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5. 빌드 업-10-
"무슨 소식?"
"얀마, 형 지난주 미국 있다 왔잖아. 들었겠냐?"
"아, 맞다. 암튼 형 없는 동안 사범대 난리 났어요."
"사범대에서?"
"네, 윤리교육과 횡령 사건요."
"횡령?"
처음 듣는 소식에 도훈이 귀를 쫑긋 세웠다.
"네. 거기 총무가 학생회비 들고 잠적해 버렸다나? 심지어 저번 축제 주점 때 술이랑 안주까지 싹 다 외상 달아놓고선 매출까지 다 들고 날랐데요. 정산 하나도 안 해주고."
"와, 완전 도둑놈이네?"
"놈이 아니라 년이요. 암튼 그것 때문에 학교 완전 뒤집혔어요.
피해액이 이천만 원이 넘는다던가? 윤리과는 지금 초상집 분위기예요. 걔 못 잡으면 자기들이 각출해서 메꿔야 한다더라고요."
"왜 날른 건데? 이유가 뭐야?"
"뭐라더라? 뭐 때문인지는 몰라도 빚을 크게 져서 사채를 당겼다나? 그거 안 갚으면 조폭들이 쫓아와 죽인다고 해서 학생회비 들고 날른 거래요."
"어이가 없네. 그렇다고 공금에 손을 대? 총무가?"
"문제는 그 일 때문에 대학 본부 측에서 학생회비를 직접 감사한다고 했대요. 형도 미리 알아 두셔야 할 것 같아서."
"그러니까 학생회비를 대학에서 회계 감사를 한다는 거지?"
"네. 이번 건으로 경찰까지 학교에 들락거리니까 선제적으로 대응한다더라고요. 하필 그 일이 사범대에서 터지는 바람에, 저희 과도 조만간 감사 들어올 거래요. 지금 총무가 1학년 서현이 맞죠?"
"그렇지."
"서현인 똑똑하니까 알아서 잘 해놨겠지만, 나중에 따로 얘기해 보세요. 괜히 별것도 아닌 일 때문에 꼬투리 잡히면 회장인 형만 입장 곤란하니까요."
"그래. 알려줘서 고맙다."
[별일이 다 있군요. 대학생이 학생회비를 들고 튀다니.]
'아예 없는 일은 아니야. 나 대학 다닐 때도 드문드문 있었어. 근데 고작 이천만원에 빨간 줄을 긋다니. 누군지 몰라도 인생 한 번 제대로 조졌군.'
[이천만원이 주인님에게야 껌값이겠지만, 대학생에게 결코 작은 돈은 아니죠.]
'그렇다고 도둑질이 말이 되냐? 부모님한테 손을 벌려서라도 수습 했어야지.'
[그렇긴 하네요.]
어쨌든 회계 감사가 있을 거라는 소식에 도훈도 대비를 해야 할것 같았다. 전생에 회사 생활을 오래 했던 그였기에, 감사라는 것이 얼마나 사람을 피곤하게 할 수 있는지 잘 알았다. 마음먹고 털면 못털 사람이 없는 게 감사라는 것이었다.
도훈은 서현에게 연락해 오후에 학과실에서 보자고 메시지를 남겼다. 쉬는 시간이라 답장이 곧바로 왔다.
-박서현 : 앗! 오빠 학교 돌아오셨어요? 걱정했어요. 아버님은 괜찮으세요?
-이도훈 : 응. 다행히 큰 병은 아니셨어. 걱정해줘서 고마워. 다름이 아니라 대학에서 학생회비 감사를 한다고 하던데 소식 들었어?
-박서현 :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지난주부터 저희가 쓴 영수증이랑 지출 내역 싹 다 모아놨어요. 이제 엑셀 파일로 정리만 하면 돼요.
-이도훈 : 역시 우리 총무는 믿음직하구나. 이따 수업 끝나고 보자.
-박서현 : 네, 오빠♥
다시 수업에 들어간 도훈은 모처럼 강의에 집중했다. 일주일간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동기들 노트를 빌려 지난 시간에 필기한 내용을 사진으로 찍기까지 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보내다 보니 어느덧 수업이 끝났다.
만나기로 약속한 서현은 아직 수업이 남아있었으므로 도훈은 남는 시간을 때울 겸 조교실을 방문했다. 일주일간 자신의 편의를 봐준 민주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서였다.
"안녕하세요, 조교 선생님."
"어? 도훈 학생!"
민주는 조교실에 함께 근무하는 보조의 눈치를 보느라 사무적으로 응대했다. 그러나 눈빛이 반짝이는 걸 보니, 그의 방문을 종일 기다렸던 모양이다.
"네, 덕분에 잘 다녀왔어요."
민주가 하던 일을 중단하고 도훈을 응대했다.
"별일 없으면 차라도 한 잔 마시고 가지?"
"그럴까요?"
"뭐 마실래? 커피?"
"좋죠."
민주는 조교실의 냉동실 문을 열어보더니 아쉽다는 듯 말했다.
"아이고, 얼음을 얼려 놓는다는 걸 깜빡했네.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만들어 줄랬는데."
"전 괜찮아요. 그냥 마실게요."
"그래도 그건 아니지. 여름엔 얼어죽어도 아이스잖아."
"지금 가을 아니에요?"
"그래도 낮엔 더우니까. 저기, 한솔샘?"
"네?"
"우리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씩 마실까?"
"배달시킬까요?"
"음, 난 학생회관에서 파는 게 맛있던데. 거긴 배달 안 되지?"
"네. 배달하기엔 거리가 좀."
"그래? 그럼 내가 가서 사올까?"
민주가 계속 답정너를 시전하자 눈치가 있던 보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조교선생님. 제가 다녀올게요."
"어머, 한솔샘! 그래 주면 나야 고맙지. 오는 길에 간식으로 조각 케익도 사오면 더 좋고."
민주가 신용 카드를 내밀며 부탁했다. 하급자에게 사적인 심부름을 시키는 느낌이지만, 도훈은 굳이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민주가 자신과 단둘이 있기 위해 걸리적거리는 보조를 내보낸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냉동실에 얼음이 없던 것도 아마도 고의적인 것 같았다.
"조교샘은 커피 뭘로 드세요? 아아?"
"응, 도훈이랑 나는 아아. 한솔샘은 먹고 싶은 골라. 비싼 거 사도 돼."
"저 그럼 자바칩 프라푸치노 먹어도 돼요?"
"응, 얼마든지. 내가 쏠게."
"아싸!"
보조인 한솔이 신난 표정으로 조교실을 빠져나갔다. 그녀가 나가자 도훈이 어깨를 으쓱하며 물었다.
"너무 부려 먹는 거 아니야? 학생인 내가 다녀왔어야 할 심부름같은데."
"히히. 걱정 마요. 한솔 샘, 그 커피숍 가는 거 되게 좋아하거든요."
"응? 왜?"
"거기 일하는 남자 알바가 딱 자기 취향이라나? 맨날 점심 먹고 나면 저한테 거기 가자고 졸라요. 얼굴 도장 찍고 온다면서."
"아하. 그런 사정이."
이상하게도 학교 조교실 보조인 한솔은 도훈에게 딱히 관심이 없는 편이었다. 물론 도훈도 한솔을 듣보잡 취급하긴 했다.
세상 모든 여자들이 도훈을 마음에 들어하는 것도 말이 안 되긴 했지만, 유독 관심이 없는 걸 보면 궁합이라는 게 존재하긴 하는 모양이었다.
도훈은 모르긴 몰라도 정보창으로 한솔의 호감도를 보면 50이하가 나오지 않을까 생각했다.
"아참, 아버님 건강은 괜찮으세요? 걱정 많이 했어요."
"다행히 별 건 아니었어. 검사 결과가 잘 나왔거든. 그냥 겸사겸사 가족들 얼굴 보러 간셈 치려고."
"다행이네요."
"암튼 고마워. 출결 처리 잘해줘서. 우리과 수업은 그렇다 쳐도, 다른 과에 부탁하기 곤란했을 텐데."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주인님의 일인데 제가 당연히 발 벗고 나서야죠."
"다음엔 발 벗지 말고."
"네?"
"빤스부터 벗는 건 어떨까?"
"아, 앗!"
도훈이 민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피스룩으로 예쁘게 차려입은 민주가 도훈의 옆에 찰싹 붙었다.
"힝, 주인님 너무 보고 싶었다고요."
"미안. 바로 오고 싶었는데 수업은 끝나고 와야 할 것 같아서."
소파에 나란히 앉은 도훈이 민주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녀의 몸에서 진한 향기가 풍겼다. 대학생에게는 쉽게 맡아 볼 수 없는 분냄새였다. 도훈은 스무살인 8선녀들과 조교 민주의 가장 큰 차이는 이러한 화장품 냄새가 아닐까 생각했다.
"평소보다 화장에 힘을 많이 준 거 아니야?"
"오랜만에 주인님 보는데 예쁘게 보이고 싶어서요. 오늘 좀 잘먹었어요?"
"응. 근데 민주는 화장 안 해도 예쁘잖아."
"아앗. 부끄럽게."
도훈이 어깨를 두른 손을 밑으로 내리더니 민주의 젖가슴을 옷위로 주물렀다.
"여긴 못 본 사이에 좀 커졌으려나?"
"아, 아앙, 주인니임."
도훈이 장난감처럼 민주의 가슴을 주무르며 물었다.
"그나저나 아까 전공 수업할 때 동기들이 학생회비 감사 얘기를 하던데? 혹시 아는 거 있어?"
"아···. 윤리교육과 사건 말씀이시죠?"
"응. 총무 맡은 학생이 돈 들고 날라버렸다면서? 그게 무슨 얘기야?"
옷 위로 가슴을 주무르던 도훈이 블라우스의 윗단추를 풀더니 브래지어 안으로 손을 넣어 주물럭거렸다. 민주는 도훈에게 가슴을 완전히 내준 상태로 대답했다.
"그게···. 안 그래도 조교 모임 때 거기 조교하는 친구한테 직접 들었거든요? 여학생 한 명이 사고를 크게 친 것 같더라고요."
"사고?"
"저도 전해 들은 이야기라 정확한 내용은 모르지만···."
민주가 해당 횡령 사건에 대해 들은 이야기를 도훈에게 전달했다.
윤리교육과 총무는 3학년에 재학 중인 여학생으로, 평소 품행이 바르고 교수들에게 깍듯해 평판이 무척 좋았다고 한다. 학생들 사이에서도 신망이 두터운 편이었다고.
"강채은이라는 학생인데 저도 예전에 잠깐 본 적 있거든요. 되게 착하고 예쁘장하게 생겼어요."
"그래?"
"아, 앙! 주인님, 꼭지는··· 오늘 예민한데···."
"나 신경 쓰지 말고 계속해 봐. 평소에 평판도 좋고 품행도 바른 여학생이 갑자기 무슨 큰돈이 필요해서 그런 사고를 쳤을까?"
민주가 계속 이야기를 전했다.
사건의 내막을 파악하기 위해 주변인 조사를 하던 중 전혀 예상치 못한 내용이 튀어나왔다고 한다.
"채은이가 최근 질 나쁜 남자애랑 어울렸나 보더라고요."
"질 나쁜 남자애?"
"뭐라더라? 호스트 빠에서 일하는 남자랑 만났다던가?"
"대학생이 호빠를 다녔다고?"
실제 호빠에서 일한 적이 있던 도훈은 선뜻 이해되질 않았다. 호빠에 일하는 남자 대학생은 있어도, 손님으로 놀러온 사람 중 여대 생은 거의 없었던 것. 호빠는 기본적으로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학생이 용돈 받아서 갈만한 곳은 아니었다.
"음, 윤리과 조교가 경찰들이 와서 얘기하는 걸 슬쩍 엿들었다는데 전문용어로 공사를 당했다나 봐요."
"공사라고?"
채은은 제 발로 호빠를 찾아간 게 아니었다. 처음엔 백화점에 쇼핑하러 갔다가, 선수에게 헌팅을 당했다. 물론 그때는 선수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단순히 직장인 정도로 알았던 모양이다.
"그러다 나중에 가까워지고 나서 본인이 호빠 선수라는 걸 밝혔다나 봐요."
"그땐 이미 늦었군."
"네. 그러다 가게에 한 번 놀러오라고 하도 졸라서 몇 번 방문을 했는데···."
다음 이야기는 안 봐도 뻔했다.
호빠 놈들이 순진한 여대생을 공사 쳐 잔뜩 빚을 지게 만든 것이다. 채무 상환 압박에 시달리던 채은은 결국 총무라는 지위를 이용해 공금을 횡령해 버렸고.
"정신 나간 계집애네. 결국엔 잡힐 거고 감옥 안가려면 부모님이 대신 물어줘야 할텐데."
"그러니까요. 근데 경찰에서도 아직도 행방을 못 찾고 있나 봐요. 집에서 실종 신고까지 냈다는데···."
"흠."
[혹시 범죄에 연루된 것 아닐까요?]
'대충 견적 나온 것 같아. 빚을 갚았는데 행방이 묘연하다면 뭔가 더 있을지도.'
[흐음. 어린 학생이 불쌍하게 됐군요. 하필 걸려도 호빠 선수에게 물리다니.]
'본인이 자초한 거야. 얼굴 반반한 남자 만나보려다 호구 잡힌 거지. 호빠 선수들이 얼마나 독한 놈들이 많은데? 처음엔 간이고 쓸 개고 다 빼줄 것처럼 살랑살랑거리다가, 나중엔 빨대 꽂아서 골수까지 빼먹는 새끼들이라고. 하여간 더러운 새끼들. 무슨 여대생을 공사친 담? 하고 많은 여자들 놔두고.'
[주인님은 예전에 빻은 얼굴 퀘스트를 해놔서 그쪽 생리에 빠삭하시겠군요.]
'그렇지 뭐. 근데 뭐 내가 신경 쓸 필요 있나? 아는 여자도 아니고.'
[그렇긴 합니다. 주인님이 무슨 정의의 사도는 아니니까요.]
정의의 사도라는 말에 도훈은 문득 제주도에서의 사건을 떠올렸다. 한 번은 유괴범에 납치되어 죽을 뻔한 여자를 구출했던 일이었고 또 다른 것은 폭발 직전의 차량에서 두 사람을 꺼내 목숨을 구한 일이었다.
두 사건 모두 정작 당사자는 기절한 상태라 감사 인사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도훈이 도와줬다는 공식적인 기록도 남지 않았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도 뿌듯한 경험이었다. 자신이 가진 능력으로 누군가의 생명을 구했다는 데서, 도훈은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미션에 대한 보상도, 업적을 해결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가슴 한 켠에서 정의로운 일을 했다는 충만감으로 가득했다. 본인의 이득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람이 아니라, 세상에 조금이라도 쓸모있는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정의의 사도는 절대 아니지.'
도훈은 이내 생각을 접었다.
지금도 범죄는 수없이 벌어지고 있다. 피해자들이 불쌍하다고 매번 직접 나설 순 없는 일이었다. 당장은 PK단의 강화된 감시를 피해 업적을 해결하기도 벅찼다.
제 코가 석잔데 누가 누굴 돕는단 말인가.
도훈은 감상적인 생각을 떨쳐버리고 슬슬 한 손을 민주의 치마밑으로 집어넣었다. 민주가 커피색 스타킹을 신고 있었기 때문에 허벅지 안쪽을 쓰다듬자 까슬까슬한 촉감이 밀려왔다.
그의 손이 가랑이 사이까지 파고드는 순간, 도훈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어? 노팬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