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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669화 (1,649/2,000)

1669. 빌드 업-4-

실내에서 담배를 피울 순 없었던 도훈은 나이트 가운 하나만 달랑 걸치고 2층 테라스에 올랐다. 린 역시 도훈의 면티를 빌려 입고 하의실종 상태로 다리를 후들거리며 따라갔다.

도훈의 주택은 2층에 체력 단련실과 그 앞으로 방 한 칸 크기의 널찍한 테라스가 설치되어 있었다. 난간에 기대선 도훈이 손끝에 불을 일으켜 담뱃불을 붙였다.

"···어? 지금 그거 화염 마법이야?"

손끝에서 촛불처럼 타오르는 불길을 보고 린이 놀라 물었다.

"아니. 내공."

"내공으로 불꽃을 일으킨다고? 언제부터?"

"좀 됐어."

"신기하군. 무슨 무공을 익힌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리 와. 너도 붙여 줄게."

린이 다가가자 도훈이 손가락에 일으킨 불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도훈이 어느새 어두워진 동네 풍경을 둘러보며 말했다. 골목길 사이에 가로등 하나만 켜져 있을 뿐, 행인도 차도 거의 없었다.

"난 이 동네 조용해서 좋더라."

"꽤 비싸 보이는데 돈이 많나 봐?"

"돈? 돈이라면 다 쓰고 못 죽을 만큼은 있지."

"······."

린이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 억울해하는 느낌이라 도훈이 의아해 물었다.

"왜? 잘생기고 잦이 큰놈이 돈까지 많다니까 억울해?"

"그게 아니라···."

"그럼?"

"플레이어는 참 편하게 사는구나 싶어서."

"무슨 소리야?"

그때 바람이 두 사람에게 불어왔다. 끈을 묶지 않은 도훈의 가운이 좌우로 벌어지며 잦이가 훤히 드러났지만, 늦은 저녁 시간이라 훔쳐보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PK단은 주어진 능력을 활용해 사적 이득을 취하는 걸 엄격히 금지하고 있거든."

"어? 그럼 어떻게 생활하는데? 따로 월급 받나?"

"월급은 무슨. 활동비라고 주긴 주는데 쥐꼬리만큼도 안 돼. 그래서 각자 자기 일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어."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마치 중세시대 수도승이나 고명한 스님들처럼 무소유를 실천하고 있다니.

"대체 왜?"

도훈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그의 입장에서 PK단은 죄 없는 플레이어를 살해하는 악당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제껏 살면서 영세하고 가난한 악당은 들어본 적 없었다.

명색이 악당이면 남의 것을 빼앗고, 훔치고, 갈취한 재산으로 떵떵거리며 살아야 하는 게 정상 아닌가?

"나도 잘 몰라. 사실 나는 외부인에 가까워서 그들의 조교 적인 신념에 대해 굳이 알고 싶지도, 궁금하지도 않거든. 하지만 그들은 그런 행위를 통해서만 자신의 능력이 계속 유지된다고 믿는 것 같더라고."

"흐음. 아무리 그래도 이해가 잘 안 되는데? 그럼 PK단원들은 평소엔 생계를 유지하다가, 플레이어가 발견되면 우르르 모여서 사냥하러 다닌다는 거야? 아무 보상도 없이?"

"대충은 맞아. 그리고 보상이 아예 없는 건 아니고, 실적이 좋으면 승진해서 위로 올라갈 수 있지."

린이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위라니?"

"본부 말이야. 쉽게 말해 공무원 조직에 빗대면 편해. 지부가 최소단위이고, 지부장은 구청장쯤 되는 위치지. 지역장은 시장이나 도지사급? 본부는 고급 공무원들이 포진된 중앙 정부라고 할 수 있지."

"나름 체계적이군."

"물론 나도 정확한 규모에 대해선 알지 못해. PK단은 철저한 점조직으로 움직이고 있어서 본부급 간부가 아니고선 전체 규모를 파악할 수 없도록 되어 있거든. 그냥 인접 지역에 어떤 지부가 있더라. 지부장이 누구더라 정도만 알음알음 알 뿐이지."

"그럼 간부에 올라가면 부귀영화가 주어지나?"

"부귀영화라니?"

"아니, 보상이 있으니까 힘든 지부 생활을 거치고 바득바득 승진하려는 거 아니야? 그게 아니면 말이 안 되는데?"

도훈의 상식으로는 여전히 이해가 안 가는 체계였다.

말이 사냥이지, 플레이어 헌팅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제주 지부 학살 사건 때만 보더라도 윤보미 한명을 상대하다가 20명 가까이 목이 날아갔다. 플레이어와 PK단의 관계는 결코 한쪽이 유리한 일방적인 구도가 아니었다. 서로 죽고 죽이는 사생결단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등급이 낮은 플레이어들은 사냥을 당하지만, 고수나 랭커까지 승급한 플레이어들은 역으로 PK단을 학살한다.

그것이 도훈이 알고 있는 둘의 관계였다.

"글쎄, 본부 쪽 시스템에 대해선 전해 들은 바가 없어서···."

"뭐라도 있겠지. 사람인 이상 아무 동기 없이 목숨을 바치는 건 말이 안 되는데?"

"아, 그걸 말하는 거구나?"

"거봐. 뭔가 있지?"

"음, PK단엔 육성교라고 1년 가량 견습 교육을 받는 시스템이 있어. 일종의 사관 학교같은?"

"사관학교?"

"응. 물론 난 외부인사라 거길 직접 가 본 적은 없지만, 모든 단원들은 평생 한 번쯤 거치는 곳이지."

"호오."

"거기서 플레이어를 헌팅 방법이나 여러 규율을 배우게 되는 데, 아마 정신 교육 내용 중에 있을 거야."

"정신교육?"

"응. 일종의 종교라고 해야 하나?"

"종교라···."

"PK단에선 이를 카르마라고 부른다더군."

"카르마? 업보 말이야?"

"비슷해. 살아생전 플레이어를 많이 처단하면, 사후 천국에 갈수 있다는 거지."

"아니 무슨···."

하지만 이번에는 도훈도 쉽게 부정할 수 없었다.

본인도 당장 천당과 지옥의 갈림길에서 염라대왕에게 심판을 받은 적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람을 많이 죽일수록 천국의 문에 가까워진다는 말은 그야말로 희대의 개소리라고 생각했다.

"그게 말이 돼? 설사 나중에 천당과 지옥으로 갈 수 있다고 쳐.

근데 플레이어를 죽인다고 천당에 가다니? 플레이어도 사람이라고!"

"흠, 입장의 차이가 있을 순 있는데 PK단에게 있어 플레이어란 신의 어릿 광대에 불과해."

"어릿 광대라니?"

[주인님. 린의 말에 현혹될 필요 없습니다. 놈들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니까요.]

'내가 알아서 걸러 들어.'

"그래. 신들의 유희를 위해 만들어진 일종의 장난감 말이야. 신들은 플레이어의 삶은 멀리서 관찰하지. 때론 내기를 걸기도 하고, 후원 해주는 신도 있어."

"설사 그게 모두 사실이라고 해도 그게 플레이어를 죽이는 이유가 될 순 없어. 역사상 얼마나 많은 플레이어들이 인류를 위해 희생해왔는데?"

"우리도 부정하지 않아."

"그럼 뭐가 문젠데?"

"도훈, 나한테 화낼 필욘 없어. 난 엄밀히 말하면 PK단 소속도 아니고 그렇다고 플레이어 쪽도 아니야. 둘 중에서 내 생존에 도움이 되는 곳에 협조할 뿐이지. 그러니 이건 최대한 중립적인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말하는 거야."

"그럼 말해봐. 플레이어가 PK단에게 사냥당해야 할 이유가 뭔지."

"흠···. 전에도 한번 말한 것 같은데, 플레이어가 선보이는 강력한 힘의 원천은 다른 게 아니야. 바로 지구의 생명력이지."

"생명력?"

"플레이어가 스킬을 한 번 쓸 때마다 지구의 엔트로피가 급격히 증가해. 쉽게 말해서 플레이어는 자신의 사명 완수라는 그럴듯한 핑계로 지구의 생명력을 갉아먹고 있는 거야. 개인의 영달을 위해 지구 시스템을 붕괴시키는 암적인 존재란 뜻이야. 플레이어 한 명 한 명이 다 암세포라고."

[모두 헛소립니다. 그건 PK단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입니다. 저들은 신에게 저항한 배신자이며···]

'로시.'

[네?]

'내가 알아서 걸러 들을 테니 걱정 안 해도 돼'

[하지만···.]

'나를 놈들이 하는 말을 아무 의심 없이 믿는 바보로 보는 건 아니지?'

"···라고 PK단에서 가르친다는 거지?"

"그래. 해당 주장의 진위 여부까진 모르지만 어쨌든 PK단의 논리는 그래."

"거참, 어이가 없군. 플레이어를 죽이면 천국에 간다니. 그걸 곧이곧대로 맹신하는 PK단 놈들도 한심하기 짝이 없고."

"도훈이 넌 한 번도 종교를 믿어 본 적 없지?"

"그래."

"어쩐지. 하지만 난 PK단 입장도 어느 정도 이해가 돼."

"그런 허무맹랑한 말을 믿는 게 이해가 된다고?"

"그게 아니라, 그들에겐 그럴만한 근거가 있거든."

"근거라는게 뭔데?"

"아까도 말했지만, 모든 PK단 신입들은 모두 한 번은 육성교에서 견습 교육을 받게 돼. 그리고 그 안에서 천국의 증거를 직접 보게 된다고 하더라고."

"증거라고?"

"응. 플레이어를 처단한 단원들이 죽고나서 천국에 갔다는 확실한 증거 말이야."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나도 직접 보지 않았으니 거기까진 몰라. 하지만 자신들이 직접 보고 경험했으니 더더욱 사실이라고 믿지 않겠어? 도훈이 너라면 안 그럴 것 같아?"

"······."

도훈은 갑자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PK단이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 플레이어는 존재자체가 위험하다. 지구를 갉아먹는 암세포이며, 조직수술을 통해 제거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반대로 그들이 과거 신을 배신한 무리로 본다면, 모든 주장은 자신들을 변호하기 위한 새빨간 거짓말이고 합리화를 위한 거짓 선동일뿐이다.

[주인님 제가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놈들이 뭐라고 해도 난 흔들리지 않으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도훈의 말은 진심이었다.

진실이 무엇이건, PK단은 플레이어를 죽이는 것이 존재의 목적이며 스스로에 대한 증명이다.

하지만 도훈은 절대로 죽어줄 생각이 없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플레이어로 인해 설사 지구가 파괴더라도, 그건 자신이 상관할 바 아니었다.

'막말로 내가 죽고 난 뒤 세상이 멸망하든 말든 무슨 상관이겠어?'

[절대 그럴 일 없습니다. 모두 새빨간 거짓말이니까요.]

'전혀 신경 안 쓴다니까 그래? 너 때문에 지구가 멸망하니까 죽어달라고 하면 곱게 죽어줄 사람이 어딨어? 개소리도 작작 해야지.'

"좋아. 궁금한 건 덕분에 어느 정도 해소된 것 같아. 근데 이제와서 나한테 왜 이런 이야기를 해주는 거지?"

"뭐가?"

"나를 제주도로 빼돌린 것도 그렇고, 왜 갑자기 날 적극적으로 돕느냐는 거야. 저들을 배신하기로 완전히 마음먹은 건가?"

"음···. 내가 누구 편인지를 묻는 거야?"

"그래. 사실 아직도 긴가민가하거든. 물론 미호가 나를 배신할 일은 없겠지. 하지만 너희들은···. 미호와 생각이 다를 수도 있으니까."

난간을 붙들고 선 린이 한동안 먼 곳을 응시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솔직히 지금도 격렬하게 논쟁 중이야."

"뭘?"

"어떤 포지션을 취하는 게 더 유리할지. 의견이 팽팽하게 갈리거든."

"반대하는 쪽은 누군데?"

"그건 알려줄 수 없어."

"좋아, 이건 말해줄 수 있지? 지금 몇 대 몇이야?"

"4:5."

"내가 5야?"

"아직까진."

"아직이라···."

도훈은 씁쓸하게 웃었다. 아슬아슬한 우위.

단 한 명만 생각을 바꿔도 금세 기울어질 수 있었다.

"일단은 너에게 최대한 협조하는 중이야. 너와 함께면 밤마다 유흥업소를 다니며 모르는 남자의 정기를 빨아먹을 필요가 없으니까. 솔직히 세간의 속설처럼 사람 간을 빼먹고 말지, 생판 모르는 새끼한테 대주는 것도 아주 지긋지긋하거든."

"잠깐. 속설이라니? 구미호는 사람 간을 빼먹는 게 아니었어?"

"먹을 수야 있지. 하지만 그건 미호에게만 해당하는 문제야. 그게 군령자의 영혼을 채우는 음식은 아니니까. 우린 음식이 필요 없어."

"아···."

"그리고 간이 필요하면 사 먹으면 그만이야. 인터넷으로 생 간도 배달되는 세상에 무슨."

"생간이 배달된다고? 사람 생간이?"

"무슨 소리야? 꼭 사람일 필욘 없어. 그냥 간이면 돼."

"아···."

"그리고 전해 듣기론 서양에 사는 뱀파이어들도 요샌 직접 흡혈 안 한다더라고. 헌혈원에서 몰래 수혈용 팩을 빼돌린다나?"

"자, 잠깐. 그럼 뱀파이어도 실존하는 건가?"

린이 어이가 없다는 듯 도훈을 쳐다보았다.

"내가 진짜 구미호라는 사실을 잊은 건 아니지? 숨긴 꼬리라도 보여줘?"

"아, 아니 그건 아닌데."

"당연히 뱀파이어도 있어. 진혈 뱀파이어는 거의 안 남았지만."

"진혈은 뭐야?"

"순수 혈통을 말하는 거야. 지금 남은 건 대부분 하프거든. 반쪽짜리라, 능력이 예전 같진 않아."

"놀랍군. 혹시 우리나라에도 있나? 그 뱀파이어라는 거."

"걔들이 여기까지 왜?"

"아, 그런가?"

"여하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너를 통해서 얻는 이득은 그게 전부야. 나머진 대부분 위험하지."

"위험하다는 소리는···."

"이번에도 봤잖아. 만약 너와 내통한 게 걸렸으면 미호는 분명 죽었을 거야."

"어차피 정식 단원도 아니라면서? 그게 무서우면 그냥 탈퇴하면 그만 아닌가?"

"그게 더 위험해."

"더 위험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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