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6. 빌드 업-1-
도훈이 담배 연기를 내 뿜으며 생각했다.
‘역시 의심을 받고 있었구나. 어제 폰을 꺼놨던 건 나한테 위험하다는 사인을 보낸거였어.’
[그래도 미호양이 안 걸렸다니 다행이군요.]
‘그러게.’
[하지만 놈들이 주인님의 존재를 알아채고, 미호양을 의심하기 시작한 것은 분명 불길한 징조입니다.]
‘그건 알아서 조심해야지. 내일 쯤 서울로 올라갈 채비를 갖춰야 할 것 같군.’
[마침내 복귀로군요.]
도훈은 서울로 다시 돌아간다고 생각하자, 시원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특히 보미를 혼자 남겨두고 가야 한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그것 때문에 마지막으로 눌러주긴 했지만, 분명 서운해할 수밖에 없었다.
‘막상 서울 가려니 보미한테 미안해지는데.’
[어쩔 수 없죠. 다만 그녀도 그녀대로 랭커에 도전 중이고, 주인님도 대학 생활을 이어 가야 하니 언제까지 이곳에 머무를 순없습니다. 절대 잊으시면 안 됩니다. 대학 졸업과 교사 임용은 주인님이 꼭 해결해야 할 과업이라는 걸요.’
‘그거야 알지.’
단순히 교사만 되는 것이라면 도훈은 지금도 임용 시험을 통과할 자신이 충분했다. 실력으로 부족하면 아이템의 힘을 빌리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임용 시험에 대한 응시 자격은 사범대 졸업자나, 졸업예정자에게만 주어졌다. 월 반이 불가능한 현 임용 제도에서 도훈은 꼼짝없이 4학년이 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그가 캠퍼스에 발을 걸치고 있는 이유였다.
[혹시 서울로 돌아가셔도 한동안은 몸을 사리셔야 합니다. 특임대 놈들이 쉽게 포기하진 않을 테니까요.]
‘알고 있어.’
도훈은 담배를 비벼 끄고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갔다.
보미의 옆에 누운 도훈이 잠을 청했다. 보미가 살짝 잠을 깼는지 그를 발견하고는 몸을 옆으로 돌려 안겨 왔다.
도훈은 자기에게 꼭 안겨 잠든 보미를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
* * *
“오늘은 보미 너 혼자 출근해야 할 것 같아.”
내가 차려준 아침밥에 한창 들떠있던 보미의 표정이 금세 어두워졌다.
“왜? 혹시 어제 교통사고 때문에? 오늘은 그런 일 없을 거야.
제주도에서 그정도 사고가 자주 일어나는 편은 아니거든.”
“아니야.”
“아니면 김 형사님? 김 형사님이랑은 어제 잘 얘기 끝났다니까?”
“그게 아니라···.”
도훈이 솔직히 말했다.
“오늘 서울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아.”
“오늘···?”
“응. 그렇게 됐어.”
“아···.”
보미는 서운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밥숟가락을 내려놓더니 갑자기 의자에 무릎을 올리고 무릎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
“흑흑.”
“보미야. 영영 가는 것도 아니잖아.”
“알아, 아는데···. 갑자기 떠난다고 하니까. 아직 마음의 준비도 못 했는데.”
나는 훌쩍거리는 보미의 옆으로 다가가 그녀를 안아주었다.
“괜찮아. 핸드폰 번호도 알고, 마음 먹으면 언제든지 만날 수 있잖아. 비행기 타면 한 시간이면 보는데 뭘.”
“그렇긴 하지만···.”
“출석을 더 빠지면 이번 학기 위험할 것 같아서 그래.”
“그럼 내가 바래다줄게. 비행기 출발이 언제야?”
보미는 마지막 순간이라도 같이 있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당연히 돌아갈 비행기는 필요 없었다. 마법의 문고리로 바로 넘어갈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녀에게 해당 아이템을 들켜선 곤란했다.
내가 언제든 제주도로 넘어올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 그녀가 시도 때도 없이 나를 부를 것이다. 그것은 운신의 폭을 좁히기 때문에 곤란하다. 보미는 좋은 여자이자, 훌륭한 동료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내 본분을 망각할 순 없다.
“아니야. 넌 출근해야지. 지난주도 조퇴했는데, 또 연차를 내면 눈치 보일 거 아니야. 공무원이 그렇게 자주 빠지는 것도 이상하고.”
“그치만···.”
“보미야. 그냥 나 혼자서 갈게. 그렇게 하자.”
“아···.”
보미가 헤어짐을 너무 힘들어하는 통에 그녀를 설득하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그녀는 나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호감도 100이란 상대방에게 나의 의지를 관철하는데 있어 무척이나 중요한 요소다. 이는 우리 둘의 관계에 있어 내가 절대적인 갑이라는 뜻이다.
“알았어···. 네 뜻이 정 그렇다면.”
“고마워. 이러다 지각하겠다. 얼른 출근해. 설거지랑 집 청소는 내가 다 해놓고 갈게.”
“하지마.”
“응?”
“하지마. 내가 퇴근하고 돌아와서 할 거야. 도훈이 네 흔적을 조금이라도 오래 간직하고 싶어.”
“그렇다면야···.”
보미는 지각하기 직전까지 나와 함께 있다 겨우 출근했다. 매일 전화하고 연락하고, 겨울 방학이 되면 꼭 보러 온다는 다짐을 몇 번이나 하고 나서였다.
“휴-. 겨우 출근시켰군. 헤어짐이 이렇게 힘들어서야.”
[고생하셨습니다.]
‘이제 미호 연락만 기다리면 되는 건가?’
오전 동안 보미의 집에서 대기하면서 간만에 운기조식을 했다.
여행 기간 음양보합으로 쌓아 놓은 음기를 갈무리해 내공으로 전 환시키기 위해 꼭 거쳐야 하는 과정이었다. 그간 따로 여유가 없어서 못 했는데, 밀린 숙제를 해치운다는 마음이었다.
로시를 호법으로 세운 뒤 거실 한 가운데 가부좌를 틀고 운기조식을 하는 사이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그야말로 몰아일체가 되어 집중하느라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도 없었다.
‘뭐야. 벌써 오후 3시라고? 이러다 보미 퇴근할 시간 다 되는거 아니냐?’
아침부터 서울로 출발한다고 그 난리를 피웠는데, 여전히 집에 있는 모습을 보면 보미 입장에선 너무 황당할 것 같았다.
그럼 고민을 하던 차에 마침내 기다리고 있던 미호에게서 연락이 왔다.
-특임대 철수했어.
“확실해?”
-본부에서 철수 명령을 내렸어. 기약 없는 일을 붙잡고 있을 만큼 한가한 사람들은 아니거든. 일단은 전면 철수야.
“다행이군. 저녁에 혹시 볼 수 있어?”
-내가 집으로 갈게.
미호와 통화를 마친 나는 마법의 문고리를 꺼내 보미의 옷 방에 설치했다. 목적지는 서울에 있는 우리집이었다.
‘포털은 일방통행 설정 안 되지?’
[네. 주인님이 이곳에 다시 복귀하셔야 사라집니다.]
‘그냥 놔두면?’
[일주일 안에 자연 소멸입니다.]
‘혹시 플레이어인 보미가 알아챌 가능성은? 내가 만든 포털을 사용할 수도 있나?’
[원천적으로 불가능합니다. 포털은 개통 1회만 이동 가능하며, 주인님과 함께 통과하지 않으면 그 존재도 확인할 수 없습니다.]
문을 지나고나면, 보미의 집안에선 마법의 문고리 효과가 사라진다는 소리였다.
‘알겠어.’
서울로 복귀하기 전 마지막으로 보미의 집안을 둘러보았다. 다음에 바로 넘어오기 위해선 집의 구조를 정확히 기억해둘 필요가 있었다.
‘오케이. 저장 완료.’
옷 방문에 마법의 문고리를 설치하고 우리집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문을 여니, 서울에 있는 내 방이었다.
‘볼 때마다 신기하단 말이지. 이런 식의 공간이동이 가능하다는게.’
[포털의 원리까지 설명해 드립니까?]
‘됐어. 머리 아픈 건 질색이라.’
순식간에 서울 집으로 넘어온 나는 일주일 동안 방치되었던 집안을 둘러보았다. 그간 청소를 못 한 것치곤 딱히 더럽진 않았다.
먼지가 조금 쌓인 것 빼곤 떠날 때 모습 그대로였다.
그래도 청소는 한 번 해야 했기에 집안의 창문을 열고 환기를 시킨 뒤 집 청소를 시작했다. 혼자 살기엔 너무나 큰 저택이었기 때문에 진공청소기와 물걸레질을 하는 것만으로 오후가 모두 지나고 말았다.
“휴, 겨우 끝났네.”
청소를 마치고 핸드폰에 온 연락을 일일이 확인했다.
평소 연락이 잦은 여자들 깨톡은 자동응답기가 자연스럽게 답변을 해 놓은 상태라 딱히 신경 쓸 게 없었다. 2.0 버전으로 업그레이드 된 후 관리하는 여자 숫자도 늘고, 인공지능 답변도 훨씬 정교해 진 것 같다.
일단은 복귀 소식을 알려야 했기 때문에 조교인 강민주에게는 따로 깨톡을 남겼다.
-이도훈 : 내일부터 학교 다시 나가요.
-강민주 : 주인님! 돌아오셨군요! 보고 싶었어요!
-이도훈 : 응. 내일 학교 가서 보자. 출결은 잘 처리됐으려나?
-강민주 : 걱정 마세요. 저희과 전공은 제가 해결했고, 타과 교양수업도 아는 조교들한테 잘 일러뒀어요. 급한 사정으로 외국에 나간다고 하니 다들 이해하더라고요.
-이도훈 : 고마워. 이번에 크게 신세 졌어.
-강민주 : 우리 사이에 그런 말씀 마세요. 그럼 지금 집에 오셨어요? 제가 저녁 사서 갈까요?
하지만 미호와의 약속이 예정되어 있었으므로 민주의 방문은 불가능했다.
-이도훈 : 아니야. 아직 시차 적응이 안 돼서 잠을 더 자야할 것 같아. 내일 조교실에서 봐.
-강민주 : 네, 주인님!
민주에게 복귀 소식을 알린 나는 다른 친한 후배들에게도 개인적으로 연락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내일 직접 만나는 게 빠르겠어. 후배들이 집 위치를 아니까 불쑥 찾아올까 겁나네’
[그러게 집 주소를 왜 알려주셔가지고.]
‘난들 이렇게 될 줄 알았나.’
저녁 시간이 되어 혼자 배달 음식을 시켜먹고 있는데 대포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당연히 미호일거라 생각하고 전화를 받는데 다른 사람이었다.
-행님, 저 번갭니다.
“엉? 니가 갑자기 왜?
나의 반문에 오히려 최번개가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예? 이 번호로 저 말고 다른 분하고도 연락하십니까? 다름이 아니라 지난번 찾으신 분에 대해 새로운 정보가 업데이트가 돼서 알려드리려고요.”
“업데이트라니?”
-그때 실종되었다는 분이 경찰 수사로 발견되었거든요. 유괴범에게 납치가 되었다는데 지금···.
“아아, 알고 있어.”
-네? 알고 계셨습니까?
“어. 알고 있으니까 그 건은 더 안 알아봐 더 돼.”
-알겠습니다. 저는 혹시나 해서 입원한 병원이랑 위치를 파악해서 연락드렸습니다.
“훌륭하군.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일하는 게.”
-네, 언제든 또 시키실 일 있으면 연락만 주십쇼, 행님은 저의 VIP고객이시니까요.
“알았어.”
통화를 끊은 도훈이 피식 웃었다.
[최번개가 열일하는 데요?]
‘돈 받은 만큼 최선을 다하는 타입이지. 말끝마다 행님행님하는 경박한 말투만 빼면 나름 믿을만한 녀석이야.’
[그래도 혹시 모르니 조심하십시오. 돈을 너무 밝히는 사람은 결국 더 큰 돈에 주인님을 팔아 넘길 수도 있다는 뜻이니까요.]
‘로시 네 말도 틀린 건 아닌데 전제가 잘못됐지.’
[전제가요?]
‘우리나라에 지금 나보다 현금성 자산이 많은 사람이 얼마나 될 것 같아?’
[아···.]
‘그리고 혹시나 나보다 돈이 많다고 해도 그 사람이 나한테 굳이 관심을 보일 확률은?’
[듣고 보니 그렇군요.]
‘그리고 최번개는 돈에 관해선 솔직한 친구니까 배신을 때리더라도 한번은 물어보고 할 걸?’
[물어보다뇨?]
‘이런 제안이 들어왔으니 나한테 얼마를 더 줄 거냐고 역제안을 걸 거란 소리야.’
[그건 좀···.]
그때 현관문 초인종이 울렸다 인터폰으로 얼굴을 확인하니, 모자를 깊이 눌러쓴 여자애가 손에 비닐봉지 하나를 들고 있었다.
-치킨 배달요.
[주인님, 그새 또 치킨을 시키셨습니까?]
‘내가 시킨 거 아니야.’
[그럼요?]
‘미호가 배달원으로 분장한 것 같아.’ 인터폰으로 현관문을 열어주자 미호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갑자기 왜 배달원이 됐어? 혹시 아직도 감시받는 거야?”
“감시는 끝났어.”
“그럼?
“남자 혼자 사는 집에 젊은 여자가 그냥 들락거리면 수상하게 여길 거 아니야? 빈손으로 오기 뭐해서 오다가 사 왔어.”
“나, 저녁 아까 먹었는데?”
“그럼 나 혼자 먹지 뭐.”
미호는 거침없이 거실로 가더니 테이블에 사온 통닭을 펼치기 시작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옆자리에 앉았다.
“구미호도 사람들이 먹는 걸 똑같이 먹나?”
“그럼 굶을까?”
“아, 아니. 남자들 정기 빨아 먹고 산다지 않았어?”
“그건 내 몸에 들어있는 영혼들이 수명을 계속 갉아 먹으니까 ···. 아, 귀 아파. 솔직히 사실이잖아?”
미호는 나와 대화를 하는 와중에도 몸속의 영혼들과 따로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다. 가끔씩 혼잣말을 하는 게 적응하기 힘들었다.
“안 먹어도 되는데 먹는다고 문제가 되진 않아.”
“그래.”
나는 혼자서 통닭을 먹고 있는 미호를 보다 식욕이 돋아 옆에서 몇 개 집어 먹었다. 미호는 피식 웃더니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제주도 여행은 재밌었어?”
“그럭저럭?”
“신수가 훤한 걸 보니 또 가서 여자들 끼고 놀았겠네, 뭐.”
“굳이 대답할 필요 없는 질문이군.”
“하긴 뭐 그러거나 말거나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미호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통닭을 다시 집었다.
굳이 배가 고프다기 보단,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서 연기하는 것 같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