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680화 (1,660/2,000)

1680. 빌드 업-15-

[근데 지금의 모습만 봐선 트라우마가 있다고 믿기 어려운데요?]

'왜?'

[낯선 남자 집을 무방비로 따라가는 것을 보면요. 보통은 겁내는 게 정상 아닌가요?]

'그만큼 자기 실력을 믿는다는 거겠지.'

[무술 좀 배웠다고요? 여자가 남자를?]

'윤채이 체격을 보라고. 저게 어딜 봐서 여자야? 어지간한 남자랑 비교해도 안 밀리겠구먼.'

[그래 봐야 주인님보단 작죠.]

'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제대로 된 싸움 기술을 배운 여자라면 남자들하고 붙어도 절대 안 밀려. 평범한 성인 남성이랑 UFC 여자 선수랑 붙으면 누가 이길 것 같아? 뒤지게 처맞고 한 대 더 맞을걸? 아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정음이를 보라고. 태권도 발차기 한 방이면 턱 맞고 기절해 버릴텐데?'

[근데 현 UFC 챔피온이라도 주인님 앞에서는 안 되는 거 아닙니까? 일반인이 주인님의 털끝이나 건드릴 수 있나요?]

'그걸 윤채이가 모른다는 게 핵심이지. 혹시 수틀리면 나를 단숨에 제압할 수 있다고 믿으니까 저렇게 겁 없이 나대는 거라고. 또 내가 얼굴만 보면 되게 순하게 생기지 않았냐?'

[확실히 날라리보단 훈남에 더 가깝죠.]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가자 채이가 더더욱 감탄했다.

"와, 너 대체 정체가 뭐야?"

"네?"

"너 뭐 돼? 혹시 재벌 집 막내아들이야?"

"왜 그렇게 호들갑이세요?"

"호들갑이라니? 이렇게 좋은 집에, 심지어 가전제품도 다 새것이 네. 혹시 집이 엄청 잘 살아? 너네 아버지 뭐하시니?"

"왜 누나는 제가 직접 벌었을 거라곤 생각 안 하는데요?"

"직접?"

채이가 놀란 표정으로 도훈을 쳐다보았다.

보면 볼수록 신기한 사내였다. 자신을 보고도 전혀 주눅 들지 않는 첫인상부터 심상치 않았다.

대부분 남자는 자신의 큰 키를 보자마자 기가 팍 꺾였다. 여자 키 175는 남자로 치면 190에 가까운 느낌이었기 때문에 채이의 위압감은 상당한 편이었다.

게다가 어린 시절부터 육상으로 다져진 근육질의 몸매도 한몫했다. 라이더 자켓에 헬멧을 쓰고 있으면, 입을 열기 전까지는 누구도 그녀를 여자라고 생각 못 했다.

팔에 새겨 놓은 문신도 마찬가지. 채이가 바이크를 배운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아스팔트 위로 팔이 갈리면서 크게 흉터가 졌는데, 이를 가리기 위해 진하고 넓은 문신을 오른팔 전체에 새겨야 했다.

하지만 의도와 다르게 자신의 문신을 본 남자들은, 그녀가 폭주족과 관련 있거나 혹은 전과자 출신이라고 오해하고 더더욱 무서워했다.

그렇게 늘 뒷걸음질 치던 남자만 봐왔던 채이에게, 도훈은 무척이나 독특한 사내였다.

한낱 대학생에 불과한 그는 전혀 겁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자신을 살짝 얕잡아 보는 느낌마저 들었다.

채이는 도훈의 그런 태도가 건방지거나 기분 나쁘기보다, 반대로 흥미가 돋았다.

그가 언제까지 자신을 무시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선을 넘게 만들고 싶어지는 사내였다.

"제 능력이 출중할 수도 있지 않아요?"

"넌 학생이잖아. 국성 대학생."

"학생은 뭐 돈 못 버나?"

"학생이 무슨 수로 돈을 벌어?"

"요새 많잖아요. 가령 유튜버도 있고."

"너 유튜버야?"

"아뇨. 제가 유튜버라는 건 아니고요."

"뭔데, 그럼?"

"코인 대박도 있고."

"코인은 망하지 않았나? 주변에서 곡소리 나던데 요즘?"

"······."

도훈이 아픈 곳을 찔렸는지 입을 다물었다.

[아아, 주인님.]

'···일시적 조정이다. 언젠간 올라.'

[그러지 마시고 지금이라도 손절을.]

'웃기지 마. 존버는 승리하다.'

[존버가 뭡니까?]

'존나 버티는 거지 뭐야?'

[존나 버러지 새끼가 아니고요?]

'야이 개새끼야!'

"진짜 뭔데? 집이 부자가 아니면? 설마 로또라도 맞았어?"

"궁금해요?"

"당연하지. 서울 시내 한복판에 너 같은 대학생이 2층 주택에 혼자 살고 있으면 누구나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친해지면 알려줄게요."

"에이씨, 뭐야. 김빠지게."

"차는 무엇으로 드려요?"

"주문하면 다 나오니?"

"기본적인 건 있을걸요?"

"난 그럼 홍차."

"홍차요?"

"응. 나 커피 안 마셔. 커피 마시면 밤에 잠을 못 자서."

"아하, 네. 잠시만요. 소파에 잠깐 앉아 계세요."

도훈이 주방에 가서 물을 끓이는 사이, 소파에 앉은 채이가 걸치고 있던 가죽 재킷을 벗었다. 도훈이 힐끔 고개를 돌려 몸매를 구경하는데, 재킷 아래 감춰진 볼륨감이 상당했다.

'오우, 큰데? 최소 C? 아니 D는 되보이는데?'

[아무래도 체격이 있다 보니···.]

'저래서 코치에게 시달렸던 걸까?'

[왜요?]

'육상복장이 은근 노출이 심한 편이거든. 훈련할 때마다 맨날 핫팬츠 같은 반바지에 민소매 나시만 걸쳤을 텐데, 저런 몸매면 가슴이 너무 돋보이지 않았겠어?'

[근데 왜 창던지기 종목이 육상입니까? 그건 투척 종목 아닌가요?]

'육상 맞아. 던지기 류도 기본적으론 육상의 한 갈래야. 달리기는 종목만 육상이 아니고.'

[아하.]

'근데, 선수 생활 계속했어도 대성하긴 힘들었겠다.'

[그건 왜 그렇죠?]

'가슴이 너무 커서. 육상 선수 쪽은 가슴이 너무 크면 밸런스가 안 맞아서 힘들어. 일종의 핸디캡이랄까? 육상 선수 중에 글래머를 찾기 힘든 이유기도 하지.'

[아하.]

"도훈아. 나 집 좀 둘러봐도 돼?"

"얼마든지요."

기다리기 심심했던 채이가 소파에서 일어나 집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도훈이 머그컵을 꺼내 커피와 홍차를 만드는 사이, 채이가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방을 하나씩 돌아다녔다.

'어제 청소 싹 다 끝냈으니 보여줘도 괜찮겠지?'

[앗 주인님, 작은 방에 마시지 베드!]

'억!'

뒤늦게 마사지 베드의 존재를 떠올린 도훈이 급히 채이를 말렸다.

"아니, 누나 그 방은!"

"뭐, 여기?"

그러나 이미 채이는 방문을 열어버린 상태였다. 가구라곤 전혀 없는 방안에 떡하니 가운데 놓인 마시지 전용 베드는 누가 봐도 어색한 모습이었다.

"이거 뭐야?"

도훈이 쪼르르 달려와 채이에게 해명했다.

"스, 스트레칭 용도요."

"스트레칭은 혼자서 하는 거 아닌가? 방에 이런 물건이 왜 있어?"

"그러니까. 제가 정기적으로 전문 마사지사를 불러 마사지를 받고 있거든요. 제가 운동선수라서."

"운동? 너 운동해?"

"네."

"무슨 운동?"

"저희 대학 배구 선수예요."

도훈이 술술 거짓말을 했다. 실제로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으니 완전 거짓말은 아니었다.

"배구라고? 배구 선수 치곤 좀 작은 거 아닌가?"

당연히 185의 키는 배구 선수치곤 작은 편에 속했다.

"리베로에요."

"아, 그 수비 전문?"

"네."

"뭐 그럼 말이 안 되는 건 아닌데···."

채이도 눈치가 있었기에 도훈이 처음과 달리 조급해 한다는 걸 깨달았다. 매사 자신만만하던 그가 쩔쩔매는 모습을 보니 갑자기 놀리고 싶어졌다. 마침내 약점을 찾은 느낌이었다.

"어, 근데 여긴 왜 이래? 다 찢어졌는데?"

매의 눈으로 둘러보던 채이가 마사지 베드 가장자리에 날카롭게 찢긴 부분을 발견했다. 마치 발톱으로 할퀸 모양새였기 때문에 누가 봐도 수상한 흔적이었다.

'으앗, 저긴 어젯밤 린이 손톱으로 후벼판 자국이잖아?'

도훈은 순간 아찔했으나, 바로 둘러댔다.

"어, 그게···. 원래부터 그랬어요."

"원래부터라니?"

"중고로 구매했거든요. 알죠? 캐롯 마켓."

"호오. 그래?"

채이가 속으로 비웃었다.

다른 가전제품이나 가구가 모두 새것인 걸로 봐선 마사지 베드만 중고라는 것은 믿기지 않았다.

'…재밌는 구석이 있는데?'

누구나 남모르게 즐기는 은밀한 취미가 하나쯤 있다고 하지만, 도훈은 유독 특이한 것 같았다.

'나를 마사지 베드 용도도 몰라보는 바보로 본 거야? 이 자식 봐라?'

"이, 일단 나가죠. 차 다 끓여놨어요."

"그래."

작은 방을 나온 채이는 거실로 바로 돌아가지 않고 이번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어, 거긴 2층인데?"

"여긴 구경하면 안 돼? 혹시 다른 사람 사는 집인가?"

"아뇨, 제집 맞는데요."

"심심하니까 조금만 더 구경할게."

"저, 차는···."

"좀 식으면 어때서? 어차피 뜨거워서 식혀 먹어야 할 거 아냐?"

도훈의 약점을 잡은 채이는 계속 그를 곤란하게 할 목적으로 무턱대고 2층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이미 1층에서 마사지 전용 룸을 봐버린 이상, 2층에 어떤 기괴한 도구가 펼쳐져 있어도 별로 놀랍지 않을 것 같았다.

'이상한 고문 도구 같은 거 잔뜩 있는 거 아니야? 채찍이라든지 밧줄이라든지, 아니면 구속구 같은···.'

채이는 2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도훈에 대한 흥미가 팍 식어버렸다.

'변태 같은 새끼. 하여간 멀쩡해 보이는 놈들이 뒤로는 더 하다니까?'

세상엔 겉만 번지르르하고 속은 병든 사람이 많았다.

어린 시절 자신을 가르쳤던 코치라는 작자가 딱 그랬다.

아시안 게임 3관왕이니, 실력 좋은 훌륭한 코치니, 부부가 둘 다 메달리스트 출신이니 하면서 추켜세우는 유명한 사람이었으나 실상은 인간의 탈을 쓴 늑대에 지나지 않았다.

처음엔 굉장히 친절하고 세심하게 그녀를 지도하던 코치는, 언젠가부터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자꾸 스트레칭을 시키면서 몸은 더듬는다거나, 팔 각도를 올리라고 동작을 수정하면서 엉덩이에 발기된 잦이를 비벼대는 식이었다.

당시 어린 마음에 감히 저항할 수 없었던 채이를, 나이도 한참 많은 코치라는 작가는 온갖 방법으로 희롱했다.

심지어는 대회 전날, 직접 몸을 풀어주겠다며 아무도 없는 숙소에 불러서는 준강간에 가까운 짓을 벌였고, 그날로 채이는 운동을 그만두었다.

'개 같은 새끼. 어떻게 유부남에 애 아빠라는 새끼가.'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은 채이는 억울함에 육상부 감독에게 투서도 남기고, 교육청에 직접 신고까지 해보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늘 똑같았다.

자신이 너무 과민반응을 한다던가, 코치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든가, 더 심하게는 자신이 먼저 유부남에게 꼬리 치며 들이댔을 거라는 말도 안 되는 모함을 받기도 했다.

스트레스로 성적마저 부진했기에, 자신의 편을 들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진상조사라는 명목으로 몇 달간 지루한 시간 끌기가 이어졌고, 종국에는 가벼운 경징계 선에서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평생의 꿈을 잃은 것은 자신인데, 오히려 가해자는 잘해주려다 뒤통수를 맞았다는 식으로 주변에 이상한 소문을 내며 2차 가해를 이어갔다.

해당 사건으로 대인 기피증에 시달릴 정도로 힘들어했던 채이는, 그 무렵 사람을 상대하지 않고 일할 수 있는 퀵 서비스 일을 시작하면서 조금씩 상처를 추스를 수 있었다.

얼굴을 가린 헬멧은 세상의 풍파로부터 자신을 지켜주는 일종의 투구와도 같았다. 누구도 자신을 알아보지 않는 게 좋았고, 사고로 인해 팔에 문신을 새겼을 땐, 오히려 남자들이 자신에게 기가 눌린 모습을 보고 점점 자신감을 회복했다.

운동밖에 모르던 순진한 채이의 모습은 사라지고, 인간에 대한 불신, 사회 시스템에 대한 회의로 성격마저 반항적으로 비뚤어진 것도 이때였다.

몇 년 뒤 상처를 회복한 채이는 직접 복수하기 위해 코치를 찾았다. 하지만 해당 코치는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비슷한 건으로 끝내 구속된 이후였다.

선수 시절 커리어는 물론, 코치 경력 말소, 부인과 이혼하며 인생이 완전히 끝장나버린 그에게, 채이가 할 수 있는 건 욕을 한 바가지 퍼붓는 것이 전부였다.

복수로 해소되었어야 할 트라우마는 그렇게 앙금이 되어 가슴 싶이 남고 말았다.

'하여간 사내놈들은 다 똑같아. 그놈이 그놈이지 결국.'

채이가 오늘도 남성 혐오를 듬뿍 되뇌며 2층에 올랐다. 도훈이 안절부절하는 표정으로 뒤를 따랐다.

"왜 그래? 대체 뭐가 있길래?"

"그냥 개인 헬스장이에요."

"헬스장? 집에 헬스장이 있다고?"

"네. 제가 운동을 전문적으로 하다 보니까."

"잘됐네. 나도 운동 좋아하는데."

채이가 기대감(?)을 갖고 2층 운동 룸의 문을 열었다.

그러나 눈 앞에 펼쳐진 것은 잘 꾸며진 개인 트레이닝 룸이었다.

"어···. 진짜네?"

채이가 한 방 맞은 표정으로 도훈을 쳐다보았다. 괜한 오해로 그를 변태로 오해했는데. 실상은 근 손실 걱정으로 가득한 헬창이었던 것이다.

"그러게 제가 뭐라고 했어요. 저 운동하는 곳이라니까."

"아니 배구선수가 무슨 헬스를 이렇게까지나···."

"제 취미에요. 이제 내려가요."

도훈이 계속 등을 떠밀자 오기가 생긴 채이도 괜히 버티기 시작했다. 자신의 안목이 틀렸다는 걸 쉽게 인정할 수 없었다.

"들어오랄 땐 언제고 자꾸 내보내려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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