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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679화 (1,659/2,000)

1679. 빌드 업-14-

도훈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고민할 필요가 없도록 신께서 미션을 하사하셨군.'

[설마 이것도 의도하신 겁니까?]

'의도까진 아니고, 조건이 조성되긴 했지. 낯선 직업, 처음 보는 여성, 기구한 사연까지. 완벽한 3박자랄까? 솔직히 얻어걸린 거야.'

[하여간 운도 좋으신 분. 미션 내용을 띄워 드릴까요?]

'그래.'

-섹스 테라피.

*어린 시절 트라우마로 인해 남성 혐오를 가진 여성을 섹스로 치유하는 미션입니다.

*성공 보상으로 4,000포인트와 '섹스 테라피스트' 칭호가 주어 집니다.

*칭호 '섹스 테라피스트'는 관계를 맺은 여성들의 스트레스 지수를 극단적으로 낮춰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당신과 섹스를 나눈 여성들은 이제 마음의 평온을 느낍니다.

*제시된 시간을 초과하면 자동으로 미션이 소거됩니다.

*남은 시간 : 12시간.

도훈이 빠르게 미션 내용을 확인하는데, 채이가 갑자기 목소리 톤을 바꾸더니 더듬거리며 말했다.

"음음, 방금 말은 취소. 내가 좀 심했던 것 같아."

갑자기 확 바뀐 채이의 태도를 본 도훈은 매력 버프의 영향이라고 생각했다.

'그거네. 운동선수 호감도 버프.'

[네?]

'채이도 한때 육상 선수를 희망했잖아. 지금도 주짓수를 배우고 있고. 그러니 나의 운동 능력에 본능적으로 호감을 느낀 것 같아.

버프까지 얹어서.'

채이가 먼저 사과하자 도훈 역시 한결 태도가 누그러졌다.

"아니에요. 근데 전 그쪽이 여자라서 무시한 게 아니라, 정말 배달이 급해서 그런 거예요. 혹시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때요?"

"어떻게요?"

도훈이 전혀 새로운 제안을 했다.

"저도 물건을 시간 내로 전달해야 하는데, 그쪽은 로커에 직접 넣는 건 절대 못 하겠다면서요."

"그거야, 앞서 설명했듯이···."

"아니에요. 이해해요. 처음 보는 사람이 어떤 물건을 맡기는 줄 알고 지하철 로커에 대신 넣어주겠어요? 그러니까, 그냥 저를 배달해 주세요."

"응?"

"절 지하철역까지 태워 달라고요. 제가 직접 넣을 테니까."

"아···."

"택시 불러서 가는 것보단 빨리 갈 수 있죠? 명색이 퀵인데."

도훈의 도발에 채이가 발끈했다.

"장난해요? 도심에서 바이크 보다 빠른 건 없다고 자부해요."

"알았어요. 그럼 저 데려다줘요. 배달비는 똑같이 치를게요. 그럼 서로 기분 나쁠 일도 없죠?"

"그거야 그렇지만."

채이는 도훈의 새로운 제안에 잠시 망설이다 불쑥 악수를 청해왔다.

"오케이, 콜. 방금은 화내서 미안해요. 내가 보기보다 다혈질이라."

"이해해요. 근데 몇 살이에요? 저보다 어려보이는 것 같은데."

도훈은 동안이라며 채이를 띄웠다.

그 말에 채이가 처음으로 수줍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 아니에요. 스물여섯인데. 그쪽은?"

"스물셋요. 저보다 누나였구나. 이도훈입니다."

"난 윤채이. 나보다 동생이니까 말 편하게 할게?"

"그러세요."

"통성명 끝났으니 바로 출발할까?"

채이가 바이크 측면 트렁크에서 헬멧을 하나 더 꺼냈다.

"이거 써."

"하이바 꼭 써야 해요?"

"사고 날까 위험해서가 아니라, 교통경찰한테 걸리면 범칙금 물어서 그래."

"알았어요."

도훈이 헬멧을 쓰고 바이크 뒤에 앉았다. 마찬가지로 헬멧을 쓴 채이가 말했다.

"꽉 잡아. 생각보다 빠르니까."

"뭘 그런걸···. 어엇!"

채이가 갑자기 바이크를 출발시켰다.

배기량이 큰 만큼 채이의 바이크가 악셀을 당기자마자 급발진 하듯 튀어 나갔다. 도훈이 반사적으로 채이의 허리를 얼싸안았다.

'이것 봐라? 방금 일부러 그런 거지?'

[주인님을 시험하는 걸까요?]

'그런 의도가 다분해 보이는군.'

퀵 서비스를 오랫동안 해온 채이의 라이딩 실력은 수준급이었다.

순식간에 대학을 빠져나가더니 도로를 달리면서도 차와 차 사이를 요리조리 통과하며 빠른 속도를 유지했다.

도훈은 느슨하게 허리를 감싸 안으며 최대한 밀착을 피했다. 성추행 트라우마가 있는 그녀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부아아아앙-

빠르게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던 채이가 사거리에서 신호를 받고 멈춰 섰다.

"속도는 어때? 마음에 들어?"

"딱 좋은데요?"

"그래? 좀 더 당겨도 돼 그럼?"

"좋으실 대로."

채이는 허리를 느슨하게 잡는 도훈의 반응에 살짝 자존심이 상한 상태였다. 일부러 무섭게 달려 겁먹게 하려고 했는데 전혀 쫄지 않은 것이다. 마치 자신의 실력을 무시하는 느낌이었다.

'꼴에 남자라고 자존심 세우기는. 귀여운 자식.'

신호가 바뀌자 채이가 급가속으로 튀어 나갔다.

하지만 도훈은 이미 적응을 마친 이후라 허벅지에 힘을 꽉 주고 하체를 몸체에 단단히 고정해 둔 상태였다. 더구나 최근 제주도에 바이크를 직접 몰아봤기 때문에 특유의 속도감에는 이미 적응이 끝난 상태.

속도를 더 올렸음에도 여전히 도훈이 허리를 느슨하게 쥐는 모습에 채이가 기어코 급격한 방향 전환을 시도했다.

'끝까지 버텨 보시겠다? 이래도?'

바이크 몸체가 거의 45도까지 기울어지는데도 도훈은 특유의 균형감각으로 버텨냈다. 서커스에 가까운 묘기였다.

'대체 뭐지? 어떻게 허리도 안 잡고 버티는 거지?'

이쯤 되자 채이는 도훈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순식간에 목적지에 도착한 채이가 지하철역 입구에 멈춰 섰다.

"도착. 여기 맞지? 3번 출구."

"진짜로 빠르네요. 고마워요. 계산은 그럼···."

도훈이 퀵비용을 건네려고 하자 채이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거절했다.

"얼른 일 보고 와. 여기서 기다릴 테니."

"네?"

"다시 돌아가 봐야 할 거 아니야? 예정에도 없는 지하철역에 왔으니. 태워다 줄게. 비용은 그때 가서 계산해."

도훈은 어깨를 으쓱하며 물었다.

"설마 왕복 요금으로 받는 거 아니죠?"

"뭐래? 마음 바뀌기 전에 얼른 다녀오기나 해."

"알겠어요."

도훈이 지하철역으로 서둘러 내려갔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주인님이 아무것도 안 했는데, 채이양의 태도가 사뭇 바뀐 것 같은데요?]

'아무것도 안 한 건 아니지. 무려 테스트를 이겨냈잖아.'

[그게 무슨···.]

'사나이 테스트는 통과했으니 이다음에도 그녀의 흥미를 끌 수 있을지 지켜봐야지.' 지하철 로커에 도착한 도훈은 빈 로커에 현금 2억을 채워 넣었다. 인벤토리에 담아둔 현금 뭉치를 꺼내 넣는 것이기 때문에, 누가 보면 마치 로커 안에서 저절로 돈이 쏟아지는 것처럼 보였다.

필요한 만큼 돈을 채워 차곡히 쌓은 도훈은, 대포폰을 이용해 최번개에게 로커 위치와 번호, 설정한 비번을 남겼다.

'오케이. 이걸로 착수금 전달은 끝났고.'

[이제 다시 채이양에게 돌아가실 겁니까?]

'응. 미션도 받았겠다 12시간 이내에 공략하려면 서둘러야지. 어차피 최번개가 호빠 마담들을 통해 정보를 알아 오는데 하루정도 걸린다고 했으니.'

도훈이 다시 지하철역 입구로 올라가자, 채이가 바이크에 기대선 채 담배를 입에 물고 있었다. 멀리서 그녀를 본 도훈이 혀를 끌끌찼다.

'아이고, 문신에 흡연까지 아주 가지가지 하는구먼?'

[주인님도 흡연하시면서 누가 누굴 비난하십니까?]

'그렇긴 한데, 여자가 몸에 문신하고 흡연까지 하면 아무래도 헤퍼 보이는 게 사실이니까.'

[헤프기로는 국성대 난봉왕이 더.]

'야. 너 요새 자꾸 개긴다?'

[아닌데요?]

'암튼 윤채이가 필요 이상으로 폼 잡는 버릇이 있네.'

[나름 멋있는데요? 키도 크고 얼굴도 예쁜 편이라 모델 핏처럼 나오고요.]

'뭐, 그건 인정.'

도훈이 채이 쪽으로 걸어가는데, 누군가 그녀에게 다가가 말을 거는 모습이 보였다. 낯선 남자였다.

'응? 저건 또 누구야?'

도훈이 일부러 걸음을 멈추고 먼 거리에서 청력을 돋우며 둘의 대화를 엿들었다.

-요, 새끈한 누님, 오토바이 좆간진데? 나 한 번만 태워줄···.

-꺼져. 처맞기 싫으면. 어디서 씨발, 좆같은 면상 들이밀어? 뒤지고 싶구나, 니가?

-어, 어···, 예 죄, 죄송합니다!

대충 내용을 들어보니 채이의 미모에 혹해 헌팅을 시도하던 남자가 보기 좋게 퇴짜를 맞는 모습이었다. 도훈이 그걸 보고 빵 터졌다.

'푸하하. 성깔하고는. 진짜 남자를 좆으로 보는구나?'

[덩치 좋은 주인님한테도 안 꿀렸는데, 누군들 안 우습겠습니까?]

'그러게. 대체 무슨 자신감이지?'

[주짓수 블루 벨트라서 그런 걸까요?]

'주짓수라···. 물론 실전성이 높은 무술이긴 하지. 그래도 저건 어지간한 남자라면 모두 벽치겠다는 태도로 밖에는 안 보이는데.'

[약자 멸시가 패시브라서 그런가 봅니다. 강자 추종도 있지만요.]

'강자 추종. 강한 남자하면 또 나지. 그래, 잘 됐다. 그걸로 한번 꼬셔봐야겠다.'

[뭘로요?]

'주짓수.'

[근데 주인님 주짓수 안 배우시지 않습니까?]

'까짓거 뭐 있겠어?'

채이에게 접근한 남자가 퇴짜를 맞고 물러나는 걸 확인한 도훈이 성큼성큼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다녀왔어요."

"일찍 왔네? 그래, 마약 거래는 잘하고 왔어?"

"에이, 마약 아니라니까 그러네."

채이가 짓궂은 농담을 멈추지 않았다. 조금 전 그녀의 박력 넘치는 거절을 엿들은 도훈은, 그녀가 쌍욕을 박지 않는 것만으로도 자신을 나름 예우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럼 뭔데? 설마 현금?"

"어? 어떻게 알았어요?"

"얼만데? 천만 원쯤 돼?"

"이억요."

"아이고, 억 소리가 절로 나는 구나! 하하!"

도훈은 진실을 말했으나 농담이라고 생각한 채이는 호탕하게 웃어넘겼다. 사실대로 말한 도훈은 가타부타 덧붙이지 않고 어깨만 으쓱할 뿐이었다.

"암튼 타, 학교로 다시 데려다줄게."

"저 수업 끝나서 학교로 돌아갈 필요 없는데요?"

"엉? 진짜?"

"기왕 태워다 주신다고 했으니 그럼 집으로 데려다주세요."

"나랑 장난해? 약속하고 다르잖아."

"여기서 대학교로 돌아가는 거나 우리 집 가는 거나 별 차이 없거든요."

"그래도 이건 아니지. 내가 무슨 개인택시도 아니고."

"알았어요. 추가 요금 더 드릴게요. 됐죠?"

"야! 너 아까부터!"

도훈은 돈 얘기를 꺼내면 채이가 신경질적으로 반응한다는 것을 알고 일부러 찔러본 것이었다. 예상대로 채이가 역정을 내자 도훈이 곧바로 말을 바꾸었다.

"그럼, 미안하니까 밥이라도 드시고 가든지요."

"밥? 너희 집에서?"

"저녁 시간 다 됐잖아요. 그 정돈 괜찮죠?"

"집에 부모님 안 계시니?"

"같이 안 사는데요?"

"아, 원룸이야?"

"그건 아닌데···."

의외의 제안에 채이가 다시 호탕하게 웃었다. 그녀는 고분고분말 잘 듣는 남자보다, 엉뚱하고 도발적인 사내를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풉-. 너 좀 웃긴다? 지금 나한테 작업 거는 거니?"

"작업이면 라면 먹고 가라고 했겠죠."

"아하하하하! 라면이래!"

채이가 고개를 하늘로 쳐들더니 호탕하게 웃었다. 시답지 않은 농담에도 깔깔거리는 모습이 은근 귀여웠다. 도훈은 그녀가 다짜고짜 쌍욕을 박으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높은 호감도 덕분인지 반응은 먼젓번 헌팅남과 극과 극으로 갈렸다.

"누나 보기보다 무서운 사람이야, 까불지 마라."

"그래서 태워 줄 거예요, 말 거예요?"

"좋다. 기분이다. 타. 어차피 콜도 안 들어오는데."

도훈을 다시 바이크에 태운 채이가 집으로 출발했다. 말한 대로 도훈의 집은 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다.

"여기요."

"여기라니?"

도훈이 근사한 2층 주택을 가리켰다.

"다 왔다고요. 여기가 제가 사는 집이에요."

채이가 믿기지 않는지 헬멧을 벗더니 다시 한번 주택을 쳐다보았다. 서울 단독주택 가격을 아는 그녀로서는, 입을 쩍 벌릴 수 밖에 없었다.

"정말 여기가 너 혼자 사는 집이라고?"

"네."

"농담하지 말고. 나 갑자기 설레려고 그러니까."

"왜요? 막상 집 보니까 라면 먹고 가고 싶어졌어요?"

"푸하하, 그만 웃기라니까. 근데 진짜 너네 집 맞아?"

도훈 씩 웃더니 대문 열쇠를 꽂고 문을 열어 주었다.

"봤죠?"

"와, 진짠가 보네?"

"안 들어올 거예요?"

채이가 잠시 망설이더니 대답했다.

"흠, 그래도 초면인데 같이 식사하긴 좀 그렇지 않나? 그냥 마음만 받을게. 나 어차피 좀 있으면 운동 가야 할 시간이거든."

하지만 미션이 걸린 도훈도 포기할 수 없었다.

12시간 이내 공략이었기 때문에 다음을 기약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식사가 부담스러우면 차라도 한잔 하고 가든지요. 그 정도 시간은 되지 않아요?"

채이가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음···. 30분 밖에 없는데."

아마 채이가 말하는 운동이란 주짓수 도장에 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집까지 태워주셨는데, 그냥 보내면 저도 마음이 불편해요."

"···그런가? 근데 너 혼자 사는 거 맞지? 나 들어가서 쪽팔리기 싫으니까 얼른 솔직히 불어."

"에이, 속고만 살았나. 누가 보면 유괴하는 줄?"

"웃기시네. 내가 너 무서워서 그러는 것 같니? 그래. 간다. 가."

바이크를 담벼락에 세운 채이가 도훈을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

의외로 도발에 쉽게 걸려드는 단순한 성격이라고, 도훈은 생각했다.

'확실히 단순한 성격이긴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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