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2. 빌드 업-17-
이번엔 도훈이 벌러덩 누웠다.
채이가 다리 사이로 들어오자 도훈이 농담을 던졌다.
"요즘은 여성 상위시대라더니 그 말이 맞네.."
"흥!"
채이는 도훈의 도발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아까부터 심리전에서 말리고 들어간 것도 패배의 원인이 되었다는 판단이었다.
'초보라고 절대 얕잡아 보면 안 돼. 상대는 체격도 나보다 좋고, 종목은 달라도 나름 운동을 계속해온 선수 출신이야. 이번엔 절대 방심하지 않겠어.'
채이가 위에 올라타자 도훈이 다시 스마트 워치를 향해 소리쳤다.
"로시, 타이머 1분,"
"그럼 시작한다?"
"어허, 존댓말 써라 동생아."
"···시작할까요?"
"얼마든지 들어와."
그렇게 두 번째 대결이 시작되었다.
먼젓번과 다르게 이번엔 채이가 도훈을 위에서 덮친(?) 자세였다.
'헬스 말고 진작 주짓수나 배울 걸 그랬나 봐.'
[왜 그러십니까?]
'이렇게 스킨십이 많은 종목인 줄 몰랐지 뭐야?'
채이는 위에서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도훈을 향해 육탄돌격을 하는 모양새였다. 적극적으로 부비부비를 해대는 채이의 애무에 만족스러워하던 도훈은 30초쯤 시간이 남았을 때 슬슬 힘을 주기 시작했다.
'어디 한 번 움직여 볼까?'
도훈은 사실 기술 같은 건 전혀 몰랐다. 굳이 알 필요가 없었던게, 주짓수에서 기술이라는 것은 결국엔 힘을 효율적으로 배분해 상대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것이 전부였다.
애초부터 천하장사인 도훈에게는 해당 되지 않는다는 소리. 도훈이 빠져나오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채이가 더욱 거세게 밀어붙였다.
도훈은 계란으로 바위치기를 하면 이런 기분이 들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여기서 바위는 도훈이었다.
'역시 바위치기보다 가위치기가 더 좋은데.'
[네? 뜬금없이 무슨 소립니까, 그게?]
'아냐 있어, 그런 게.'
"거 너무 세게 문지르는 거 아니야?"
"······."
"욕구불만 아닌가 이 정도면? 너무 즐기지 말라고."
도훈이 계속 입을 털자 채이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닥치고 집중이나 하지?"
"왜? 내가 말할 때마다 막 설레?"
"웃기지 마."
"이렇게 얼굴이 바짝 붙어 있는데 아무렇지 않다고?"
도훈이 채이의 목덜미를 잡은 다음 얼굴을 마주 댔다.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만큼 초근접거리였다. 코끝이 서로 맞닿고, 조금만 더 붙으면 입술도 부딪힐 것 같았다.
겨우 긴장을 유지하고 있던 채이는 도훈의 눈과 마주치는 순간, 힘이 탁 풀려버렸다.
'아, 왜, 왜 이렇게 잘생긴 거야···.'
당연한 얘기지만 주짓수를 배우러 오는 사내들은 운동에 미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젊은 나이에 여자와 데이트하기보다, 남자들끼리 살을 부대끼며 땀을 흘려대는 게 더 좋은 사람들이었다.
헬스 마니아 중에 하루도 근손실을 못 참는 헬창이 있다면, 주짓수에도 벨트 승급이나 그랄(티어)을 올리는데 목숨을 건 사내들이 많았다.
당연히 운동에 미친 사내들이라 외모는 대부분 신경쓰지 않았다.
거칠고, 투박하고, 로션도 안 바르는 건 기본. 심지어 잘 씻지도 않는지 몸에선 쉰내가 펄펄 나고, 입을 열때마다 시궁창 냄새가 났다.
그런 사내들만 상대해온 채이에게 도훈은 천사가 따로 없었다.
일단 외모에서 비교가 되질 않았다.
몸은 헬스 트레이너 뺨치게 좋은데, 얼굴은 정반대로 훈훈한 대학생 모습이었다. 특유의 자신감도 마음에 쏙 들었다. 일단 자신을 보고 주눅 들지 않는다는 점만으로 합격이었다.
외모에서 이미 채이를 설레게 했던 도훈이지만, 운동 능력은 더 더욱 뛰어났다. 아무리 체급 차이가 난다고 한들, 운동을 배운 사람과 안 배운 사람 사이엔 좁힐 수 없는 간극이 있다.
더구나 자신은 고등학교 때까지 엘리트 체육을 배워온 선수 출신. 초심자에 불과한 도훈에게 그래플링 대결에서 밀리는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딱 한 가지밖에 없었다.
'···천재다.'
천재.
모든 노력하는 자들의 적.
프로의 길에 발을 디뎌 본 선수들은 대부분 어려서부터 천재 소리를 한 번쯤 듣는다.
-네 나이에 벌써 이런 실력이라니, 놀랍구나.
-넌 정말 축복받은 재능을 가졌어!
-대단하네. 천재야, 천재!
하지만 나이를 더 먹을수록 경쟁은 더 치열해지고 성적은 떨어지기 마련. 매일 쉬지 않고 노력했는데, 이기지 못하는 상대가 슬슬 등장하기 시작한다.
똑같은 노력. 아니 그보다 더 적은 노력으로도 우습게 상대를 짓눌러버리는 라이벌의 등장.
그들은 또 다른 천재였다.
결국 운동에서 천재란, 맨 마지막 순간까지 살아남은 단 한 명을 일컫는 단어였다. 그리고 불행히도 채이는 이미 한 번 그 벽을 실감한 사람이었다.
세상엔 자신보다 더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하늘 위의 하늘.
그리고 더 위의 또 다른 하늘.
위로 올라갔다고 생각할 때마다, 잡히지 않게 멀어져가는 까마득한 존재.
채이는 오늘 도훈을 보고 또 한번 확신했다.
'천재구나, 그냥. 주짓수의 천재. 이게 안 배운 사람의 몸놀림이면···. 정말 타고났다고 밖에는···.'
도훈은 너무나 손쉽게 채이의 누르기를 풀고 뒤집어 버렸다. 어떻게 당했는지도 모를 만큼 순식간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도훈이 쓰는 기술은 주짓수가 아니라는 것.
그저 우격다짐으로 뒤집어 버렸다는 것.
그에게선 배운 사람의 기술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본능적인 움직임만으로 채이의 결박을 풀어냈다.
"자, 내가 또 이겼네?"
천재가 빙긋 웃었다.
절대적인 실력 차이에 채이는 마침내 탄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자존심 상해할 일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녀는 한국 주짓수 역사상 길이 남을 천재와 처음으로 대련을 한 것이다. 영광이나 마찬가지였다.
"···말도 안 돼!"
"뭐가?"
"왜지? 왜 잘하지?"
"내가 잘해?"
"말이라고?"
"네가 약한 게 아니고?"
자존심을 후벼파는 발언에도 채이는 한마디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원래 천재에겐 모든 게 이해되지 않는 것 천지다.
-왜 그걸 못하지?
-따라 해 봐. 이게 안 된다고?
-도무지 이해를 못하겠군.
그녀도 한때 그런 소릴 생각없이 내뱉곤 했다.
누군가에겐 숨 쉬듯 당연한 일도, 다른 누군가에겐 필사적인 노력으로도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몰랐을 때다.
이를 깨달은 순간은, 자신보다 더한 천재를 만났을 때 뿐.
도훈은 아직 벽을 느끼지 못했으니, 자신을 얕잡아 보는 것이 당연했다. 채이는 그래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게 바로 천재의 특권이니까.
띠리리릿- 띠리리릿-
경박스러운 스마트워치의 알람이 울렸다.
도훈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이번에도 내가 이겼네?"
"······."
"자 그럼 소원 말해도 되지?"
도훈은 채이의 위에 올라탄 상태에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대련에 집중할 땐 몰랐는데, 생각해보면 너무나 야한 자세였다.
아무리 옷을 입고 있다고 해도, 도훈의 몸이 채이에게 바짝 밀착해 있었다.
"그냥 이대로 5분만 쉬자."
"뭐, 뭐라고?"
"말 그대로야. 너무 힘을 쏟은 것 같아."
"아니."
휴식을 원하면 내려와서 드러누우면 그만이었다. 마운트포지션에서 그녀를 침대 삼아 눕겠다는 건 핑계에 불과했다. 하지만 약속은 약속. 채이는 군소리 없이 도훈의 요청을 따랐다.
"···맘대로 해."
"해?"
"···요. 진짜 나보다 나이도 어리면서 꼬박꼬박 존댓말 받고 싶냐?"
"그럼? 내가 이겼는데 누나라고 부를 순 없잖아."
"그냥 서로 말 놓자. 오케이? 이것도 엄청 양보한 거야."
"그러시든지."
도훈은 여전히 채이를 위에서 누르고 있었다. 힘을 뺀 상태로 가만히 누워있자니 채이는 점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건 더이상 그래플링 아닌데···.'
그라운드 대결도 아닌 남녀가 서로 포개져 누워있는 경우는 하나 밖에 없었다.
'서, 설마 섹···.'
야한 상상을 떠올린 채이는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달아올랐다.
도훈의 단단한 가슴이 계속 자신의 가슴을 짓눌렀다. 무겁다기보다, 부끄러운 마음이 더 컸다.
"으, 음. 언제까지 이대로 있으려고?"
"왜, 아직 5분까지 한참 남았는데?"
"그, 그래도···. 숨쉬기 곤란해지는데."
"알았어, 그럼."
도훈이 선심 쓰는 척 엎드려 뻗친 자세로 상체를 바짝 들어 올렸다. 거리가 떨어진 상태로 두 사람의 눈빛이 공중에서 서로 얽혔다.
'지, 진짜. 짜증 나게 잘 생겼어.'
채이는 아까처럼 도훈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흔들리는 감정을 들킬 것만 같았다. 채이가 고개를 옆으로 휙 돌리자 도훈이 그녀를 내려보며 물었다.
"나 하나만 물어봐도 돼?"
"뭐?"
"날 왜 따라온 거야?"
"응?"
"처음 보는 남자가 무섭지 않아? 내가 어떤 사람일 줄 알고?"
"무섭긴? 차 마시자니까 왔지."
"차 마신다고 해놓고 여기서 이러고 있네?"
"그, 그건···."
"솔직히 말해봐. 나한테 반했지?"
"무슨 헛소리야!"
채이가 발끈했지만 도훈은 좀 더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더니 계속 물었다.
"내 눈 똑바로 쳐다보고 대답해."
"봤다. 뭐?"
"정말 아무 생각 없었어? 내가 덮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내가 남자를 무서워할 여자로 보여?"
"그럼 하나도 안 무섭겠네?"
도훈이 갑자기 채이의 두 손목을 붙들었다.
저항하지 못하게 위에서 두 팔을 제압하는 자세였다.
"이래도?"
"흥, 넌 늘 이런 식으로 여자를 꼬셨나 보지?"
"아닌데?"
"뭐가 아닌데? 힘으로 제압해서 강제로···. 저질 같으니."
"내가 굳이 여자를 힘으로 제압할 필요가 있을까?"
"그럼?"
"만약 내가 누군가를 꼬시고 싶다면 그냥 말만 걸면 돼. 눈빛 마주치고 대화만 나누어도 술술 넘어오거든."
"미친. 내가 그렇게 쉬운 여자로 보여?"
"그럼 비싼 여자야? 너는?"
"이, 이거 안 놔?"
채이가 결박을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지만, 도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힘이 너무 세서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았다.
"난 너 마음에 드는데."
"뭐, 뭐라는 거야 아까부터."
"그래서 집으로 초대했던 거고. 난 아무 여자나 집으로 들이지 않는다고."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지?"
"아니? 오늘은 차만 마시려고 했지. 얘기 좀 하고, 어떤 사람인지 파악도 하고."
"근데?"
"근데 같이 이렇게 붙어서 부대끼고 있으니까 살짝 힘드네."
"뭐가 힘들···. 허, 헉. 너 뭐, 뭐야 밑에!"
"미안. 최대한 티 안 내려고 했는데, 내가 워낙에···. 알지?"
"얼른 그거 안 치워? 변태 같은···"
"잠깐만 대고 있으면 안 될까?"
"시, 싫다고."
"싫은 건 확실해?"
도훈이 채이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물었다.
"무슨 개소···."
"그럼 여긴 왜 그러는데?"
도훈이 시선을 밑으로 내려 그녀의 젖가슴 쪽을 가리켰다. 그녀의 젖꼭지가 살짝 융기되어 옷 위로 볼록 튀어나와 있었다.
"어, 엇!"
채이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격렬한 몸싸움을 하던 도중 브라가 풀리며 밑으로 흘러내린 것이다. 원래 주짓수를 할 때는 니플 패치를 붙이고 스포츠 브라를 착용했기 때문에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지만, 아무 준비 없이 도훈과 대련을 펼치다 보니 벌어진 참극이었다.
"아, 아니야!"
"아니야?"
"그, 그냥 이건···. 꼬, 꼭지가 원래 큰 편이라고!"
당황한 채이가 아무말 대잔치를 벌였다.
물론 수긍하고 넘어갈 도훈이 아니었다.
"정말? 확인해도 돼?"
"무, 무슨 확인?"
"만져보면 알지."
"아, 아아! 하, 하지마!"
하지만 말린다고 들을 도훈이 아니었다.
두 손은 각각 채이의 양 손목을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에, 도훈은 얼굴을 밑으로 내려 두 볼을 가슴에 문지르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도훈의 행동에 채이가 몸 둘 바를 모르고 소리쳤다.
"꺄아, 하, 하지 말라고!"
그러나 도훈은 계속 양쪽 볼을 비비더니 다시 채이를 보고 말했다.
"왜 이렇게 딱딱해?"
"······."
"그냥 브래지어가 밑으로 흘러서 튀어나온 거라면 여기가 딱딱하면 안되는 거 아닌가?"
"······."
"대답해 봐."
"시, 싫어."
"몸은 솔직한데 입은 그렇지 못하네."
도훈이 다시 발기된 잦이를 가랑이 사이에 바짝 밀착시켰다. 그럴 때마다 대물의 묵직한 존재감에 채이의 몸이 바짝 달아올랐다.
'어, 어뜩해···. 괜히 기분이 이상해 져버려···. 내가 왜 이러지?'
하지만 당연한 반응이었다.
채이는 처음부터 도훈에게 높은 호감도를 가지고 있었고, 주짓수대결을 펼치면서 그의 천재적인 능력에 압도당했다.
약자를 멸시하는 것 이상으로 강자를 추종하는 그녀의 성향상 도훈에게 느끼는 호감도는 첫눈에 뿅 간 정도였다.
그가 자신을 멋대로 주무르고 만진다고 해도 거부할 수 없었다.
이를 정보창으로 확인한 도훈은 과감하게 채이를 유혹했다.
"내가 오해한 거라면 사과할게. 대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