서비스 기산데."
-그건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요?
"걱정은 안 해도 돼. 개인적으로 친한 사람이니까."
-넵, 더 필요한 게 있으시면 지금 알려주십쇼.
"아냐. 용건은 끝났어. 늦은 시간 미안하다. 다시 자라."
-행님이 필요하실 땐 언제든 콜 하십시오. 저는 24시간 대기 중이니까요.
"너 혹시 심야 할증으로 받냐?"
-엇, 이번 건은 그럼 그냥 평시 요금으로 받겠습니다.
그 와중에 돈 계산이 철저한 최번개를 보며 도훈이 속으로 웃었다.
"됐어. 추친비 아끼지 말고 팍팍 써. 대신 일 처리만 깔끔하게 하라고."
-맡겨 두십시오. 보안은 목숨 걸고 지키겠습니다.
"그래."
도훈이 전화를 끊으며 생각했다.
'역시 번개는 입이 무거워서 좋다니까.'
[입이 무겁다뇨?]
'방금 위조하라는 공문서 용도에 관해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잖아. 어디에 쓰이는지 분명 궁금했을 텐데 말이야. 조폭이 무슨 재학증명서에 보건증까지 필요하겠어?'
[하긴, 그렇군요.]
집으로 돌아간 도훈은 내일을 기다리며 잠을 청했다.
* * *
다음날 오후 수업을 마친 도훈은 후배들의 눈을 피해 빠르게 학교를 빠져나왔다.
혹시나 자기가 복귀했다는 사실을 알고 누군가 접근하면 일정이 꼬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학교 밖으로 무사히 빠져나온 도훈은 곧 번개에게 연락을 받았다.
-최번개 : 행님, 말씀하신 것 준비 다 끝났습니다.
-이도훈 : 오케이. 내가 20분 안으로 퀵 보낼게. 혹시 내용물이 뭔지 물어도 대답 말고 서류만 건네. 위치는···.
접선 장소를 정한 도훈은 곧바로 퀵 배달을 하는 채이의 개인 폰으로 연락했다. 전화를 받은 채이의 목소리에 바람 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혹시 배달 중이야?"
-아니, 끝내고 돌아가는 길. 근데 무슨 일이야?
"나 물건 하나만 가져다 달라고. 퀵 요청이야."
-설마 또 마약이야?
"뭐, 비슷해."
채이는 농담으로 알아듣고 피식 웃었다.
-어디로 가면 되는데?
도훈이 접선 장소를 알려주자, 채이가 알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이상하군요. 채이양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부탁을 들어주다니. 처음엔 의심스러워서 퀵도 안 받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땐 나랑 자기 전이고. 지금하곤 상황이 다르지.'
[어떻게 다르죠?]
'그땐 내가 누군지도 모르니까 귀찮은 일에 휘말리지 않겠다는 심정이었겠지.'
[지금은요?]
'설사 내가 진짜 범죄자라도 상관없다는 마음?'
[주인님을 그 정도로 신뢰한다고요?]
'이건 신뢰가 아니야.'
[그럼요?]
'무조건적 추앙?'
[추앙이라고요?]
'그러니까 내 부탁이면 범죄든 뭐든 상관없이 들어주겠다는 무한한 복종 같은 거지.'
[고작 섹스 한 번으로 사람이 그렇게 바뀐다고요?]
'그만큼 떡정이 무섭다는 뜻이야. 채이는 지금 나한테 푹 빠져 있거든. 절대 내 부탁을 거절 못 할걸.'
[캬, 사람 감정을 이런 식으로 이용하시는군요.]
'그만큼 내가 자기한테 극한의 쾌락을 안겨주니까. 나에게 잘 보이면 자기한테도 무조건 이득이란 걸 알거든. 일종의 마약과 같은 거지.'
[그럼 오늘도 채이 양하고···.]
'아니. 보상은 너무 자주 주는 것도 안 좋아. 마일리지 좀 쌓이면 한 번씩 눌러줘야지. 내가 비싸게 굴수록 더욱 애탈 테니까.'
[진짜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시는 군요.]
'여자들이 하는 보슬아치 짓을 미러링하는 것뿐이야.'
[과연 대한민국 최고 자슬아치답습니다!]
채이는 생각보다 빠르게 배달을 완료했다.
검은색 몸체의 오토바이가 순식간에 다가오더니 도훈 앞에서 옆으로 휙 꺾으며 멈춰 섰다.
도훈은 코앞에서 바이크가 서는데도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그만큼 채이의 실력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채이가 헬멧을 벗더니 웃으며 말했다.
"역시, 배짱 하나는 끝내 준단 말야?"
"어? 머리 잘랐어?"
어깨까지 이르던 채이의 머리가 숏컷으로 깔끔하게 변해있었다. 중성미가 느껴지는 모습이었지만, 얼굴이 워낙 예뻐서 생각보다 잘 어울렸다.
"응. 날이 덥길래."
"예쁘네."
채이는 도훈의 칭찬이 기쁜지 수줍게 웃다가 품에서 갈색 서류봉투를 꺼내 들었다.
"찾아오라는 게 이거 맞지? 아무리 봐도 마약은 아닌 것 같던데?"
"혹시 봤어?"
"아니. 만져봤는데 종이 같길래."
서류 봉투는 밀봉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채이가 중간에 열어본 것 같진 않았다. 아마 열려 있었어도 확인하진 않았을 것이다.
"응. 급하게 필요한 서류가 있어서."
"나한테 굳이 설명할 필욘 없어. 난 도훈이 네 부탁이라면 진짜 마약이라도 배달해 줄 테니까."
"왜?"
"그래야 네 약점을 잡아 협박하지. 히히."
채이는 도훈을 보자 그의 얼굴에 눈을 떼지 못했다.
마치 당장이라도 그와의 끈적한 섹스를 기대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도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곧 호스트 바 출근 시간이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고마워. 비용은···."
"됐어. 우리 사이에 무슨 계산이야. 알려준 장소가 가까워서 오는 길에 잠깐 들른 거야."
"그래도 돈은 받아야지."
"돈 대신 다른 걸로 받으면 안 돼?"
"음, 오늘은 내가 시간이 좀···."
도훈의 거절에 채이의 표정이 금방 시무룩해졌다. 그가 좋아한 대서 머리까지 숏컷으로 쳤는데, 정작 기대했던 대답을 듣지 못한 것이다.
"힝, 나 오늘 오후 운동 째려고 했는데···."
"다음에 보자. 어차피 우리 집 위치도 알잖아."
"알았어. 바쁘다니 어쩔 수 없지."
채이는 깔끔하게 포기하고는 다시 바이크를 돌렸다. 실망감도 금새 잊을 수 있는 쿨한 성격이 장점이었다.
"조심히 가! 오늘 고마워!"
도훈이 크게 소리쳤지만 채이는 대답없이 머리 위로 주먹을 들더니 뻑큐를 날릴 뿐이었다. 그렇게 뻑큐를 든 채로 바이크가 점점 멀어져갔다.
"하여간, 저 성질머리 하고는."
도훈이 피식 웃으며 서류 봉투를 개봉했다.
그가 새벽에 부탁한 각종 공문서가 완벽하게 위조되어 담겨 있었다.
'번개 녀석. 역시 일 처리 하나는 진짜 깔끔하다니까?'
[한데 대학은 왜 전남에 소재한 대학으로 고르신 겁니까? 거긴 너무 시골 아닌가요?]
'여기서 멀수록 놈들의 정보력이 닿지 않을 테니까.'
[그러면 경남이나 부산 쪽이 서울 기준으로 가장 멀지 않나요?]
'거긴 안 돼. 구씨가 속한 조직이 부산을 근거지로 한다고 했으니, 마음만 먹으면 직접 확인할지도 몰라. 유흥 쪽으로 발이 뻗어 있을 테니 그 지역 호스트바에 내 신상 돌려보는 건 일도 아니겠지. 그럼 내가 거기서 활동했던 선수였다는 거짓말을 들켜버릴 거고.'
[아, 그래서 전남으로.]
'전남은 놈들의 세력과 떨어져 있는 데다, 굳이 대학 재학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거기 가보진 않겠지. 막말로 내가 대학생이면 어떻고 아니라도 무슨 상관이겠어? 단지 내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증거일 뿐.'
[역시 주인님은 한 수 앞을 내다 보시는군요.]
'가족관계부에 나온 주소나 사람들도 뒤탈 없을 거야. 실제 존재하는 주소랑 사람을 골랐다간 나중에 놈들에게 해꼬지 당하면 곤란하니까.'
[그래서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 내셨군요.]
'그렇지.'
도훈은 다시 집으로 돌아가 출근할 채비를 했다. 학교 수업을 끝내고 또다시 일을 나가려니 하루가 너무 길게 느껴졌다. 하지만 내일이 주말이었기 때문에 조금은 무리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8시에 맞춰 가게로 출근한 도훈은 곧바로 조태오의 사무실에 방문했다.
똑똑똑-
"누구야?"
"하서준입니다."
"하서준? 아아, 어제 왔던 그 신참. 들어와."
도훈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정장을 입고 있던 태오 자리에서 일어서 그를 반겼다.
"왜 이렇게 일찍 출근했어?"
"어제 같이 일했던 준후 형이 8시부터 오픈한다고 해서요."
"오픈은 8시긴 한데, 어차피 손님 받으려면 앞으로 한 두시간은 더 있어야 할 걸? 지금은 웨이터들 출근 시간이고."
"그런가요? 잘 몰라서 그냥 일찍 나왔습니다."
"잘했어. 피곤하면 선수 대기실 가서 쉬고 있어."
"네. 그리고 어제 말씀하셨던 서류 챙겨왔습니다."
도훈이 갈색 봉투를 내밀었다.
태오는 그 자리에서 내용물을 열어 확인했다. 꼼꼼하게 서류를 살핀 태오는 대학 재학 증명서를 보더니 도훈에게 물었다.
"···전공이 호텔경영학?"
"네."
"경영학과는 자주 들어봤는데, 앞에 호텔이 붙은 건 또 처음 이군."
"호텔 경영에 특화된 곳입니다. 졸업하면 보통 국내외 호텔 쪽으로 취업하고요."
"그렇구나."
"···라고 들었는데 3류대라서 막상 졸업한 선배들 보면 취업이 잘된 사례는 없더라고요. 저도 그냥 점수 맞춰서 간 거라서요."
"그렇구먼. 채용진단서는 어디 보자···."
태오는 다른 부분보다 성병 검사지에 주목했다.
"뭘 이런 것까지 떼 왔어?"
"어제 형님이 말씀하신 게 갑자기 생각나서요."
"하하, 그냥 한 말인데 신경 쓰였나 보네. 콘돔은 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