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5. 빌드 업-20-
"저녁은 안 먹고?"
"아까 샤워하는데 콜 들어 왔더라고. 가봐야 할 것 같아. 저녁은 다음에 같이 하자."
"아···."
"그리고 내 번호 알려줄게. 다음엔 연락할 일 있으면 여기로 직접 전화해. 회사로 전화하면 내가 배정이 안 될 수도 있으니까."
"응."
도훈은 채이와 연락처를 교환했다.
"그럼 가볼게."
"응, 누나 조심히 가."
채이를 집 앞까지 배웅한 도훈은, 그녀가 오토바이를 타고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았다. 채이는 끝까지 쿨내를 풀풀 풍기며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근데 채이양의 오토바이에 쓰인 한자는 무슨 뜻인가요?]
'한자? 아 저거? 송골매 준(?)일 걸?'
[송골매요?]
'송골매가 먹이를 낚아챌 때 시속 320km의 속도로 날아온다잖아. 저 기종이 아마 최초로 시속 300km를 넘는 바이크로 출시되어서 붙인 이름일 거야. 일본어로는 하야부사.'
[아하, 그런 뜻이 있었군요. 어쩐지 엄청 빠르더라더니.]
'물론 선수용은 더 빠른 것도 있겠지만, 일반 소비자가 탈 수 있는 기종 중에선 최고라고 보면 돼. 그나저나 끝까지 뒤도 돌아보지 않는군.'
[헤어질 때 채이양이 많이 아쉬워하는 눈치였습니다만.]
'그래도 티는 많이 안 내더라.'
[자신의 이상형을 만났으니 미련이 많이 남았을 것 같습니다.]
'어쩔 수 있나. 그래도 가끔 얼굴 볼 일 있을 것 같아. 아까 보니까 도심 안에서 이동하는 건 바이크가 제일 빠르더라고. 다음에 또 퀵 서비스 부를 일이 있을 거고.'
[주인님은 정말 다양한 직업의 여성들과 인연을 맺으시는군요. 또 그걸 적절히 활용하시고요.]
'어쩌겠어. 이게 내가 가진 능력인걸.' 채이를 돌려 보낸 도훈은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어느덧 해가 떨어져 주변이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저녁을 먹고 잠시 휴식을 취한 도훈은, 서재에서 밀린 학과 공부를 복습했다. 카메라로 찍어 놓은 노트 필기까지 모두 다시 복습하려니 생각보다 양이 많았다. 일주일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선 한동안 밤마다 도서관을 다녀야 할 것 같았다.
* * *
다음날.
오후가 되었을 때 최번개로부터 연락이 왔다. 목소리를 변조한 도훈이 번개와 통화했다.
"알아봤어?"
-네, 행님. 근데 혹시 시간 되시면 지금 저희 사무실로 방문 가능하실지.
갑작스러운 호출에 도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최번개가 자신을 오라 가라 할 군번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상하관계가 분명한 번 개가 그런 말을 했다면 필시 다른 연유가 있을 것 같았다.
"갑자기 무슨 일인데?"
-실은 어제 맡기신 일을 조사하던 중, 말씀하신 건과 관련된 선수 한 명을 붙잡았습니다. 해당 건을 묻자 무턱대고 도망을 가길래요.
"잡았다고?"
-네. 근데 이놈이 도통 입을 열지 않으니···.
도훈이 곧바로 대답했다.
"알았어, 사무실에서 기다려. 금방 갈 테니까."
수업은 이미 끝났기 때문에 도훈은 부담 없이 차를 몰고 번개의 사무실로 향했다. 이동 중에 역용 마스크를 이용해 성난 도훈으로 변신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로시, 근데 문신 토시 같은 것도 있을까?'
[문신 토시요?]
'그래도 명색이 깡패 컨셉인데, 팔이 너무 허전한 것 같기도 해서.'
[어제 채이양 이레즈미 문신 보고 따라 하고 싶은 신 거 아니고요]
'들켰냐?'
[정말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군요. 암튼 천상계 마켓에서 찾아 달라는 말씀이시죠?]
'응. 기왕이면 가짜 티 많이 안 나는 걸로.'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검색을 마친 로시가 제품을 알려왔다.
[문신 토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새겨주는 제품이 판매 중이군요.]
'새길 생각까진 없는데? 무슨 교사가 문신이야. 면접에서 짤릴 것도 아니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천상계의 뛰어난 기술력으로 실제와 똑같지만 지울수도 있으니까요.]
'지워지는 문신? 헤나 같은 건가?'
[아뇨. 진짜로 문신입니다. 원할 때 지울 수 있을 뿐이죠.]
'오, 좋네. 진행 시켜.'
[인벤토리로 보내겠습니다.]
잠시 후 차를 주차한 도훈이 인벤토리에서 얇은 재질의 쫄쫄이를 꺼냈다. 상의 한 벌과 팬티스타킹 형태의 하의 한 벌 ,도합 두벌이었다.
'이게 뭐야? 그냥 쫄쫄이 아니냐?'
[아닙니다. 전신에 문신을 새겨주는 제품입니다. 착용 후 원하는 부위에 그림을 선택하면 진짜 문신이 피부에 새겨집니다.]
'난 팔에만 할 건데?'
[상관없습니다. 전신에 새길 수 있다는 뜻이지, 전신을 모두 문신으로 채울 필요는 없으니까요. 상의를 입고 팔에만 문신을 적용하시면 됩니다.]
'오호, 그렇단 말이지?'
도훈은 주차장에서 웃옷을 벗고 쫄쫄이 상의로 갈아입었다.
'이제 어떻게 하는 거야?'
[스마트워치에 연동된 어플을 설치해 두었습니다. 거기서 원하는 그림을 고르시면 됩니다.]
'괜찮네.'
도훈은 어플에 떠오른 문신 그림을 살펴보다, 마음에 드는 그림을 골랐다.
'이걸로 팔에다만 할 수 있다는 거지?'
[네. 가능합니다.]
'막상 팔에만 하려니까 좀 허전해 보이는데. 등판까지 다 해볼까?'
[괜찮으시겠습니까?]
'뭐 어때? 어차피 지워지는 거라며.'
도훈이 고른 그림은 이레즈미와 흡사한 색조 문신이었다.
군데군데 빨간색이 들어가고, 팔에는 용과 잉어, 등판에는 일본 도깨비를 닮은 괴물의 형상이 무섭게 그려져 있었다.
'이걸로 할게.'
[네. 그럼 텍스처를 적용하겠습니다.]
잠시 후 받쳐 입은 쫄쫄이가 몸속으로 흡수되더니 도훈의 상반신 전체에 진한 문신이 새겨졌다.
'어랍쇼? 이거 피부에 녹아버린 거야?'
[맞습니다. 옷 자체에 천연 염색 성분이 포함되어 있거든요. 아이 템 자체는 1회용이기 때문에 사용하고 나면 녹아서 사라집니다.]
도훈은 문신을 쓱 둘러보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룸미러 거울로 보니 성난 도훈의 얼굴도 완성되어 진짜 깡패 같은 모습이었다.
'마음에 드는데?'
[제주도에서 이동석 형사로 변장했을 때랑 똑같은 거 아닙니까?]
'형사나 조폭이나 그게 그거라니까.'
도훈은 내친김에 만능 변장 도구를 이용해 화려한 꽃무늬가 들어간 남방을 걸치고, 선글라스도 하나 착용했다. 변장을 마치고 나니 영락없는 양아치의 모습이었다. 머리까지 포마드 기름으로 빗어넘긴 도훈이 차에서 내려 건들거리는 걸음으로 최번개의 사무실로 향했다.
최번개의 심부름 센터가 위치한 곳은 오래된 구도심이었다.
폐업한 가게들이 군데군데 보이고, 건물 외벽 페인트가 낡아 떨어져 있었다. 각종 오물과 쓰레기 악취가 진동을 했으며,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외국인 노동자나 노숙자 몰골이었다.
[최번개는 돈도 많이 벌면서 왜 이런 곳에 사무실을 두었을까요?]
'원래 음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양지로 나와 봐야 별 차이 없거든. 범죄자들은 바퀴벌레처럼 지저분한 곳으로 몰려들기 마련이니까.'
[서울 도심 안에 이런 범죄 도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어디나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는 법이야. 화려한 빌딩 숲에도 하수 처리장은 존재하는 법이니까.' 번개의 심부름 센터가 있는 건물 앞에 도착하자 입구를 지키고 있던 떡대들이 도훈을 알아보고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오셨습니까, 형님!"
번개에게 미리 언질을 받은 듯, 깍듯한 환영 인사였다.
"번개는?"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야이 새끼들아. 계단 청소 좀 해라. 무슨 시궁창도 아니고."
도훈이 괜히 시비를 걸자 깍두기 두 명이 벌벌 떨며 대답했다.
"시, 시정하겠습니다."
"바로 치우겠습니다."
도훈이 껄렁거리는 표정으로 사무실로 올랐다.
[건달 역에 너무 몰입하신 거 아닙니까?]
'메소드 연기 괜찮았냐?'
[연기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도훈이 들어가자 의자에 앉아있던 최번개가 벌떡 일어나 그를 반겼다.
"오셨습니까 행님!"
어제 기름칠 좀 해놨다고, 더욱 깍듯해진 태도였다.
"돈은 잘 챙겼지?"
"네, 행님. 늘 감사합니다."
최번개가 자신이 앉아 있던 가죽 의자로 도훈을 안내했다.
"제가 형님 오시기 전에 미리 뎁혀놨습니다요."
"하여간 입만 살아가지고."
도훈이 비릿하게 웃으며 사장님 의자에 걸터 앉았다.
테이블 위에 다리를 올리고 허리를 젖히는데 최번개가 대뜸 담배를 대령했다.
"늘 피우시던 걸로 준비했습니다."
"어? 내 취향은 어떻게 알았어?"
"버리고가신 꽁초로 확인했습니다."
"미친놈."
도훈이 담배를 입에 물자 번개가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그의 시선이 팔에 새겨진 문신을 계속 힐끔거렸다.
"저, 행님 외람된 질문이지만."
"하지마."
"아, 넵 죄송합니다."
도훈이 웃으며 다시 물었다.
"뭔데?"
"원래 팔에 문신이 있으셨던가요?"
"몰랐냐?"
"아, 네 저번에 뵀을 땐 못 본 것 같아서···."
"그땐 긴팔이었겠지."
"아하. 몰라뵀습니다."
"그건 그렇고 어제 조사한 것부터 설명해봐."
"네, 행님."
최번개가 미리 준비한 태블릿을 도훈에게 보여주었다.
프리젠테이션 화면에는 여러 인물의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일종의 조직도처럼 보였다.
"이게 뭐냐?"
"행님이 말씀하신 사건과 관계된 애들입니다."
"조폭이야?"
"아닙니다 행님. 족보도 없는 애들입니다. 화류계 애들끼리 서로 형님 동생하고 부르는데, 지들 멋대로 조직처럼 꾸려놨더군요."
"흐음. 계속해봐."
번개가 조직도 맨 밑의 이름을 소개했다.
"여기 아래가 선수들입니다. 그러니까 선수라는 것은 호빠에서 ···."
"알아. 아니까 쓸데없는 말 빼고."
"네."
최번개의 요약에 따르면 국성대 횡령사건의 원인이 된 놈들은 일종의 '박스' 모임이었다. '박스'란 한 명의 마담이 관리하는 선수들로 구성된 느슨한 소모임으로 대략 20명 이내의 선수들이 소속되어 있었다.
"보통 호빠 애들이 공사를 칠 땐 돈 많은 유부녀를 노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간통죄가 없어졌다고 하지만, 혼인 관계 파탄의 귀책이 잡히면 위자료를 못 받고 쫓겨날 수 있다는 것을 악용하는 방식이죠."
"그래서?"
"근데 이놈들은 학생들을 타깃으로 잡았습니다. 어제 말씀하신 국성대학교 뿐만 아니고, 인접한 대학들이 주로 대상이었습니다."
"한두 군데가 아니다?"
"네."
소위 '구씨파'라고 스스로를 부르는 놈들은 2~3명이 팀을 짜서 움직인다고 했다. 학생들이 많이 출몰하는 장소에 미리 자리를 잡고 있다가, 고급 명품 백을 들고 있거나 비싼 옷을 입은 여학생들을 주로 대상으로 노린다고 했다.
"처음엔 헌팅 비슷하게 접근을 합니다. 에이스급 선수가 갑자기 말을 걸면 열에 서넛은 번호를 넘긴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처음엔 그렇게 번호를 수집한 여학생들과 친분을 쌓습니다. 만나서 차도 마시고 식사도 하고, 데이트 비슷하게 해서 호감을 쌓아두는 거죠. 아마 그때가 타깃의 집안 재산을 파악하는 단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흐음."
여기까지는 도훈도 일정 부분 파악하고 있는 내용이었다. 다만 이들이 그룹단위로 움직이는 일종의 범죄조직이라는 것은 처음 알게 되었다.
공사 목표로 분류된 여학생들은 자연스럽게 호빠로 초대를 유도 한다. 어차피 남자 얼굴에 혹해 마음을 빼앗긴 여자애들이 대부분이었으므로, 막상 신분을 밝혀도 거부하는 경우는 없었다고.
"일단 호빠까지 따라오면 세팅은 끝납니다."
"끝나다니?"
"잘생긴 오빠 한 명 믿고 따라갔는데, 막상 가보니까 잘생긴 애들이 취향대로 있는 것이죠."
"흐음. 애들 사진 같은 것도 혹시 있어?"
"그러실 줄 알고 확보해 놓았습니다. 이것들이 일본처럼 명함에 자기 사진을 박아서 뿌리더군요."
번개가 테블릿을 넘기자 선수들 사진이 촤르륵 펼쳐졌다. 잘생긴 남자 월드컵 16강 대진표처럼 빽빽이 모여있는 사진을 본 도훈이 미간을 찡그렸다.
'씨팔. 무슨 생기다만 새끼들이구먼.'
[네?]
'저딴 것들이 호빠 선수랍시고 깝치고 다녔다는 거 아니야? 무슨 게이새끼처럼 생겼네.'
[그래도 나름 비주얼이 훌륭한 편 아닌가요?]
'야. 얼굴에 화장 떡칠하고 조명까지 받치면 누구나 저 정도 와꾸는 나오지. 거기다 명함판에 넣는다고 보정까지 넣을거 아니야?'
[하긴, 주인님이 훨씬 잘생기시긴 하죠.]
'어째 답정너 같은데?'
[들켰습니까?]
"이것들이 구씨파인가 뭔가하는 놈들이야?"
"네."
"근데 왜 하필 구씨파야?"
"이 박스를 관리하던 마담의 성씨가 구씨였다고 합니다."
"합니다? 그게 뭔 소리야?"
"아쉽게도 구씨의 이름이나 연락처는 알아내지 못 했습니다. 처음부터 가명을 썼고, 선수 생활을 일찍 접고 마담으로 올라간 터라 사진도 구하기 어려웠습니다."
"흐음, 실망스러운데."
"죄송합니다 행님. 이틀만 더 주시면 구씨 집에 숟가락이 몇 개 있는지까지 알아오겠습니다."
도훈은 시간이 촉박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러려니 넘어갔다.
"됐고. 놈들 수법은 대충 알겠네. 이 상태에서 몰래 몰카를 찍은 다음 여자애들을 협박한다는 거지?"
"네, 근데 이게···."
번개가 말을 망설였다.
"뭐? 더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