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3. 제주도 푸른 밤-93-
* * *
도훈이 밖에서 양아치들을 처리하는 사이, 사정을 모르는 두 사람은 서로 진지한 얘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저, 윤 경위님.”
“네?”
“이런 자리서 꺼낼 얘기는 아니긴 한데···.”
취기에 기대어 용기를 낸 김 형사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때 보미가 중간에 말을 끊었다.
“잠시만요. 저부터 얘기하면 안 될까요?”
“네? 아, 네.”
보미 또한 계속 기회를 엿보고 있었기 때문에, 더는 질질 끌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래. 도훈이 말이 맞아. 살짝 오버 같긴 하지만 차라리 내가 쪽팔리더라도 먼저 말을 꺼내는 게 예의인 것 같아.’
“음···. 저 실은 남자친구 생겼어요.”
“남자··· 예? 뭐라고요?”
“김 형사님께 가장 먼저 말씀드리는 거예요.”
“어, 언제요?”
“지난 주말에요.”
“누구···.”
김 형사의 눈빛이 세차게 흔들렸다. 그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계속 보미에게 물었다.
“원래부터 알고 있던 친구요. 여기 사람은 아니고 서울 사는 ···.”
“아···.”
아- 라는 짧은 탄식 속에 수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김 형사는 반쯤 얼이 빠진 상태로 보미의 말을 들었다.
“실은 지난주에 연차 내고 쉬었거든요. 그때 그 친구가 제주도까지 내려와서 고백하더라고요. 그리고 사귀기로 했어요.”
보미는 양심에 찔렸지만, 거짓말로 김 형사를 단념시켰다. 따지고 보면 완전한 거짓말이라고 할 수 없는 게 주말 사이 도훈과 깊은 관계가 된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김 형사는 큰 충격을 받은 듯 한동안 말이 없더니, 눈앞의 소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폭발 직전의 활화산처럼 감정을 억누르는 게 보미에게까지 전달될 정도였다.
즐거웠던 술자리가 끔찍한 농담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하나도 재미없었다.
“······.”
보미가 무거운 분위기를 깨고 입을 열었다.
기왕 꺼낸 이상 마무리를 지어야 했다.
“으음, 그래도 김 형사님하곤 친하게 지냈으니까 제일 먼저 알려드리는 거예요. 아까는 이 형사님 눈치 보여서 말을 못 꺼냈어요.”
“···그러시구나.”
“네.”
“축하드립니다. 하하!”
김 형사가 마음에도 없는 축하를 건넸다. 끝까지 이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불혹에 가까운 그의 연륜 덕분이었다.
여기서 더 추해지는 것이 더 큰 후회를 남긴다는 것을 알았고, 스스로의 감정을 절제할 수 있는 사내였다, 그는.
속이 쓰리긴 했지만, 차라리 자신이 고백하기 전에 먼저 말해준 것이 다행이라고 여겼다. 하마터면 크나큰 흑역사를 남길 뻔했으니까.
“저 근데 아까 하시려던 말씀이···.”
김 형사는 쪽 팔리기도 하고 민망한 마음에 애써 둘러댔다.
“아뇨, 그때 사촌분 소개팅요. 언제쯤 되나 해서.”
“아, 소개팅···. 제가 계속 말하고 있는데 답이 없네요.”
“그렇구나. 딱히 보채는 건 아닙니다.”
“네. 죄송해요. 저는 해드리고 싶은데 마음대로 안 되네요.”
“아니에요. 윤 경위님이 왜 저한테 죄송해요? 제가 염치없이 부탁드리는 건데. 성사가 꼭 안 되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저랑은 인연이 아닌가 보죠.”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김 형사의 속은 말이 아니었다. 지금의 상황이 악몽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흠흠, 죄송한데 저도 잠시 담배 좀···. 이 형사 이 친구는 왜 안 오지?”
민망해진 김 형사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고백을 한 것도 아닌데 차인 것처럼 얼굴이 화끈거렸다. 단둘이 윤 경위의 얼굴을 마주 볼 자신이 없었다.
도망치듯 횟집을 빠져나온 김 형사는 그대로 집으로 도망쳐 버릴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기나긴 짝사랑이 허무하게 끝나버렸다는데 화가 나고 자존심이 상했다.
나름 형사티가 덜 난다는 말을 자주 들었는데, 그래 봐야 형사는 형사였던 모양이다.
어떤 사람들은 백수보다 형사가 싫다는 말을 대놓고 하기도 했다. 무식하고, 꾀죄죄하고, 언제 칼 맞아 죽을지 모르는 불안한 남편감이라나?
여자들에게 인기가 없는 거야 어찌 보면 당연하지만, 감히 그는 오르지도 못할 경찰대 출신 윤 경위를 마음에 품었다.
‘사랑했었다, 씨···.’
욕을 하고 싶었지만, 차마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잘못한 게 없었다. 혼자 망설이다 고백할 타이밍을 놓쳐버린 것뿐이다. 떠난 뒤에 손을 흔들어봐야, 지나간 버스는 돌아오지 않는다.
가게 밖으로 나온 김 형사가 담배를 물었다.
그때 옆 골목에서 뭔가가 날아왔다.
“···어?”
문자 그대로 뭔가가 날아가는 중이었다. 공중에 붕 뜬 그것은 골목 바깥으로 튕겨 나가더니 데굴데굴 굴러 인도에 널브러졌다.
“···사람이잖아?”
날아간 것은 사람이었다. 김 형사는 저 정도 충격이면 거의 트럭에 치인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뭐, 뭐야!”
담배를 집어 던진 김 형사가 골목으로 뛰어갔다. 뭔지 몰라도 사건이 벌어진 게 틀림없었다.
“으악!”
“살려주세요!”
골목에 도착하자 온갖 비명과 절규가 난무하고 있었다. 처음엔 조직간 패싸움이 벌어진 줄 알았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한 명이 여럿을 쓰러뜨린 모양새였다.
“이, 이 형사?”
“어? 형님 나오셨습니까?”
“자네 지금 뭐하고 있는 거야?”
바닥에 나뒹구는 사람은 얼핏 잡아도 10명이 넘었다. 신기한 점은 하나같이 기절해서 신음조차 들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김 형사는 혹시나 쓰러진 상대가 죽은 건 아닐까 걱정이 들어 맥박을 확인했다. 다행히 숨은 붙어 있었다.
“글쎄, 이놈들이 다짜고짜 시비 걸더라니까요?”
“우, 우리가 언제!”
도훈에게 멱살을 잡혀 있던 놈이 발악하듯 소리쳤다.
도훈이 피식 웃더니 중지를 접어 이마에 딱밤을 튕겼다.
뻑!
도저히 딱밤이라곤 믿기지 않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멱살을 잡힌 놈이 의식을 잃고 말았다. 고작 딱밤을 맞고 기절해 버린 것이다.
전의를 상실한 마지막 놈이 골목길을 벗어나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김 형사가 막다른 골목의 입구를 막아선 셈이었기 때문에 놈들은 김 형사 앞에서 주춤거렸다.
“너는?”
“비, 비키라고!”
김 형사를 피해 달아나려는 문신충에게 김 형사가 슬쩍 발을 걸었다.
쿵-!
“윽!”
워낙에 팔에 문신이 많아서, 김 형사는 놈을 보자마자 화장실에서 시비를 걸던 양아치 중 한 놈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제야 김 형사는 작금의 상황을 파악했다.
“이 새끼, 내가 다시 보면 가만 안 둔댔지?”
김 형사가 문신충을 포박하는 사이 도훈이 나머지 잔챙이들마저 모두 처리한 뒤 잭나이프를 가지고 설치던 놈의 목덜미를 잡아 질질 끌고 왔다. 한 손으로 70kg는 넘는 사람을 잡아끄는 모습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다른 놈들은 대충 훈방 조치해도 될 것 같은데, 이놈은 죄질이 나쁜데요? 위험하게 잭나이프를 들고 설치더라고요.”
“잭나이프?”
도훈이 기절한 놈을 뒤집어 바닥에 눕히자, 김 형사가 놈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어? 이 자식은···.”
“왜요? 아는 놈입니까? 자기가 은갈치파 식구라던데?”
“하-. 요 양아치 새끼가 또 은갈치파를 팔아먹고 다녔구먼? 그냥 잔챙이야. 정식 조직원까진 아니고 밑에서 잔심부름이나 하는.”
김 형사가 잭나이프의 뺨을 후려쳤다.
짝-.
“동구야. 일어나라. 여기 너네 집 아니다.”
동구라는 양아치는 살짝 정신이 들었지만, 김 형사의 목소리를 알아채고 계속 기절한 척했다. 그러자 이번엔 도훈이 나섰다.
“형님. 그거 가지고 깨겠습니까? 보십시오. 아주 턱주가리를 돌려버려야···.”
“히, 히엑! 사, 살려주십시오!”
도훈의 말에 겁을 먹은 동구가 벌떡 일어나더니 갑자기 김 형사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울먹이기 시작했다. 김 형사가 어이없다는듯이 그를 떨쳐냈다.
“징그러워 새끼야. 이 새끼가 갑자기 왜 이래?”
하지만 동구가 놀란 것은 당연했다. 눈앞의 도훈은 말 그대로 괴물이었기 때문이다. 무기를 순식간에 빼앗은 그는 엄지 손톱으로 눌러 잭나이프의 날을 부러뜨려 버렸다.
그리곤 눈앞이 번쩍하더니 뺨 한 대에 정신을 잃었다.
“저, 절 그냥 잡아가 주십시오! 유치장에라도 넣어 주십시오!”
“뭐?”
“저, 저 형님 너무 무섭습니다. 제발 때리지 못하게 해주세요!”
김 형사는 겁을 잔뜩 집어먹은 동구를 보더니, 도훈을 향해 물었다.
“이 형사. 애를 얼마나 팼길래 상태가 이래?”
“그냥 시비 걸길래 정신 교육 좀 해줬습니다. 너 아까 은갈치파라고 했냐? 걔들도 한번 단체로 불러볼래?”
“아, 아닙니다. 제 동생들이 무식해서 형사님인 것도 몰라 뵙고 ···.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동구가 손이 발이 되도록 빌기 시작했다.
도훈은 그 모습이 역시 똥파리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역시 파리 맞네.’
[근데 김 형사가 왜 혼자 나왔을까요?]
‘흐음. 그러게. 보미랑은 얘기가 어떻게 됐으려나?’
김 형사는 한 방에 기절해 버린 양아치들을 쓱 쳐다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범상치 않은 줄은 알았는데, 역시나 이 형사는 괴물이었구나.
어휴-. 아무리 잔챙이들이라고 해도 10명이 넘는 애들을 혼자서 ···.’
“이 형사. 여긴 내가 수습할 테니까, 이쯤에서 마무리하지.”
“네? 은갈치 파인가 뭔가도 같이 조져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그마치 현직 형사를 담그려고 했는데요.”
“아니···. 일단 이놈은 정식 조직원도 아닐뿐더러, 조직 차원에서 개입했다는 증거도 없잖아. 폭력단체 관리는 우리 쪽에서 차근차근하고 있으니 괜히 일 크게 벌이지 말고. 자네 사건도 있으니까.”
“흐음.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뭐.”
“자넨 윤 경위님 좀 부탁하네.”
“형님은요?”
“이 자식이 칼 들고 위협했다면서? 본보기로 한 놈 정도는 유치장에 넣어야지. 내가 경찰서로 인계할 테니 자네는 윤 경위님 집에 바래다 드리게. 내가 부탁 좀 할게.”
“아···. 알겠습니다. 괜히 저 때문에 흥을 망쳤군요.”
“아니야. 별소리를. 여긴 내가 정리할 테니까 어서 가보라고.”
“네, 그럼···.”
도훈은 김 형사의 허둥대는 태도에서 그의 의중을 짐작하고는 군소리 없이 물러났다. 횟집에 돌아가니 보미가 혼자 멀뚱히 자리에 앉아있었다.
“어? 김 형사님은? 너랑 같이 담배 피운다고 아까 나가셨는데?”
“집에 가자.”
“응? 갑자기 무슨 소리야?”
“가면서 말해줄게.”
도훈이 보미를 데리고 다시 나왔을 땐 이미 김 형사는 동구를 데리고 경찰서로 인계해간 뒤였다.
술을 안 마신 보미가 운전대를 잡고 도훈이 보조석에 앉았다.
보미는 차에 타자마자 변장을 위해 쓰고 있던 마스크를 벗어냈다.
“어휴, 답답해 죽는 줄. 내가 이래서 회식 같은 거 싫어하는데.”
“많이 힘들었어?”
“말이라고? 맨날 특수분장을 하는 느낌이라고. 화장도 귀찮아하는데. 근데 도훈이 넌 안 벗어?”
“난 얼굴에 쓰는 종류는 아니야.”
도훈의 역용 마스크는 안면근육을 비트는 기술이었기 때문에 순전히 자기 피부였다. 시간이 지나면 점점 풀리는 특성 때문에, 저녁이 되자 얼굴이 반쯤 돌아와 있었다.
“어? 그러고 보니 점점 잘생겨지는 거 같은데? 기분 탓인가?”
“아니 맞아. 스스로 풀리거든. 집에 갈 때쯤엔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을까?”
“히히. 근데 다시 봐도 잘 생겼다.”
“맞다. 누가 아까 너 보고 빻았다던데?”
“뭐라고! 누가!”
보미가 흥분해 소리치자 도훈이 그녀를 진정시켰다.
“너무 열 받지 마. 내가 알아듣게끔 혼내 줬으니까.”
“혼내다니? 설마 때렸어?”
보미가 우려를 표하자 도훈이 방금 전 있었던 사건을 요약해 설명했다. 그리고 김 형사가 혼자 사건을 수습하기 위해 경찰서로 떠난 것도.
“아···. 어쩐지. 난 왜 갑자기 중간에 사라졌나 했네.”
“김 형사님이랑은 얘기 잘 됐어?”
“응. 그냥 남친 생겼다고 했지 뭐. 네 말대로. 그만한 핑계가 없더라고.”
“그래서 뭐라는데?”
“잘 됐다고. 축하한다고. 괜히 먼저 말 꺼냈나 싶어. 어쩌면 괜히 설레발친 건 아닐까?”
“아닐걸.”
“근데 좀 이상하잖아. 상대가 고백도 안 했는데, 굳이 먼저 말을 꺼낸다는 게. 김 형사님이 날 이상하게 생각하면 어떡하지?”
도훈이 보미를 타이르듯 말했다.
“아마 당분간은 불편할 거야.”
“누구? 김 형사님이랑?”
“응.”
“아, 그런 거 싫은데···. 역시 괜히 말했나 봐.”
“그게 아니야 보미야. 차라리 그게 나아.”
“그게 낫다니? 괜한 말 해서 어색해진 거잖아.”
“김 형사도 지금은 속이 쓰리겠지만, 어차피 그런 건 다 극복하게 되어 있어. 나중에 전혀 몰랐다가 뒤통수 맞는 것보다는 이게 낫지.”
“하아-. 그래도 좋은 분이었는데.”
“그래 보이더라. 하지만 둘 다 가질 순 없는 거지. 그건 욕심이야.”
“둘 다라니?”
“나도 갖고 싶고, 김 형사랑도 계속 잘 지내고 싶은 거잖아. 그건 쉽지 않다고.”
“아···.”